조선의 관찬 역사서인 <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그것도 고위 관료의 죽음을 기리는 ‘졸기(卒記)’로 실린 류성룡에 대한 총평의 일부다. <징비록>을 읽어나가면, ‘자기만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는 비판이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짐작이 간다. 예컨대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감동시켜서 회군을 저지하고, 군량 조달 책임자를 처벌함으로써 명나라에 줄 군량을 단기간에 확보한 일, 자신이 호서의 곡식을 영남으로 보내 구제하지 않았더라면 백성들이 모두 굶어 죽었으리라는 언급 등은, 읽기에 따라서 류성룡 자신의 공로를 유독 특필한 것으로 지적될 법도 하다.

나아가 이는 전쟁의 책임 문제와도 관련된다. 많이 알려진 대로,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 사행 후에 전쟁이 임박했으니 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일행이었던 동인 김성일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고 보고해서 조정의 논의가 둘로 갈렸다. 결국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므로, 김성일을 비롯해서 그에 동조한 동인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성일과 동문수학한 동인으로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자신은 일찍부터 전쟁의 위험을 중대하게 생각했으며, 김성일 역시 인심의 동요를 걱정해서 한 말이지 전쟁의 가능성이 정말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고 서술하였다. 전쟁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책임이라는 매우 민감한 사안에 있어서 동인에게 주어질 수 있는 불리한 평가의 고리들을 의도적으로 쳐 내고자 한 자기합리화로 읽힐 수도 있는 대목이다.  

전쟁 발발 초기, 의병장 조헌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이다. 이러한 일각의 주장은 계속 이어져서, 전쟁이 거의 마무리되던 시기에 제출된 상소에서도 ‘주화오국(主和誤國)’ 즉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해서 나라를 그르쳤다는 지적이 류성룡에게 가해졌다. 이 상소들로 인해서 결국 류성룡은 파직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그가 추천하여 활약을 펼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 내내 군사와 행정, 외교를 주도한 류성룡 역시 정치적 생명을 다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명나라 조정 내부의 알력으로 인한 무고 사건 및 이산해와의 대립 등 간단치 않은 사정들이 얽혀 있지만, 끝까지 그를 따라다닌 심각한 비판이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했다’는 것이었음은 주목을 요한다. <실록>의 ‘졸기’에서도 “강화 논의를 극력 주장하고 우호를 주선하여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만든 죄가 천고(千古)에 수치스러운 한을 남겼다. 이 때문에 의사(義士)들이 분개하고 논자들이 비판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런데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가장 역점으로 두어 서술한 것은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화를 반대하였다는 주장이다. 그가 건의하여 복권시켜 준 서인의 정철이 평양성에서 다시 의주로 피난할 것을 주장할 때에도 자신은 끝까지 맞서서 평양성을 지키자고 주장했으며, 명나라 제독 이여송에게 왜병과의 일전을 촉구하다가 오해를 사서 곤장을 맞을 뻔한 일, 그러면서도 끝까지 강화를 반대하고 명군 지휘부 앞에 무릎까지 꿇으며 조선 왕실을 대변하여 격전을 호소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류성룡은 온 나라가 무력하게 초토화된 전쟁을 일선에서 이끈 재상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업적을 부각하기 위해서 <징비록>을 집필한 것인가? <징비록>은 당쟁으로 정계에서 쫓겨난 한 개인의 날조된 자기변명에 불과한 것인가? 

처음 인용한 <실록>의 '졸기'는 류성룡을 두고 ‘붕당에 얽매인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선조실록>은 류성룡의 정적이었던 이산해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그 서술의 편파성을 바로잡고 전쟁 통에 부실한 사료를 보완하여 다시 펴낸 <수정선조실록>은 서인계 인사들에 의한 기록이다. 이들 <실록> 저자들 역시 당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예가 많기 때문에, 류성룡에 대한 비판 자체가 실은 ‘붕당에 얽매인 마음’을 버리지 못한 탓에 나온 것일 여지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기록, 나아가 역사 서술은 애초에는 누군가의 기억을 근거로 삼는다. 어떤 사건을 서사할 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특정한 기준으로 일부 사실들을 선택하고 재배치함으로써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재구한다. 그것이 개인의 삶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에 대한 기억일 경우, 그것은 이미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 그 사회가 공유하는(공유한다고 믿는, 혹은 믿게 하고 싶은) 기억으로 재구되는 셈이다.

한 집단이 공동으로 가질 수 있는 기억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 중의 하나가 전쟁이다. 전쟁이라는 비상한 사태는 대단히 격렬하고 총체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과 그에 대한 기억들을 만들어 낸다. 그 기억들은 각자의 제한된 처지와 관점에 따라 제각각일 수 있고, 때로는 특정 집단의 의도에 의해 공유되고 변개되어 가기도 한다.

가장 비근한 예로, 의병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지식의 테두리에서,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가 임진왜란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코드는 ‘의병’이다. 전쟁 초기 관군들이 속수무책으로 패전하는 가운데 그나마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교과서적으로 주어지는 기억이다.

그런데 의병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전쟁 당시 및 직후의 일반론은 아니었다. 왜란 평정의 공은 오직 명군(明軍)의 힘이었고, 따라서 자신을 따라 의주까지 가서 명나라에 사정을 호소한 호종(扈從) 신하들만을 공신으로 간주하는 것이 애초 선조의 생각이었다. 관군 가운데에도 이순신, 원균, 권율 외에는 공을 논할 만한 장수가 전혀 없다고 보는 가운데, 의병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매우 미미하였다. 

사실 농민들이 유사시에 관군으로 동원되는 조선의 군제 하에서, 애초에 관군과 의병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더욱이 지역의 선망을 받는 이가 의병장으로 나섬에 따라, 관군으로 동원될 사람들이 의병으로 들어감으로써 의병 모집이 관군을 무력화하는 데 일조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장들에게 왕이 실시간으로 관작을 하사함으로써 관군과 같은 지위를 지닌 의병이 생기기도 하고, 관군과 의병이 연합 작전을 수행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자신의 안위를 개의치 않고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과 장렬한 순국은 참으로 값진 일이지만, 의병의 입장에서 관군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오히려 걸림이 되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 역시 일면의 기억이다. 광해군을 거쳐 인조대에 이르는 동안 서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특정한 기억들의 확대와 배제가 만든 사례의 하나로 볼 만하다. 

류성룡은 전쟁 초기 패배감에 어찌할 줄 모르던 선조와 신하들에게 호남 의병의 봉기를 희망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강변한 바 있다. 그러나 <징비록>에 기록된 의병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고경명, 곽재우, 장사진 정도가 짧게나마 서술되었고 나머지는 지역 별로 의병장 이름을 열거하는 데에 그쳤다. 앞서 상소문을 인용한 조헌은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부언하자면 조헌의 평시 태도는 매우 과격하고 당파적이어서 같은 서인이었던 이이(李珥)의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 초기 관군의 패전을 보는 그의 시각은 철저하게 류성룡, 이산해 등 동인 정권을 향한 책임론에 입각해 있었다. 이는 이전부터 견지하고 실천해온 그의 당론이었고, 의병 활동 역시 그러한 인식이 구체화된 것이다.

사람 수만큼이나 다른 그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특정 집단에 의해 채택되고 변개되기도 해온 기억들 가운데 어떤 기억이 더 사실에 부합하는가의 문제에서 잠시 눈을 돌려서, 우선 그 기억이 누구의 기억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기록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좀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징비록>은 누구의 기록이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역시 <실록> '졸기'의 일부이다. 부정적인 기조 가운데에도 류성룡의 탁월한 실무 능력과 군사 업적만큼은 높이 인정하였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진행되던 당시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겸직으로 명군 지도부를 상대하는 접반사, 각 도의 군무를 지휘하는 도체찰사, 그 자신의 발의로 창설한 훈련도감의 도제조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행정과 외교, 군사 각 분야의 요직을 두루 다 맡았던 셈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 가운데 이순신의 <난중일기> 역시 저자가 장수로 활약하면서 기록한 것이지만, 가족 및 개인의 신변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고 자신이 겪은 전장의 서술을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에 조경남의 <난중잡록>이 비교적 상세하여 훗날 <선조수정실록> 편찬의 사료로 활용되었고, 안방준의 <야사별록>의 경우 일본으로 넘어가 간행되어 읽혔는데, 각각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어서 내용과 시야가 제한적이다. 이에 비해 <징비록>은 국정 전체를 총괄하며 주도하는 요직에 있던 사람, 즉 ‘당로자(當路者)’의 기록이다.

수많은 기억과 기록들이 각각 나름의 의미를 지니겠지만, 당로자의 그것이 각별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지금처럼 매체와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더구나 조보(朝報) 등을 통한 일상적인 공적 통신마저 단절되고 사관(史官)의 기능도 마비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국정 전반의 형세에 대한 시야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대의명분만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과 실리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기밀에 속하는 외교 사안들과 급박한 군사 정책들에 속속들이 관여했던 당로자의 기억과 기록은 그것 자체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더구나 류성룡은 20대 후반에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사료 정리와 초고 작성 등의 실무를 담당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역사 서술에 능한 당로자의 기록이라는 점이야말로 <징비록>이 지니는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이 책의 제목인 ‘징비(懲毖)’의 뜻을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류성룡 본인이 쓴 서문이다.

징비는 지난 잘못을 징계함으로써 뒷날에 근심이 될 만한 일을 삼간다는 뜻이다. 벌에 쏘이는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조그맣다고 함부로 다루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듯이, 지독한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당시의 사적을 정리함으로써 잘못을 지적하고 경계하고자 <징비록>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징비록>을 읽어나가면 가장 인상적으로 와 닿는 것이, 한심하리만치 처참하게 무너지는 조선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불과 열흘 만에 경상도가 적의 손에 넘어가는 동안, 제대로 싸운 장수가 하나도 없었고 천혜의 지형도 이용할 줄 몰랐으며 조정의 계책은 현장과 전혀 맞아 들어가지 않았던 사실들을 류성룡은 냉정하고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처음 침략을 보고받은 지 보름도 채 안 되어 피난길에 오른 왕의 일행에 대한 서술 역시, 한 나라의 조정이 이렇게 한순간에 곤두박질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치부까지 생생하게 담았다. 호위병들이 왕을 위해 만들던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고 도망치는 장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가던 행차가 성난 백성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 등에 이르면, 이미 조선의 왕조는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일 정도이다. 그 자신 왕을 모시고 가던 신하로서, 이런 부끄러운 속살까지 드러내어 기록한 류성룡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 바로 ‘징비’인 것이다. 그 안타까울 만큼 솔직한 기록에 담긴 징비의 진심은, 그것이 한탄에 머물지 않고 국정 운영의 실무에 대한 구체적 지적과 방책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를 지닌다.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군사와 외교 분야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핀다.

<징비록>에는 전쟁의 서사뿐 아니라 군사 제도의 구체적인 문제점과 방책들이 담겨 있다. 류성룡은 전쟁의 흐름을 결정한 중요한 전투들의 상황 전개와 그 전략의 성패들을 적극적으로 서술하였다. 사실 기록을 넘어서 평가의 수준으로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은, 류성룡이 이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징비록>은 총 16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징비록’이라는 편명으로 서술된 1, 2권이 주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그러나 앞에 인용한 서문에서 저자 본인이 말하였듯이, 전쟁 수행 당시의 문서들을 모은 나머지 14권도 <징비록>의 일부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가운데 전쟁 기간 군사와 국정에 관한 보고서들을 모은 ‘근폭집’, 본인이 도체찰사를 지내며 지휘계통으로 보낸 문건들인 ‘군문등록’ 등에는 군사제도, 훈련, 지역방비, 조세와 군량 조달, 창고 설치 등에 대한 전문적인 방책들이 담겨 있다. 

류성룡은 훈련도감을 창설하여 농민들을 유사시 병사로 징집하는 구조를 직업군인 체제로 개혁하고자 하였고, 진관제를 재시행하여 평민만이 아니라 양반의 사노비들도 징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대동법을 시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군량미를 확보하는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류성룡이 종전(終戰)과 함께 정치적 힘을 잃은 탓에, 훈련도감만이 축소된 형태로 남았을 뿐 그의 군사 방책 대부분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불과 몇 십 년 뒤에 일어난 병자호란의 참상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은 물론 일본과의 전쟁이었지만, 조선으로서는 일본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더 까다로운 외교 대상이 명나라였다. 전쟁 발발 전부터 조선이 일본과 내통했다는 설을 해명해야 했고, 지원된 명나라 군대는 조선의 군량미 보급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애를 먹이며 좀처럼 왜군과 일전을 벌이려 하지 않으면서 일본과 직접 강화를 논의하며 조선을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도 도를 넘어섰다. 여기에 명 조정의 분열과 지원군 내부의 갈등까지 겹쳐서, 조선으로서는 외교 현장의 순간순간이 살얼음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접반사 임무를 수행한 류성룡은 조선의 생존을 위해 그야말로 동분서주하였다. 전쟁 전 명나라를 치겠다는 일본의 계획을 처음 입수했을 때 내통의 혐의를 받을 수 있으니 모른 척하자는 영의정 이산해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나라에 알리는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의심을 풀게 한 이가 류성룡이었다. 전쟁 초기 명나라에는 심지어 피난 중에 있는 선조 일행은 가짜 조선 왕이며,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요동을 수복하려 한다는 설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이 때 명나라가 그런 오해를 할 만한 이유들을 조선이 제공한 것이 사실임을 냉철하게 역설하고, 명군 지휘부를 직접 만나서 의구심을 푼 것 역시 류성룡이었다. 5만 명에 가까운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대는 일, 결전에 나서지 않으려는 명군 지도부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설득한 일, 심지어 전쟁의 와중에 열다섯 차례나 왕위를 내놓겠다며 왕정을 중지한 선조를 달래고 공황 상태에 빠져서 명나라에 귀의하자는 논의까지 나온 조정을 추스른 일도 류성룡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말이 <징비록>의 서사 및 임진, 계사년의 보고서를 모은 ‘진사록’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든 임진왜란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각 나라, 다양한 인물들의 기억과 기록들을 모자이크처럼 엮어야 할 것이다. <징비록>은 그 많은 창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매우 의미있고 소중한 창임을, 당로자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해 보았다. 사실 <징비록>의 또 다른 장점은, 역사 서술가로서의 사실 수합과 문장가로서의 박진감 있는 문체, 그리고 전쟁이라는 극적 상황이 맞물려서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이다.

<징비록>의 첫머리가 조선 전기의 재상 신숙주의 일화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신숙주가 세상을 떠날 무렵 성종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일본과의 화친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수용한 성종이 사신을 보냈으나 공교롭게도 대마도에서 풍토병에 걸려서 본토까지 가지 못했고, 그 뒤로 한 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정이다. 전쟁 발발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내온 사신에 대해 서술하기 위한 전사(前史)로서 언급한 것이긴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시점에서 그 발발 원인을 되돌아보는 류성룡의 통한에 찬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전쟁이 발발한 뒤 강화 논의에 반대한 것과 애초 일본과 화친하면서 그들을 파악했어야 했다는 시각은 모순이 아니다. 

신숙주는 본인이 직접 일본 사행을 다녀왔을 뿐 아니라, 일본과 유구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이자 외교지침서인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인물이다. 또한 성종을 도와서 조선의 국가 기틀을 완비한 명재상이기도 하였다. 16세기 이래 점차 내면화된 성리학이 학문과 사상의 주류를 이룬 조선은, 실무와 행정에 능한 이보다는 명분과 도의에 깊은 이를 높이 치는 전통이 유독 강하였다. 특히 여말선초 지식인들이 지녔던 국제적 안목은 점차 일국 내로, 향리 안으로 움츠러든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빼어난 안목과 경륜을 지닌 류성룡이 임진왜란이라는 동아시아 국제전을 수행하고 나서 ‘지난 잘못을 징계함으로써 뒷날에 근심이 될 만한 일을 삼가고자 쓴’ 이 책의 첫머리에 신숙주를 언급했다는 점이 심상치 않게 읽히는 것이다. 당시까지 조선의 역사가 가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가지 않은 길, 어쩌면 지금 우리도 여전히 보지 못하는 그 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류성룡의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실록>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류성룡의 상이 치러지던 1607년 5월 13일의 기사이다. 당쟁으로 굴절된 기록자의 시각을 통과하면서도 살아남은, 당대 민간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명재상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 경륜이 오롯이 담긴 것이 이 책, <징비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