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무리 조선이 주자학의 나라라 하더라도,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의 대표적인 저술로 ‘주희(朱熹)의 편지글 다이제스트’를 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동아시아 한자문명을 함께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중국의 학자가 쓴 글 아닌가? 게다가 이 책은 ‘저술’이 아니라 ‘선집(選集)’에 불과하지 않은가?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영향력의 크기와 지속력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황의 다른 어떤 글보다도 많이 읽힌 책이 <주자서절요>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시, 좀 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세계 학술사에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저술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학자들의 공동저술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그 가운데 하나로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한다. 중국학자 주희의 글에 깨알같이 주석을 단 책을 두고 ‘우리의 독창성’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다. ‘남의 것을 전혀 모방하지 않고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만을 독창성이라고 한다면 인문 저술에서 이 말을 사용할 만한 대상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이 가지 않은 데까지 나아가서 남이 내놓지 않은 것을 내놓았다는 정도의 뜻이라면 <주자대전차의>야말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에도 <주자대전> 전체를 대상으로 삼은 주석서는 없기 때문이다. ‘독창적’이라는 수식어는 거두어들이더라도, ‘독보적’이라고 하기는 충분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자서절요>의 영향력과 <주자대전차의>의 독보성이 조선 사상사를 보는 데 있어서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선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조선시대 사상사를 대략 복기해 보자.

불교가 사상과 문화를 주도하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은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자 모든 제도와 문화의 근간이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사상사는 주자학이 주도하였으며, 그 절정에 이른 시기가 퇴계와 율곡으로 대표되는 16세기이다. 그러나 점차 당쟁이 격화되기 시작했고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통치 계급은 교조화된 주자학을 중심으로 보수화되었다. 주류 학자들은 관념화된 이기논변에만 빠져서 민생과 실용을 위한 학문을 외면한 채 공리공론과 당쟁만 일삼았고, 주자학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상을 말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핍박했다. 일부 재야 학자들이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실학(實學)’을 내놓아서 자생적 근대의 싹이 텄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 수용되지 못했고, 결국 세도정치와 쇄국정책 끝에 치욕적인 망국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교과서적 상식에 의하면, 16세기 이황과 이이의 단계에서 이미 주자학이 조선의 사상으로 꽃을 피웠고 17세기 이후에는 주어진 정답에 따른 교조의 강요와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논변만이 전개되었을 뿐 주자학 내에서는 더 이상 의미 있는 학술적 진전을 찾을 수 없으며, 따라서 주자학을 벗어난 실학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상사를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그런데 <주자서절요>는 이러한 시각의 일부가 착시 현상임을 보여주고, <주자대전차의>는 이러한 시각이 만들어내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주자서절요>와 <주자대전차의>를 전면에 내놓은 이 글의 목적은, 그 착시의 교정과 사각지대의 복원에 있다.

현행본 <주자서절요> 앞에는 이황 본인의 서문이 붙어 있다. 이 책은 이황 생전에 이미 제법 많이 유포되었지만 본디 서문은 달려있지 않았다. 이황 본인이 이 책의 찬술자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야 제자들은 책이 완성되고 나서 2년 뒤에 이황이 직접 써 놓은 서문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후에 발간된 책들에 이 서문이 붙게 되었다. 다음은 그 앞머리 일부다.

노학자의 이 솔직한 술회를 통해서 우리는 조선 사상사가 <주자대전>이라는 거대한 바다와 만나는 순간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문을 닫고 들어앉아 이 <주자대전>만을 읽고 있는 이황을 보고 어떤 이가 더위에 몸을 상할까 걱정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가슴 속에서 나도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일어나서 저절로 더위를 잊어버리는데 무슨 병이 나겠는가.” 제자의 전언에 의하면 이황이 보았던 <주자대전>은 하도 손을 많이 타서 글자 획이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서문의 말미에서 이황은 자신이 이 책으로 인해서 학문의 단서를 열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황으로서는 이 책과의 만남이 그야말로 학문의 신기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조선사상사의 신기원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의 상식과 동떨어진 장면이다. 조선 최고의 주자학자라면 당연히 어려서부터 주희의 글을 샅샅이 읽어서 40대 중반 쯤엔 이에 통달한 수준이리라 기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황은 이 때 처음으로 주희의 문집을 입수하였고 그나마 이후로도 은퇴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13세기 초에 받아들인 주자학을 이념 기반으로 삼아서 14세기 말 조선이 건국되었고 모든 정치제도와 교육문화에서 주자학이 실현되었으며 그 결과 16세기 이황, 이이에 와서 학문적 성취가 꽃피었다고 하는, 예의 그 교과서적 상식과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전까지 300년 넘게 읽고 공부했다는 주자학은 무엇이었나?

이황 본인이 <주자서절요> 편찬에 대한 이의를 염두에 두고 서문에 가설해 넣은 문답이다. 사실 주희의 사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사서집주(四書集註)>이다. 조선이 주자학을 학문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것은 바로 이 <사서집주>를 공인 교과서로 채택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왜 자잘한 편지 글들에 집착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이에 대한 이황의 답변은, 편지는 주로 특정 대상과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학문의 출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과 방법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황 자신이 바로 이 주희의 편지들에서 학문의 단서를 발견하였듯이, 처음 주자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경전으로 나아가기 위한 입문으로 삼기에 최적화된 텍스트라는 설명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서절요>의 편찬 의도이자 선문(選文) 기준이다.

이 문답은 이황의 학문 여정, 나아가 조선 사상사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가 경전을 이해하는 표준적인 시각’의 역할을 하던 주희의 글이, 이제는 경전 그 자체의 반열로 오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선에서 처음으로 주희의 모든 글을 완독해낸 인물임이 확실해 보이는 이황에 의해서, 주희의 글 자체가 학문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지는 서문에서 “도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논어>의 역할을 주희의 편지가 보완할 수 있다.”고 한 이황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황은 <주자서절요>의 간행을 추진한 제자 황준량에게 준 편지에서, 이를 간행한다 해도 읽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책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황이 가진 원본을 가져다가 베껴 쓴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사적으로 판각하여 유포한 예도 있었다. 이황 본인이 지속적으로 <주자서절요>를 문인들과 강독하는 교재로 삼았으며, 정구, 장현광 등 이황의 제자 계열에서는 물론, 성혼, 윤증, 송시열, 김창협 등 서인계에서도 필독서이자 강독과 토론의 교재로 삼았다. 이현일은 이 책을 국가 교육과정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 책에 대한 후인들의 애호는 사례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식으로 간행된 것만도 8번이고, 일본에서도 4차례나 판각되었다는 사실이 이 책이 얼마나 많이 읽혔는가를 말해준다. 이황의 제자 김성일은 <주자서절요>를 손수 베껴 써두고는 매일 새벽마다 정갈하게 씻고 앉아서 그 가운데 편지 한두 통을 뽑아 암송한 뒤에 종일토록 그 뜻을 묵상했다고 한다. 특히 영남에서는 이 책으로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근세에까지 이어져서, 구한말 일제강점기에도 <주자서절요>에 직접 토를 붙이고 주석을 달아서 늘 머리맡에 두고 애송했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이황 이후로 조선의 학자들이 <사서집주>를 비롯한 주석서들과 <근사록>, <심경> 등의 편집된 성리서를 넘어서서 주희의 글을 직접 읽기 시작했으며, 그 가장 널리 읽힌 텍스트는 <주자서절요>였다. 조선의 사상사는 <주자서절요>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황은 조선 주자학의 완성이라기보다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연 인물이다.

이황은 서문에서 “학문에 관련되고 수용에 절실한 것을 뽑되 편과 단락에 얽매이지 않고 요긴한 부분을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결국 각 편지의 형식을 살리기보다는 내용 위주로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을 추렸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적인 내용만 앙상하게 남긴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오히려 이런 개인적인 인사말은 왜 잘라버리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도 적지 않다. 학설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주희가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와 어투, 그리고 학문을 주제로 토론하는 분위기 자체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고 여긴 이황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황 본인이 주희의 편지를 읽으면서 감동적으로 만난 그 ‘말의 맛’과 ‘뜻의 무궁함’을 선집에서도 고스란히 살리고자 함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황의 <주자서절요> 편집이 단순한 요약 발췌가 아니라 특정한 부분의 배제를 수반하는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이황은 서문에서 <주자대전>에 실린 주희 편지의 분량이 많다는 점과 함께 “거기 실려 있는 제자들의 질문 가운데 득실(得失)이 없을 수 없다.”는 점을 선록의 이유로 들었다. 완곡한 표현이지만, 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별 도움이 안 되는 문답은 잘라 버렸다는 말이다. 이는 주희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그리고 그 이해에 대한 자신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작업이다.

특히 주희의 사상은 초년과 중년, 만년에 차이가 있어서 그 가운데 어느 것을 정설로 볼 것인가가 오랜 논란거리이기도 하다. 이황은 선택한 주희의 편지 내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주희의 정설을 기준으로 그에 맞지 않거나 주희 스스로 뒤에 생각을 달리하였다고 보는 내용은 문장 혹은 단락을 삭제하고 수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록과 삭제 작업 하나하나의 타당성 여부가 훗날 학자들 사이에 학술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주자서절요>가 선집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면 그것이 단순한 선집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자서절요>는 주희 편지에 대한 텍스트비평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황은 <주자대전>의 이본을 입수하여 자신이 지닌 <주자대전>과 일일이 교감하는 작업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이런 교감기를 비롯하여 강독 중에 제기된 여러 의문과 견해들을 <주자서절요>에 적어 나갔다. 이렇게 쌓인 난해한 부분에 대한 주석과 인명 및 사실 관계에 대한 목록 및 해설 등이 <주자서절요>의 새로운 판본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황이 제자들과 이 책을 읽으며 문답한 내용들을 정리한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 등이 편찬되었다. 주희 편지에 대한 주석서의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경서에 대한 주석으로서 주희를 읽는 것과, 주희의 글 자체에 주석을 다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경서로 가기 위한 입문’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제 주희의 글은 경서와 별개로, 심지어 대등하게 읽어야 할 텍스트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흐름의 연장선에, <주자대전> 전체에 주석을 단 <주자대전차의>가 놓인다.

이에 비해서 <주자대전차의>는 주희의 글 전체를 대상으로 주석 작업을 가한 책이라는 점에서, 이황이 제자들과 토론하며 일부 진행한 주석의 전통을 이어서 완수해 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영남의 학자들이 만들어 유포한 <주자서절요>가 널리 읽히기 시작한 지 100여 년 만에, 이제껏 조선은 물론 중국에서도 시도된 적 없는 ‘주희의 모든 글에 대한 주석’이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 계열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주자대전차의>는 1686년에 1차적으로 완성되었으나 바로 간행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3년 뒤에 송시열은 아직 간행되지 않은 이 책의 서문을 썼다. 다음은 그 서두이다.

송시열은 주희의 글에 자신이 주석을 단다고 자처하는 데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이 꼭 필요하다고 본 이유는, 주희의 글에는 명확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는데 이황의 <주자서절요기의>를 제외하고는 수백 년 동안 제대로 된 주해가 없어서 심화된 연구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다. 학문적 의리를 밝히기 위한 주석 뿐 아니라, 정통 한문과는 다른 구어체 표현 등에 대한 어구 풀이의 필요성도 고려되었다. 그리고 송시열이 <주자대전>의 주석에 힘을 쏟게 된 보다 결정적인 계기를, 서문의 말미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서문에까지 윤휴를 거론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송시열의 사문난적 언급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이 책 <주자대전차의>의 편찬 과정 역시 정치적 여건에 따라 굴곡을 겪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정의 지원 하에 진행되었다. <주자서절요>의 편집이 이황의 주변 자제들의 베껴 쓰기로 진행되어 지방관으로 나간 제자의 주도로 간행되고 점차 널리 유포된 것임에 반해, <주자대전차의>는 조정의 비용 및 인력 지원 하에 진행되었고 결국 조정의 교서관에서 간행되었다.

그러나 그 편찬과 간행의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송시열이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한 때가 1675년 함경도 유배 시절이었다. 정국이 바뀐 뒤 1683년부터 김수흥, 김수항 형제와 박세채 등의 주선으로 숙종의 적극적 지원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1686년 완료를 보고하고 간행을 허락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절차상의 문제를 들고 일어난 남인들의 비판으로 간행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 정세가 다시 급변하여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된 상태로 언제 간행될지 모르게 되어버린 이 책의 서문을 쓴 것이다. 송시열은 그로부터 4개월 만에, 이 책의 간행을 보지 못한 채 사사되었다.

이후에도 당쟁의 풍파는 이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점차 노론계가 실권을 쥐는 방향으로 정국이 진행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도 송시열 개인만이 아니라 여러 동료, 제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져 온 이 책은 송시열 사후 그의 유지에 따라 권상하와 김창협 등의 손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12세기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희의 전집에 대한 최초의 주석본이 1716년 조선에서 간행된 것이다.

이황이 이미 <주자서절요>를 대상으로 주희 글의 본의를 이해하기 위한 토론을 지속하였고 그 결과가 간행에 반영되었음을 언급하였다. <주자대전차의>는 그 범위를 주희의 글 전체로 넓혔을 뿐 아니라, 더 정밀하고 심화된 해석으로 나아갔다. 우선 대본이 되는 <주자대전>의 판본들을 폭넓게 확보하여 비교 검토하였고, 이미 간행된 선집 및 부분적인 주석서들을 망라하여 참조하고 때로 적시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자대전차의>의 간행 과정 자체가 동료, 제자들과의 치열한 강독 및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작성된 초고를 돌려 읽고 일정한 기간 합숙하며 논쟁하고 지속적인 편지 왕래를 통해 수정해 나갔다.

김창협의 <주자대전차의문목>은 그 토론의 합의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김창협은 <주자대전차의>의 구상 단계에 송시열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다. 이후 몇 차례의 토론과 서신 왕래 과정에서 송시열은 젊은 학자 김창협의 학문적 역량을 매우 높게 평가하여 그가 제시한 의견들을 대부분 수용하였고, 제자인 권상하와 함께 이 책을 완성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사후 <주자대전차의>의 편집은 권상하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김창협은 그 간행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 결국 간행된 <주자대전차의>에는 김창협의 의견들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고, 이를 애석하게 여긴 어유봉이 스승 김창협의 견해를 모아서 다시 엮은 책이 <주자대전차의문목>이다. 의문 사항을 정리한 문목(問目)의 형식이지만 기존의 <주자대전차의>와 해석을 일부 달리하는 또 하나의 주석서인 셈이다.

김창협 이후로도 <주자대전차의>에 대한 수정과 보완의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제출되었다. 1850년에 이루어진 <주자대전차의집보>는 <주자대전>의 체제에 맞추어 페이지 별로 주석들을 총집결해서 편집해 놓은 책이다. 여기에 동원된 자료가 23종인데, 이황, 송시열, 김수항, 김창협을 비롯해서 민우수, 이의현, 임성주, 이재, 김매순, 홍석주, 한원진, 서유구 등 모두 조선 학자들의 저술이다. 이제 주희의 특정 글, 특정 구절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봐야 주희 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러한 이설들의 폭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오늘의 시각으로는 여전히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 해석의 차이들은 대부분 그냥 읽어나갈 때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미세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이를 분별하고 논변하는 데에는 정밀한 방법과 섬세한 논리가 요구된다. 주희의 글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주희의 학문 스케일에 따라 전근대 동아시아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기도 하다. 특히 심성론의 영역에서는 주희 글의 특정 부분에 대한 해석들이 그대로 치열한 논변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지니는 의미가 주희 글의 정확한 진의에 접근해서 주희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철저하게 ‘주자로 학문하기’였다 하더라도, 텍스트비평, 논리학, 변증학 등 해석과 논변의 방법에 해당하는 영역으로부터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까지 학문의 전 분야에 걸친 학술적 역량이 집적된 결과로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생각해 보면 전근대 동아시아 학술의 역사는 경서 해석의 역사였다. 이 ‘경서로 학문하기’가 시대마다 새롭게 시도된 경서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세계를 다시 읽고 다르게 기획하는 것이었다면, 주자학의 나라 조선이 낳은 ‘주자로 학문하기’ 역시 또 다른 단계의 중요한 학술 행위였던 셈이다.

학술사를 서술하는 관건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있다. 쓸모 있는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산의 높이뿐만 아니라 특색도 중요하다. 온통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산밖에 없는 지역에 단풍나무 가득한 산이 있다면 높이가 낮더라도 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동식물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른 지역에서는 흔한 것이라도 이 지역에서 귀하다면 역시 주목할 만하다. 실학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소중하고, 그것을 찾고자해 온 노력도 값지다고 생각한다. 서구 유럽이 이미 정답으로 내놓은 ‘근대’를 허겁지겁 찾는 시도이든, 그것과는 다른 복수의 근대‘들’ 중 하나로서 실학을 주목하는 것이든 간에.

그러나 제3자에게 이것이 우리나라의 학술적 성과라고 내놓을 경우 당장 들어오는 질문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었나?”이다.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린 윤휴, 박세당의 경서 해석은 중국 학술사의 스펙트럼에 가져다 놓으면 주자학에서 아주 가까운 지점 어딘가에 놓일 뿐이고, 구체적인 해석들 역시 경학사적으로는 사실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의 실용학과 자연과학 역시, 명대 초기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조정에 상주했던 중국에서 이미 숱하게 논의되어 온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약용의 탈주자학적 경학은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자산이지만, 누군가 구절구절 근거를 들어가며 청대 학술의 발췌 노트에 불과하다고 해도 쉽게 항변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물론 시차가 있고 사회경제적 환경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학자들의 주장이 명청대 저술의 어느 부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 해도, 그것을 특정 시기에 특정 문제들에 대한 진단과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니는 의의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그 의의는 우리 내부의 학술사로 제한된다.

실학이라는 유일한 틀로 조선후기의 학술사를 바라볼 때 생기는 가장 큰 사각지대는 당연히 주자학이다. 17세기 이후 300년 동안에도 쇠퇴하기는커녕 더욱 왕성하게 이어져온 주자학을 도외시하고 조선의 학술적 성과를 논하는 것은, 실상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어리석은 선택이다. 상식적으로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 역량이 오랫동안 집결된 곳에서 독보적 성취가 이루어질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자서절요>에서 <주자대전차의>로, 그리고 <주자대전차의집보>로 이어진 선집과 주석들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조선만의 저술들이다. 기껏해야 ‘주자로 학문하기’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평가절하할 일이 아니다. 그 번잡하고 지루해 보이는 작업들 하나하나에 집적된 조선의 지적 자산을 면밀히 음미하고 조명할 필요가 있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이 도달한 주자학의 경지야말로, 주희의 나라 중국을 넘어서 내놓을 수 있는 독보적 학술성과의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