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 신분인 이덕무와 박제가가 당대에 이름났는데, 선친께서는 그들이 지은 작품을 보시고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영조 말년에 모씨, 모씨와 같은 간사하고 방종한 한 부류가 있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이들을 떠받들다가 여기에까지 이른 것이니 시대의 기풍을 볼 수 있다. 서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대부의 자제들도 이들을 애호하니, 세상의 도의를 위해 간과할 수 없는 근심거리이다.”
조선후기 문인 심노숭(1762-1837)이 아버지 심낙수(1739-1799)의 말을 옮겨 적은 글이다. 이 점잖은 학자가 세상을 걱정하며 몹쓸 문풍의 진원지로 거론한 모씨들이 누구일까? 교과서적인 상식으로 연암 박지원을 떠올릴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문체와 발상으로 한 시대를 놀라게 했고, 그에 대한 열광적인 추종의 분위기가 근엄한 주자학자들의 우려를 자아낸 인물로 ‘실학파 문인’ 박지원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덕무, 박제가는 박지원과 매우 가까운 서얼 문인들이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인물은 박지원보다 앞서서 문단의 기린아로 등장한 남인계의 문사 이용휴와 그의 조카 이봉환이다.
노론 정객 심낙수의 언급이긴 하지만 ‘간사하고 방종한[邪淫]’ 인물이라고 평가된 이용휴에게 한 시대의 젊은 문인들이 이토록 쏠리고 열광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실제로 영조 말년 그의 명성은 대단해서, 문장을 연마하여 새롭게 되고자 하는 이들이 모두 그의 비평과 가르침을 듣고자 몰려들었다. 이를 두고 남인 학자 정약용은 “벼슬에도 나아가지 않은 신분으로 문단의 저울대를 손에 잡은 것이 30여 년이었으니, 이는 예로부터 유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이 어쨌든 정치와는 별도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오늘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인문의 숭상을 표방하던 조선에서 한 시대의 문장을 평가하고 계도하는 것은 국가의 일이었다. 이를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 예문관의 책임자인 대제학이 ‘저울대를 잡고 물건의 경중을 가리듯이 문장의 고하를 판정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직책’이라는 의미의 ‘문형(文衡)’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이 바로 이러한 뜻에서이다. 따라서 자신의 문장을 인정받고자 하는 문인이라면 이러한 권세를 지닌 이들에게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벼슬에 오를 가능성이 제한된 서얼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 벼슬길에 나가야 할 사대부의 자제들까지, 실권은커녕 벼슬을 한 적도 없는 재야인사 이용휴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이른바 ‘재야문형(在野文衡)’의 탄생이다.
문학을 전공한 사대부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실학자로 알려진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조카다. 그의 집안은 조부 대까지 조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남인계 명문가였으나, 이익의 맏형인 이잠(李潛)이 숙종의 친국 끝에 죽음을 당함으로써 역적의 집안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훗날 이용휴의 아들인 이가환(李家煥)이 정조의 신망 하에 관직에 올랐으나 역시 노론계의 집중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천주교 전파의 괴수라는 혐의로 옥사하였고, 이후 고종 때까지 신원되지 못했다.
이런 집안 배경으로 인해 이용휴는 28세 생원시 합격을 끝으로 더 이상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이후 7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전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채 그야말로 재야 문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벼슬길에 올라 대부(大夫)로서 경세(經世)에 참여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학문에 힘쓰는 사(士)로 사는 것이 ‘사대부(士大夫)’의 본분이다. 주자학의 세례 이후 사의 학문이 심성 수양에 치중되긴 하였으나, 그 본질은 언제든 경세에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문장 수련은 그 수단 내지 여기(餘技)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대부로서의 가능성이 차단된 이용휴는 오로지 문학에만 힘을 쏟았다.
이용휴에게 있어서 문학은 더 이상 경세의 도리와 학문의 이치를 담는 도구가 아니었다.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확인하며 세상을 이해하고 반영하는 새로운 시선이자, 또 하나의 세계였다. 실학자들이 현실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경세의 이상을 학문으로 저술해 내었다면, 이용휴는 세상의 통념을 넘어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예술의 가치를 문학이라는 상상의 세계로 그려낸 것이다.
이용휴의 작품을 일별하면 유독 ‘나’에 대한 시선이 매우 강함을 발견할 수 있다. 남들의 생각, 이미 주어진 관념들을 철저히 해체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갈을 끊임없이 던진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 그 옛날 첫 모습은 순수한 천리 그대로였는데 지각이 하나둘 생기면서부터 해치는 것들 마구 일어났네. 뭐 좀 안다는 식견이 천리를 해치고 남 다른 재능도 해가 되었지. 타성에 젖고 인간사에 닳고 닳아 갈수록 그 속박을 풀기 어렵네.(중략) 옛 나를 잃어버리고 나자 참 나 또한 숨어버리고 일을 위해 만든 일들이 나를 타고 내달려 돌아올 줄 모르네. 오래 떠나 있다가 돌아갈 마음 일어나니 마치 꿈 깨자 해 솟아오르듯. 몸 한번 휙 돌이켜보니 벌써 집에 돌아와 있구나. 주변의 광경은 달라진 것 없는데 몸의 기운 맑고 평화롭도다. 차꼬를 풀고 형틀에서 벗어나니 나 오늘 새로 태어난 듯! 눈이 더 밝아진 것 아니고 귀 더 밝아진 것도 아니나, 하늘이 내린 밝은 눈 밝은 귀가 옛날과 같아졌을 뿐이로다. 수많은 성인이란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 나는 나에게 돌아가기를 구하리라. 갓난아기나 어른이나 그 마음은 하나인 것을. 돌아와 보니 새롭고 특이한 것 없어 다른 생각으로 내달리기 쉽지만 만약 다시금 떠난다면 영원토록 돌아올 길 없으리. 분향하고 머리 조아려 천지신명께 맹세하노라. 이 한 몸 다 마치도록 나는 나와 함께 살아가겠노라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내용을 담은 그의 작품 대부분이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위의 글은 <환아잠(還我箴)>이라는 운문의 잠언인데, 자(字)가 ‘환아’인 신득령이라는 인물에게 써준 것이다. 그 외에도 멀리 있거나 떠나는 이를 위해 지은 증서(贈序)와 송서(送序)를 비롯해서, 남의 글이나 그림에 써 준 서문(序文)과 제발(題跋), 상대의 건물 이름에 담긴 뜻을 풀어준 기문(記文), 자(字)를 지어주며 의미를 밝힌 자설(字說), 장수를 축원하는 수서(壽序), 그리고 죽은 이에게 말을 거는 제문(祭文) 등이 주류를 이룬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은 독방에서 자신을 향해서만 되뇌는 주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던지고자 한 경구였다. 그리고 이렇게 문학을 매개로 하는 인간관계들이야말로 이용휴가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한 힘이었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이용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문학은 이용휴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치열한 장이었다. 그는 늘 남들의 평가에 연연할 것 없다고 말하곤 하였으나, 그의 글들에서 자신의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학자였던 숙부 이익에게 배운 다른 자제들이 주역학과 예학, 경제학, 수학, 군사학 등에서 각기 일가를 이루었던 것과 대등한 열의와 진지함으로 이용휴는 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리고는 문학에 있어서 남들과 다른 경지에 오르기 위해 광범위한 서적을 탐독하고 새로운 표현방식을 실험하였다. 그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재야문형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전공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오늘날과 달리,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가르침을 입은 사대부들은 무언가를 전공하여 몰두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사대부의 생을 평가할 때 대상 인물의 업적과 장점을 기준으로 경세가, 학자, 문장가의 어느 한쪽에 방점을 찍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를 놓고 가하는 후대의 평가일 뿐인지 대개의 사대부는 이 중 어느 하나를 ‘전공’한다고 자임하지 않았다. 이들이 애초에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 문장가의 길을 걷겠노라고 스스로 천명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문학 전공자’ 이용휴는 이채로운 인물이다.
기이한, 참으로 기이한
<흠영(欽英)>이라는 방대한 일기를 남긴 유만주는 이용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이 사람의 문장은 지극히 괴상하다. 산문에서는 지(之)나 이(而) 같은 어조사를 전혀 쓰지 않으면서 시에서는 이런 글자를 회피하지 않으니, 일반 사람들과 매우 다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진실로 병폐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이한 점이기도 하다. 혜환이 소장한 서책은 매우 방대한데 모두 기이하고 독특한 것들뿐이고, 평범한 것은 한 종도 없다. 그의 기이함은 실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정(正)을 중시해온 전통이 강한 한자문화권에서 기(奇)는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고, 따라서 어떤 인물이나 그의 문학을 평가하는 키워드로 기(奇)를 거론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유만주는 이용휴를 두고 문학은 물론 독서 취향과 천성까지 속속들이 기(奇)하다고 평하였다. 그는 당시의 문장을 정(正)과 기(奇)의 두 흐름으로 나누고 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이용휴와 이덕무를 들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용휴에 대한 비평들은 하나같이 ‘기(奇)’를 중심에 둔다. 정약용은 기굴(奇崛)과 신교(新巧)를, 이경유는 기매(奇邁)와 절속(絶俗)을, 김택영은 기궤(奇詭)와 첨신(尖新)을 핵심 평어로 삼았다.
이용휴의 작품이 기이하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통용되는 격식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제한된 글자 운용 법칙을 지켜야 하는 한시에는 가능한 한 어조사를 쓰지 않고 원활한 의사 전달을 위주로 하는 산문에서는 어조사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일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용휴는 의도적으로 이를 거부했다. 통상 비슷한 형식과 용도의 글들에 기대되는 분량에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짧은 글을 즐겨 쓰곤 했다. 분량 뿐 아니라 장르의 속성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전범을 따르지 않았으며, 남들이 보지 못했을 법한 책에서 궁벽한 전고들을 가져다 사용하였다. 같은 글자를 집중적으로 반복한다든가, 설명 없이 이질적인 사례와 비유들을 대뜸 열거하는 것으로 서두를 여는 등, 파격을 구사한 작품이 많다. 산문 두 편을 예로 든다.
‘차거’는 이 사람이 이곳에 산다는 말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가 젊으나 식견이 높으며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이다. 만약 그를 찾고 싶으면 마땅히 이 기문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쇠 신발이 다 닳도록 대지를 두루 다니더라도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此居, 此人居此所也. 此所卽此國此州此里, 此人年少識高, 耆古文, 奇士也. 如欲求之, 當於此記, 不然, 雖穿盡鐵鞋, 踏遍大地, 終亦不得也.)
늙은이가 할일이 없어, 둘러앉은 손님들에게 평소 듣고 본 기이한 것을 말해 보게 했다. 그러자 한 손님이 말했다. “어느 해 겨울, 날씨가 봄처럼 따뜻하더니 갑자기 바람이 일고 눈이 내리다가 밤이 되어서야 눈이 그쳤는데, 무지개가 우물물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떠들썩했지요.” 또 한 손님이 말했다. “전에 어떤 떠돌이 중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깊은 골짝에 들어갔다가 한 짐승과 마주쳤는데, 호랑이 같은 몸이 푸른 털로 덮였으며 뿔이 났고 날개를 가진 것이 어린아이 같은 소리를 내더랍니다.” 나는 이런 따위의 것들은 허황한 말이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한 젊은이가 찾아와 인사하고는 시를 선물했다. 성명을 물으니 이단전이라 하기에, 그 특이한 이름에 의아했다. 시집을 펼치자 빛나고 괴이하며 뭐라 말할 수 없이 들쭉날쭉하여, 생각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는 점이 있었다. 비로소 두 손님의 말이 허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각각 작품 전체이다. 첫 작품은 <차거기(此居記)>라는 기문(記文)이다. 기문은 대개 어떤 건물의 건립 유래 기술 및 그 이름의 의미에 대한 의론으로 이루어지는 격식을 지닌 문체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이 짧은 작품은 ‘차(此)’라는 글자를 9번이나 반복하면서 파격적인 방식으로 이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사실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은 ‘나이가 젊으나 식견이 높으며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라는 몇 마디 말에 모두 담겨 있다. 이 짧은 기문 말고는 세상 어디에서도 이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자기 글에 대한 자부이면서 슬쩍 거는 장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작품은 이단전이라는 시인의 시집에 써준 발문인 <제하사고(題霞思稿)>이다. 다른 이의 작품집에 서문이나 발문을 달 때 저자에 대한 예의를 차리면서 적절히 논평도 곁들이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진짜 머슴 놈’이라는 뜻의 단전(亶佃)이라는 이름의 이 처음 보는 젊은 시인의 시를 무심코 읽어내리던 이용휴는 기이하고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들이 책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일반적인 발문으로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던 이용휴가 이 시집에 대한 논평 대신 들이민 것은 ‘겨울밤의 무지개와 날개 달린 푸른 호랑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이함에 대한 참으로 기이한 발문이다.
이러한 형식의 실험 못지않게 이용휴의 작품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그 참신한 발상에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은 작품에 담지 않으려 했고, 남다른 생각을 던짐으로써 독자가 당연시해온 통념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거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발랄함을 기대한다면 그와는 거리가 있다. 전술했듯이 심낙수는 이용휴를 두고 ‘간사하고 방종하다.’고 혹평한 바 있으나, 이는 주자학의 이념을 신봉하지 않고 선불교와 양명학에까지 깊이 빠진 점을 비판한 것이지 그 비판 그대로 이용휴가 욕망과 감정의 여과 없는 표출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점에서 이용휴가 길어 올린 깨달음들은, 오히려 방종이라기보다 절제였고 외적 발산이라기보다 내면을 향한 응시였으며, 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본래 누구나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다. 다만 세상이 강제하는 이런저런 관습들에 매여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아등바등 사는 이들로서는 쉽게 이르기 힘든, 아니 언젠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 생각들이기 때문에 순간 기이해 보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기이한 기법과 기발한 착상들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더 강렬하게 제시하기 위한 일종의 충격 요법인 셈이다.
기(奇)는 기괴하고 정상이 아니어서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을 지니기도 한다. 유만주가 “병폐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이한 점이기도 하다.”라고 했을 때의 기(奇)는 후자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당시의 많은 젊은 문인들이 이용휴에 열광하고 그를 추종했다는 사실에서, 이 ‘뛰어나게 기이한’ 문학이 한 개인의 성향을 넘어서 시대 분위기의 일각으로 이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보든 긍정적으로 보든 간에, 천편일률의 문학에 물릴 대로 물린 당대의 요구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그 선봉에 선 인물이 이용휴였다.
참된 나를 찾은 자리에서 열리는 새로운 세계
이용휴는 조선에서 드물게 기(奇)라는 평을 듣는 작가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기(奇)는 애써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眞)이 다하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이함에 이르는 길이 ‘참됨’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데에서 열린다는 말이다. 이용휴는 기이한 기법과 발상을 즐겨 구사했지만, 그 기이함은 그저 다름을 위한 다름이 아니었다. 나의 삶과 세계를 겹겹이 싸고 있는 허위들을 바닥까지 걷어내고 그 참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용휴의 시 213수와 산문 367편은 모두 조남권・박동욱이 모으고 공역하여 전집으로 출간하였다. 이로써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용휴의 ‘참됨’과 만날 수 있는 다리가 주어졌다. 때로는 일체의 전범을 부정하고 통념의 신화를 파괴하는 준열한 일갈로, 혹은 ‘그 옛날, 거기’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대한 통찰과 권면으로, 어떤 때는 다른 말 하는 척 시치미 떼며 허위 가득한 세상에 일침을 놓는 우스갯소리로, 이용휴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참됨은 여전히 그의 글들 속에 살아 있다.
이용휴는 들여다볼수록 거짓투성이인 자신에 대한 철저한 회의와 부정을 통해 참된 나를 다시 찾아 가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에게서 인간다움 본연의 가치를 발견하였고, 힘겨운 삶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불운한 벗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 빚어내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세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그려내었다.
유형원, 박지원, 홍대용, 그리고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실학자’라고 부르는 일군의 인물들은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하고 제도와 사상의 개혁을 논하였다. 이에 비해 이용휴의 글에서는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과 논평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서는 매우 강렬하고 도발적인 자기 부정과 사회 비판의 목소리가 들린다. 뿐만 아니라 그 부정과 비판을 넘어서 새로운 시야, 또 하나의 세계가 그의 글들을 통해서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문학의 힘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조선의 책, 조선의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2, No.9, 2014년 9월, 송혁기,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