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구화, 세계화, 혹은 글로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라 할 수 있는 16-17세기에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한 서양인의 보고를 담은 책에 대한 이야기다.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2.2 貴 C510 130, 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 suscepta ab Societate Jesu, 1615.
책은 1615년 5월 30일에 예수회의 총대리(總代理) 신부인 페르디난두스 알베르가 로마에서 편찬한 책이다. 이 서명은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1)이다. 저자는 여러 명이지만, 주요 저자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와 그의 후계자 니콜라스 트리고(Nicolas Trigault, 金尼阁, 1577-1628)이다.
2.
이 책은, 1610년에 마테오 리치가 죽자, 그를 기리기 위해서 혹은 그의 성인(聖人) 추대를 위해 그의 후계자인 트리고와 몇몇 신부들이 리치의 글과 그가 중국에서 행한 학문 활동 전반과 포교 활동 일반에 대한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라틴어 판은 1616년, 1617년, 1623년, 1684년에 재판되었고, 라틴어 판의 프랑스어 번역이 1616년, 1617년, 1618년에, 독일어 번역은 1617년, 스페인어 번역은 1621년, 이탈리아어 번역은 1622년, 영어 번역은 1625년에 출판되었다. 이와 같은 번역 상황은, 이 책에 대한 유럽 독자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책의 구성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앞에서 소개한 일본에 대한 편지 모음과는 달리 목차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목차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또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를 위해 목차의 순서대로 옮기겠다. 마찬가지로 인명과 지명의 번역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라틴어 음차를 그대로 우리 말로 옮기었다. 이 책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제1항은 이 책의 서술 구성과 원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2항은 시나를 통치했던 왕국의 규모, 위치, 국명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제3항은 시나의 비옥한 대지에서 생산되는 곡물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제4항은 시나의 기계들과 그 기술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제5항은 시나의 자유교양학문들과 학문들의 등급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제6항은 시나의 국가 통치 방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제7항은 시나의 제례(혹은 전례) 방식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제8항은 시나인의 얼굴의 모양과 몸 가짐 및 자세와 기타 여러 전통에 대해서 소개한다.
제9항은 시나인의 미신들과 다른 잘못들을 평가하고 있다.
제10항은 시나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여러 다양한 종교 집단과 여러 잘못된 모습들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제11항은 사라센인들과 유대인들과 시나에 오래 전에 들어온 기독교 신앙의 흔적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제2장
제1항은 프란키스쿠스 사베리우스가 시나에 포교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제2항은 예수회가 시나 포교 원칙을 다시 마련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3항은 같은 해에 포교를 위해서 세 번째로 시나 왕국에 파견되었으나 정착에 실패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제4항은 샤우퀴누스(광동(廣東)의 한 지역)으로 신부들이 물러났고, 건물과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제5항은 천주의 법을 시나인들에게 서서히 전파했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제6항은 미카엘 루기에리 신부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무고(誣告)로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가 풀려났고 유클리드 수학 저서를 시나 말로 옮기는 것이 경이를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7항은 신부들이 히스파니아 왕에게 간청한 사절단이 시나 왕국을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8항은 두 명의 신부가 이 포교 활동을 중도 포기했고, 자신들이 주로 활동하던 지역에서 세퀴이나 지역으로 나아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9항은 새 교황이 신부들을 파견하였고, 루기에리 신부는 쾅시(廣西?) 지역으로 갔다고 보고하고 있다.
제10항은 상급 지위에 있던 에두아르두스 신부가 아마카우스 지역으로 되돌아갔고, 큰 무고에 시달리던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자유롭게 풀려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11항은 미카엘 루기에리 신부가 아마카우스 지역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붙잡혀있었으며, 에두아르두스 신부는 샤우퀴누스 지역으로 돌아갔고, 일반 백성들의 광기에 예수회 신부들이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제12항은 시찰관이 교황에게 시나의 왕에게 사절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루기에리 신부를 로마로 보냈고, 안토니우스 알메이드 신부가 키나 왕국을 방문
했으며, 교황이 새로운 대주교 인정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13항은 그 당시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어떤 성과에 근거해서 샤우퀴누스 지역에 대주교청을 설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기록을 담고 있다.
제14항은 샤우퀴누스 지역의 대주교 문제를 두고 벌어졌던 마지막 논쟁과 예수회 신부들의 추방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
제3장
제1항은 시나의 포교하기로 결정했고, 사비에르 신부가 새로운 근거를 마련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2항은 아마카우스의 신부들이 소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시나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시찰관이 파견되었다는 보고를 담고 있다.
제3항은 사우체이(아마도 소주(蘇洲)) 성의 고귀 관료의 아들 취타이소가 마테오 리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했고, 리치 신부가 그와 함께 인근의 도시로 갔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제4항은 사우체이 지역에서 겪은 첫번째 고초와, 이 지역으로 감독관 에두아르두스 신부가 방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5항은 안토니우스 알메이다 신부가 죽었고, 그를 대신에서 페트루스 출신 프란키스쿠스 신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6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난칭(南昌) 성으로 갔고, 그곳에서 몇몇 그리스도 신자들을 규합했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제7항은 밤중에 두 명의 강도가 집을 침입했고, 두 명의 신부에게 부상시켰으며, 재판에 호부되어 벌을 받게 되었으나, 신부들의 간청으로 석방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제8항은 페트루스 출신 프란키스쿠스 신부가 죽었고, 라자루스 카나네우스 신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보고를 담고 있다.
제9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난칭으로 곧장 갔다고 보고한다.
제10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난칭에서 추방되었고, 대주교가 설치된 키암시우스(강서 (江西)?)지역으로 피난했다고 전한다.
제11항은 키암시우스 지역에 새로운 주교 자리가 인정되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2항은 마테오 리치는 신부가 인근에 있는 왕들과 친교를 맺었고, 자신을 대중적인 강연자로 스스로 칭하는 몇몇 유력 인사들과 교유 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제13항은 예수회 소속 마테오 리치 신부가 난칭으로 파견되었고, 새로운 거처가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제14항은 사우체이에서는 라자루스 카타네우스 신부가 큰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의 예수회 신부들이 소환되었다고 보고한다.
제4장
제1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두 번째로 난칭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2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시나 왕을 대신해서 난칭을 총괄하는 관리에 의해서 초청받았고, 이곳에서 페이키누스(北京)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는 보고를 담고 있다.
제3항은 페이키누스에서 협상은 실패했고, 신부들이 다시 난칭으로 되돌아왔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제4항은 겨울이 일찍 찾아왔고, 신부들은 강위에서 겨울을 견디어야 했으며, 마테오 리치 신부는 육로를 통해서 난칭으로 가는 길을 모색했고 그곳에서 세 번째의 거처를 마련했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제5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예수회 신부들의 권위가 날로 높아졌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6항은 난칭의 유력 인사들이 마테오 리치 신부와 교유하기를 간청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7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천주의 법에 해서 가르침을 펼쳤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제8항은 추운 겨울집으로부터 난칭으로 안전하게 초청하였고, 살기 좋은 거처를 마련해주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9항은 라자루스 카타네우스 신부가 아마카이로 갔고, 난칭 사람들 가운데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아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나왔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0항은 페이키누스의 포교가 계속 시도되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제11항은 텐생(지명) 성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서 보고한다.
제12항은 페이키누스에 있는 키나 왕이 선물과 함께 초대했으며, 이는 뜻밖의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13항은 전례를 관장하는 시나 관리들에 의해서 포박당했고, 사절단이 머무는 성으로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제14항은 이의 전쟁(아마도 이자성(李自成)의 난) 이후에 마침내 예수회 신부가 도성에 머물 수 있다는 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제15항은 예수회 신부들이 시나의 고위 관리 두명과 아주 긴밀한 교유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또한 좋았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6항은 백련교도들이 그들 때문에 누명을 뒤집어 쓴 예수회 신부들을 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보고를 담고 있다.
제17항은 사우체이 주교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제18항은 몇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사우체이 주교청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보고 있다.
제19항은 난키누스(남경(南京)) 교회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제20항은 아마카 지역에서 에마누엘 디아즈 신부가 포교 감독관으로 시나로 파견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제5장
제1항은 시찰관이 이아포니아로부터 아마카로로 돌아와서 포교 일체에 대한 보고문을 작성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2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그 시기에 지은 책들이 천주의 법에 어떤 권위를 더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제3항은 파울루스 신부는 철학(아마도 문과) 분야에서, 마르티누스 신부는 군사(아마도 병과)에 대해서 박사 시험(科擧)를 취득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4항은 난키누스(남경(南京)) 주교청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제5항은 사아케이에서 머무는 집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재6항은 난칭의 포교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예수회의 친구 취우스토가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7항은 페이키누스의 머무는 곳에서 일어난 일들과 집을 샀다는 보고를 하면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키나 말로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제8항은 시찰관이자 이 포교 운동의 기초를 닦았던 알렉산더 발리아누스가 아마카에서 죽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9항은 예수회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캉동(광동(廣東)?)에서 폭동을 일으켜 예수회 형제 마르티네즈 신부가 다쳤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0항은 폭동이 가라앉자 카타네우스 신부가 동료 신부와 함께 <시나> 왕국을 통해서 자신이 머물던 곳으로 되돌아갔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1항은 카타이오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디아로부터 왔는데, 예수회 본부로부터 파견되었는데, 이름은 베네딕투스 고에시우스이고 루지타누스(포르투갈) 지역 사람이라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2항은 카타이오가 시나의 왕국이라는 것과 카타이오로 가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3항은 예수회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베네딕투스를 맞이하기 위해서 파견되었고, 형제 베네딕투스가 시나 왕국에서 죽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제14항은 예수회를 반대하는 큰 폭동이 난키누스에 일어났다고 보고하고 있다.
제15항은 난키누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힘겹게 견디어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제16항은 시나 왕이 친히 마테오 리치 신부가 제작하고 출판한 세계 지도를 궁전에 걸라 명령했고, 페이키누스의 교회가 새로운 건물들로 증축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제17항은 교회에 관련해서 난키누스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제18항은 카타네우스 신부가 파울루스 박사의 고향인 시안하이(아마도 上海)에서 2년에 걸쳐서 행한 노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제19항은 이 시기에 사우체이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제20항은 마테오 리치 신부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제21항은 시나 왕이 마테오 리치 신부에게 봉분을 하사했고, 그곳을 예수회 신부들은 건물을 성스러운 곳과 세속에 속하는 곳을 구분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3.
약간, 긴 옮김이다. 물론 여러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이 옮김에 기초해서 이 책이 가진 학문적 가치와 의의에 대해 논하겠다. 대략 세 가지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책(2)은, 16~17세기 동서 조우의 초기 상황을 이해함에 있어서, 연구의 출발이 되는 텍스트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특히 동서 교류의 연구와 관련해서, 이 시기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시대였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 말부터 중국에서는 동양 고전과 서양 고전의 번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매우 체계적이고 아주 심도 깊은 동양과 서양의 학자들의 토론과 논의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뤄진 번역은 양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요컨대, 하나는 서양 고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 고전을 서양어로, 특히 라틴어로 옮기는 것이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일부, 유클리드의 <기하학>, 키케로의 <우정론>의 일부가 <명리탐(名理探)>(3), <교우론(交友論)>,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서명으로 한역되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의 일부가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inensis이란 제목으로 라역(羅譯)되었다. 이 번역 작업의 중심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중국의 대학자들과의 토론과 논의를 심도 있게 나누었고, 그 논의를 바탕으로 번역하고 주석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명 말기에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알레니(Giulio Alleni, 艾儒略, 1562-1649) 같은 선교사들이 명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였던 이지조(李志操, ?-1630)나 서광계(徐光啓, 1571-1630)와 같은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어찌되었든, 번역의 과정에서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중핵 개념들과 동양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 개념들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맞대응 되면서 비교되고 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대표적으로, <중국의 철학자 공자 혹은 중국의 학문(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inensis)>이 저술 및 번역되었다. 이 책은 1687년에 루이 14세의 칙령으로 왕립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서 파리에서 출판되었다(Parisiis, Apud Danielem Hortemels, via Jacobaea, sub Maecenate, 1687 cum Privilegio Regis). 이 책의 서문은 중국 학문의 특징과 공자의 생애를 다루는 내용을 담고 있고, 이어서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를, 마지막으로 일종의 부록으로 중국 역사를 소략적으로 서술한 <중국연대기>를 담고 있다. 사서(四書) 가운데 <맹자(孟子)>는 빠져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학문을 소개하려 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번역 기획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동양 고전의 라틴어 번역이 단기간에 진행된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예수회 선교사들이 사서의 번역을 시도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적어도 1589년 이전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서를 처음 번역한 이는 미켈레 루기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 1543-1607)이다. 그는 1590년에 이를 로마에서 출판하려 시도했다. 이 번역 원문 필사본은 현재 로마의 엠마누엘레 비토리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Fondo Gesuitico 1195번). 이후 마테오 리치가 1591년에서 1594년 사이에 중국의 소주(蘇洲)에서 사서(四書)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이 번역은 필사본의 형태로만 전승된다. 책들이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해는 1662년부터다. 다 코스타(Ignatius da Costa, 郭納爵)는 <공자의 생애, Vita Confucii>와 함께 <대학>을 Sapientia Sinica라는 서명으로 중국 강서성(江西省) 건창부(乾脹府)에서 목판본으로 출판한다. 1672년에 인토르체타(Prospero Intorcetta, 殷鐸澤)가 <중용>을 Sinarum Scientia Politico-moralis의 서명으로 출판한다. 이들이 번역을 위해서 저본(底本)으로 사용한 원전은 주희(朱熹)가 편집하고 주석을 단 <사서집주(四書集註)>였고, 일부 텍스트를 확인한 결과 주희의 주석과 장횡거(張橫渠, 1020-1077)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과정에서 명나라의 만력제 신종(神宗)대의 명재상이자 대학자였던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의 <사서직해(四書直解)>를 참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번역된 책들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같은 왕과 같은 정치가와 볼테르,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행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이 시기에 이뤄어진 번역과 주해 작업은 크게 주목해서 살펴야 할 사건이다. 왜냐하면, 요컨대, 한편으로 동양에서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과 용어들이 이 번역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서양의 근대가 시작함에 있어서 또한 근대 학문들이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동양의 학문도 또한 서양이 동양에 끼친 영향에 못지않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번역과 주해에 몰두했던 예수회 신부들이 많고 많은 책들 가운데에서 하필 이 책들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 위의 목차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은 이에 대한 해명을 해 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기록을 담고 있는 저술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의 학문적 가치와 의의가 발견된다. 한편으로 서양 고전의 한역 텍스트들과 동양 고전의 라역 텍스트들의 이해와 분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해 줄 텍스트이고, 다른 한편으로 원시-중국학(Primitive Sinology)의 형성을 살핌에 있어서 중요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책은 동양의 학문과 제도에 대한 정보를 서양 세계에 체계적으로 전하는 텍스트이다. 예컨대, 이 책의 제1장은 중국의 정치 제도, 통치 방식, 학문과 사상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다. 아마도 이런 내용들은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는 중국의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에 대한 마테오 리치의 관찰과 보고는 루이 14세와 같은 프랑스 왕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특히, 절대 왕정의 확립과 관련해서 중요한 관료제의 도입이나 중상주의 정책은 당시 중국을 통치하고 청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연구가 요청된다. 어찌되었든 루이 14세는 특히 중국의 관료 선발 시험인 과거 제도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고, 또한 중국의 통치 체제를 가능케하는 교육 제도와 그 교육의 실제 내용이었던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고 싶어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동양 고전이 17세기 말에 서구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퍼지게 된 것도 실은 루이 14세의 절대적인 후원 덕분이었다.(4)
4.
이상의 진술은, 동서 교류 연구사의 측면에서 보면, 이아포니아가 물론, 처음에는 서양의 종교를 수용했지만, 나중에는 정신 문명이 아닌 물질 문명을 중심으로 받아들인데 반해, 키나의 경우는 그 수용의 양태가 달랐다는 점을 보여준다. 키나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의 경우, 이아포니아로 들어간 서양 선교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키나인에게 접근하고 또한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키나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도 중국의 황제에게 “자명종”과 같은 물질 문명을 전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한 것은 총포와 같은 무기류가 아니라, 서양의 학문과 사상이었다. 또한 서양 사상을 처음부터 나인에게 이입하고 혹은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동양의 학문, 문화, 종교와 서양의 그것들을 비교-연구해서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서양 종교를 소개하고 뿌리내리게 하려는 전략을 취했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을 학자들은 “적응주의(accommodation)”(5)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적응주의 노선에 따라, 키나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한편으로 서양의 종교와 학문과 사상을 동양 세계에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 동양의 학문과 제도를 서양 세계에 전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양의 종교과 사상을 처음부터 이입하고 혹은 주입하려 하지 않았고, 동양의 학문, 문화, 종교와 서양의 그것들을 비교-연구해서 이를 기반으로해서 서양 종교를 소개하고 뿌리내리게 하려는 전략을 취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바탕 위에서 당시 서양 학문 언어인 라틴어로 옮기고 있다는 점에서, 16-17세기 키나에서 벌어진 동양과 서양의 조우는 상대적으로 평화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찌되었든, 동양의 정신 세계와 서양의 정신 세계가 정면으로 맞대응되면서, 양 세계의 교류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근대(近代)의 시작은 17세기부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이와 관련된 중요한 선행 연구로는, 데이비드 먼젤로의 <진기한 나라, 중국>(6)과 같은 저술이 있다. 이 책은, 내가 보기에, 이 분야의 연구에 있어서 지금까지 나온 저술 가운데에서 가장 탁월한 텍스트이다. 물론 동서 교류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이와 관련해서 그가 던지는 물음들과 이에 대한 해명들은, 기존의 다른 연구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논의의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 문자와 “보편 언어(universal language)”에 대한 먼젤로의 논의는, 동양의 학문이 그리스-로마 고전의 재발견을 통한 고전의 번역과 주해가 중심을 이루어 있던 서양의 교육과 연구에 동양의 학문(예들 들면, <주역 (周易)>과 같은 책)과 한자(漢字)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7)를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이다. 요컨대, 보다 자세한 추적을 해보아야 하겠지만, 화학, 의학, 수학, 음악은, 자연 언어의 표기 체계가 아닌 그 학문만이 공유하고 있는 표기 혹은 기호 체계를 사용하자는, 예컨대, 화학의 개별 원소들을 표시하는 표기 체계나, 수학의 부호 체계들, 또한 음악의 기보와 음가를 표시하는 기호들이 만들어 사용하자는 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가 17세기인데, 이와 관련해서, 먼젤로의 “중국 문자와 보편 언어”에 대한 연구는, 이런 기호와 부호를 사용하자는 제안이 나오게 된 데에는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상형 문자 체계인 한자가 상당 정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적으로, 자연의 탐구를 위해서 보편 언어 혹은 근원 언어 혹은 “진정한 문자(real character)” 체계를 개발하자고 최초로 제안했던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문자를 사용하여 글을 쓴 것은 극동의 왕국, 중국에서였다. 진정한 문자는 대체로 글자나 단어가 아니라, 사물이나 개념을 표현한다. 언어가 미칠 수 있는 지역보다 문자들이 더욱 일반적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나 지역에서 서로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학문의 진보(Advancement of Learning)>, London 1605)(8)
인용은, 베이컨의 보편 언어에 대한 기획이 한자 체계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함을 보여준다.(9) 물론, 베이컨의 보편 언어 기획의 기저(基底)에는, 스페인 마요르카 출신 신비주의 신학자였던 레이몬두스 룰루스 (Raymondus Lullus, 1232-1315)의 “조합주의(ars combinatoria)”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자 체계가 자연학의 부호와 기호 체계 개발과 기획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도 분명하다 하겠다. 또한 보편 언어를 개발하자는 베이컨의 제안은, 그가 주장하듯이, 새로운 학문들이 사용하게 될 기호 체계(“Novum Organonon”) 혹은 부호 체계의 표준화와 통일화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고 논쟁을 촉발하였는데, 그의 제안은, 존 윌킨스나 조디 달가르노와 같은 그의 후계자들, 화학자 로베르트 보일이나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과 같은 학자들, 독일의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와 같은 철학자에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는 1662년에 왕립 아카데미가, 파리에서는 1666년 학술 아카데미가, 베를린에서는 1700년에 학술 아카데미가 창설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시기는 베이컨이나 갈릴레이(Galile0 Galilei, 1564-1642)와 같은 근대 과학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였던 때였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서 근대 학문의 세계가 열리게 되는데, 이와 관련해서 자연의 사물들을 자연 언어의 표기 체계가 아닌 새로운 기호 체계를 마련하려는 기획함에 있어서 동양의 사유 체계와 언어 체계가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하겠다. 어찌되었든, 이와 같은 새로운 기호와 부호를 사용하는 학문 운동은, 또한 학술 아카데미와 같은 학회의 창설은 서양의 학문 체계를 이전까지의 기독교 교리 중심의 교육 방식과 그리스-로마의 고전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전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학문 운동이 일어나는 변화의 중심에 한자(漢字)와 동양의 사유 체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동서 교류의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하겠다. 단적으로 동양 학문의 핵심을 담고 있는 <주역>이 라이프니츠와 같은 독일 철학자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이 자리에서 굳이 자세하게 부연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피었듯이, 먼젤로의 탐구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일어났던 교류 양상이 일방적인 수용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 세계는 상호 영향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 연구라 하겠다.
5.
내 생각에는, 먼젤로의 <진기한 나라, 중국>은, 소위 세계가 소위 “글로벌”화의 초기의 모습을 추적함에 있어서 연구의 베이스 캠프와 같은 구실을 담당하는 텍스트이다. 적어도, 기존의 연구들이 동양과 서양의 서적 가운데에서 어떤 책들이 번역되었는지에 교류 상황을 추적하는 수준 이상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먼젤로의 논의는 매우 중요한 기초 연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다만, 먼젤로의 연구 지평이 아직은 역사적인 접근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동서 교류를 연구함에 있어서 당시 예수회 신부들이 직접 번역하고 주해를 단 텍스트들을 직접적을 분석하고 비교-연구한 텍스트는 아직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철학자 공자 혹은 중국의 학문(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inensis)>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축약 정리해서 알폰소 바뇨니(Alfonso Vagnoni, 高一志, 1568-1640)가 1605년에 출판한 <서학수신(西學修身>, <서학제가(西學齊家)>, <서학치평(西學治平)>과 같은 텍스트들이 어떤 학적 고민과 정치적 배경을 통해서 탄생한 저술인지에 대한 해명을 <진기한 나라,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 텍스트들이 나중에 동양 사상의 전개와 발전에 어떤 영향을 행사했는지,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은 어떠한지에 대한 논의가 없고, 또한 이런 텍스트들을 번역하고 저술되는 과정에서 동양사상의 기본 개념들과 서양사상의 그것들이 어떻게 저울질 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데, 이에 대한 해명을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몬젤로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명을 하기 위해서 <진기한 나라, 중국>을 저술한 것은 아니기에, 이에 대한 해명은 이런 문제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의미에서, 동서 교류의 연구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다만 체계적이면서 엄밀한 비교-연구가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비교-연구가 다루고 밝히게 될 세계가 실은 연구사에 있어서 미지(未知)의 신대륙(terra incognita)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음은 세계관의 충돌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세계관의 충돌 문제는 여러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 주제이다. 예컨대,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은 근본적으로는 전례 논쟁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회 신부들은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예수회”를 추방하려는 반대 움직임과 심지어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충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전면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 논쟁은 한편으로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의 정면 충돌로 확산되었다. 예컨대, 마르티네스가 저술한 <천학전개(天學傳槪)>와 반(反) 그리스도교 관료인 양광선(楊光先, 1597-1669)이 지은 <벽사론(闢邪論)>이 충돌의 최전선에 맞붙었던 텍스트들이다. 중국인의 기원이 아담으로 비롯되었다는 마르티네스의 주장에 양광선이 <부득이(不得已), 나도 어찌 할 수 없다> 논변을 제시하자, 마르티네스의 동료인 부글리오 신부가 <부득이변(不得已辯), 나도 달리 할 수 없다>는 반박 논변을 출판할 정도로 충돌은 확전되었다. 하지만 충돌은 서양 신부들 내부에서도 크게 벌어졌다.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에 대한 롱고바르디(Nicolo Longobardy, 龍華民, 1559-1654)의 비판이 그것이다. 중국인들의 전례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문화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제례 의식을 인정하려는 것이 마테오 리치의 입장인 반면, 롱고바르디는 미신과 우상을 섬기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논쟁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Breuis relatio eorum quae spectant ad declarationem Sinarum imperatoris Kam Hi circa coeli, Cumfucij et avorum cultrura datam anno 1700. Accedunt primatum, doctissimoruq[ue] virorum, et antiquissimae traditionis testimonia / [Antoine Thomas]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천(天)에 대한 숭배와 공자의 문묘와 조상에 대한 숭배에 대한 강희제가 1700년에 밝힌 판단에 대하여>)에서이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귀중본 보관실에 소장되어 있다(청구 기호는 貴 C510 113이다). 이 책은 전례 문제에 대한 중국의 최고 권력자인 강희제(康熙帝, 1654-1722)의 입장이 명백하게 표명되어 있는데, 그는 중국의 제례 의식이 소위 서양적 의미의 종교 행위가 아니고 일종의 문화 행사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충돌은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니며 현재 진행형에 속하는 부딪힘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충돌의 원인과 배경을 탐구함에 있어서 충돌의 시작 단계를 살필 수 있는 기록과 보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는 매우 크다.
6.
지면 관계상 전례 문제는 이 정도로 소개하겠다. 사실, 전례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도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과 같은 텍스트들이 직접적으로 원전을 통해서 연구된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예컨대, 세계관의 충돌 문제와 관련해서, 예를 들자면, 제5장 제16항에 명나라 만력제가 마테오 리치 신부에게 세계 지도를 제작해 달라고 부탁하는 기록이 단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우선 지도부터 살펴보자.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 관리와 함께 1604년에 제작하고, 이지조가 해설을 단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이 지도를 제작한 리치의 공적을 인정한 명의 만력제는 그 보상으로 예수회 신부들이 북경에 머물도록 했고, 그들이 머물면서 학문과 표교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는데,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은 이에 대한 소개도 자세히 하고 있다. 예컨대, 이 책의 제5장 21항에는 명의 만력제가 마테오 리치 신부가 죽자, 그를 위해 봉분을 하사했고, 그곳을 예수회 신부들이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에 속하는 공간을 구분하여 건물을 운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의 마지막 부분에는 리치의 무덤과 건물의 도면이 그려져 있다. 이 도면이 중요한 이유는, 북경에 세워진 어쩌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천주교 성당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건물 도면의 설명에는 이 건물이 1611년에 세워졌다고 보고 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보다 본격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특히 건축사를 전공하는 연구자와 학제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어찌되었든, 이 지도를 보고 당시 중국인들이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우선, 중국의 영토가 세계의 10분의 1도 안된다는 사실과 중국이 세계의 중심도 아니라는 사실은, 비록 리치 신부가 제작한 제도에는 중국이 중심에 위치하고 있지만 당시 중국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리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아마도 리치)는 희망한다. 언젠가는 왕 자신이 혹은 그의 후계자 가운데 어떤 이가 지도와 그 해설을 읽고서 천주의 법을 배우려는 열정을 품게 되기를 말이다. 어찌되었건, 이 지도가 키나인들을 낙담시킨 것은 분명하다. 자신들의 광활한 왕국이 세계의 한 구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말이다. 가장 크지 않다는 사실에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인용은, 리치가 이 지도를 제작하게 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물론 명나라 만력제에게는, 다르게 설명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양어로 기록된 문서에는, 분명히 비록 대국이기는 하지만, 중국인이 생각하듯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한 구석에 위치한 나라에 불과하다고 전하고 있다. 리치의 이와 같은 생각을 이어받은 사람이 쥴리오 알레니(1582-1649년)이다. 그는 <직방외기(職方外紀)>(11)라는 책을 한문으로 저술하는데, 이 책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한 내용은, 서명이 지시하는 것처럼, 한편으로 소위 “중국 너머의 세계”를 소개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중심이 따로 없고, 오로지 중심은 하늘의 천주에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리치가 제작한 지도와 알레니의 저술은 화이관(華夷觀)을 중심으로 중화주의를 흔드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점은 예수회 신부들에 대한 당시 청나라 황제들의 입장이다. 어쩌면, 청나라 황제들이 한족(漢族) 중심의 화이관과 중화주의 역사관을 깨기 위해 예수회 신부들이 제작한 지도와 저술들을 전략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보다 체계적인 비교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흥미로운 점은,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와 알레니가 지은 <직방외기>는 당시의 조선 지식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 흔적으로, 영조대에 역관으로 활약했고, 천재 요절 시인으로 알려진 이언진(1740-1766년)이 지은 “해람(海覽, 일본기행시)”과 같은 시를 제시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에 알레니와 마테오 리치가 언급되고 있다.
지구(地毬)의 같고 다른 차이와 바다의 섬들이 크고 작음은
서양 선비 리마두가 치밀하고 엄격하게 갈라 놓았다네.(12)
인용은, 18세기의 조선도 서양 학문의 영향권에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교 원정>이 서양의 세계관에 의해서 중화주의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텍스트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공간적인 관점에서, 예컨대 <곤여만국지도>와 <직방외기>와 같은 텍스트가 중화주의 세계관을 흔들고 있다면, 시간적인 관점에서는 중국의 천문학을 대체하는 서양의 서적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의 독해를 바탕으로 새로 제안하고자 하는 점은, 소위 “세계화”의 움직임이 이미 명말 청초, 즉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세계화의 발단이 되었던 시점은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100년 뒤에 조-일전쟁(임진왜란), 혹은 서양인의 말을 빌리자면 “코라이 전쟁”이 일어나는데, 나는 이 전쟁이 소위 “세계화”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발발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자세히 소개했지만, 코라이 전쟁이 물론 동아시아 전쟁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서양의 동진(東進) 운동의 연장선에서 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라이 전쟁”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적어도 동아시아의 교류사의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에 남긴 “코라이 전쟁”에 대한 보고이다.
이아포니아인들이 코리아 왕국을 침범했다(Iapones regnum Coria infestat)
남경에 당도했을 때에, 모든 곳이 공포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이아포네스인들인이 그들의 영토로부터 출발해서 코리아 왕국을 적의로 가득 찬 군대를 보내어 침공했기 때문이다. 코리아 왕국은 시나에게 많은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시나의 보호를 받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아포네스인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행동거지와 용모가 수상한 사람이나 모든 면에서 떠돌이로 여겨지는 사람을 집안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조각배에서 찌는 더위를 견뎌 냈어야만 했다.(13)
인용은, 코라이 전쟁이 중국 본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방인을 집에 받아들이지 말라는 칙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인용은 키나 본토 전체가 전시(戰時) 체제로 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찌되었든, 전쟁 때문에 마테오 리치 일행이 문전박대를 당하고서 남경의 조그만 배에서 더운 여름을 견딜 수 밖에 없었음은 흥미롭게도 “코라이 전쟁” 탓이었다.
<주>
(1) 이 책의 원래 서명은 <예수회가 중국에서 수행한 그리스도교 포교-원정에 대하여>이다. <진기한 나라, 중국>에서 이향만, 장동진, 정인재가 번역한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을 따랐다.
(3) 이 책의 원전은 Commentarii Collegii Conimbricensis e Societate Jesv : In Vniversam Dialecticam Aristotelis Stagiritae Nune Primum in Germania in lucem editi. Coloniae Agrippinae, Apud Bernardvm Gualterivm, 1611이다.
(4)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통해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저술하거나 번역한 텍스트는 아래와 같다. 곰드, <中國現狀新誌, Nouveax memoires sur l'etat present de la Chine>, Paris, 1696; 부베, <中國現狀誌, L'Etat present de la Chine en figures>, Paris, 1697, <中國皇帝傳, Histoire de l'Empereur de la Chine>, la Haye, 1699, <耶蘇會書簡集, Recueil des Lettres edifiantes et Curieuses>, Paris, 1703-1776; 뒤 알드, <中華帝國全誌, Description ge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al Tartarie Chinoise>, Paris, 1735; <北京耶蘇會士硏究紀要, Memoires Concernent l'historire les arts, les sciences, les usages etc, par les missionnarres de Pekin>, Paris, 1776-1814; 코스타(Ignatius da Costa), <대학, Sapientia Sinica>, Kien-Chan Kian-si, 1662; 인트로체타(Prospero Intorcetta, 殷鐸澤) <중용, Sinarum Scientia Politico-moralis>, <중국의 철학적 공,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censis latine exposita>, Paris, 1686-1687; 노엘(Le P. Francais Noel, 衛方濟) <중화제국경전, Sinensis inpesi Libri classlci Sex>, Prague, 1711 (이 책은 중국의 사서와 효경, 소학의 라틴어 번역, 중국의 고주를 충실하게 참조하였으며, 라이프니츠와 볼프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많이 영향을 줌); 비스델루(Visdelou, 劉應), <역경> 주해; 프레마르(Premare, 馬約瑟), <역경>, <중용>, <성리>, <장자>,<노자>,<회남자> 텍스스 연구; 레지스, <역경>의 라틴어 번역; 마일라, <통감강목>의 라틴어 번역; 거빌, <서경>의 프랑스어 번역 등이 있다.
(5)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에서 출판한 이연승, 예수회 색은주의 선교사들의 유교 이해, <종교와 문화> 17, 2009년, 쪽수 33-66을 참조하시오.
(6) 이 책은 이향만, 장동진, 정인재 교수의 노력으로 한글로 번역되어 2009년 나남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9) 베이컨에게 한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책은 아마도 후안 곤잘레스 드 멘도자(Juan Gonzalez de Mendoza, 1545-1618)가 지은 <중화 중국의 문물과 의례와 견습에 관한 역사, (Histroria de las cosas, ritos y constumbres, del gran Reyno de la China, Rome 1585, 1586년 개정)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진기한 나라, 중국> 299쪽을 참조하였다.
(9) 584쪽, Speramus aliquando fore, ut vel Rex ipse, vel e successoribus unus aliquis e spectata tabula lectisque ad eam commentaris in cupiditatem veniat de hac ipsa lege inquirendi. Hoc saltem spectaculum interim Sinenses animos deprimit dum Regni sui vastitatem Orbis Universi angulum non maximum conspiciunt.
(11) 이 책의 번역은 <직방외기> 천기철, 일조각 2005을 참조하시오.
(12) 地毬之同異 海島之甲乙 西泰利瑪竇 線織而刀割
(13) 324-325. Nanchinum ubi ventum, omnia formidinis plena repererunt. Nam Iapones suis finibus egressi regnum Coria infestis armis impetiverant. Id Sinae quod esset vectigale magno sumptu tuebantur, et exigua spes eo tempore apparebet, Iaponum impetum retundendi. Ea res effecit uti nemini satis animi fuerit, ad Nostros hospitio excipiendos. Nam gravibus edictis nuper cautum erat, ne quis in aedes suas reciperet homines, qui vel habitu, vel vultu suspicionem ingerent, qui in omnem partem vagi omnia contemplabantur. Ergo aestus maximos exiguo navigio male tecti superarunt.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아포리아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10, 2014년 10월, 안재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