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언어와 관련된 퍼즐이나 말장난 게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꾸준히 관심을 갖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외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기는 한 것 같다. 그런 게임들 중에 영어권에서 인기가 있는 것으로는 스크래블과 십자말풀이가 있는데 스크래블은 주어진 7개의 알파벳 타일을 이용하여 단어를 조합해내는 게임이고 십자말풀이는 해당되는 칸에 대한 힌트를 보고 그 답을 격자 형태의 답지에 적어 나가는 게임이다. 스크래블은 주로 두 사람이 겨루는 경우가 많지만 십자말풀이는 특별히 대회에 나가지 않는 이상 보통 혼자서 혹은 팀을 이뤄 정답지를 매꿔 나간다. 단어 철자를 누가 잘 맞추나 겨루는 스펠링비도 언어를 이용한 게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주로 어린 학생들이 겨루는 대회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게임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아무튼 이런 게임들을 다룬 책이나 기사, 영화들(스크래블을 다룬 ‘Word Wars’, 십자말풀이를 다룬 ‘Wordplay’, 스펠링 비를 다룬 ‘스펠바운드’ 등)을 보면 애호가 층이 무척 두껍고 그 열정도 대단하다는 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스펠링비나 스크래블의 경우는 진정으로 언어를 이용한 게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두 게임 모두 게임을 함에 있어 단어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철자를 외우는 능력이나 점수가 높은 알파벳을 조합해 단어를 만드는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게임에서는 이민 온지 몇 년 안되는 학생들이나 심지어 외국인들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스크래블의 경우 토너먼트 형태의 대회가 전 세계적으로 꽤 열리는 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대회는 미국도 영국도 아닌 태국에서 열린다. 태국에서는 우승자에 대한 시상을 왕이 직접 할 정도로 스크래블 대회를 국가 스포츠의 수준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영어 실력보다는 단어 목록을 외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듯 외국인들도 노력만 하면 충분히 최고 수준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렇듯 암기와 조합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게임에서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암기력과 조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하더라도 모든 단어 목록을 알고 있고 1초에 수억 개 이상의 조합을 할 수 있는 컴퓨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반면 십자말풀이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단어의 다양한 의미와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출제자가 의도한 언어적인 함정까지 피해갈 수 있어야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 높은 수준에 오르기는 극히 어렵다. 아무리 영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원어민이 아닌 이상 뉴욕타임즈 일요일판 십자말 풀이를 반 이상 채우기는 어렵다.(뉴욕타임즈의 경우 월요일은 초보수준의 퍼즐이 나오고 화요일부터 점점 어려워져 토요일은 초보자가 거의 손을 댈 수 없는 수준의 문제가 나온다. 일요일의 경우 수준은 수요일 정도지만 퍼즐의 크기가 훨씬 커진다.) 컴퓨터가 일반 상식을 묻는 대표적인 미국 퀴즈쇼인 ‘지오파디’에서 1등을 할 수는 있어도 십자말풀이 대회에서는 중위권을 벗어나기 힘들다. 십자말풀이의 특성 상 답을 바로 알 수 있는 명확한 힌트가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다소 애매한 힌트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애매함에 컴퓨터는 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또한 기존의 문제에서 나오지 않은 새로운 언어 트릭이 등장하면 컴퓨터는 속수무책이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단순한 사전적 정의를 이용해서 문제를 낸다면 컴퓨터는 순식간에 맞추겠지만 어느 정도 실력있는 출제자가 만든 퍼즐이라면 사람은 충분히 넘을 수 있지만 컴퓨터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될만한 문제들을 많이 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충분히 넘을 수 있을 만한’ 장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퍼즐이라도 실력자라면 2,30분 정도 걸려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때문에 출제자는 항상 퍼즐을 푸는 사람이 충분히 고민해서 알 수 있는 수준에 맞추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만한 함정을 파야 하고 문제를 푸는 사람은 그런 출제자를 의도를 알고 길이 반드시 있다는 신념을 갖고 문제에 임해야 한다. 이런 출제자와 푸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십자말풀이의 큰 매력으로 작용하는데 이런 것이 십자말풀이의 인기가 백 년 이상 이어질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십자말풀이는 옛날만큼의 폭발적 인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신문사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뉴욕타임즈의 경우 온라인 구독을 해도 십자말풀이를 하려면 별도의 구독료를 지불해야 한다. 일주일 맛보기 이외에 무료로 십자말 풀이를 할 방법은 없다. 유료로 구독하는 애호가가 충분히 많다는 얘기일 텐데 영국의 경우도 타임즈 구독자 중 10퍼센트 이상이 십자말풀이 때문에 신문을 구독한다고 얘기했을 정도이니 만만치 않다.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내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 매일같이 참신함을 유지할 수 있는 출제자들의 능력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십자말풀이의 문제는 단순한 사전적 정의여서는 안된다. 그 단어를 가리키기는 해도 왜, 어떤 방향에서 그 단어를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게 최대한 문제를 꼬아야한다. (물론 너무 꼬아서 풀 수 없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간단한 예로 “Supporter of wicked things?”라는 문제를 보자. 언뜻 보고서 사악한 것을 지지하는 사람이 무얼까 하고 고민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wicked는 사악한이라는 뜻이 아니라 심지라는 의미의 wick에서 파생된 ‘심지가 있는’이라는 뜻으로 봐야 하고 따라서 이 문제의 답은 ‘초(candle)’이다.
단순히 문제를 꼬는 것 말고 아예 답을 적는 방식을 꼬는 방법도 있는데 예를 들어 다음 퍼즐에서 빨간 색 칸으로 시작하는 세로 88번의 문제는 Texas이고 답은 ‘Lone Star State’인데 답을 적을 때 한 바퀴 돌려서 적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적어야 하는 답은 총 8개인데 답을 그렇게 한바퀴 돌려서 적어야 한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퍼즐의 제목(’단어 꼬기’)과 33번 세로 답안인 ‘코리올리스 힘’처럼 퍼즐 안에 암시적으로 포함된 힌트들을 발견해 내어 이를 통해 푸는 사람이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 있는 것은 실제 코리올리스 힘이 그렇듯 북반구(상단)의 답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돌아가며 적어야 하고 남반구(하단)의 답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적어야 한다.
다른 식으로 힌트를 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답안지의 격자 모양이 다음 모양이라면 답은 소용돌이, DNA, 유전, 회오리 등과 관련된 답이 많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때로는 하나의 문제가 두개의 답을 가질 수도 있다. 1996년 대통령 선거 결과 발표 전날 실린 십자말풀이의 경우 똑같은 문제들이지만 그 답은 두가지가 될 수 있다
39번 세로 힌트는 할로윈과 관련된 검은 색 동물인데 이는 CAT이 될 수도 있고 BAT이 될 수도 있다. 그에 이어지는 7개의 세로 힌트가 모두 이런 식의 두 개의 답을 가진다.
이 밖에도 문제들의 맨 앞 글자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던가 대각선 글자를 이으면 새로운 힌트가 나타난다던가 아무튼 언어와 철자의 조합으로 가능한 트릭은 총동원된다.
영국의 경우는 주어진 힌트가 좀 더 수수께끼에 가까운데 주로 아나그램(단어나 문장의 철자를 뒤섞어서 새로운 단어나 문장을 만드는 것. 예를 들어 dormitory => dirty room), 스푸너리즘 (문구의 두 부분의 일부가 서로 뒤바뀌는 것), 이중 정의 (힌트의 두 부분이 같은 단어에 대한 다른 정의가 되는 것), 뒤에서 다시 얘기할 팔린드롬 등이 이용되는데 이 중에 어떤 트릭을 썼는지는 힌트 자체에 암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Demand to rewrite scenes in it이라는 힌트에서 rewrite라는 단어는 답에 대한 설명의 일부인 동시에 이 문제를 풀려면 아나그램을 이용해야 한다는 문제를 푸는 방식에 대한 힌트도 된다.
2. 글쓰기라는 퍼즐
잘 만들어진 퍼즐이라면, 앞에 나오는 여러가지 언어적 함정에 빠져 문제를 푸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라도, 답안지를 보고 나면 ‘아, 왜 그걸 몰랐지’ 하고 무릎을 치게 한다. 아무리 복잡해 보이고 해답이 없어 보여도 퍼즐의 답은 어떻게든 결국 찾아낼 수 있다. 아무도 풀지 못하는 퍼즐은 출제자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십자말풀이를 출제한다는 것은 세계를 규칙과 체계가 있는 틀에 담는 노력이고 거기에는 항상 딱 들어맞는 답이 있다. 반면 문학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세상이라도 겉을 둘러싼 장막을 치우면 그 아래는 출구가 없는 미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학에서 퍼즐과 같은 요소가 그다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예외는 있다. 퍼즐을 만드는 것처럼 글을 쓴다고 하면 고전적인 탐정 소설 작가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런 장르 소설 작가 이외에도 루이스 캐롤이나 조르쥬 페렉 같이 소재나 이야기의 구성에 퍼즐의 요소를 이용한 작가들이 있다.(조이스 같은 모더니즘 작가들이나 바스, 바셀미, 쿠버 등 흔히 포스트모던으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이런 면이 보인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퍼즐은 내가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미묘하다) 특히 페렉의 『인생 사용법』의 경우 배경이 되는 아파트의 방 배치를 비롯해서 이야기 전개 순서 등 소설 전반에 퍼즐의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다. 페렉은 이 밖에도 다양한 형식 실험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한데 『실종』이란 소설의 경우 알파벳 e를 하나도 쓰지 않고 수백 페이지의 장편 소설을 완성했고 이후 『레버넌트』라는 중편 소설에서는 심지어 모음 중에서 e만 사용하여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페렉이 속했던 울리포라는 문학 그룹에 속한 작가들 중에도 이런 시도를 계속한 사람들이 있고 이밖에도 현재 활동 중인 작가 중에 다니엘루스키나 데이비드 미첼 등 퍼즐의 요소를 빌어서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몇몇 있긴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어떤 흐름을 이루지는 못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실주의적 접근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노력들이 그저 독자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한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직소 퍼즐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춰가듯 소설을 읽어나가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은 매우 안타깝다. 잘 짜여진 틀이 드러날 때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단순한 묘사나 서사를 통해서는 전달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 느낌을 압축해서 설명하기 쉬운 예로 팔린드롬을 이용한 시들이 있다. 팔린드롬이란 앞뒤 순서를 바꾸어도 형태가 바뀌지 않는 단어나 문구를 말하는데 여러 단위의 팔린드롬이 있다. 예를 들어 Anna라는 이름은 철자 단위의 팔린드롬이고 우리 말의 경우 음소 단위로 글자를 적지 않기 때문에 그런 팔린드롬을 찾기는 어렵지만 음절단위로 보면 ‘다시다’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철자 수준으로 된 팔린드롬 중에 문장을 이루는 것은 극히 찾기 어려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A Man, A Plan, A Canal – Panama!’나 ‘A Santa lived as a devil at NASA’ 등이 있다. 『괴델, 에셔, 바흐』에 소개된 것처럼 음악도 팔린드롬의 형식을 따를 수 있다. 팔린드롬으로 된 시의 경우 대부분 문장 단위의 팔린드롬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이 전형적인 예이다. (시의 전체 내용은 “palindromic poem doppelganger”라고 구글로 검색하면 쉽게 볼 수 있다.)
Doppelgänger
Entering the lonely house with my wife
I saw him for the first time
Peering furtively from behind a bush –
Blackness that moved,
A shape amid the shadows,
A momentary glimpse of gleaming eyes
Revealed in the ragged moon.
……
Revealed in the ragged moon
A momentary glimpse of gleaming eyes
A shape amid the shadows,
Blackness that moved.
Peering furtively from behind a bush,
I saw him, for the first time
Entering the lonely house with my wife.
이 시는 뒷부분에서 앞부분이 뒤집혀져서 반복되는데 그렇다고 앞의 반만 읽으면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행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행의 순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시작 부분은 ‘아내와 집에 들어가다가 한 남자가 몰래 지켜보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고 마지막 부분은 ‘그 남자가 내 아내와 집에 들어가는 것을 내가 몰래 지켜봤다’는 것으로 전혀 다른 내용이다. 중반 이후의 행들은 전반부의 행들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운명적이고 자포자기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렇듯 새로운 형식적인 틀을 시도하는 것은 흥미로운 노력일 수 있지만 이렇게 명확한 형식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유행이 좀 지난 것 같다. 문학을 벗어나서 보면 이런 시도는 더 찾아보기 힘든데, 작가의 논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외적인 면은 대부분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기 마련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호프스태터의 책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더 특별한 것 같다. 호프트태터는 인공지능이라는 다소 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논리적인 서술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점들을 새로운 채널을 통해 전달하려 했다. 이런 시도가 항상 성공적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괴델, 에셔, 바흐』도 엄청난 성공작임에는 틀림없지만 외국어로 번역할 때는 그 형식적인 틀의 유지라는 요구가 큰 걸림돌이 된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 책의 성공에 힘입어서인지 그에 이어서 집필한 책에서도 이러한 시도를 계속했는데 이 책이 이 글에서 다룰 『Le Ton beau de Marot』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 말장난이 들어 있는데 철자 상으로는 마로의 아름다운 곡조라는 뜻의 제목이지만 발음만 들으면 ‘마로의 무덤(Le Tombeau de Marot)’이라고 이해하기 십상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호프스태터는 번역이라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사람이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본다. 이 책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른 성격의 두 줄기의 이야기 흐름이 교대로 등장하는데 첫번째는 번역에 대한 경험과 고찰이고 두번째는 마로라는 프랑스 시인의 「Ma mignonne」이라는 시가 사람에 따라 또는 번역하는 자세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번역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독자는 이 두 줄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번역이라는 과정에서 내용과 형식이 동시에 번역될 수 있는 것인지, 그 두가지가 과연 구별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잇기로 하자.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상국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3, 2016년 3월, 이상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