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립은 미얀마 카친족 출신의 난민신청자이다. 미얀마에는 버마족과 더불어 약 130여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카친족에 대해서 미얀마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아왔다. 카친족은 KIA (Kachin Independence Army, 카친독립군)라는 군사조직을 통해 미얀마 군과 대치해 왔는데, 마립의 부모님은 모두 KIA에 속해 있었기에 마립은 어린 시절부터 전쟁을 온 삶으로 겪어내야 했다. 마립의 가족들은 늘 미얀마 군인을 피해 작은 마을, 초가집, 대나무 숲 등으로 도망을 다녀야 했는데, 큰 나무 아래, 강가, 대나무 사이 등 어디든지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면 바로 은신처가 되었다. 비 오는 날은 특히 힘들었는데, 미얀마 군인들에게 들킬까 불을 피울 수 없어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이면 과일이건 잎이건 가리지 않고 따먹었고, 운이 좋은 날에는 산짐승을 잡아먹기도 하였다. 고달픈 피난 생활 중에 여동생은 말라리아에 걸려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린 마립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배고픔과 미얀마 군인들의 총이 너무나도 무서웠고, 밤마다 작은 손을 모아 살기 위해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립이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친척의 도움을 받아 마립은 신분을 속이고 미얀마의 정규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친척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그것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18살이 되던 해부터는 수도 양곤으로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마립이 카친독립군의 지도자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낸 당국으로부터 늘 감시를 당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립은 거주신고를 하지 않은 것을 핑계로 인센 감옥으로 끌려가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고 가까스로 풀려난다. 마립은 미얀마 어디에서도 편하게 숨 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브로커를 통해 한국행 비행기표를 손에 넣게 되었다.
2.
그렇게 안전한 곳을 찾아 한국에 왔지만 비자가 만료되어 체류자격이 없는 마립에게 한국 역시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마립은 한국인들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미얀마 사람들에게도 본인의 신분을 숨겨야 했는데, 미얀마 정부의 스파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카친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차별을 걱정해서였다.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유엔난민기구에서 난민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을 듣고, 마립은 본인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난민신청을 하면 누군가에게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기에 많이 망설이고 고민했지만, 커가는 아이들에게 전쟁이 없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난민신청자가 급증을 한 탓에, 마립은 난민신청 후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는데, 그 사이 나는 마립과 종종 연락을 하고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잘하는 마립은 종종 카친족에 관련된 뉴스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보내주곤 했는데, 사무실에서는 그 뉴스들을 번역해서 모아서 나중에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자료로 제출을 하였다. 한 번은 부족한 서류를 받으러 마립의 집을 방문했는데 귀한 손님이 왔다며 치킨을 매운 맛, 순한 맛으로 두 마리나 시켜주셔서 무척이나 행복하고 배가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했는데, 마립은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결혼식에 와주었다. 난민심사가 지연되어 불안하고 답답하실 수 있었을텐데도 만날 때마다 늘 웃는 얼굴로 감사하다고 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내가 크게 격려를 받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립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깜짝 놀라 부랴부랴 병문안을 갔는데, 마립은 남편이 허벅지에 금이 갔을 뿐, 뼈가 산산조각 나지 않아서 감사하고, 병원비가 상대방의 보험회사에서 처리가 된다고 해서 또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립이 인생의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뚝 솟은 산 같이 느껴졌고 그녀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졌다.
3.
하지만 마립의 남편은 수술 받은 부위에 염증이 생겨 계속해서 재수술을 받게 되었고 예상보다 입원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마립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작은 아들이 다니는 다문화 어린이 집에서 보조교사로 일을 시작했고, 어린이집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두 시간 동안 전자제품을 조립하는 아르바이트도 추가로 하게 되었다. 하루종일 그렇게 쉴 틈 없이 일하면 너무 고단하겠다고 걱정을 했더니 그렇게 바쁘게 일하지 않으면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바쁜 것이 더 낫다고 한다. 그러면서 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 누워 있으면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고 있는데, 혹시나 남편이 평생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두렵고 걱정이 밀려온다고 하면서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우뚝 솟은 산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나도 눈물이 났다. 나도 남편이 아파서 입원했을 때 걱정하며 지새우던 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혹시라도 남편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마음을 졸이며 걱정하던 그 밤이 생각 나면서, 두 아이를 데리고 오랫동안 누워 있는 남편을 간호하며 난민신청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은 오죽할까, 어설프게나마 짐작이 되어 나도 같이 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심사를 해달라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계속 요청을 하였고, 신청서를 제출한 지 1년 8개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면담을 하게 되었다. 심사관은 카친족의 상황, 가족 관계, 어린 시절, 그리고 양곤에서 당했던 어려움들까지 꼼꼼하게 물어보다가 한 대목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다. "결국 이 모든 어려움이 아버지 때문인건데…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았나요?"이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는 원망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요." 라고 대답을 하는 마립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이 보였고, 나는 그 옆에서 덩달아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느라 혼이 났다.
사실 마립의 진술서를 여러 번 읽었기에 어떤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고 안타까운 사연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한번도 진술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아무리 전쟁 영화를 많이 보고, 상상력을 동원해본다 한들, 늘 풍족하고 안전하게 살아온 나에게 그녀가 겪었던 공포와 아픔은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난민신청을 돕기 위해 마립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마립이 엄청나게 특별한 난민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 때 아버지를 이해 못해 반발했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딸이었고, 아픈 남편에게 한결 같이 신실한 아내였다. 늘 고향에 있는 자신의 민족을 걱정하는 애국자였고,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을 걱정하는 큰 언니였으며, 두 아이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통해 나는 멀게만 느껴졌던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4.
난민들이 겪은 박해라는 것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난민들이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 –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 부모를 생각하는 자녀 – 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 같다. 비범한 박해의 아픔에 대해서 우리가 상상하기는 힘들어도, 평범한 일상이 깨어졌을 때 겪는 아픔에 대해서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매일의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정성되이 가꾸어 가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첫 아이를 출산 했고, 산후 조리를 하는 동안 마립이 난민인정을 받게 되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이지, 아이를 낳은 것 만큼이나 기쁜 소식이었다. 게다가 그해 봄, 마립의 큰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작은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정신영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4, 201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