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바다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바다 건너편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물론 나침반을 따라 정 동쪽으로 계속 가면 미국 서해안이 나온다. 미국 서해안 도시 중에는 산디에고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7월 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화 축제인 코미콘이 열린다. 만화 팬들이 모여서 만화에 대한 사랑과 관련 소식을 나누는 공간인데 지금은 규모가 엄청 커져서 영화사를 비롯한 연예계의 큰 손들도 참여하기 때문에 새로운 SF 판타지 영화 소식이나 각종 팝 문화와 관련된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동해안에서 동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갠달프나 닥터 맨해튼 차림을 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산디에고는 우리나라보다 약간 남쪽에 있기 때문에 귀를 약간 남쪽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방향은 틀린 방향이다. 오히려 귀를 훨씬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 강릉에서 헤라클레스가 정 동쪽을 향해 활을 쏜다면 그 화살은 바다를 건너서 미국 서해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도를 지나 남아메리카의 칠레의 서해안에 떨어진다. 미국의 산디에고 근처가 아니라 칠레의 산티아고 근처를 지나게 될 것이다. 지구는 구형이기 때문에 직진방향은 지구의 대원(구에서 두 지점을 지나게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원)을 따라가는 방향인 것이다. 만약 정 동쪽을 고집하며 나침반의 동쪽 방향을 따라가려면 오히려 조금씩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한다. 이런 사실을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북극 근처에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면 이해가 좀 빨라진다. 북극에서 10미터 남쪽으로 내려온 지점에서 시작해서 계속 동쪽을 향해 가려면 북극을 중심으로 반지름 10미터의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돌아야하는데 이를 직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해안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지만 다만 그 원이 워낙 크기 때문에 짧은 거리에서는 직진처럼 느껴지지만 먼 거리를 생각하면 상당히 휘어진 경로가 되고 만다.
실제 헤라클레스의 화살이 가는 경로는 간단한 비례식으로 그릴 수 있다. 강릉에서 시작해 경도 L도 만큼 직진했다면 그 때의 위도는 대략 다음과 같다.
38 - L * (38 / 90)
그러니까 90도쯤 지났을 때는 위도가 0도가 되고 (따라서 태평양 상공 어디에선가 적도를 지나서 남반구로 접어든다) 160도쯤 지나면 남위 30도인 칠레 상공을 지나게 된다.
아이들이 이런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만약 위의 공식만을 알고 있다면 지구에서의 직진 경로를 쉽게 계산할 수는 있겠지만 왜 저런 공식을 쓰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반면에 직진 경로가 꼭 대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면서도 공식을 모르기 때문에 실제 경로를 구하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지식이며 분명 뇌 안에서도 다른 부분에서 처리될 것이다. 단순한 공식만 알아서 몇 몇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경우는 기능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원리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보통은 단순한 기능적인 지식 보다는 원리를 아는 경우 더욱 대단한 지식을 가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과연 원리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지식의 경우 내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영어 단어 중에 ‘기소하다’라는 뜻의 단어가 있는데 indict라고 쓴다. 대학원에 갈 때까지도 이 단어의 발음이 한국어로 썼을 때 대충 ‘인딕트’와 비슷한 발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인다이트’에 더 가까운 발음이었다. 이런 사실은 알 거나 모르거나 그 여부를 거의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깜빡하고 ‘인딕트’라고 발음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안다 모른다라는 선형적인 잣대를 기준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리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특수 상대성 이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반 상대성 이론의 경우 그 공식이 황당하게 복잡하고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의 경우 그 공식이 피타고라스 정리와 간단한 대수식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수치적으로 그 결과를 계산하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다. 훈련만 잘 시킨다면 아마 고등학생들도 풀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관련 서적을 읽는 등 수십 년 동안 띄엄띄엄이나마 특수 상대성 이론과 접촉을 해왔지만 내가 특수 상대성 이론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마도 그 결과가 내가 가진 상식에 너무나 크게 위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에도 어떤 분야의 지식이건 단순한 사전적 혹은 기능적 지식을 넘는 원리에 대한 지식은 어떤 것인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원리에 대한 지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수준의 지식(‘원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수준 낮은 지식(앞에서 말한 사전적 혹은 기능적 지식)의 단순한 조합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그와는 전혀 다르게 이런 다른 수준의 지식은 뇌 안에서도 다른 수준에서 처리될 지도 모른다. 수준 낮은 지식이 단순한 기억과 연산에 의해서 처리된다면 고수준의 지식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저수준의 지식을 한 번 더 숙고할 수 있는 재귀적인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지식에 대한 논의는 수백 년 동안 이루어져 왔지만 지식과 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일반인이 이해할 정도로 정리된 결과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논의는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나중에 뇌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러한 지식의 전달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틀 메시지, 외부 메시지, 내부 메시지
저자는 메시지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누고 있다. 틀 메시지, 외부 메시지, 내부 메시지가 그것인데 틀 메시지는 ‘메시지의 시작과 끝을, 혹은 메시지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외부 메시지는 ‘내부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방법’, 내부 메시지는 ‘발신자가 의도한 의미’를 말한다. 이러한 분류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앞에서 알아본 것처럼 외부 메시지 자체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부 메시지는 외부 메시지의 상위 층위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예로 화재 경보를 살펴보자. 화재 경보가 울린다는 것은 ‘건물 어딘가에 불이 났다’라는 내부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다. 워낙 요란한 소리이기 때문에 메시지의 시작과 끝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으니 틀 메시지도 명확하게 전달된다. 외부 메시지 역시 ‘이런 소리는 건물 어딘가에 불이 났다는 신호입니다’라는 사회적 규약이라고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는 보통 부모나 학교의 교육에 의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외부 메시지와 내부 메시지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메시지의 물리적 형태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다. 화재 경보의 경우 소리가 있거나 없거나 두 가지 상태 중의 하나를 나타내는 역할 밖에는 못한다. 외부 메시지는 메시지의 물리적 형태와 내부 메시지 간의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메시지의 물리적 형태와 내부 메시지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외부 메시지는 내부 메시지와 닮아가고 물리적 형태가 내부 메시지와 유사할수록 외부 메시지는 단순해진다.
다음과 같은 서양 농담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제프라는 사람이 어쩌다 사은 행사에 당첨되어서 스탠드업 코미디 엑스포에 초청을 받았다. 이 사람이 엑스포에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전국에서 온 최고의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차례로 농담을 하며 최고의 실력을 겨루는 코너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시간이 왔고 첫번째 코미디언이 농담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코미디언은 그저 일어나 ‘147번!’이라고 외치고는 자리에 앉았고 다른 코미디언들은 손뼉을 치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코미디언도 마찬가지로 그저 ‘219번!’이라고 외친 후 자리에 앉았고 다른 코미디언들은 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제프는 의아해 하며 옆 자리의 사람에게 ‘왜 농담은 안 하고 번호만 말하는 거죠?’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말하길, ‘이 사람들은 워낙 연륜이 있기 때문에 모든 농담을 다 알거든. 그래서 모든 농담에 번호를 붙였고 실제 농담을 안 들어도 번호만 들으면 무슨 농담인지 다 안다니까.’ 이 얘기를 들은 제프는 ‘나도 한 번 해봐도 될까요?’하고 손을 들고 일어나선 이렇게 외쳤다. ‘198번!’ 이어지는 냉랭한 반응에 창피해진 제프는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 때 뒤쪽 어딘가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려왔다. ‘저 친구 농담을 제대로 하려면 몇 년은 더 공부해야겠어...’
이 농담에 등장하는 각 농담의 물리적인 메시지 형태는 그저 일련번호에 불과하다. 때문에 가능한 내부 메시지마다 그에 대응하는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경우 그만큼 해석은 힘들어지고 외부 메시지에서 어떤 간단한 체계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약간 다른 얘기긴 하지만, 위의 농담에서처럼 모든 농담이 일련 번호로 나열되어 있다면 위의 농담 자체도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제프가 그 농담에 해당하는 번호를 외쳤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의 농담에 담긴 아이러니를 무시하고 무딘 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다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코미디언으로서 연륜이 있다 해도 과연 번호만 듣고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까? 사실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농담이라는 것은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런 내용을 전달하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농담의 내용을 한 순간에 전달할 수 있다 해도 듣는 사람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보통 농담을 얘기할 때의 열쇠는 맨 마지막에 예상을 뒤집는 한 방이다. 마지막 한 방으로 부서뜨리기 위해 블록 하나하나 탑을 쌓아 올리는 과정이 중요하다.
코미디를 포함해 거의 모든 예술 작품들이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다른 일상적인 메시지 전달 방법에 비해 예술에서는 실제 물리적 형태 자체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형태를 직접 접하지 않고 그 작품에 대한 설명만 들었다면 그 작품을 접해봤다고 얘기하기는 힘들다. 이는 예를 들어 과학 이론 같은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과학 이론의 경우 그 이론을 진작 알고 있었다면 그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한 몇 백 페이지짜리 설명서를 읽을 필요는 없다. 물론 설명 자체에 기발한 내용이 들어 있고 흥미진진하다면 설명하는 이론의 이해와는 다른 이유로 그 설명서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렇게 소감을 얘기할 것이다. “야, 설명이 기똥찬데. 정말 예술이야!”
극단적인 예로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존 케이지의 작품 하나를 살펴보자. 아마 클래식 음악 중에서 내가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하나 있다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곡일 것이다. 곡이 4분 33초간의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냥 피아노 앞에 4분 33초 동안 앉아 있으면 된다. 아무 음악적 소질이 없는 나조차 이 곡을 심지어 첼로 곡으로 편곡할 수까지 있는데, 그냥 피아노 대신에 첼로 앞에 4분 33초 동안 앉아 있으면 된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을 살펴보면 ‘행성들’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음악가들이 ‘1분간의 침묵’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가 ‘4분 33초’의 저작권 침해로 고소를 당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정말 웃지 못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런 개념은 여러 예술 분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인상 깊게 기억나는 것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패션쇼’라는 영화에 나오는 옷이 없는 패션쇼인데 화면을 둥둥 떠다니며 모델들의 중요한 부위를 가리던 빨간 하트들 때문에 더 인상이 깊었던 것 같다.
아무튼 케이지의 곡은 정보의 측면에서 보자면 ‘4분 33초간의 침묵’이라는 간단한 말로 완벽하게 표현된다. 컴퓨터의 측면에서 보면 넉넉잡아도 30바이트도 안 되는 양의 정보이다. 보통 비슷한 길이의 곡을 컴퓨터 용 MP3 파일로 만들면 5메가 정도의 크기가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하며 몇 십 메가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가 듣기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그런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주장에 따르면 5메가짜리 파일에는 그 작품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일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이지의 곡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정보양은 일반적인 다른 곡들에 비해 10만분의 1 내지 100만분의 1 정도의 정보 밖에는 안 된다.
하지만 ‘4분 33초간의 침묵’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케이지의 음악을 들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만약 4분 33초간의 시간을 들일 필요 없이 이런 30바이트만의 정보로서 궁극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이를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이 경우 작품에 담긴 내부 메시지에 대한 해석은 지나치게 많은 외부 메시지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외부 메시지는 ‘미술사 상의 의미’라던가 ‘개인적 실험과 감성’이라던가 ‘매체의 성격에 대한 탐구’라던가 하는 복잡한 내용이 다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케이지의 곡의 경우에는 틀 메시지조차 복잡한 메시지가 필요하다. 곡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요란한 동작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곡이 끝나면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든가 하는 의식이 필요하게 된다.
특정 예술 작품의 경우 외부 메시지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는 그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외부 메시지가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여부. 두 번째로는 외부 메시지가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로스코의 작품을 보며 말초적인 희열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이 경우 그런 사람들은 로스코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외부 메시지가 별로 필요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이 더 가치가 있다고 얘기할 것이다. 반면 어떤 추상 미술 작품을 보고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이 작품의 진정한 감상을 위해서는 이런 이런 시대적 배경과 바르뜨의 이런 이런 비평과 기타 수십권의 책을 읽어야 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작품이 외부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런 외부 메시지의 필요가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더 높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 외부 메시지의 역할을 최소로 줄인다면 예술 작품의 내부 메시지는 예술 작품의 물리적 형태와 거의 동일하게 된다. 즉 예술 작품에 대한 경험 자체가 예술 작품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작업과 동일해지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예술 작품의 해석이라는 작업은 무의미한 작업이 된다.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본다면, 해석이라는 작업이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지만,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과는 별도의 작업으로서 예술사라든가 미학 비평 등의 작업은 예술과는 별도의 분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전 글에서 살펴봤듯이 메시지의 전달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중 어디에 내부 메시지가 존재하는지는 명확하게 말하기 힘들다. 어쩌면 내부 메시지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부 메시지란 단지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하고 한 계층의 메시지는 그 아래 계층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내부 메시지이지만 그 위 계층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그저 전달의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의미란 이전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양파와 같은 것이 될 것이고 메시지의 의미란 이런 양파껍질들 전체의 합으로 정의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틀메시지/내부 메시지/외부 메시지가 얼마나 유용한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떤 메시지가 내부 메시지와 외부 메시지로 명확히 나뉘지는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어쨌든 저자의 논지 전개를 따라가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내부 메시지와 외부 메시지가 충돌을 일으키고 서로 섞이는 과정도 일종의 재귀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수론을 통해서 어떻게 풀어져 나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상국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8, 2015년 8월, 이상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