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음은 물이나 산 같은 데만 있는 건 아니다. 웅장한 성당이나 그윽한
사찰에만 자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도 있고 사회나 국가에도 있으며 생각이나 지식, 기술은 물론 인생이나 예술, 문명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노인의 패인 미소에, 아이의 해맑음에, 도축을 앞둔 소의 눈망울에도 깃든다. 여행 중 마주치는 풍경에, 일상서 접하는 인공적 경관에도 깊음은 스며들어 있다. 어쩌면 우리
삶을 구성하고, 삶터에서 마주하는 것들 대부분에 깊음이 배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들이 깊음을 잘 보아내는 건 아니다. 말이 깊거나
속이 깊으면 또 학식이 깊거나 조예가 깊으면 분명 좋은 일임에도, 깊이를 포착하는 일은 언제부턴가 일상서
접하기 힘든 바가 되었다. 왜일까. 깊음이 이익의 원천이나
즐거움의 터전 노릇을 못하기 때문이다. 깊음이 이익을 안겨주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취할 것이요, 깊음이 재미를 유발하면 가만 놔둬도 애써 찾을 것이다. 좋다한들
이익도 되지 않고 재미도 없으니 깊음은 없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음이다.
개인 차원서만 그러한 게 아니다. 작금의 세상 풍조는 깊음을 연신
밀어내고 있다. 경쟁, 성과, 효율 등의 행세는 깊음이 깃들 시간을 허락지 않는다. 깊음을 갖춰갈
기회가 여간해선 주어지지 않는다. 미래를 내다보려 하지 않고 현실만을 중시하며, 근본의 치유보다는 당장의 통증 완화를 지향한다. 진지함은 ‘갑분싸’를 유발할 뿐 좌중을 깊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진중한 생각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만큼 선호되지 않는다. 여운 깊은
미소보다는 휘발성 강한 웃음이 각광받는다. 한마디로 깊음은 우리 사회서 먹힐 수 있는 ‘스펙’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깊음을 갖추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제법 든다. 깊음이 이래저래 우리 생활에서 멀어진 저간의 사정이다.
그런데 깊음을 이렇게 멀리해도 별 문제 없는 것일까. 인류의 선한
진보는 삶과 삶터에 자리 잡은 깊음으로부터 추동되었다. 개인의 삶부터 국가사회의 존속에 이르기까지 깊음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이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되는 바가 아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깊음의 역능은 차고 넘치게 입증됐기에 그렇다. 깊음은
문명의 덕(德)이었다. 그럼에도 깊음은 우리 사회서
꾸준히 축출되고 있다. 누군가가 그것을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밀어내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이리 오랜 세월동안 정치인의 막말이 또 언론의 부추김이 그들의 생존 기반이 되고 영향력 강화의
원천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기업을 좌우하는 일 따위도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