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중국의 정신세계는 매우 안정적인 구조를 지닌다. 근대 이래로 중국은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하면서 안정적인 정신 구조가 점차 붕궤되어 갔으며, 중화 대지의 사상계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화국 성립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합당한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도 결국 한 명의 서양인이며, 그의 사상에 서양의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점은 외면할 필요도, 부인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물론 외래의 사상——예를 들면 불교——도 중국에서 완전하게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며, 나아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불교는 비록 탈속의 학설이지만, 또한 홍진세상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여 경배하도록 할 수 있으니, 나아가서는 조정(朝廷)에 거하고 물러나서는 산천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다.
공화국의 근본 학술로써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통 중국에서 불교가 차지했던 것과 같이 굳건한 지위를 확립하지는 못하였다. 중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학설은 여전히 조정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조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일정 정도 산천의 광활한 세상으로부터 점차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발전이 경제와 사회구조의 급속한 변화와 짝을 이루지 못했다. 둘째로 마르크스 학설은 본질적으로 비판과 혁명을 추구하는 학설인데, 구체적인 국가 통치에서 주로 요구되는 것은 사회 질서와 인심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첫 번째 모순을 강조하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두 번째 모순이야말로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여 현대 중국의 사상적 기초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이 어떻게 질서가 건전하고, 민심을 붙잡을 수 있는 정치와 사회구조를 건립할 것인가? 이것은 정치가들이 부단히 탐색해온 문제일 뿐 아니라, 중국 사상계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온 문제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든, 현대 신유가[新新儒家]든, 아니면 자유주의자든 간에, 모두 이 문제를 고민하며, 자신의 대답을 내놓으려 한다. 화동사범대학의 쉬지린(许纪霖) 교수는 일종의 개방적 자유주의 입장을 줄곧 견지해왔다. 수십 년간, 쉬지린은 줄곧 이러한 입장에서 근대 이래 중국 사상의 대세 변화를 연구하였고, 오늘날 중국 지식계의 형세에 주목하면서, 중국 발전의 문명적 방향을 그려낸다. 최근 10년 사이에는 《중국 지식인론[中国知识分子十论]》, 《공공공간으로의 회귀[回归公共空间]》, 《또 하나의 이상주의[另一种理想主义]》, 《계몽의 기사회생[启蒙如何起死回生]》, 《당대 중국의 계몽과 반계몽[当代中国的启蒙与反启蒙]》등 다양한 저작을 출간하였다.(1) 2014년에 출간된 《문명 중국[中国,何以文明]》은 비록 이전 저작들의 중후함에 미치지 못하고 논술 상에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자유주의의 입장에 서서 보다 명확해진 한 가지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중국이 어떻게 해야만 경제역량으로 세계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명역량으로써 세계를 바로 세울 것인가?(2)
《문명 중국[中国,何以文明]》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에는 주로 하나의 판단이 들어 있으며, 한 가지 관점에 대해 서술한다. 하나의 판단은 지금 현재 굴기한 중국이 아직 부강한 중국일 뿐이며, 문명의 중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관점은 진정한 의미에서 굴기란 문명 중국의 성숙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두 번째 부분에서는 주로 어떻게 중국 문명을 재건할 것인가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저자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보편과 특수”의 논쟁을 초월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좁은 의미의 계몽사유에서 벗어나, 윤리적 자유주의의 포용적인 계몽사유를 품을 것을 호소한다. 세 번째 부분은 “문명사회와 정신윤리”라는 제목 하에, 실제로는 현재 중국의 정신생활 가운데 우려되는 여러 가지 부정적 상황들을 주로 분석한다. 논술의 맥락을 놓고 볼 때, 세 번째 부분은 어쩌면 첫머리에 두는 것이 가장 적합할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은 구성은 독자에게 용두사미라는 느낌을 준다.
쉬지린이 보기에 작금의 중국은 “‘질서대란(秩序大亂)’의 시대에 들어섰다. 여기서 ‘난(亂)’은 표면적인 ‘난’이 아니라, 법률질서와 정치질서, 사회질서,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하게는 심령질서의 ‘난’이다. 이 ‘난’은 각종 윤리의 하한선이 계속해서 무너지는 가운데 나타난다.”(3) 쉬지린은 이처럼 혼란한 사회질서의 배후에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시민정치학”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정치학은 유아론(唯我論)적 개인주의와 끝없는 물욕주의를 신봉하며, 끊임없는 욕망의 만족과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한다.(4) 최악은 이러한 시민정치학이 “권귀(權貴)자본주의 노선”(5)의 발전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쉬지린은 개혁개방 이전의 공화국 이데올로기를 유토피아 사회주의라고 부르며, 개혁개방 이후의 이데올로기는 세속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세속사회주의로 돌아선 이후, 80년대 초에 신(新)계몽의식이 나타난다. 90년대 들어 새롭게 각성한 계몽의식은 각종 사상의 굴기와 도전에 직면하며, 그 속에는 다원적 현대성과 포스트모더니즘, 고전주의가 포함되며, 그리하여 21세기에 사상적 “신(新) 전국시대”로 진입한다.”(6)
쉬지린은 오늘날 중국사회의 아노미 현상, 현실질서와 심령질서 혼란의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계몽사상의 몰락, 또는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의 몰락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당대의 정치적 자유주의 경향과는 달리, 쉬지린은 고전적인 윤리적 자유주의를 보다 더 지지한다. 바꿔 말하면 그는 롤스가 아니라, 칸트와 밀의 노선 쪽으로 기울어 있다. 자유주의자로서 쉬지린은 분명히 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을 받들고, 개인이 박탈할 수 없는 권리와 도덕적 자주성을 지니는 것이 사회질서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쉬지린은 당대의 자유주의가 “공공영역과 공공정의 문제”에만 주목하여, 가치의 문제를 완전히 개인의 신념과 자주적 선택의 문제로 돌리고, 동시에 이로부터 “가치와 선으로 공공영역을 몰아내고, 순수한 개인의 일로 돌아간다”(7)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경우 이러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재조(在朝) 자유주의”(8)라 이름 붙이고, 그로써 당대에 이러한 판본의 자유주의가 지니는 지배적 지위를 묘사한다.
저우바오송(周保松)은 로크에서 밀, 다시 롤스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의 사유가 줄곧 진보하고 개선되어 왔다고 여긴다.(9) 이와 반대로 쉬지린은 자유주의의 이러한 발전 과정을 일종의 퇴보, 실패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는 칸트와 밀의 윤리적 자유주의로 되돌아갈 것을 제창한다. 체제화된 정치적 자유주의와 비교하여, 쉬지린은 이러한 윤리적 자유주의를 “재야(在野)”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일종의 “포괄적 자유주의“로써, 이러한 판본의 자유주의는 공공정의 문제에만 주목하여 가치의 문제를 홀시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도덕과 이성의 매력으로 뭇 사람들을 끌어당기며, 경쟁적인 방식으로 지식과 문화의 영도권을 쟁취하고자 한다.”(10)
쉬지린은 윤리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자유주의에 비해 이론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길 뿐 아니라, 현실적인 층위에서도 그것이 당대 중국의 정신위기 문제에 더욱 부합한다고 본다. 당대 중국의 냉소주의와 물욕주의, 허무주의의 성행과, 심령질서의 위기는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쉬지린은 정치적 자유주의가 이러한 심령위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적으로 무력하며, 윤리적 자유주의가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갖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쉬지린은 중국의 자유주의가 서구 자유주의의 발자국을 따라 윤리적 자유주의로부터 정치적 자유주의로 전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그와 반대로 중국의 자유주의는 “포괄적인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고전적 자유주의를 갱신하여, 덕성에서 지식으로, 윤리에서 정치로 나아가는 문화적 영도권을 획득”하는 근본적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11)
비록 자유주의의 입장을 고수하지만, 쉬지린은 여러 가지를 아우를 것도 주장한다. 그는 자유주의가 고전주의를 배척해서는 안되고, 그것과 대화해야 하며, 동시에 당대 공민 공화주의와 공동체주의로부터 사상적 자원을 흡수함으로써, 윤리정신을 포함한 자유주의로 유효하게 통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현대 사회의 물욕주의와 냉소주의, 허무주의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명한다. 또한 이것이 필자가 앞서 쉬지린이 일종의 개방적 자유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교조적 자유주의 입장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까닭이다.
쉬지린이 보기에 자유주의는 현재 중국사회의 정신위기 문제를 해결해줄 길이면서, 중국이 세계에서 진정한 문명의 굴기를 드러낼 수 있는 관건이기도 하다. 중국의 굴기는 국제정세를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의 굴기로 인해 21세기 국제정세는 서양에 의한 통일천하의 국면에서 벗어나,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의 삼분천하로 바뀔 것이다.(12) 물론 쉬지린이 보기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굴기는 부와 힘의 굴기라 할 수 있을 뿐이며, 문명의 굴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와 힘의 굴기를 문명의 굴기로 제고할 수 있을까? 쉬지린의 입장은 여전히 자유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문명에 대한 그의 정의로부터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때때로 쉬지린은 문명을 넓은 의미에서 “일련의 가치관”, “포괄적인 종교 혹은 철학”, “포괄적인 의미의 시스템”으로 정의하며, 그것은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에 관해 실질적인 답안을 제공한다. 어떤 경우 쉬지린은 문명을 현대문명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은 바로 일련의 계몽가치관 및 이에 대응하는 제도화를 가리킨다.”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그는 문명을 바로 엄복이 말한 “자유를 체(體)로 하고, 민주를 용(用)으로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이로부터 출발하여 무엇이 문명적 삶인지 서술한다. “자유도 좋고, 민주도 좋고, 모두 일종의 문명이며, 하나의 현대적 가치관이다. 자유와 민주는 인류의 삶에서 가장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이고, 대체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며, 이것은 자유와 민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때에만 인류가 상대적으로 존엄하게 살 수 있고, 비교적 인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13) 이를 바탕으로 쉬지린은 문명의 보편성을 설명한다. 그는 “여러 가지 특수한 문명들이 공유하는 부분”이자,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기본가치”가 보편적 문명을 구성한다고 본다. 비록 문명은 보편적이지만, 또한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화하고 끊임없이 재구성될 수 있다. 쉬지린은 중국이 굴기하는 과정에서 “문명의 보편적인 하한선에 도전”할 수 없으며, “보편적 문명과 대화”를 전개하면서 “보편적 문명의 내용을 확장”해야 하고,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문명으로 세계를 인도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14)
문명과 보편적 문명에 관한 쉬지린의 논조는 중국이 서양의 자유민주 노선을 통해서만 진정한 문명의 굴기를 이룰 수 있다고 단순히 주장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쉽다. 하지만 쉬지린은 어떤 경우 서양이 만들어낸 불평등 질서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른바 “중국의 시간”이 온다는 것이 서양 “일신교 세계의 역사 시간을 바꾸어, 세계 전체가 다시는 불평등한 금융과 무역, 권력의 계급 질서 아래에서 생존을 이어나가지 않게 하고, 다신교의 문명 가운데서 평등한 협력과 공존을 모색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쉬지린은 분명하게 유가(儒家)문명이 “다신교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에 “중요한 동방의 지혜”로써 공헌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질서는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차이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 사이에서 화해의 길을 모색하며, 그것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기초로 하여 상호 융합하고 상호 보완하여,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구성한다.”(15) 이 점에서 볼 때 쉬지린은 비록 시종일관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 평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를 견지하지만, 동시에 5·4이래의 계몽정신과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전통 유가정신을 융합하고자 한다.
쉬지린이 보기에 중국의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과 중국 문명의 굴기는 단순히 중국이 보편적 문명의 조류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중국의 지혜로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시간이다.”(16) 이와 동시에 쉬지린은 중국의 지혜로 천하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에 자신감을 보인다. “중국의 천하 지혜로 미래 세계의 다원적 문명 질서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17) 그러나 쉬지린의 개방적 태도에서 그의 최종적인 입장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일종의 종합이며, 타협이다. 중국의 전통 속에서 천하주의와 현대사상 속의 보편문명을 종합한다. 이러한 종합을 통해 중국은 “한편으로 세계의 보편문명에 녹아 들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문명 자신의 주체성을 보존한다. 한편으로 보편적 문화를 중국적 특수성으로 전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특수성을 보편적 문명의 한 부분으로 제고하며, 이리하여 중국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 민족이 될 수 있으며, 중국의 문명이 전세계 인류에게 위대한 공헌을 할 수 있다.”(18) 쉬지린은 그의 이러한 종합적 입장을 “신(新)천하주의”로 개괄한다. 자유주의와 유가전통을 종합한 이러한 사유에 대해 필자는 “유가 자유주의”라는 말로 쉬지린의 입장을 설명하고 싶다. 비록 그가 이러한 명명을 결코 사용한 적이 없고, 어쩌면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필자는 이러한 설명이 “신천하주의”보다 낫고, 보다 정확하게 아름다운 세계 질서에 관한 쉬지린의 구상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쉬지린의 개방적 태도와 관련하여, 그의 자유주의 입장은 자유주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종류의 사상과도 종합과 타협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쉬지린의 이러한 종합 혹은 타협이 어쩌면 자유주의를 만족시키지 못할 수 있으며, 또한 신신유가의 환심을 얻기도 어려울 수 있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중국, 중국인]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3, 2015년 3월, 천지앤홍(陈建洪), 중국 난카이 대학(南开大学) 철학과 교수; 이수현 옮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