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이 참 즐겁다. '광해'를 보고 난 뒤에, 이런 상상력을 왜 정치에서는 볼 수 없냐며 한탄한 적이 있다. 기발한 상상력도 좋지만, 우리의 심상을 자극하는 방식과 내용이 모두 마음에 든다고 해야겠다. 이런 한국 영화 덕분에, 우리네 일상은 이미 오래 전에 '헐리우드 키드'의 아련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최근 영화 '관상'도 좋았다. 이젠 헐리우드 영화는 못보겠다는 생각. 헐리우드에서 수입한 '대작'들도 가려서 봐야지하는 생각. 아니 적어도 매력적인 플롯이 없는 영화는 안 본다는 기준 정도는 생긴 것이다.  

 

'관상'으로 더욱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배역들이 감독의 의도와 한치도 다르지않는 연기를 하는 모습, '삼국지'와 같은 중국의 대형 영화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부드러운 화면과 아름다운 색감, 그리고 이런 섬세한 터치가 담아내는 삶의 모습, 모두 좋다.

 

그래. 이것이 우리의 이전 삶이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섬세한 분장 하나하나까지 이미 익숙한 마음 속 옛날 어른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낸다. 송강호씨의 수염 분장에서 오래전에 보았던 선비화가인 윤두서의 자화상이 스쳐 지나간다. 바로 이것이 벤허를 보며 설레이고, 대부를 보며 동떨어진 세상에서 삶의 단초를 어렵게 찾았던, 우리 아버지들이 꿈꾸던 한국 영화일거다.

 

2.

그런데 이 영화의 말미에 가슴 아픈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본다. 수양대군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필요한 살육을 저지르는 장면이다. 개인적 야망을 추구하던 폭군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건 허구 중에서 더욱 허구일 거다. 수많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혁명을 통해 정권을 쟁취한 이가 그렇게 쉽게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바보가 될까. 조선시대의 정치권력은 더더욱 일반 사람들의 눈으로 감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서양 고전에 등장하는 작은 도시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폭력의 전시적 행위를 수양대군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같다. 어쨋든 왕은 곧 하늘이라고 말하던 시대가 아니던가.  

 

사실 지금도 정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비도덕적이거나 지저분해 보일 수는 있지만, 그렇게 쉽지 않다. 삶의 왜곡과 인간의 흠결이 빚어내는 정치에서도, 정치권력은 그렇게 한 사람의 '기분'으로 작은 사안조차 처리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더욱 그럴 것이고, 유교의 나라에서 왕이 되려던 '수양대군'도 그러했을 것이다. '김종서'를 죽이고, 곧 조카인 임금을 유배보내 죽음으로 내몰 사람이다.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없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작가와 감독의 생각이 스며든 것일 터이다. '권력은 저리도 냉혹하다.'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저 모양이다.' 자의적 지배, 무분별한 행동, 폭군에 대한 여러 상상력이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 권력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수 없다. 너무나 복잡하게 운행해서, 우리의 일상에서는 소주 한잔으로 해소될 일도 정치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권력, 또는 권력자를 그런 상상에 '가두는 것' 은 어쩌면 너무나 도덕적이고, 어쩌면 너무나 조야한 생각일 수 있다. 오히려 세종대왕도, 링컨도, 피해갈 수 없는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이 우리가 당면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  

 

3.

관상을 보던 사람은 남도로 내려가 '운명'을 성찰하고, 수양대군은 '운명'따윈 짓누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보면, 모두가 행복할까. 도덕적 자부심에 전자는 뿌듯하고, 후자는 알 수 없는 부도덕의 명예를 짊어지면 그뿐인가. 아니면 자기가 해를 입힌 관상보는 사람을 다시 찾아가서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한명회의 행동이 치졸하다며 무릎치는 우리가 대견한가.

 

그러기에 잘 만든 영화에서, 수양대군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아쉽다. 우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잠시 먹먹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기처럼 등장한 관상가의 초연한 모습에 통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 알아두자. 미국인들이 왜 아직도 영국 왕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왜 아직도 케네디 가문의 자손들을 무슨 왕족같이 생각하며 사는지를. 왜 일본인들이 케네디 가문의 신임 일본대사에게 왜 열광하는지. 그리고 왜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나라도 공화국과 제국의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는지. 

 

어쩌면 우리 청중도 관상가가 아니라 수양대군에게 감동했을 수가 있다. 소크라테스보다 트라시마쿠스에게 감동하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듯이, 어쩌면 우리 대중들은 486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권력지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권력이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4.

완성도 높은 한국 영화가 더욱 감사한 시절이다. '광해'도 감사하고, '관상'도 감사하다. 우리는 아마도 '시인의 나라'인가보다. 우리의 상상력을 누가 따를 수 있을까. 이런 나라를 족쇄채운 불필요한 것들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OECD라고 나팔부는 선진국들 중 6번째로 빈곤층이 많은 나라. 시적 전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볼품없는 정치, 이런 정치판에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봄날은 간다'라는 백설희씨의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간다." 얄궂은 시절에 김남주 시인이 꿈꾸던 '자유'가 실없는 기약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정치하든 어려운 삶을 살피는 정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존하지만 행복한 세상, 이것이 우리가 원한 것 아닌가. 그것이 광해를 구하다 죽은 여종의 눈물이 아니던가. 이런 시적 감상도 없는 정치에 마음 상한다. 아니 억장이 무너진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4, 2013년 12월, 파랑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