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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5 09:56

[이병주칼럼] 실패한 방주: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글쓴이 : 아포리아

'실패한 방주, 노아의 방주인가 인간의 방주인가?' :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1. 지각 관람한 설국열차 – 꼬리 칸에 탑승한 관객

중3 아들과 영화 ‘설국열차’를 지각 관람했다. 요즘 상업적 성공을 이룬 영화들의 어설픔에 많이 식상한 나는 버틸 만큼 최대한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영화 관객이 800만 명이 넘고 주변 사람들마다 밥 먹을 때마다 이 영화평을 하곤 하니, 어지간한 나도 어쩔 수 없이 영화표 두 장을 사고 ‘설국열차’의 꼬리칸 관객으로 탑승하게 되었다.

영화는 생각보다 좋았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꽤 괜찮은 영화였다. 불과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에서 이처럼 다양하게 폭넓게 인간과 세계의 문제, 계층적 갈등과 정치적 대립의 문제, 폭력과 희생의 문제, 절대를 향한 인간의 의지와 그 한계들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영화는 나름 멋지게 이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다의적(多義的)으로 다루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감히 대중성과 철학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고전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 영화를 본 직후, 만15세를 갓 넘긴 아들 녀석과 함께 이 영화의 내용을 두고 토론한 인간과 세계, 정치와 종교에 관한 대화를 영화평으로 정리해 본다.

2. 영화 해석의 다양성과 자유(自由)를 주는 미덕

잘 만든 영화는 우리에게 단순한 답을 주지 않고 다양한 질문을 준다. 영화 '설국열차'의 가장 좋은 미덕은 인간 세계의 축소판인 설국열차에 인간과 세계의 모든 문제를 다 집어넣고 나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각자 자기 나름대로 다양한 답과 사색을 가질 수 있는 자유(自由)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영화 ‘설국열차’는 꼬리 칸(tail section)의 하류층 사람들과 지배자인 앞쪽 엔진 칸의 대립과 투쟁을 핵심 구도로 삼고, 반란군인 꼬리 칸 사람들과 그 지도자가 101개의 챠량을 거쳐서 가장 앞쪽 엔진 칸까지 전진하는 과정을 기본 스토리 라인으로 하고 있다. 인간 생존의 한계 선상에 놓인 꼬리 칸 사람들의 분노와 울분, 앞쪽 칸(front section) 상류층의 편안한 생활조건, 꼬리 칸 사람들의 전진과 그에 대한 진압군의 방어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적 대립을 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인간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다루고 있는 비종교적, 사회적 영화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화의 소재와 표현에 있어서,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方舟)’에서 ‘설국열차(Snow piercer)’의 기본모델을 가져오고 있다. 또한 설국열차를 움직이고 열차 탑승자-인류 생존자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거룩한 영구엔진(eternal engine)에 대한 찬양은 기독교의 예배와 찬양을 흉내 내고 있으며, 설국열차의 제작자이자 관리자인 윌포드(Wilford)는 열차 내 세상의 모든 일을 전지적 관점에서 관장하려고 하는 점에서 절대자 신(神)의 모방을 하고 있고, 꼬리 칸의 정신적 지도자 길리엄(Gilliam)이 인간 살육을 막기 위하여 자기의 몸을 절단하여 타인의 양식으로 내어놓은 이야기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영화의 주제를 표현하는 거의 모든 장치 속에서 기독교와 성경의 다양한 소재들을 차용하고 있는 점에서, 영화 '설국열차'는 인간에 대한 지식과 신에 대한 지식을 깊이 다루고 있는 종교적 영화로 충분히 읽혀질 수 있다.

인간의 일을 다루면서도 종교적 장치들을 대거 차용하는 점, 비종교적 영화이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영화로 나타나는 점은, 이 영화가 다양한 관객들에게 다의적, 중의적으로 해석, 수용될 수 있는 미덕으로 나타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노력을 중시하는 무신론자와 비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 중 지배층 사람들이 꼬리 칸 사람들에 대하여 ‘설국열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미리 예정된 자리(preordained position)를 지켜야 한다는 명제’로 기독교의 예정론(豫定論)을 살짝 비틀어 허구적인 체제 옹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장면 등에서, 이 영화를 적극적인 ‘기독교 비판’ 영화로 공감하면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편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주목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이 영화를 ‘인간의 전반적인 한계를 무시하고, 인간이 신(神)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 인간(Wilford)의 실패’를 다루는 ‘기독교적 영화’로 공감하면서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과 신, 사회적 주제와 종교적 소재를 함께 다루면서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비기독교인의 공감과 기독교인의 공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보수와 진보의 대립 투쟁을 다루면서도 양자 모두에게 공평한 변론의 기회를 주고 어느 한 쪽도 단순히 미화하지 않고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가 가지는 극히 예외적인 탁월한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3. 설국열차 전쟁(戰爭) – 인간(人間)들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 (설국열차의 정치적 해석)

가. 엔진의 지배자 윌포드 (Wilford) - 보수(保守)의 한계

이 영화에서 엔진 칸에 사는 윌포드는 설국열차를 제작한 윌포드 회사의 창립자이고, 설국열차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전지적(全知的) 관점의 절대자로 나타난다. 특히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반란군 지도자인 커티스(Curtis)와 직면한 윌포드가 설명하는 설국열차의 운영원리, 즉 꼬리 칸 사람들의 반란조차 ‘열차 내 생태계와 인구수를 조절하려는’ 윌포드의 정밀한 계획(섭리)에 따른 것이고 영화 시작부터 커티스가 반란에 관한 지침을 전달받은 탄피내 메모지조차 실제로는 윌포드가 써서 보낸 것이라는 대목을 보면, 윌포드는 그야말로 열차 내 좌우 대립을 넘어선 초월적 차원에서, 인간이면서도 신의 역할을 하는 절대자로서 행세한다.

이 영화에서 윌포드의 변론이 보여주는 설득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영화 시작부터 전반부까지 꼬리 칸 사람들에게, 엔진 칸과 그 지배자인 윌포드는, 꼬리 칸 사람들을 생존 조건 이하에 방치한 자, 모든 고통과 악의 원천인 악의 표상으로, 반란군의 심리적 동력인 증오감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윌포드의 지시에 따라 꼬리 칸 사람들의 전진을 막고 폭력적으로 살육하는 진압군의 행동을 통해서 윌포드에 대한 꼬리 칸 사람들의 원한과 적대감은 더해 간다. 그러나 막상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가 최종 목적지인 엔진 칸에 도달하여 윌포드를 제거하고 역성혁명을 완수하려는 시점이 오자, 윌포드는 반란군 지도자인 커티스에 대하여 아무런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커티스에게 인류의 마지막 세상인 설국열차의 새로운 지도자, 자신의 승계자가 되어 달라는 충격적인 제안을 한다. 윌리엄을 제거하고 엔진 칸을 차지하려던 커티스의 역성혁명 이념은 이 순간 전혀 다른 버전(version)으로 실현되지만, 동시에 좌우대립을 뛰어넘는 세계 관리자로서의 높은 경륜을 보여주는 윌포드의 웅변에 지배자에 대한 커티스의 적대감은 물거품처럼 증발되어 그 근거를 상실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언자 요나의 이름을 가진 초능력 소녀 고아성이 그 순간 엔진 칸의 바닥 밑에서 거룩한 엔진의 인간부품으로 참혹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꼬마 Tommy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래서 윌포드의 전지적 지배와 섭리의 비인간성과 잔인성이 폭로(reveal)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화 속의 주인공 커티스와 영화 밖의 주인공인 우리들 모두는 좌우의 다툼을 초월하여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을 관리할 경륜을 가진 지배자/지도자 윌포드의 사상과 비전에 설복되어 넘어갈 위험에 놓이지 않았을까?

우리 역사에서 윌포드와 비슷한 모습의 지배자들은 없었을까?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키고 아리안 우월주의로 유대인을 학살한 극우 파시즘 히틀러의 나치스당의 정식 명칭은 좌우를 망라한 것처럼 보이는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었으며, 나치당의 정치적 행동적 지지기반으로 동원된 계층은 1차대전 패배 후 실업과 가난의 좌절감에 빠진 독일의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층이었다. 좌우를 초월하여 독일의 온 계층을 결집하고 동원하여 독일인의 자존심을 회복시켰던 영웅 히틀러는 설국열차의 자칭 전지적 지도자 윌포드와 같은 종류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전되고 안정된 민주선거 체제에서 보수당과 진보당(또는 민주당)이 각각 그 계층적 이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쟁투하는 것은 오히려 안전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개발과정의 국가이든 발전한 국가이든 보수당 또는 진보당이 자기의 이념적 계층적 한계를 부정하고 민족주의나 국민총화 같은 초월적 구호로 계층 대립을 부정하면서 지나치게 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할 때, 이것은 도리어 인간을 전체를 위한 부품이나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방치하는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영화 '설국열차'는 보여주고 있다.

나.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 (Curtis) - 진보(進步)의 한계

꼬리 칸 반란의 지도자 커티스는 영화 중반부까지 매우 담대하고 상당한 지도력과 자기통제력이 있는 의인(義人), 정의로운 반란군 지도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에서 커티스는 송강호(남궁민수)에게 자신이 원래는 꼬리 칸 초기의 기아 시절에 사람을 살해하고 인육(人肉)을 먹던 일당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자백하는 대목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 즉 그가 단지 순결한 정의파가 아니라 선과 악, 의와 불의를 함께 겪는 한계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 대목은 영화 '설국열차'가 하층민과 상층민의 대립, 꼬리 칸 사람들과 앞쪽 칸 사람들의 계층적, 계급적 대립과 폭력적 쟁투를 다루면서도, ‘가난한 사람들만이 전부 선(善)하고 그 반대쪽은 전부 악(惡)하다’는 기계적, 1차원적 인식의 초등 수준을 벗어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진보든 보수든 혁명가이든 세속인이든,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무시하고 지고지순한 100% 순혈 정의를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주장하고 행동할 때, 그 오만함이 가져다주는 타락과 파국은 매우 절망적이고 파괴적이다. 따라서 자신의 과거와 죄로 인한 부담에 구속되고 제약받는 커티스의 모습은, 오히려 자기의 의로움에 대한 자기만족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만만한 지도자의 모습보다 더 건전하고 안전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의 한계, 즉 이 영화 속 진보진영의 한계는 진보진영의 아젠다(agenda)와 전략전술의 부재(不在)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영화 후반 엔진 칸에서 조우한 윌포드가 커티스를 환영하고 차기 지도자로서 늙은 자신을 승계하여 엔진 칸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커티스는 역성혁명의 목표를 달성함과 동시에 금방 상실한다. 커티스 혁명의 목표는 ‘악한 지배자 윌포드를 제거하고, 엔진 칸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배자 윌포드가 그리 악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reveal하고, 엔진 칸의 권력을 평화적으로 커티스에게 이양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빈약한 반란군의 역성혁명, 진보혁명의 목표는 허공에 증발해 버리고, 설국열차의 현 체제 앙시앙 레짐 (ancien regime)은 그 붕괴의 위기를 가뿐하게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의 이 대목은 인류 역사 전반을 거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진보주의와 혁명 아젠다들의 한계와 체제투항적 결과들을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21세기의 시대적 전개 상황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진보 아젠다의 약점,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압도적 전개 속에서 꼬리 칸 사람들의 객관적 상실감과 주관적 분노는 더욱 강해지지만(occupy movement처럼), 사회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진보주의의 아젠다는 길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다는 점을, 이 영화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설국열차’에서 영화의 주된 동력원인 ‘꼬리 칸 사람들의 반란’이 단지 그 지도자 1인을 엔진 칸으로 보내고 파송된 반란군 지도자 1인이 지배층에 포섭되는 정도로 빈약하고 허무한 비전과 전략전술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것에는 다소의 불만이 생긴다. 근본적으로 윌포드도 망하고 커티스도 해결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커티스 혁명의 비전과 설국열차 개혁 이념이 적어도 보수파 윌포드의 강력한 자기 변명의 절반 정도 수준이라도 충실한 내용을 가지고 커티스가 대등하게 윌포드와 논쟁할 수는 있을 정도로 전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정치가들과 전문가들도 감을 잡지 못하는 21세기 진보진영의 아젠다를, 한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에게 거저 얻어먹기를 원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다. 보수와 진보의 싸움 - 관객에게 판단을 맡긴 영리함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절반의 사람들은, 설국열차 꼬리 칸 사람들의 반란에 자신을 감정이입하면서 이 영화를 보고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 선거 때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한 또 다른 절반의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 길리엄의 한계에 고개를 끄떡이고 보수파 지도자 윌포드의 웅변에 다소 공감하면서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좌우지간(左右之間)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얻고 800만 명,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 절반 정도의 사람은 ‘지금 상황이 살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절반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생각의 사람들이 딱 50% 안팎으로 나눠지고 양 진영이 선거제도를 통하여 몇 년씩 간격으로 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神秘)하고도 절묘(絶妙)한 현상이다. 각 진영이 각자 자기의 당파적 입장과 현실적 이해관계에 충실하면서, 한편 다른 쪽에는 다른 의견을 가진 절반의 반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외감과 존중심을 가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설국열차 속의 현실을 진정한 지옥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가, 노아의 방주(方舟)를 본 따 만든 ‘설국열차’ 101간 차량에 이 세상 인류의 모든 계급 간 갈등과 정치적 대립 및 그로 말미암은 폭력과 싸움을 축소하여 우겨넣어 놓고도, 꼬리 칸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분노를, 엔진 칸의 지배자 윌포드에게는 자신의 경륜을 각각 변론할 기회를 주고, 그에 대한 판단은 극장에 앉아있는 모든 관객의 몫으로 자유롭게 맡겨놓은 것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아주 현명하고도 훌륭한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4. 실패(失敗)한 방주(方舟) – 인간의 방주, 썩어버린 선악과 (설국열차의 기독교적 해석)

가. 노아 방주(方舟)와 윌포드 방주(方舟)의 비교분석

창세기 노아 방주의 스토리 라인과 윌포드 설국열차의 스토리 라인을 비교해 본다. 노아 방주에서 전지적(全知的) 주인공은 하나님(신)이고, 사람을 대표하는 주인공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만들고 방주에 탑승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방주에서 나와 새 세상을 시작하는 다소 수동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영화 '설국열차'의 윌포드 스토리에서 전지적(全知的) 주인공은 윌포드(인간)이고, 하나님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즉 윌포드 방주(설국열차)에서 방주의 주인 윌포드는 노아의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가 거의 모든 장치와 도구를 성경에서 차용하여 따온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노아 방주 스토리에서 세상이 물에 잠긴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의 결과이다. 윌포드 방주 스토리에서 세상이 눈과 얼음에 덮인 것은 기후변화에 대한 해결책으로 C-37을 대기에 살포한 인간 행동의 결과이다. 노아의 방주를 만든 것은 물이 빠질 때까지 인간을 보존하였다가 다시 인간 세상을 재생(再生)하려는 신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절대자 윌포드에게는 설국열차가 곧 관리하고 유지하여야 할 세상의 전부이며, 얼음이 녹은 후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인간세상을 재시작하려는 재생(再生)의 시나리오가 빠져 있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는 죄에 싸인 세상과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난처이자 다시 살아서 세상에 나가기 위한 구원의 방주로 설명된다. 그러나 설국열차라는 방주는 죄에 싸인 세상 그 자체의 축소판으로 끝없는 반란과 학살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심판의 장소이다. 결국 윌포드의 방주인 설국열차는 구원 방주가 아니라 구원이 없는, 심판에 처한 세상 그 자체이고, 이제는 설국열차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그 결과 방주와 세상의 의미가 뒤집어져서, 윌포드 방주(설국열차)에서는 방주가 멸망의 공간으로 바깥세상이 구원의 공간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설국열차의 문이 열리고 송강호의 딸 고아성과 타미가 탈선(脫線)한 설국열차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의 길, 심판 (설국열차의 파괴) 뒤의 새 세상을 만드는 길로 그려져 있다.

이처럼 윌포드의 방주인 설국열차는 노아의 방주를 패러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상 노아의 방주와는 전혀 다른 성격과 운명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노아가 방주를 타고 벗어난 세상 전부가 설국열차-윌포드 방주에 축소판으로 들어있으니, 윌포드의 방주인 설국열차는 괴로움과 무서움과 두려움과 서로 다툼과 미움이 가득한, 유한하고 심판받아야 하는 세상 그 자체이다. 윌포드는 설국열차 안에서 영구엔진을 통하여 사회진화론적 통제와 관리를 통하여 심판받을 세상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하고, 커티스는 그 심판받을 세상의 지배권을 탈취하려고 하지만, 두 사람, 두 노선은 막판에 함께 길을 잃는다. 이 때 얼음에 덮인 열차 밖 세상을 관찰하고 방주(설국열차)의 문을 부수어 방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남궁민수(송강호)야말로 오히려 노아 방주의 ‘노아’에 가깝다.

영화에서 송강호(남궁민수)의 딸(고아성)의 이름은 성경의 선지자인 요나(Jonas)이다. 성경의 요나는 바다 속의 방주(方舟)인 거대한 물고기 뱃속에 3일간 갇혀 있다가 바깥으로 토해져 나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 속의 방주 설국열차의 요나는 태어나서 17년간 열차 속에 갇혀 있다가 문 밖으로 토해져서 바깥세상으로 나간다. 인간의 방주인 설국열차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고, 인간의 방주인 설국열차로부터의 탈출, 요나의 물고기 뱃속으로부터의 탈출이 새로운 구원의 방주라면, 영화 '설국열차'의 끝, 요나와 타미의 새로운 발걸음으로부터 ‘노아’ 이후의 새 세상, 무지개가 하늘에 걸려있는 새 역사가 새로 시작될 것이다.

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果實) – 전능자(全能者)가 되고픈 인간의 실패

영화 '설국열차'에서 윌포드의 모습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자신을 유지하고 책임지려는 인간의 최고치를 보여준다. 윌포드는 좌우(左右) 대립에서 좌나 우의 한쪽 진영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좌와 우의 전체를 모두 총괄하고 한 수준 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려는 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 윌포드는 인간 문명의 생존을 유지할 기계(영구엔진)를 만들고 그 엔진의 계속 구동을 보장하며, 생존 인류의 생태계적 지속을 유지, 관리하는 절대적 사명을 책임진다. 윌포드는 제한된 열차 안에서 식량과 모든 재화의 생산을 관리하며, 앞쪽 칸 (front section) 사람들에게는 풍족한 생활과 관리자로서의 지위를 제공하고, 인간 생태계의 보존을 위하여 꼬리칸 (tail section) 사람들의 최소 생존을 유지케 하며, 수시로 전쟁과 반란을 발발시켜 꼬리 칸 인구와 앞쪽 칸 사람 양쪽 모두의 숫자를 조절한다. 윌포드는 꼬리 칸 지도자 길리엄과 공존 협력의 관계를 가지며, 너그럽게도 원수인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여,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설국열차 권력의 계승자로 지명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의 능력은, 설국열차 안에서 모든 선과 악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다스리는 윌포드에게서 최고치로 나타난다. 영화 '설국열차'의 윌포드는 니체가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린 초인(超人)에 가깝다.

그러나 영화 '설국열차'는 전능자 윌포드와 거룩한 영구엔진이 그 기계의 인간부품으로 살아있는 어린아이들을 가두어놓고 사용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폭로(reveal)함으로써 인간의 힘으로 이루는 기술과 문명의 화려함 뒤에 놓인 잔인성과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윌포드가 역설하는 사회진화론적 인간생태계 보전을 위한 인구 조절, 즉 주기적인 살육(殺戮) 정책은, 우리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다시 정신을 차려 생각해 보면, 신본주의적 견지에서나 인본주의적인 견지에서나 결코 용납하거나 인정할 수 없는 악마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영화 '설국열차'에서 선악을 관장하고 세계를 섭리하면서 전능자의 역할을 추구하는 인간 윌포드의 길은 그 한계와 죄성이 드러나면서 설국열차의 탈선과 함께 실패하고, 요나와 타미, 연약한 두 명의 아이들에게 인류의 미래가 달리게 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것’ 즉 인간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는 매우 심오하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있거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자리에 서려고 하고 자기가 선악을 판단할 자리에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행동하는 모든 사람은 신의 미움과 심판의 대상으로 된다. 수백 년 전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한 21세기 인류의 정보화 기술문명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보듯 21세기 현대의 인류는 인간문명의 완전함과 영원성을 주장할 자신감을 거의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 끝없이 달려온 인간역사의 한계점에 대한 공감대를 계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화려하고 거룩한 영구엔진을 단 설국열차의 탈선과 실패를 그린 영화 '설국열차'는 기독교의 인간론과 깊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5. 결 론

서두에서 얘기한 것처럼 내가 이 영화를 지각 관람한 까닭은, 최근 대량 관중을 동원하여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이룬 영화 중 일부에서 느낀 ‘배신감’과 ‘실망감’ 때문이다. ‘배신감’이라 함은, 어설픈 영화를 상업적으로 잘 포장하고 시장에 쫙 풀어서 팔아먹는 대량 마케팅 전략에 사기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이고, ‘실망감’이라 함은 어설픈 영화에 속아서 함께 몰려든 1천만 동료 영화팬들의 선구안(選球眼)을 믿지 못하게 된 불신감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나의 배신감과 실망감을 시원하게 씻어준 좋은 영화였다. 영화 ‘설국열차’는 상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 근원적 질문들을 극히 진지하게 전개함으로써, 최근 너무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듯싶은 작가주의적 예술영화들을 뛰어넘는 고전적 작품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나의 배신감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영어로 된 영화이자 복잡하고 다면적인 문명비판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무려 800만 이상의 한국 관객이 열광적으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영화관객의 진지함과 수준에 대한 충분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영화를 만든 제작자와 이 영화를 감상한 한국 관객 모두에게 찬사를 보낸다. 나아가 영화 ‘설국열차’의 내러티브와 문제의식과 고민이 원작인 만화 ‘설국열차’보다 더욱 폭넓고 깊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세상, 그리고 심판과 구원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 영화를 만들어낸 봉준호 감독에게도 큰 박수를 보낸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병주 칼럼]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이병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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