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잠자기 전 할머니께서는 종종 옛날 이야기를 해주셨다. 국민학교 때, 방학 숙제를 다 마쳤었는데 해방이 되어버려서 숙제 검사를 못 받게 되어서 슬펐다는 이야기, 6.25 사변 때 피난을 가는 동안 감자를 하도 캐먹어서 감자가 지긋지긋해졌다는 이야기, 중공군이 집을 점령했을 때 할머니의 오빠가 몰래 쌀을 훔쳐왔던 이야기까지, 매일 밤 들려주시던 이야기들에서 비록 일제시대를 살지 않았고,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현재는 과거 덕분에 존재한다는 것과 역사에 대해 어렴풋이 나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자라면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고, 이렇게 저렇게 들어온 이야기들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어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웬만한 대학에 들어가고, 또 노력해서 웬만한 직장에 들어가고,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관심사였기에, 들려오는 이야기도, 내가 하는 이야기도 모두 비슷했고,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크게 놀랄 일이 없었다. 그렇게 무난하고 안전하게 살던 나의 세계에 들려온 조금 다른 이야기에 대해서 나누어 보려고 한다.
2.
2011년 12월, 나는 동료 변호사와 함께 칼 바람이 매섭게 불던 서울을 떠나 태국으로 떠났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뜨거운 태양과 야자수 나무를 뒤로 한 채, 공항 한 켠의 송환대기실로 이동을 했다. 국제공항마다 설치되어 있는 이 송환대기실이라는 곳은 여권이나 비자 문제 때문에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임시로 기거하며 원래 왔던 곳으로 송환되기까지 대기하는 곳이다. 보통은 일주일 내로 문제가 해결되어 송환이 되지만, 여권이나 비자 발급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그 이상 머무르게 되는 경우가 있고, 우리가 만나러 갔던 이브라임은 기록적으로 송환대기실에만 10개월 가량을 갇혀있게 된 경우였다. 한국에서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를 돕고 싶어 온 것이라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이내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고 그 동안 일어났던 일을 덤덤히 풀어내기 시작하였다.
이브라임은 에티오피아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오로모족에 속해 있는데, 이브라임의 아버지는 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분이었다. 이브라임이 어렸을 적, 아버지는 집을 떠나셨는데, 가족들은 아버지가 오로모족의 독립을 목표로 세워진 무장정치단체인 오로모독립전선 (Oromo Liberation Front, OLF)에 가입했다는 소식만을 전해 들었다. 그 이후로 이브라임의 인생은 한마디로 매우 꼬였다. 이브라임은 어린 나이에도 OLF의 비밀 요원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군인들의 감시를 받았고, 공립학교에서는 반역자의 자식을 가르칠 수 없다며 쫓겨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브라임의 불행을 더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부군은 장례식장에 난입하여 “반란군의 죽음을 애도하다니 너는 굉장히 위험한 사상을 가졌다.”라고 하면서 이브라임을 그 길로 군인 캠프로 끌고가 고문을 하였다. 모진 고문 끝에 이브라임은 앞으로 마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모두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을 당한 뒤 겨우 풀려나게 된다.
이브라임은 마을의 지긋지긋한 감시와 차별 때문에 숨을 죽이고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불행은 어김없이 이브라임을 찾아왔다. 마을에서 3명의 군인들이 살해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을 계기로 이브라임은 또 다시 군인 캠프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고문으로 죽든지, 도망치다 죽든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생각하고 이브라임은 빗발치는 총알을 간신히 피해 캠프에서 도주를 하여 케냐로 도망을 간다. 하지만 케냐 정부와 에티오피아 정부의 긴밀한 관계는 이브라임을 늘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는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아프리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브라임은 브로커를 통해 마련한 표로 한국으로 갈 수 있었고, 인천 공항에서 난민신청을 하게 된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면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한다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였으나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난민신청은 거부가 되었지만 여권 문제 때문에 바로 송환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이브라임은 약 두 달 반 가량을 인천 공항의 송환대기실에 갇히게 되었다. 제대로 된 잠자리 하나 없이 치킨 버거로 삼시 세 끼를 때우며,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그 땅으로 언제 송환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지내는 것은 큰 고욕이었지만, 그보다 더 이브라임을 괴롭게 한 것은 한국인들의 불신과 멸시였다. “이 거짓말쟁이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이브라임에게 종종 외치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는지 덤덤히 이야기를 하던 이브라임의 목소리가 격앙되기도 하였다.
3.
두 달 반이 지나도 이브라임의 여권 문제에 아무 진전이 없자 한국 정부는 결국 이브라임을 에티오피아로 강제송환을 감행하였고 이브라임은 힘없이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경유국인 태국에서 여권 문제 때문에 또 다시 구금이 되고, 다섯 달 이상을 구금이 되어 지내던 중, 나와 동료가 이 소식을 듣고 이브라임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와 계속되는 거절에 상처를 입은 이브라임은 결국 이야기 끝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요. 나에겐 희망이 없어요.”
그의 큰 눈망울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며, 그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휴지를 건네주는 일뿐 이었다. 사실 그에게 휴지를 건네주기 전까지 나는 그의 이야기를 반신반의로 듣고 있었다. 나는 본래 사람을 잘 신뢰하는 편도 아닌데다가, 이웃을 향한 긍휼함으로 무장된 그런 타입의 사람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난민지원을 하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내 인생에서 상상할 수도 없었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지독한 불행을 겪었다는 사람들과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가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브라임을 괴롭게 했던 한국 사람들의 심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한국 사람들은 피부색이 어두운 외국인들이 무조건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고 이를 위해 어떤 거짓말이라도 일삼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TV를 켜면 들려오는 이야기는 피부색이 어두운 외국인들이 일을 하러 혹은 결혼을 하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한국에 와서 너무 행복해졌다는 식의 이야기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피부색이 어두운 외국인들을 보면, ‘아, 한국에 돈 때문에 왔구나’ 정도의 생각을 하게 된다. 거기에 가끔씩 들려오는 외국인들의 범죄 소식은 이들이 경제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국민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그래서 두렵기까지 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브라임이 백인이었다면 난 그의 이야기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브라임이 겪은 사건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평범한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이라든지, 인종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든지, 정치적으로 다른 상황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더 근본적으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지독하게 불행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가 싫었다. 게다가 불행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더 불행해지는 그런 이야기라니, 나의 무난하고 안전했던 세계에서 듣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이야기였던 것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고난을 겪는 것을 많이 봤지만 두 시간 후면 주인공은 행복하게 웃음을 짓고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이브라임의 이야기는 한 시간 진행된 영화를 보는 것 마냥 갈등이 얽히고 설킨 상태였고, 이후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은 보통 정의를 수호한다든지, 가족을 지킨다든지, 어느 정도 정당한 이유를 위해 희생과 위험을 감수했었지만 이브라임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사실 아무런 이유 없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부분이 기존에 들어 왔던 이야기와의 가장 큰 차이였을 것이고,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인생이란 노력한대로 되는 것 아니었던 것인가? 무의식 중에 내 인생을 받혀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생각하고 있던 인과율이라는 것이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 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내 속을 아는 지 모르는지 이브라임은 눈물을 닦고는 너무나도 고맙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멀리까지 와줘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맙다고 한다. 앞으로 구금상태에서 하루 속히 풀려나고 난민신청절차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돕겠다는 말에는 또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땡큐를 남발한다.
이브라임의 얼굴에 전에 없던 옅은 미소를 바라보며 또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 이브라임의 불행이 그에게 원인이 없던 만큼, 이브라임을 돕기 위한 우리의 등장 또한 그에게 원인은 없었다. 10달 간 갇혀 있던 이브라임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우리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리가 이브라임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야 말로 우연 혹은 기적이라고 할까. 사실 우리도 경제적 사정과 스케줄 등을 고려했을 때 이브라임 한 명을 만나러 태국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겼고, 이에 비행기표와 스케줄 등의 여건이 허락되어 우연치 않게 그 먼 곳까지 그를 만나러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4.
결국 이브라임이 그 날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막연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삶이란 인과율만이 지배하는 예측 가능하고,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라는 것이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양 아등바등 살 지는 말아야겠다. 사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내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라기 보다 거저 주어진 것들이 아니었던가? 태어난 시와 장소, 헌신적으로 길러주신 부모는 물론이요, 지금 내가 내 힘으로 얻어내었다고 생각하는 것들 – 학위, 직업, 친구, 배우자 – 또한 실은 주어졌기 때문에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내 지성으로 설계하고 내 힘으로 이뤄가는 것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겠다. 주어진 것들에 곰곰이 감사하며, 우연 혹은 기적의 얼굴로 나타나는 사건들을 좀 더 반갑게 맞이해야겠다. 그러다가 나의 삶이 내 이웃의 삶과 만났을 때, 살가운 우연으로, 기적이 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기쁜 일은 없지 않을까.
이브라임을 다시 송환대기실로 보내며, 하루속히 그가 안전하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의지에 불타올랐지만, 두 시간짜리 영화에서처럼 단번에 이브라임이 풀려나서 난민으로 인정을 받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인권위원회에 한국에서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진정을 하고, 유엔난민기구에 협조를 요청하고, 법무부에 문의를 하고,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이브라임은 그 후로도 세달 정도를 갇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지지부진한 일상이 이브라임에게 기적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꾸준히 노력을 했고, 결국 이브라임은 난민인정을 받아 뉴질랜드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브라임을 태국에서 만나고 온 후 다섯 달이 지난 후, 우리는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변호사님,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좋은 소식은 뉴질랜드 정부가 잘 도와준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제가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을 때에 저를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죠. 너무 감사 드려요. 오늘 저는 그 덕분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 때 변호사님이 제 곁에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가 보낸 이메일을 읽는 나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훗날 잠드는 손자의 머리맡에서 해 줄 멋진 이야기가 생겼다. 그의 노력이 좌절되고 힘들 때, 삶은 기적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브라임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정신영의 사람 이야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3, 2014년 3월, 정신영, 공익법센터 어필 상근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