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 될 때마다 한글의 우수성이니 한글 사랑이니 말이 많지만 정말 한글이나 전반적인 언어에 대해 딱히 한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대학교 때 말장난을 좋아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낱말의 어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한번은 선배에게 '그런 거 관심 있는 애는 너 밖에 없으니까 따분한 얘기 고만 하라'는 쫑코를 먹고는 그다음부터 상처를 받았는지 학교에서 그런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공대생 주제에 그런 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회에 나와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봐도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매우 찾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 녀석은 공대생 중에서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도 특이한 녀석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가 너무 좁기도 하고 그런 관심사를 나눌만한 깊이 있는 대화를 별로 못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방송이나 인터넷 등 공공 매체를 봐도 그런 인상은 여전히 남는다. 어느 매체를 보던 한글이나 언어에 관한 내용의 양도 극히 적을 뿐 아니라 얼마 안되는 내용도 바른말 고운말 등의 타이틀을 단 정확한 문법이나 맞춤법에 대한 내용 아니면 아이들이 한글을 망치고 있다던가 하며 탄식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언어란 교정과 학습의 대상일 뿐 흥미와 관심의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지경이니 한글이 우수하다는 말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자화자찬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인 나도 한글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언어라는 것에는 철저히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글의 우수성과 이어질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언어 자체를 두고 뛰어나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따질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얼마나 많이 얼마나 공들여 사용하는지를 보는 것이 언어의 내재적인 우수성을 따지는 것 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보면 한글에 낙제점 이상을 주기는 힘들 것 같다. 단순히 양적인 면만 봐도 그렇다. 당장 컴퓨터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결과 중에 검색어와 실제 관계가 있는 사이트 수 자체가 얼마 안될 뿐 아니라 내용도 대부분 한 사이트에서 복사된 내용이다.(물론 요리법 같은 실용적인 내용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지만 글을 읽기 위해서 찾아갈 만한 사이트만 따지면 그 양은 극히 적다) 단행본의 수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주식투자나 일부 장르문학 같은 극히 제한된 주제에 관한 책을 빼면 그 규모는 극히 빈약하다. 내가 참여하는 독서토론 모임의 경우 주제 제한 없이 모든 분야에서 관심 있는 책을 찾아서 읽는 편인데도 토론 대상 책의 90퍼센트 이상이 번역서인데 다른 모임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원하는 내용의 책을 찾기 힘든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아주 깊은 내용을 다룬다 해도 기사의 단어 수는 3천 단어를 넘기 어렵다. 만 단어 이상의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외국 신문/잡지와는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양은 반복되는 것을 빼면 단어, 표현, 글 등 모든 수준에서 상당히 빈약한 것 같다. 물론 양만 갖고 언어 사용의 수준을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양이 빈곤한데 좋은 보석과 같은 글이 나오기는 힘들다. 일단 양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의견이 있긴 하지만 내 자신이 그런 판단을 할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질에 대해서 강한 주장을 펴기는 힘들다.

규모가 빈약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글의 값도 무척이나 비싸다. 대중 서적 단행본의 경우를 보면 한권 한권의 가격을 봤을 때는 외국과 큰 차이가 없지만 책 한 페이지, 책 한 권에 들어가는 글의 양이 동화책 수준으로 적기 때문에 같은 양을 비교하면 가격에서 큰 차이가 난다. 해리 포터는 시리즈 전체(총 7권)가 아마존에서 46불, 즉 54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 사려면 23권을 사야 하고 할인을 해도 17만원 이상의 돈을 줘야 살 수 있다. 인문서 중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경우 한 권으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가격이 할인을 해도 54000원이다. 아마존에서는 14불에 판매 중이다.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이는 심각한 뻥튀기가 아닐 수 없다. 가장 악명 높은 경우가 이 글을 쓰는 본인이 번역한 중력의 무지개인데 반값 할인을 한적이 있긴 하지만 처음에 99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나와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 바가 있다. 이 책은 아마존에서 14불에 판매 중이고 미국 헌책방에 가면 3불 정도에 쉽게 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팔린 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인터넷 중고 시장의 가격은 배송료 제외하고 90,000원(알라딘) ~ 200,000원(교보문고) 수준이다. (출판사의 말에 따르면 번역료가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실제 노동 시간을 따지면 그 보상은 최저 임금의 반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물론 판매 예상 권수를 감안하면 출판사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번역저작권 비율로 계산하면 최저 임금의 5분의 1 수준의 보상을 받아야 계산이 맞으니까.)

책의 형태도 극히 제한적이다. 소설책 같은 경우 일본도 책들이 얇은 편이지만 많은 경우 문고판으로도 나오기 때문에 굉장히 싼 가격으로 책을 구매할 수 있고 중고책 가게에서는 정말 싼 가격에 새책같은 헌책들을 구할 수 있다. (아, 일본 중고책 가게란!) 하지만 이런 싸구려 문고판은 우리나라 독자들의 고급진 손가락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산업이 원가를 낮추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출판사의 경우는 원가를 높이려는 목표를 향해 약진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가를 높이기 힘든 전자책의 경우는 철저히 외면 받는다. IT 선진국이라고 말은 많지만 출판계에서 디지털 혁명은 아직 먼 것 같다. 전자책으로 출판되는 책들의 종류는 극히 제한적이다. 일부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판매되는 책의 30퍼센트가 전자책이라고 한다. 물론 전자책이 출판 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걱정도 많지만 어쨌든 미국 출판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출판 시장의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크게 축소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다. 판매되는 전자책 외에도 디킨스나 오스틴 등 저작권이 만료된 거장들의 작품은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수백년 동안 나온 책들 상당수를 인터넷 상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아, 실로 오래된 얘기다!)에 나온 우리나라 책들도 많긴 하겠지만 이북은 커녕 일반책으로도 구하기 어렵다. 요즘 나온 책들도 잘 팔리는 책 빼고는 몇 년 안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워지기 십상이니 옛날 책들은 어쩌랴하고 말 뿐이다. 더 옛날 책들은 사정이 더 심각한데 아예 대부분 외국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한문) 나같이 무식한 사람은 원본을 읽을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록유산이라는 승정원일기도 원본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읽어 보려면 학자들의 번역을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고 (앞으로 수십년 걸린다 한다) 번역된 부분도 온라인 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17세기 영국의 사무엘 핍스의 일기는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다 볼 수 있고 트위터에 가입하면 매일 그날짜 분을 받아볼 수도 있다. 수백년 간 우리글을 괄시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도 들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책을 싫어하게 된 이유도 이런 역사적인 면이 있지 않나 하는 근거 없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영어의 경우 전자책 이외에 오디오북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 서적의 경우 대부분 오디오북으로 동시 출판이 되고 (중력의 무지개도 오디오북으로 나왔다!) 앞서 언급한 핑커 책이나 피케티의 책들, 브라이언 그린의 과학책들도 모두 오디오북으로 구매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 오디오북 사이트인 오디언에 가보면 정말 볼만한 20세기나 21세기 책이 거의 한 권도 없다.

영어의 경우는 이렇게 온라인으로 보관되는 자료가 많다보니 재미 있는 연구들도 가능한데 대표적인 도구 하나를 소개하자면 ngram이라는 도구가 있는데 이는 영어 단어나 표현의 사용 빈도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도구이다. 예를 들어 프랑켄시타인, 아인시타인, 셜록 홈즈에 대한 언급이 연도에 따라 얼마나 많았는지를 그래프로 볼 수 있다. 

 

문화 현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beatnik(비트족)'이라는 단어와 'hippie(히피족)'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 변화를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볼 수 있다.

영어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thou'와 'you'의 사용빈도도 비교할 수 있다.

(피케티의 20세기 자본론을 보면 1914년 이후에 소설에서 돈의 양에 대한 언급이 줄어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작가가 이런 도구를 잘 사용해 봤다면 그런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글 뿐 아니라 말도 마찬가지인데 티비나 라디오에서 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경우가 요즘은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대부분이 지루한 정치 토론이거나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관한 내용이다. 인문학이나 과학 강연 같은 것은 재미있는 것들이 가끔 있지만 이슈가 될만한 주제에 대해서만 그것도 정말 아주 가끔이고 문학을 다룬 프로의 경우는 보고 있자면 정말 억지로 애를 쓴다는 애처로운 느낌만 든다.

라디오의 경우 음악, 애청자 감동 사연, 뉴스 등 틀에 박힌 내용이 99퍼센트라고 볼 수 있는데 '토크라디오'라는 전통이 살아 있는 미국과는 많은 비교가 된다. 물론 토크라디오도 반 이상이 따분한 정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밖에 문학, 언어, 철학, 과학, 경제, 국제 관계 등 여러가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이야기도 꽤 많이 있다. 특히 올해에는 팟캐스트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라디오 방송 내용을 파일로 다운로드 받아 듣는 것도 무척 쉬워졌다. 물론 기존 라디오 방송 내용을 팟캐스트로 제공하는 것 말고도 다른 '오리지널' 팟캐스트들도 많이 있다. 올해 팟캐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 것도 '시리얼'이라는 팟캐스트의 역할이 큰데 'This American Life'라는 라디오 방송의 스핀오프로 제작된 이 팟캐스트는 1999년에 벌티모어의 한 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살해 당한 한국인 이해민 양의 사건을 다루고 있고 검거되어 복역 중인 해민 양의 친구가 실제 살인자가 아닐 가능성을 인터뷰와 증거 및 재판 과정의 재검토를 통해 조목조목 따져보고 있다. 이 밖에도 팟캐스트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매 1분 분량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스타워즈 미닛'에서부터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대한 분석을 하는 're:Joyce'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모든 분야의 내용을 다 찾아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팟캐스트에서 흥미로운 내용들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꼭 전문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이나 영어에 촛점을 맞추어 보자면 이런 주제에 대한 많은 팟캐스트가 있지만 관심을 많이 받는 팟캐스트 중에 '렉시콘 밸리'는 스포츠캐스터가 진행 및 제작을 하고 '영어의 역사'의 경우에는 변호사가 모든 제작을 하고 있다. 특히 '영어의 역사'는 정말 한 명의 많은 노력이 들어간 프로그램인데, 현재 70회를 넘어섰으므로 70시간 분량의 내용이 있는 셈인대도 이제 막 중세 영어를 벗어났으니까 프로그램이 끝나려면 앞으로 100회는 더 남지 않았을까 한다. 백프로 영어를 다루지는 않더라도 'Good job, Brain'이나 'Ask me another'와 같은 일반인 대상 가벼운 퀴즈 프로그램에서도 영어 자체에 대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양을 갖고 어떤 분야의 수준을 얘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작을 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청취를 하며 이렇게 유지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언어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디오랩'이라는 팟캐스트도 언어를 주로 다루지는 않는다. 딱히 주제가 뭐라고 꼬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주변의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삶과 자연에 대한 통찰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는 얼마전에 암으로 사망한 올리버 색스가 죽기 전에 한 인터뷰도 들을 수 있고 영국 퀴즈쇼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어떻게 변형되어서 나타나는지도 들을 수 있다.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언어가 우리 삶에서 워낙 큰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여기서도 꽤 높은 비중으로 다루어지는데 특히 흥미로웠던 에피소드는 번역에 대한 것인데 미국 시트콤 사인펠드가 외국 텔레비젼에서 방송될 때 생기는 번역의 문제, 욕을 수화로 번역할 때의 문제 등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소개되는 내용 중에 하나가 'Le Ton beau de Marot'라는 책이었고 사실 이 글에서 하려는 내용은 이 책에 대한 소개였는데 서론이 너무 길어져 버렸으니 원래 하려던 얘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야 하겠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이 길게 글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