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여년전 길가메시나 진시황제의 얘기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영생에 대한 바람은 꽤나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상상력의 일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 의료기술이 발전해도 최고령자의 나이가 크게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조만간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약이나 시술이 등장할 것 같진 않지만, 영생에 대한 바람과 그것이 이루어졌을 경우에 대한 상상은 계속되는데, 덕분에 영생을 하게 되면 그 영겁의 세월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라든지 예술이 필요 없게 될 것이라든지 뇌의 기억 능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둥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된다. 나같이 부정적인 사람들을 빼고 실제로 영생이 가능하게 될 정도로 의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실제 그런 약이나 시술이 개발되게 되면 부유층이나 권력층만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어떤 제약회사에서 그런 약을 개발해서 당신에게 가져왔다고 가정해보자. 알만한 부자들과 유명인들은 벌써 다 사서 먹었고 특별히 기간 한정 90% 세일해서 당신 재산의 반만 내면 약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제의를 덥석 수락할 것인가? 수백 시간이 걸려야 끝낼 수 있다는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도 이제 도전해 볼 수 있게 될 것인가?

일반적으로 제대로 된 약이라면 모든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서 그 효능을 검증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영생의 약은 어떻게 그 효능을 검증할까? 영생의 약을 정확하게 검증하기 위해서는 영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소박한 가정을 해서 생명을 1년 연장해 줄 수 있는 약은 어떨까? 만약 건강한 삶을 1년 연장할 수 있다면 그 약의 가치는 상당할 것이고, 그에 대해 큰 물질적 대가를 흔쾌히 치르려는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 효능을 검증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 약을 먹은 사람의 수명이 1년 연장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좀 나이든 어른에게 그런 시험을 한다고 가정해도 보통은 몇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설사 몇십 년을 기다려서 그 사람의 수명을 알아낸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원래 수명이 얼마인지 알아야 그것과 비교해서 수명이 늘어났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수명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수명 1년 연장의 약도 그 효능을 검증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영생의 약만큼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완벽하게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예를 들어 확률 95%의 신뢰성으로 그 효능을 증명하려면 통계적인 방법을 쓰면 된다. 즉 비슷한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 사람들에게는 수명 1년 연장의 약을 먹이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설탕약(플라시보)을 먹이고 모든 사람이 다 죽을 때까지 몇십 년을 기다린 후 평균 수명을 비교하면 된다. (물론 설탕약을 먹인 사람들의 불만이 폭주해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실험은 말짱 꽝이다) 그런데 이 때 어느 정도 신뢰성을 보장하려면 실험 대상의 수가 꽤 많아야 하고, 수명 연장의 약이 아이언맨으로 만들어주는 약이 아닌 이상 자동차 사고 같은 재난으로부터 보호해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에 사고사로 죽은 사람들은 평균 수명 계산에서 제외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장애로 작용하는 것은 그 '원래의 수명' 이라는 문제다. 사람에게 타고난 수명이 있다는 생각은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상당히 근거를 대기 어려운 생각이다. 만약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태어났을 때 이미 그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사람의 수명을 알 수 있다. 타고난 수명과 실제 수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의 차이도 사라진다. 타고난 수명이 곧 실제 수명이 되고 사고사라는 것도 없어질 텐데, 왜냐면 모든 일들은 사고가 아니라 미리 정해진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이렇게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정말 현실 속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겠지만, 정보를 충분히 얻으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런 주장을 편 사람 중에 우두머리로 뽑히는 사람으로 라플라스는 사람이 있는데, 확률에 관해 쓴 책 속에서 그런 얘기를 썼다가 기계론적 우주관의 주창자로 취급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만약 어떤 지성체가 우주 전체의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존재하는 힘의 세기를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미래의 모든 일들을 예측할 수 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 그런 지성체가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가 불가능한 것처럼 (전의 글 참조)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려운 물리학 이론을 쓰지 않더라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알 수 있는데, 이런 라플라스의 생각은 뉴턴의 역학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과 그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찰자를 가정하고 있다. 하늘의 별과 행성의 위치를 거의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의 사건들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뉴턴의 법칙들에서 자연스럽게 유도될 수 있지만, 객관적인 관찰자의 존재는 실제 우리 우주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주의 지름보다 훨씬 큰 지렛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르키메데스의 주장이 실제로는 무의미한 서술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라플라스의 주장도 아주 간단한 이유로 무의미한 주장이다. 우주 전체의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를 알아서 기록하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우주보다 큰 저장 장치와 처리 장치가 필요하게 될 텐데 여기에 모든 힘에 대한 정보까지 저장하고 처리해야 한다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장치의 크기는 우주의 수십 배 크기가 될 것이다. 평행 우주를 가정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주에서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우주가 전체라면 전체보다 큰 것이 전체 안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장치’라는 것을 갑자기 들먹이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개념적인 수준에서 그런 장치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성을 가진 존재의 기억과 생각에 대한 얘기인데 저장 장치니 처리 장치니 하는 것들은 그저 기술적이고 부수적인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성이라던가, 생각이라던가, 기억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물리적인 기반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오류에 근거한다. 만약 그런 물리적 기반에 근거하지 않는 지성을 가정한다면 그것은 신과 같은 존재를 가정하는 신비주의에 다름 아니다. 물론 추상적인 수준에서 개념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는 물리적 기반을 빼놓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리적 기반은 절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고, 특히 라플라스의 이야기처럼 물리적인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생각과 기억의 물리적 기반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지성이니 생각이니 기억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장치에 불과하고 소립자와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주부다 더 큰 장치는 우주 안에 존재할 수 없다. (지난번에 컴퓨터가 인간 지능을 모사할 수 없다는 취지의 글을 썼는데 지금 하는 이야기와 다소 모순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이야기할 때 언급된 컴퓨터는 튜링 머신이라는 특별한 장치를 말한다. 사람이 만든 대부분의 컴퓨터는 디지털 컴퓨터이고 모든 디지털 컴퓨터는 튜링 머신이기 때문에 컴퓨터는 튜링 머신이 갖는 제약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번 글에서 언급하는 장치란 튜링 머신보다 좀더 일반적인 장치를 얘기하는 것으로, 그런 점에서 인간의 뇌를 포함한다. 튜링 머신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아무튼 내가 장치라고 표현한 그런 물리적 기반의 필요성은 매번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사고의 어딘가에는 항상 깔려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물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엔트로피나 정보로서의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저장 장치에서의 정보의 기록과 삭제의 과정을 배제하고는 기본적인 얘기조차 하기가 힘들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뉴턴의 법칙을 알면 당구공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고 또 움직임의 근본적 원인을 알 수 있다. 다음 그림처럼 움직이는 당구공을 가정해 보자.  

(그림 출처 : http://www.tutelman.com/golf/swing/golfSwingPhysics1_.html)

공들이 충돌하는 부근의 시점을 현재라고 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은 각각 다음과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학문을 비롯해 일반적인 이해의 작업에서 전형적인 방식이다. 어떤 입력값이 있고 처리장치가 있고 그 처리장치를 거쳐 출력값이 나오는 형태인데 보통 입력값은 세상에 대한 관찰이 입력값이 되고 출력값은 세상에 대한 해석이라던가 미래에 대한 예측이 된다. 물론 세상에 대한 관찰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에게는 이런 모델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선천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기질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도 기본적인 모델은 다음과 같다.

즉 환경을 하나의 함수로 볼 수 잇고 선천적인 기질을 입력값으로 볼 수 있는데 선천적인 기질이 환경적인 영향을 받아 실제 발현되는 기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선천적인 면을 우선하는 사람은 환경에 따른 영향이 적다고 즉 변환함수의 변화량이 적다고 보는 것이고 후천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선천적인 기질은 다 비슷한 값이고 환경에 따른 영향에 의해 실제 발현되는 기질이 대부분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빈 서판을 주장하는 사람은 선천적인 기질이라는 입력값이 아예 필요없다고, 모든 것이 환경이라는 함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키에 대해 이런 모델을 적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피아노 실력에 대해 이런 모델을 적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런 모델에서는 입력값과 함수를 정확하게 알면 출력값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좀더 타당한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가지 요소를 더 고려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연이라는 요소이다.

앞에서 라플라스의 기계적 우주를 언급하면서 기계적 우주에서도 현재 상태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래의 예측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기계적 우주라는 것 자체가 20세기에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종말을 맞게 된다.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양자역학적 우주에서는 (즉 실제 우주에서는)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완벽하게 안다고 해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계적 우주에서는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란 단지 정보의 부족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사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근본적인 우연이 존재하고 그런 우연의 존재가 양자역학의 근간이 된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예측이 확률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는 없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 앞의 공 두개가 부딪히는 그림은 가능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를 최대한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해도 미래와 과거의 모습은 결정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참조해서 앞의 모델을 약간 수정하면 다음과 같아진다.

여기서 환경에 따른 영향과 우연적 요소는 관찰 가능한지 아닌지의 여부로 또는 제어 가능한 요소인지 아닌지에 따라 구별된다. 우연적 요소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알기는 굉장히 어렵다. 양자역학에서 우연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해서 거시적인 세계에서도 그것을 그대로 확장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여기서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나는 우연적 요소가 상당히 크다고 믿는 편인데, 이는 내가 통신 관련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통신 이론에서는 물리적인 잡음은 절대 없앨 수 없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런 가정을 기반으로 모든 이론을 전개하는데 우리의 모델에서 우연적 요소를 그런 잡음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모델에 기반해서 보면 선천적인 면, 후천적인 면을 주장하는 편 이외에 우연적인 면을 주장하는 편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람의 선천성이니 후천성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말고도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도 이런 모델을 만들 수 있을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반면 거의 백퍼센트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별로 이론을 만들 거리가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 이런 우연적인 요소가 존재할 가능성은 배제해서는 안될 것 같다. 또한 항상 불완전한 정보 밖에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근본적으로 우연적 요소 이외에 정보의 부족에 의한 예측 불가능성도 우연적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우연적인 요소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 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초기값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의 모델들은 우연성이라는 요소를 넣든지 안 넣든지 모두 초기값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초기값을 정확하게 얻어내기가 힘들지는 몰라도 그 존재 자체는 기본적인 가정으로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당구공의 움직임과 같은 단순한 예를 보면 당연히 초기값은 존재하는 것 같다. 현재 당구공의 위치와 속도를 100%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미래의 대략적인 위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에서는 알 수 있다. 하지만 타고난 수명이라던가 타고난 피아노 재능이라던가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타고난 수명이나 재능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인 것 같다.

하지만 관찰은 불가능하지만 존재하기는 할 것 같은 (예를 들어 타고난 수명 같은) 요소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만들어진 개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양자역학에서 그 영감을 가져올 수 있다.

양자역학의 이론 중에서 내가 가장 심오하다고 생각하는 이론은 벨의 정리이다. 근본적으로 우연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굳은 생각을 가진 아인슈타인은 소립자의 성질(구체적으로는 스핀이라는 성질인데, 전자를 지구에 비교하면 자전 방향과 자전 속도에 해당하는 개념이지만 실제로는 그냥 비유의 수준일 뿐 자전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다만 거시적인 세계에서 양자역학적 성격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용하는 설명이다)을 관찰했을 때 그 성질이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는 우리가 그 성질을 알지 못할 따름이지 내재적으로는 이미 그 성질이 결정되어 있고 관찰 시점에서 그 성질을 알 수 있게 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그저 형이상학적 질문일 뿐 그런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는 없다고 치부되었고 오랫동안 이런 질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에 점이 날 위치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라는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결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하지만 그 가설이 맞는지 틀리는지 여부를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존 스튜어트 벨이라는 과학자에 의해서 증명이 되었고 실제로 나중에 실험을 통해서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틀렸음이 증명이 되었다. 즉 소립자의 성질은 내재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벨의 정리는 정말 간단하면서도 마법과 같은 논리를 통해 이런 사실을 증명했는데, 벨의 정리는 ‘우주의 구조’에서 브라이언 그린이 티비 드라마인 엑스파일 주인공들까지 등장시켜서 잘 설명하고 있다.

물론 앞에서 다룬 우연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의 이론을 그대로 거시적인 세계의 설명에 적용할 수는 없다. 벨의 정리는 다른 모든 양자역학 이론과 마찬가지로 확률 통계적 방법을 쓴다. 벨의 정리에서 다루는 실험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같은 소립자에 대해서 동일한 실험을 여러 번 한다는 것인데 이는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적용이 불가능하다. 이는 소립자와 거시적인 개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데 거시 세계에서는 두 개의 사물이 동일하다고 해서 두 개의 사물이 정말 같은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쌍둥이 두 명이 똑같이 생겼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가진 백 원짜리 동전과 다른 사람이 가진 같은 연도에 제조된 백 원짜리 동전이 똑같은 백 원짜리라고 말은 할 수는 있지만 그런 말을 할 때 그 두 동전이 동일한 물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립자 세계에서 성질이 동일한 두 개의 소립자는 근본적으로 구별이 불가능하고, 모든 면에서 동일한 개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소립자란 은행에서 숫자로 존재하는 돈과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친구의 통장에 천 원이 있었는데 내가 천 원을 그 계좌로 이체해서 이천 원이 되었다고 하자. 한달 후에 그 돈을 돌려 받기로 했는데 만약 내가 원래 있던 천 원 말고 꼭 내가 이체해 준 천 원을 달라고 한다면 친구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이 뻔한데 내가 이체한 천 원과 원래 있던 천 원을 구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립자도 이렇게 은행에 예금한 돈과 같은 존재라고 보면 소립자의 성질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같은 상황을 만들어 주면 소립자에 대해서는 동일한 실험을 수없이 반복할 수 있지만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진정한 동일함이란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정말 동일한 실험을 반복할 수는 없다. 사람의 얼굴에 난 점의 위치가 원래 정해진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같은 사람에 대해서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과거로 돌려보내 같은 실험을 반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직접 관측이 불가능한 내재적인 성질이 존재하는지는 그 여부를 결정하기가 어렵고 아마 존재한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성질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내재적인 성질을 찾아내려는 것은 대부분의 학문과 사람들의 사고의 기본 모델이다. 하지만 이런 모델의 한계점을 인지하는 것은 섣부른 일반론의 적용이나 성급한 결정을 막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노력은 절대 쉬운 것은 아니다. 최고의 천재라는 아인슈타인도 하지 못했던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