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의 옛 시구 가운데 “넘실넘실 흐르는 물, 바다로 흘러드네[沔沔流水, 朝宗于海]”(1) 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수많은 갈래의 하천들이 바다로 모여드는 모습에 빗대어 제후들이 천자를 알현하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중국 굴기(崛起)의 역정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곧 중국의 굴기와 해양에 대한 인식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 독일계 미국인 학자 비트포겔(Karl. A. Wittfogel)은 중국을 포함한 동방 문명이 수리문명(水利文明), 치수문명(治水文明)에 속하며, 치수 시스템 자체가 동방의 전제정치(專制政治) 제도를 낳았다고 보았다. 물론 중국 고대 문명이 치수문명에 속하며, 하천문명(河川文明)에 속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고대 문명은 하천의 관개(灌漑)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물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사실상 중국 고대 문명이 하천문명이라는 말은 중국이 대륙문명이라는 것 또한 의미한다. 하천의 물줄기는 어디까지나 대지의 핏줄이다. 어떤 식으로 흐르든 간에 하천은 항상 대지를 바탕으로 흘러간다. 물론 하천이 흐르지 않는다면 대지 또한 생기를 잃어버린 척박한 땅이 될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대지는 항상 중국인의 의식 속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행(五行) 가운데 토(土)는 중앙의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의 전통 문화 속에서 유가(儒家)는 하천을 생명같이 여겼으나, 도가(道家)는 하천을 경시하고 바다를 중시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도가는 줄곧 중국 정치사상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이렇듯 하천과 대지는 전통 사회의 농업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는 데에 충분한 자양분이 되어주었으며, 다른 한편로는 중국의 정치전통에서 왜 바다의 역량을 전적으로 경시하였는지 설명해준다.
3. 바다에 대한 경시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에서도 그 편린을 볼 수 있다.
공자가 말하길,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다녀야겠구나. 나를 따를 자는 유(由)일테지?” 자로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공자가 말하길, “자유는 용맹함을 좋아함이 나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재료를 구할 곳이 없구나” (子曰:“道不行,乘桴浮于海。從我者,其由與?”子路聞之喜。子曰:“由也好勇过過我,無所取材。”) (2)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었기에 개탄할 수밖에 없었으며, 세상을 등지고 바다를 유랑하고자 했다. 그가 말한―그렇다면 나를 따라 바다로 나갈―것은 분명 자로(子路)일 것이다. 스승이 직접 따를 것을 지명하니, 자로가 듣고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공자는 뒤이어 출항을 뒤집을 핑계를 찾아낸다. 자로야 네가 나보다 용감하다만 배를 만들 재료가 없구나.
이 대화는 육지를 떠나 바다 위를 떠도는 것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배를 만들 재료가 없다는 공자의 말은 당연히 핑계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는 여전히 육지에서 그의 도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로의 용기가 비록 남다르지만, “용기[勇]”는 유가에서 최고의 미덕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공자가 바다에서 도가 행해질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에서 방랑하는 것은 결국 '법도가 없는 자유'이다.
즉 중국의 전통 문명은 시종일관 하천문명이었으며,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육지문명이었다. 육지문명의 눈에는 바다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늘과 땅의 크기에 미치지 못한다. 바다는 이러한 이유로 항상 육지의 변경(邊境)이었다.
4.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운하의 건설은 하천과 해양 사이의 선택 문제와도 관련된다. 베버(Max Weber)는 운하의 건설이 “남방의 쌀을 바다를 통해 북방으로 운송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해로를 꺼리는 원인은 해적과 태풍, 특히 후자가 야기한 “해로의 위험성” 때문이며, 해로의 위험 요소들로부터 초래되는 손실이 “운하 재건의 방대한 비용을 변제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3)
물론 중화제국의 해양에 대한 기피는 자연히 경제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며, 거대한 제국의 영토에서 완전한 자급자족이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록 항해 기술은 일찍부터 상당히 발달하였으나, 거대하고 풍족한 대륙의 제국은 해양 개척의 시급성에 주목하지 못했으며, 마찬가지로 해상 무역의 필요성 또한 예견하지 못했다. 중화제국은 줄곧 믿을만한 해군력을 갖추지 않았는데, 해군력은 바로 해상 무역의 기초이자 그에 대한 보호수단이다. 제국은 바다를 건너 온 함대로부터 처절한 군사적 굴욕을 겪은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하천의 미미함과 바다의 거대함을 의식하였다.
5.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중국의 변천은 철저한 관점의 전환, 즉 하천에서 해양으로의 점진적인 방향전환을 수반했다. 중국이 받은 근대화의 세례는 바로 이러한 관점 변화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동반했다. 유럽인들은 대양을 횡단하여 미국과 중국을 발견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근대화 세례는 또한 바닷물 세례이기도 하다. 세계 일주는 유럽인들이 완수하였고, 그 결과 현대 세계의 전체적인 정치와 법률적 기초에는 모두 유럽의 흔적이 남아있다. 만약 중국인이 먼저 대양을 건너 유럽과 미국을 발견했더라면, 전 세계 정치와 법률의 판도는 분명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을 것이다. 현재 세계 정치의 핵심은 미국에 있지만, 미국은 유럽 이념의 서진(西進)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미 제국은 실제로 과거 대영제국의 진화판이며, 미국 대륙은 서쪽으로 건너간 잉글랜드이다.
현대 세계의 형성은 해양 세력의 흥기와 해양에 대한 지배권의 투쟁을 수반했다. 망망대해는 자유 지대이며, 그곳에는 어떠한 법률과 제도도 없기 때문에 위험으로 가득하다. 현재 세계의 정치와 법률 질서는 해양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으며, 관건은 해양에 대한 입법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은 해양과 항해권을 분할하고, 해상 무역권을 분배하는 문제이다.
현대 정치학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해양의 자유를 논하다[论海洋自由]》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가 해양의 자유에 대해 논한 것은 바로 무역의 자유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이다.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항해하여 아시아를 발견했고, 스페인은 서쪽으로 항해하여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 네덜란드는 항해업계의 후발주자였다. 그들이 부상하던 시기에 그들은 더없이 매혹적인 해외 무역 시장에서 마찬가지로 한 그릇의 국물을 원했다. 그로티우스는 인도양에 대한 포르투갈의 항해권 독점을 반대했으며, 따라서 해양자유를 창도한 것이다. 그는 “자연적으로 해양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고 선언했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바다 위에서 항행할 수 있으며, 어떤 국가나 개인도 해양 및 해상 항행을 독점할 수 없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그로티우스의 정치적 목적은 사실 분명했는데, 그것은 “네덜란드인―네덜란드 연방의 국민―이 동인도로 항해할 권리가 있고……그들은 또한 그곳의 사람들과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간단명료하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해양과 무역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교황의 해양 관할권에 대해 반대할 때, 그로티우스는 매우 분명하게 “해양과 항해권은 단지 금전이나 이윤과 관련될 뿐, 신앙심과는 관련이 없다”고 표명했다.
누구든 해양에 대한 관할권을 지니는 사람은 해상 무역의 명맥을 쥐게 된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와 싸우던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는 바다의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손에 쥐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전통시기 중화제국이 해양을 외면함으로써 발생한 정치적·경제적 손실은 결코 운하가 제국에게 가져다준 편익으로 변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중국은 수익성 있는 해로 무역을 위해 갖은 방법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해양은 육지의 변방이었다. 극단적인 대륙의 관점에서 보면 해양은 인류의 호수이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는 사실상 완전히 상반된 심리적 기제가 발달했다. 바로 해양을 육지의 변경(邊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육지를 해양에서 떠다니는 물고기로 보는 것이다.
철학사적 상식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경우에 따라 대지를 물 위에서 안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때로는 대지가 물 위를 부유한다고도 보았다고 말했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에 따르면 탈레스는 대지가 물에 의해 윤택해진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대지가 마치 물결을 따라 표류하는 배와 같다고도 했다. 탈레스는 단지 막연하게 대지와 물의 관계에 대해 서술했을 뿐, 직접적으로 대지와 해양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해양자유를 강조하는 그로티우스는 이 점에 있어서 매우 명확하다. 해양과 육지의 관계에 대해 논술할 때, 그로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딱 잘라 말한다. “아니다. 그것(바다)이 육지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하느니, 그것이 육지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6. 전체적인 현대 세계 체제의 발전은 해양자유와 육지주권 사이의 투쟁과 각축을 관통하고 있다. 유럽의 법학자 슈미트(Carl Schmitt)의 통찰처럼, 신흥해양질서와 전통육지질서 사이의 긴장은 바로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세계 질서의 특징이다. 현대 정치 체계와 국가학의 고전으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있다. 홉스(Thomas Hobbes)는 현대 국가의 주권을 리바이어던으로 명명했다. 《욥기》에서 리바이어던은 바다의 거대한 악어이다. 현대 정치이론의 창시자 가운데 하나인 홉스는 바다 속의 악어를 통해 현대 국가의 주권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이것은 현대 정치의 초점이 더 이상 ‘중원의 ‘사슴쫓기’가 아니라(4), 해양의 ‘파도타기’라는 것을 암시한다. 베이컨이 말했듯이 “한 국가가 해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하나의 제국이 된 것과 같다.”
근대 시기 중국의 쇠락과 당대의 굴기는 모두 해양과 육지가 투쟁하는 현대 세계의 판도 속에 위치한다. 중화제국의 개항과 인민공화국의 개혁개방은 모두 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변혁의 길 위에 놓여있었다. 변혁의 전제는 해양의 자유 및 자유에 수반되는 위험을 의식하는 가운데 해양을 도외시했던 전통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전통 시기 중국에서 하천에는 국제 정치적 차원의 의미가 있었으며, 따라서 이웃 나라를 골짜기 삼아 치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묵계가 있었다. 일단 영토 내의 하천이 되면 더 이상 국제 정치적 의의를 지니지 않으며 민생, 경제, 경제, 교통과 환경 측면의 의의만 갖게 된다. 현대 정치 체계의 핵심은 대해의 쟁탈이지 하천의 쟁탈이 아니다.
현대 세계 속에서 해양은 천하를 얻고 천하를 다스리는 핵심 지대이다. 장강과 한수는 바다로 흘러간다. 하천문명의 물은 다만 앞으로 만경창파의 해양 정치와 해양 문명으로 스며들어가 그 가운데서 물보라의 꽃을 피워냄으로써, 비로소 그 거대함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중국의 굴기, 그것 또한 같은 이치이다.
[역자 주] (1)『시경(詩經)』「소아(小雅)·면수(沔水)」 (2)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의 구절. 마지막의 “無所取材”에 대한 해석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으나, 필자는 ‘배를 만들 재료[材]’에 대한 이야기로 인용하였다. (3) 막스 베버의 『유교와 도교(Konfuzianismus and Taoismus)』 참고. (4) (역자 주) 군웅들이 사방에서 할거하며 천하를 다투는 상황을 가리킴.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 “진나라가 사슴을 잃어버리니, 천하가 모두 그것을 쫓았다[秦失其鹿, 天下共逐之]”고 하였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중국, 중국인]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천지앤홍(陈建洪), 중국 중산대학(中山大学) 철학과 교수; 이수현 옮김,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동아시아학과 대학원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