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읽기: Geschichte(역사)를 Geschichte(이야기)하라
나온 지 27년 된 독일 영화가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전에는 들을 수 없었으나 이제는 들린다. 그 목소리는 빔 벤더스의 것이 아니라 페터 한트케가 심어 놓은 발터 벤야민의 것이다. 이 영화의 곳곳에서 벤야민의 여러 글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U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가 가장 중요하고 이 글과 관련해서는 <이야기꾼 Der Erzahler>도 중요하다.
1. 제목에 대하여
이 영화는 벤더스의 1987년 작품으로 한트케가 공동으로 각본을 썼다. 독어 제목은 <베를린 위의 하늘 Der Himmel uber Berlin>이다. 불어와 영어 제목은 <욕망의 날개>, 우리말 제목은 먼저 개봉한 일본을 따라 <베를린 천사의 시>가 되었다. <욕망의 날개>라는 제목을 벤더스가 스스로 정하고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갸웃했었다. 독어 자막을 확인하기 위해 산 DVD의 부가영상과, 벤더스와 한트케가 한 공동작업들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본 후에는 벤더스에 대해 약간의 실망까지 느끼게 되었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번 글에서 자동으로 체스를 두는 기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말을 놓는 인형을 사적 유물론, 기계 안에 숨어 인형을 조종하는 난쟁이를 신학으로 보고 둘을 하나로 엮으려는 구상을 밝히고 있다. 아무튼 난 이제 이 영화에서는 벤더스가 인형이었고 한트케가 난쟁이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영화 자체에서 드러나는 것, 읽어낼 수 있는 것만 중요하다.
이 영화의 겉으로 드러난 명시적 의미(explicit meaning)는 영화사전에도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그 한계까지도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욕망의 날개>나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제목은 다미엘 천사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게 한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다미엘의 욕망과 그가 곡예사 마리온과 이루게 되는 사랑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베를린 위의 하늘>이라는 제목은 독일인에게는 트라우마인 공습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지만, 캐릭터들의 관계와 이 영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암시적 의미(implicit meaning)까지도 모두 조망하게 해주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2. 등장인물에 대하여
주요 캐릭터는 다섯이다. 천사 카시엘, 천사 다미엘, 배우 피터 포크, 곡예사 마리온, 그리고 이야기꾼 호머다. 호머는 과거를 안타깝게 회고하는 노인으로 나온다. 영화 속에서 한 번도 호명되지 않는다. 관객은 엔딩크레디트를 보고나서야 호머라는 역도 있었구나! 그 노인이 호머였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좀 무책임한 연출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호머는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를 지은 호메로스 같은 그런 이야기꾼인지, 과거에 시의 천사였다가 시인이 된 사람인지 좀 모호하게 되어 있다. 아무튼 이 다섯 캐릭터의 관계를 많은 것이 빠져나갈 각오를 하고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천사 카시엘 : 지켜보는 영원
천사 다미엘 : 다가서는 영원
배우 피터 포크 : 매개자 (영화 속 영화로 제 3제국 매개)
곡예사 마리온 : 흔들리는 현재
이야기꾼 호머 : 돌아가고 싶은 과거 (제 2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다미엘이 인간이 되어 마리온과 사랑을 이루게 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전체 골격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 둘을 한 쌍으로 보고, 카시엘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계속 호머의 수호천사로 남으므로 이 둘을 다른 한 쌍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피터 포크는 천사였다가 인간이 된 캐릭터로 다미엘과 마리온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피터 포크는 독일에 와서 출연하는 영화 속 영화(film in film)를 통해 넘어서고 싶은 과거(제 3제국, 나치)도 매개한다.
독어 Geschichte는 역사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이야기라는 뜻도 갖고 있다. 난 다미엘과 마리온 쌍이 역사로서의 Geschichte를, 카시엘과 호머 쌍이 이야기로서의 Geschichte를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 이 글을 풀어나가려고 한다.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는 하지만 나한테는 호머가 중요하게 보인다. 호머도 한트케도 벤더스도 나도 이야기꾼이므로. 이야기를 전하는 매체가 호머에게는 말, 한트케에게는 글, 벤더스와 나에게는 이미지인 것만 다를 뿐이므로.
3. 영화 속으로
천사 다미엘이 ‘아이가 아이였을 때… ’로 시작하는 시를 읊조리며 그 시를 손으로 적고 있다. 이 문장의 주절은 ‘아이는 몰랐다.’이다. 이 한트케의 <유년의 노래 Lied vom Kindsein>라는 시는 4차례 나뉘어 낭송되고 마지막에 다미엘의 독백이 추가되면서 확장되고 시에 마침표를 찍는 이미지로 영화는 사실상 마무리된다.
공중그네 곡예사 마리온의 공간은 곡마단과 그녀의 숙소인 트레일러, 그리고 인간이 된 다미엘과 조우하게 되는 클럽이다. 천사의 세계는 흑백으로 인간의 세계는 칼라로 묘사된다. 다미엘이 인간이 되는 과정에 상응하여 영화는 전체적으로 점차 흑백에서 칼라로 넘어간다. 이 영화의 암시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다미엘과 마리온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클럽에서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이야기꾼 호머의 주요 공간인 베를린 주립도서관이다. 이 영화는 대사(dialog)보다는 주로 등장인물들의 생각의 소리(thought-voice)나 내적 독백(inner monolog)이 천사들의 귀에 들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장면의 시작 부분, 카메라가 도서관 내부를 천정부터 서서히 훑는 동안 책 읽는 소리가 여럿 섞여 들리다가 갑자기 어느 여성의 책 읽는 소리가 상대적으로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다음과 같다.
‘Walter Benjamin kaufte 1921 Paul Klees Aquarell <Angelus Novus>... ‘
‘발터 벤야민은 1921년 파울 클레의 수채화 <새로운 천사>를 샀다… ‘
바로 이 그림이다. 벤야민은 그의 마지막 글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이 ‘새로운 천사’를 ‘역사의 천사’라고 부르면서 역사의 통찰을 위한 알레고리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9번 글에서 이 천사가 눈은 과거로 향한 채 자신 앞에서 벌어지는 파국을 끌어안고 싶어 하지만 진보의 폭풍이 강하게 앞에서 뒤(미래)로 불고 있어서 날개를 접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진보는 역사가 연속성을 지닌 채 스스로 진보한다고 믿는 속류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주의일 것이다. 이 책 읽는 사운드 외에 카메라가 도서관의 풍경을 스케치할 때 의미 있게 보여주는 이미지는 책 읽는 아이와, 성서사전을 놓고 신학 공부를 하는 남자와, <한 세상의 종말 Das Ende einer Welt>이라는 악보를 공부하는 여자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번 글과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사적 유물론과 신학을 하나로 엮으려는 벤야민의 구상 말이다. 이때 신학은 유대신비주의이고 곧 종말론을 상정하는 메시아주의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물론 벤야민은 메시아는 매 순간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말이다.
호머가 도서관 계단을 힘들게 올라오다가 난간에 기대어 쉬고 있는 것을 천사 다미엘이 지켜보고 있다. 호머가 읊조린다. ‘말해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세상 끝으로 내몰린 이야기꾼에 대해서… ’ 이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노래하소서, 무사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분노를.’으로 시작하는 것과 상응한다. 이어서 호머는 예전에는 자신의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던 청자들이 이제는 소설의 독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게 된 사태와, 그의 이야기가 아무도 전수받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주문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을 한탄한다.
두 번째 도서관 장면에서 호머가 사진집을 보고 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것이다. 벤야민은 <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글에서 잔더의 사진들을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의 영화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장면의 내적 독백에서 호머는 벤야민의 용어인 ‘지금시간Jetztzeit’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바탕에 깔려있는 벤야민의 이런 흔적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벤야민의 그것과 같다는 점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호머는 위의 장면에 이어 한탄을 지속한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평화의 서사시를 노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인류가 이야기꾼을 잃어버리면 인류는 자신들의 근원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벤야민은 <이야기꾼>이라는 글에서 이야기와 연대기적 기록, 정보 등의 차이를 논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이야기꾼과 근대의 소설가를 비교하고 있다. 나는 이야기가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그런 생각을 담은 글에서 이야기 생산자를 storyteller, storywriter, storyshower로 나눈 적이 있다. 말로 이야기를 하는 호머는 storyteller에, 글로 이야기를 하는 한트케는 storywriter에,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벤더스는 storyshower에 속할 것이다. 벤야민의 글 <이야기꾼>에는 사실 이야기 매체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말로 이야기를 전하고 둘러앉아 듣던 시절에는 이야기 속에 공동체의 기억이 차곡차곡 축적되지만 근대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호메로스는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400년 전 정도의 사건인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말(노래)로 만들었고 그것은 그대로 헬라스 사람 모두의 기억이 되었다. 근대의 소설가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참여한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쓴다. 그것이 사적인 기억에 머물지 않고 인류라는 공동체의 기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한트케의 고민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영화의 암시적 의미 속에 있지 않을까?
도서관과 더불어 호머의 공간인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이다. 호머 곁에는 수호천사 카시엘이 함께 하고 있다. 뒤로 베를린 장벽이 보인다. 이곳은 제 3제국 이전 시기 베를린의 문화 중심지였다. 폭격으로 황폐해져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광장을 걸으며 호머는 이곳이 포츠담 광장일 리가 없다는 말을 되뇐다. 이곳은 복원되어 번지수를 부여 받아야 할 자리이기도 하고 구원받아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공개된 지 불과 2년 후인 1989년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 해인 1990년 통일이 이루어지고 1995년부터는 이 광장에 다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곳에 영화관련 단체와 시설이 들어서고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다음 편에 계속]
박흥식의 자기 소개 :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다.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얼마 전 영화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다시 볼 일이 있었고, 이 영화의 바탕에 발터 벤야민의 사유가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흥분하여 10번 정도 더 보았고 벤야민에 대해 어설프게 알고 있던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을 가다듬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난 학자가 아니다. 참고한 국문, 독문, 영문 자료 등을 통해 이 영화와 벤야민의 연관에 대해서도 이미 연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벤야민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이 글을 쓰는 것은 단지 조금 더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내가 느낀 것이 이 영화를 다른 각도에서도 보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비평이 아니라 일종의 해설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박흥식의 영화이야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 2. No. 4. 2014년 4월, 박흥식,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