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실제 사이에, … , 어둠의 장막이 드리운다.

T S 엘리어트, ‘텅 빈 사람들’ 중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

고린도전서 13장 12절 중

글 들어가기 전에 :

실제와 실재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다소 혼란이 있는 것 같다. ‘실재’라는 단어는 사실 일상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 단어이고 주로 ‘실재한다’ 등의 서술어로만 특별한 경우에 쓰인다. 나도 평생 이 말을 쓴 것은 독서 토론에서 존재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즐겨 쓰지만 의미적이나 문법적이나 일반적인 사용의 면에서 보면 내가 말하는 대상을 설명하는데 적절하지는 않은 단어인 것 같다. ‘실제’라는 단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라는 식으로 훨씬 자주 쓰이는 단어이고 (‘실재’의 정의를 찾아봐도 ‘실제로 존재함’이라고 ‘실제’라는 단어를 사용해 정의한다) 명사로 사용하는 데에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이 글을 비롯한 모든 글에서 ‘실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색깔의 문제

예전부터 궁금했던 문제 중에 “왜 파랑과 빨강을 섞으면 보라색이 될까?”라는 것이 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꽤 흥미로운 질문이다.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먼저 빨간색이라는 말이 두가지 전혀 다른 대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빨간색은 우선 파장이 대략 700 나노미터 (0.0000007 미터)정도인 빛을 가리킨다. 이 빛은 가시광선 중 가장 낮은 에너지를 가지며 명확한 물리적 성질을 가지는 대상이다. 반면 빨간색이라는 단어는 사람 마음의 어떤 심상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는 각자의 눈속에(혹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호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이 두가지가 전혀 다른 대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 두가지 개념이 섞이게 되면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색이 된다’라는 서술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서술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빨간색은 650나노미터 정도의 빛이고 파란색은 480나노미터, 보라색은 440나노미터 정도의 파장을 갖는 빛이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인 빛은 그냥 700나노미터 파장의 빛과 480나노미터 파장의 빛이 섞여 있는 빛이지 440 나노미터 파장의 보라색 빛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람의 인식을 고려하지 않고 이 섞여 있는 빛이 무슨 색이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질문이다. 인식 외부의 빛에 '실제' 색깔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의 세 가지 원추 세포도 이 두 빛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파랑과 빨강을 섞으면 보라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의 심상 바깥의 실제 세계와는 아무 관계 없는 서술이다. 물론 노랑과 파랑을 섞으면 초록이 되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다. 그러나 에너지 면에서 초록이 노랑과 파랑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노랑과 파랑이 섞인 경우 그 평균값으로 색을 인지한다고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이해하는 흉내를 낼 수 있다. 적어도 물질 세계와의 대응관계는 존재하므로. 그러나 이런 식으로 두 가지 빛의 평균 에너지로 색을 감지한다면 대부분의 색 조합에 대한 인식은 가시광선의 에너지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한 초록색으로 편향될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색이 섞이면 많은 경우 초록색 톤을 띌 것이고 파랑과 빨강이 섞인 빛도 초록색으로 인식될 것이다. (물론 눈에 들어오는 빛은 수많은 주파수의 색의 조합이다. 그러나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두 가지 단색광이 섞이는 경우만 고려한다) 따라서 모든 스펙트럼의 빛이 섞여 있는 태양빛도 하얀색(혹은 투명한 색?)이 아니라 초록색 기운을 강하게 띄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세상은 훨씬 단색조에 가까워질 것이고 사물들을 구별하는 데 훨씬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색을 인식할 때 빛의 스펙트럼이 실제처럼 띠가 아니라 고리인 것처럼 치부하게 된 것일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두 가지 빛의 평균을 구하게 되면 두 색의 조합에 대해 훨씬 다양한 색 반응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고리라는 것도 사람의 눈이 인식하는 주파수 범위를 잘라 고리로 만든 것이므로 실제 빛의 스펙트럼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목적은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심상의 색이 세상의 실제 빛과는 독립적인 대상이라는 것을 예를 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일상에서 이런 것을 항상 주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관련된 얘기를 할 때도 많은 혼란이 발생하는 것 같다.

수학적 모델의 문제

마음 속의 모델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모델은 어떨까? 그 쪽도 실제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물리적인 세계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과학은 물리학이고 물리학에서는 세계를 수학적인 대상으로 기술한다. 공간을 기술하는 좌표계, 사물의 위치, 그리고 양자역학의 확률분표 등에 있어서 항상 실수, 복소수, 사원수 등의 수가 이용된다. 그러나 이런 숫자를 이용한 모델이 실제와 정말 대응되는지는 알 수 없다. 간단히 공간과 사물의 위치 좌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직선은 수학적 개념이고 이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예를 들어 수학적 모델로만 따진다면 내가 공을 한 지점에서 1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초속 1미터로 굴린다면 공은 1초 후에 그 지점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근사적으로 직선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더 정밀한 관찰을 하면 경로는 구불구불한 곡선이기 때문에 경로의 길이는 1미터가 아니라 훨씬 큰 값이다. 관찰의 정밀도가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경로는 아주 복잡하게 되고 (소위 말하는 프랙탈 곡선에 가까워진다.) 경로의 길이는 무한대로 커진다.

아무리 외부와 차폐된 상태에서 실험을 한다고 해도 직선 경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력이란 차폐가 불가능한 힘이고 우주 끝까지 뻗어나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중력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고 소위 비행기에서의 무중력 체험이라는 것도 사실은 자유 낙하 운동 체험에 불과하고 중력은 똑같이 작용한다. 지구를 돌고 있는 우주 정거장에 대해서도 ‘무중력’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지구 상의 중력과 거의 같은 중력(약 90퍼센트)이 작용하고 있고 다만 역시 자유낙하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우리는 지구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의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 힘은 또 그렇게 생각만큼 작지도 않다.

당구대에서 공을 맞출 때 크게 중력의 영향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공이 벽에 두세번 부딪히는 정도의 상황에서는 당구공의 궤적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마찰력이 아주 작은 당구대를 가정하고 당구공이 벽에 7번 이상 부딪힐 정도로 오래 운동을 하게 하면 그 때부터 당구공의 궤적은 주변 사람들과의 중력에 영향을 받게 된다. 즉 사람들이 어디에 서있는냐에 따라서 당구공의 궤적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 당구공이 10번이상 벽에 부딪히는 궤적을 그린다면 그 궤적은 행성들의 위치에서까지 눈에 띄는 영향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원자 단위의 정밀도에서 따진다면 모든 운동 경로는 세상의 모든 것에 영향을 받으며 극히 불규칙한 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 길이가 무한하게 커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속도 역시 무한대가 되고 모든 운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항상 위반하며 빛의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의미 있는 값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세계를 관찰하는 정밀도 수준을 선택해야 한다.

단순하게 보이는 개념이 무한대의 수렁으로 빠지는 경우는 물리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전자의 전하가 얼마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정확한 이론을 적용하면 그 계산값은 무한대이다. 때문에 유한한 값을 얻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수학적 근거가 부족한 ‘재정규화(혹은 재규격화라고도 부름)’라는 과정을 거쳐 이를 유한한 값으로 바꾼다.

실제를 가장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법은 좌표계, 사칙연산, 군이론 등의 수학적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학적 모델의 선택이 필연의 결과는 아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스케일이나 정밀도의 면에서만 봐도 해석이 달라지고 이 중에 어떤 것이 맞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단순한 대상이라도 정확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하면 거의 항상 발생하는 상황이다. 수학적 도구와 논리를 이용하지 않고 실제를 바라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