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지막 잎새에 보면 무명의 화가가 헌신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죽어가는 소녀를 극적으로 살리는 인상적인 대목이 담겨있다. 근대 회화 이전의 자연 모방에 속하는 수법으로 그 화가는 소녀를 위해서(이것은 미학의 무관심성을 위반한다.) 자신의 기술을 사용한다. 반면 리씨는 궁금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가, 나의 작품은 어떤 효용성이 있는가. 예술의 사회적 맥락의 구체성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예비 작가의 입장에 선 질문이다. 글머리 삽화로 쓰인 이미지 속의 작품 ‘마지막 잎새’는 리씨가 화폐를 전봇대 위에 2년간 매달아서 풍화시킨 것이다. 화폐는 그 사용 흐름 속에서 물리적으로 유폐되어 ‘지불정지’ 상황을 거치고 모양이 변형되어 전시장 안의 작품으로 사용되고 변환되었다. 이 작품은 거래가 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작품가의 책정은 어떻게 될까. 투자한 재료의 경제성, 적법성은 작품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최초의 물음
미술대학을 졸업할 즈음 리씨는 생각했다. 내가 하는 미술을 통해서 잘 살 수 있을까. 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그를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예술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한지. 대게 예술가가 되는 길은 단기적으로 경제적 보상이 적은(없는) 길이다. 예술가의 생은 순수라는 이름으로 경제적인 사각지대에서 숭고하게 파국을 맞기 일쑤인 보드게임 같다. 그러므로 ‘잘 사는 예술’에서 경제적인 것, 금전적인 것에 대한 사고는 중요하다.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1세기 전 칸딘스키가 쓴 책이다. 예술 하면 뭔가 정신적인 것이 담긴 것이며, 경제적인 계산과는 멀리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통념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리씨는 칸딘스키의 글이 발표된 1세기 후인 2010년 ‘예술에서 금전적인 것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새로운 가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미술을 하는 사람들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었다.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도 있었는데’* 유행가 가사에 나올 정도로 비극적 주인공인 고흐 같은 이가 대표적인데, 실제로 그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은 아주 가난한 계급이 아니었다. 동생은 은행가이고 집안은 목사 집안이다. 아주 가난한 부랑아 수준의 계급이 작가가 된 경우는 글쎄...미국에서 그래피티로 주목받아서 미술가가 된 바스키아 같은 경우일까. 남한 사회에서 중년 이후까지 작가를 하는 경우는 사회적인 배경이 작용한다.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는 버팀목이 없이 작업에 매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 구조적으로 예술가의 길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을 통해서 가난한 집을 일으키려고 화가가 되는 경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지 않는다.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이다.
무소유의 소유
리씨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타계했고, 바로 ‘무소유’의 판권 분쟁이 사회 이슈가 되었다. 도저한 자본주의의 기반이 빙산의 일각으로 비친 것이다. 무소유의 소유권을 둘러싼 시비에서 리씨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제는 돈이다 이 바보야.리씨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교육은 붕괴할 것이다. 가르치고 보여주려는 것을 보지 않고 다른 것에서 해답을 얻는 청개구리의 시선. 사시의 시선을 가진. 니체던가 진리가 흘낏 곁눈질로 보인다고 했던 이가.
자연 잉여
경제적인 문제에서 자유롭게 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속에서는 어느 정도 생계에 관한 것은 충족된 상황에서의 유유자적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안분지족도 최소한의 소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를테면 수익 형 부동산이 있다거나 든든한 투자 상품이 있는 경우 말이다. 그 외에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어느 숲(자신 명의의)에서 최소한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우일 테다. 예술과 삶이 연합한 유형도 있다. 유명한 사회심리학자가 최근에 ‘미역창고’라는 외딴곳(서울 중심에서)의 바닷가 창고를 개조하여 작업실을 만든 소식이 전해진다. 그는 인터뷰 영상에서 미역창고가 동명이의어로 ‘아름다움을 위한 노역(문학 창작)을 하는 작업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50대 남성들의 로망을 견인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이러한 실행들은 상징자본을 키우고 생산물들이 자본으로 전환이 가능할 때 지속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앞의 경우처럼 별개의 수입이나 자산을 소비하는 행위이다.
두 번째 물음
근대이후 탄생한 예술(Art)은 생활필수적인 행위에서 한 걸음 떨어진 위계에 놓여있다. 왜 그런 것일까. 당연해 보이는 현상에 질문을 던져 보자. 때론 무모한 질문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주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개념은 서양의 근대에 만들어졌다. 미학과 관련이 있으며 예술을 위한 예술이 가능하게 된 것은 낭만주의에 와서다. 봉건 시대 왕정과 귀족의 문화에서 시민(부르주아)혁명을 거치면서 시장이 탄생하고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새로운 시장에 자신의 작품을 팔 수 있는 가능성(팔아야 할 숙명)을 지닌 시대가 예술가에게 도래 했다. 예술은 이 시기 생활(기술)과 장식 등에서 벗어나서 자율성을 탐색하게 되었다. 반대로 수용자 입장에서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예술에 대해 1도 모른다 해도(모를수록) 삶이 잘 살아지는 이유는 바로 삶에서 말끔하게 분리된 예술 덕분(?)이다. 이것이 근대 서양에서 빚어진 예술의 이념이다.
무관심성
해괴한 이 번역어는 근대 미학의 핵심적인 고전 중 하나인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중요한 개념이다. 간단히 얘기하면 미적 작품에서의 주요한 속성으로 사회적, 도덕적, 실용적인 여타의 목적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미적 판단의 특징이고 그것이 담지된 것이 예술가의 작품이다. 이러한 근대 예술 관념과 미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이 칸트가 제시한 무관심성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많은 비판이 가해진 개념이다. 비판이 담긴 대표적인 예로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를 들 수 있다.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 짓기’의 부제는 ‘사회적 판단력 비판’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개인의 취미 판단이 실은 계급적 구조로 인해서 취미가 결정된다는 사회적 배경 위에 있으며 이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자유롭고 무관심한 관조에 의한 취미판단(관조 미학이라고 부른다.)은 특수한 계급의 전유물이라는 비판이다.
자율의 기반
자율적 예술 개념이 발달하는 시기에 예술가도 자립이라는 이상에 내몰리는 계기를 맞는다. 흔한 통념 중에 고흐 같은 예술가가 시대와 타협하지 않아서 작품을 한 점도 팔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시장은 당시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보상받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고흐와 세잔 등 당대의 선구들은 작품을 팔지 않으려던 것이 아니라, 부단한 목적의식을 가졌지만 시장이 아직 그들을 못 알아봤을 뿐이다. 그들이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잘 팔리는 그림에 흥미를 잃고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될까. 혹은 드라마틱한 모양새를 잃어버려서 시장으로부터 주목도가 떨어지려나.** 아무튼 모더니즘은 그러한 예술의 (시장 의존적)자율성을 탄생시킨 시대이자 이념이다.
보편 예술
예술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 지평을 여는 것.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내건 기치 중에 이 문제는 일반 대중(인민)들의 삶 속에 예술의 가치를 고르게 나누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한 편으로 부르주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온 예술의 사회화에 대한 의지는 시대적인 요청이다. 부르주아의 관조 미학을 혁파하고 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향이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주요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보면 인민을 선동하고 세뇌하는 도구로 보이지만, 이는 예술의 자율성을 비추는 거울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비판주의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는 예술에 대한 비판의식은 인상주의보다 한참 뒤에 등장한 관념이다. 양차 대전이 끝나고 제조업의 시대에 후기 자본주의 시장이 보다 성숙(영악)해지고 모든 것이 판매가 가능한 듯이 보이는 때였다. 1차 대전 시기에 다다의 자기 파괴적 행위들은 양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이끄는 활황을 타고 부활한다. 이때 한 갈래는 상품으로 거래될 수 없는 형식의 작품경향들이다. 이 때 예술 시장과 결부된 예술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예술의 관념이 시장의 확장양상의 한 편에서 자라났다. 작품이 아니 모든 것이 상품이 될 수 있는, 되기를 바라는 사회에서 예술가는 반항하는 것이다. 대지 미술과 혐오의 미술, 개념 미술 등이 이러한 문제의식의 바탕에서 탄생한 경향이다. 하나는 거래하기에 너무 큰 규모, 하나는 거래하고 싶지 않은 것, 다른 하나는 살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저한 자본주의는 이마저도 여러 방향으로 상품화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시장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딜레마 게임이 모더니즘 이후 현대 미술사의 한 페이지이다.
경제적 예술
아방가르드는 생활과 예술의 비분리성을 주장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아직도 이러한 신념하에 자신의 작업을 펼친다. 리씨는 그 일환으로 경제적 예술을 생각했다. 칸트와 다르게 ‘경제적 관심이 포함된 예술’이 리씨가 정의한 경제적 예술이다. 여유 있게 자발적 가난을 선택할 수 없는 구조적으로 가난한 상황(계급)에서 예술의 실천이 불가능한 구조에 대한 항거의 지점은 경제와 예술의 통합적인 모색이다.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은 관습적인 것으로서 고부가가치의 작품을 생산하고 거래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대안적인 경제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종합이 바로 리씨의 삶-예술(운동)이다. 이로써 리씨는 ‘삶의 전방위적인 개척’을 예술로 재정의 한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 노래, 김희갑 작곡, 양인자 작사, 1985. 도입부 나레이션 부분에 나옴. 고흐의 불행의 원인이 경제적 가난만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논의상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실례를 무릅쓰고 가져왔음. 정신적 고통이라고 흔하게 생각되는 문제, 특히 예술가는 정신적 문제를 보여주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표상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을 경제적 문제로 바꾸어서 보려는 의지가 이 글에서 아주 중요한 점이다.
**피카소 같은 후대가 대표적으로 시장을 활용하여 작품성과 유복함을 동시에 구가한 예술가일 것이다. 그의 계급적 출발점이 비록 리씨와 다를 지라도. 리씨가 장수하려는 계획(그의 작업이기도 하다)은 이러한 자기 환류에 대한 관심과 계산에서이다. 아포리아트 1편, ‘장수 계획: 잘 사는 예술 서설’ 참조.
***대지 미술 및 개념 미술은 사진이나 기록물이 거래되었다. 혐오적인 표현물들도 거래된다. 대표적으로 피에르 만조니의 ‘예술가의 똥’을 들 수 있다. 통조림 캔의 형식 속에 담긴 이 작품은 미술관에 보존되고 있다가 몇 십 년 동안 내부의 차오른 가스로 인해서 최근에 하나가 폭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는 뱅크시와 다르게 의도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 편 대지미술의 변형 확장된 버전으로 ‘4대강 대운하’을 작업을 보자. 대한민국 정부는 거대한 자금을 지원해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리씨는 이 새로운 자기충족적 정의를 박정희의 ‘새마을 정신’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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