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은 깊은 밤 숲 속에서 일어났다. 번쩍거리는 횃불을 앞세운 로마군인들의 갑옷소리와 경비병들의 움직이는 소리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마치 주요인사를 납치하라는 특명을 받은 네이비실 특공대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을 체포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행동반경, 주변인물에 대한 정보를 모두 꾀고 있는 내부자를 아군으로 얻은 체포부대는 안도했다. 확실한 정보가 있는 이상 험한 꼴은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예수님 일행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할 때까지 기다렸다. 예루살렘 도심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다가 소동이라도 일어나면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반란과 소요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예상은 적중했다. 예수님 일행이 겟세마네로 산책하러 갈 것이라는 판단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는 예수와 함께 반역자로 몰려서 사형당하느니 제사장 편에 서서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로마군병과 경비대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얼마전 예수님과 식사테이블을 떠날 때만 해도 마음을 불편하고 울적했다. 하지만, 그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면의 음성에 고개를 돌려버리자 그의 내면은 점점 굳어지고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진실에 눈을 닫은 순간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주어진 업무만 기계적으로 수행해내는 전문기술자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체포해야 한다는 목표만이 유다를 지배했다. 그분이 자신의 스승이고, 그가 참다운 인간이라는 사실은 전혀 상관 없었다. 발부된 구속영장을 어떻게 하면 신속하고도 은밀하게 집행할지 하는 생각만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런 목적이 그를 사로잡아버리자 자신에게 빵을 떼주던 예수님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참다운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대가로 불편한 마음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제는 예수님 체포라는 과업이 뭔가 대단한 대의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공허하고, 허무한 유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목표에 스폰지처럼 빨려 들어갔다. 유다의 침울하던 표정도 알 수 없는 냉담한 미소로 바꿨다. 겟세마네 공원은 이런 일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물고,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서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알 사람이 없었다. 인간의 길을 떠난 자리에 영혼 없는 기술자들이 등장한다.
이 겟세마네 동산은 아름다웠다. 야트막한 언덕에 오롯이 솟은 올리브나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분위기는 쉼을 선사했다. 예수님이 이 장소를 사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실, 예수님이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듯 했다. 이곳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여 있었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제자들과 겪은 에피소드들이 예수님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함께 걸을 수 없는 깨달음에 이르자 슬픔이 밀려왔다.
그 슬픔이 예수님의 마음에 스며든 순간 저 멀리에 로마군인들과 유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올 것이 왔다. 예수님은 이 모든 체포의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작성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질문을 한다
“당신들은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그들이 말했다.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체포되는 피의자이지만 이 모든 상황을 인식하고 있고, 장악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체포되는 것이고, 기꺼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결과를 감내하기도 다짐했다. 그런 내적인 결단을 하고 있는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담담하고, 담백하다.
“내가 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정신병자거나, 예수님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을 들고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 앞에 나서서 ‘나 여기 있으니 잡아가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이 사람이 정말 예수라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예수의 손에 칼이 들려있는 것이 아닐까? 주변에 매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머리는 한 없이 복잡하고, 불안했다. 그래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예수의 편안함과 담백함에 압도된 것이다. 유다가 이 사람이 예수라는 신호를 보낸 후에야 다시 예수님를 상대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묻는다.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왜 자신이 나서서 신분을 밝혔을까? 그 이유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제가 바로 여러분이 찾는 예수입니다. 여러분은 저만 데려가십시오. 제가 순순히 갈 테니 이 사람들은 보내주세요. 그들이 조용히 떠나게 내버려 두세요.”
그는 체포되는 순간에도 그와 함께 한 제자들이 피할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자신은 스스로 선택해서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자신만 믿고 따라온 제자들은 다르다. 그들을 자신과 같은 반역자로 내몰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순간 제자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베드로의 말에는 진심이 있다. 하지만, 그 진심은 늘 과장되어 있었고, 지나친 감이 있었다. 자신이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단언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의 격앙된 목소리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믿어달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차분하게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응수한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베드로는 지금 이 순간 로마군이 등장하자 당황했다. 지금 이 순간이다. 그가 공언했던 충성심과 용기를 나타내야 할 그 순간이 말이다. 예수님이 로마군인들과 경비병들 앞으로 태연하게 나아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서 용기 있게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 그의 손은 벌써 허리춤에 감춰둔 칼로 향하고 있었다. 칼을 들어올려서 내리쳤다. 베드로의 정신은 이미 마비되어 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칼로 무엇을 내리쳐야 할지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그의 칼은 어느덧 제사장 시종의 귀를 잘라냈다. 눈 앞에 붉은 선혈이 튀어나오자 베드로도 얼어붙었다. 그는 충성스럽기 위해서 용기 있는 결단을 했다고 자위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칼로 저항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론 아닌가? 행동하기 전에 했어야 하는 생각들이 붉은 피 앞에서 하나 둘씩 떠올랐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마디에 정신이 났다.
“그 칼을 다시 꽂아 넣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길이다. 나는 도망갈 생각이 없다.”
예수님의 한 마디에 분주했던 겟세마네는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예수님은 군병들을 따라 갔다. 남겨진 제자들은 모두들 겁을 먹고 흩어졌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렇게 허망하게 예수님을 보낼 수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자신만은 끝까지 예수님을 지켜야 했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를 좇아 제사장 저택으로 따라간다.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는 요한과 함께 있으면, 위험도 줄어들 터였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연줄이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베드로는 집 밖에 머물러야 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점점 더 그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문을 지키는 처녀의 질문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아니에요?”
베드로는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먼저 나왔다.
“무슨 말이에요. 저는 아니에요.”
불편한 마음에 문 앞에서 자리를 옮겼다. 추운 몸도 녹일 겸 그 집 종들과 경비병들이 불을 쬐고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다그친다. 베드로는 말고의 귀에 칼을 들이댄 것을 후회했다. 그 자리에서 칼만 휘두르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는 아니에요.”
제사장의 시종 친척이 이상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아까 겟세마네에서 당신이 칼을 휘두르지 않았나요? 예수와 함께 옆에 있었잖아요.”
베드로는 말도 안 된다면서 강하게 말했다.
“저는 예수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해요.”
그의 강력한 맹세와 칼부림은 두려움과 불안의 표현이었다. 그 두려움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그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 충성하겠다는 과격한 선언도 사실은 배반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대한 반동에 불과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막무가내의 긍정적인 생각에 매달렸다. 예수님이 처형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결국 다 잘 될 거라고 자위했다. 현실은 너무도 불편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환상을 믿었고, 그 세계 속에서 예수를 따랐다. 그런데 자신이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두려운 미래가 현실화되었다. 현실은 그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몽상가는 홀연히 돈키호테처럼 칼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귀를 자른다. 그의 공격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가 칼을 휘두른다고 로마군이 물러 갈리 만무했다. 그는 정작 적군의 목을 겨냥할 용기도 없었다. 그의 칼부림은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나온 반동적 행동에 불과했다. 그는 스스로 어떠한 결정과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주어진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나락에 떨어졌다. 그 결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결론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 아니라 상황에 내몰린 채 강박적으로 결정을 내리면 더 큰 위험을 직면하게 된다. 예수님이 구금된 대제사장 집으로 쫓아간 행동은 만용이었다. 제자들이 체포되지 않는 조건으로 예수님은 스스로 체포되었다. 그냥 그 순간 도망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베드로는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간다. 그가 후회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제사장 시종인 말고에게 칼을 휘두른 순간 그의 얼굴은 잘 알려졌다. 그 주변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람들이 그런 베드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부터 옮기는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이었다. 주변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추궁한다.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에 무너졌다. 단지 주변 상황이 말하는 대로 기계처럼 반응했다.
수탉의 울음소리에 베드로는 정신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침이 오는 소리에 그는 강박, 불안, 두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예수님을 상기시켜주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고통의 자리로 한 걸음씩 들어가신 분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리듬이 있었다. 그는 이 리듬에 맞춰서 장중한 장송곡을 연주하듯이 군인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었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5, 2016년 5월, 박현욱,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