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여 년의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의 산업개발과 경제성장은 괄목하다. 유럽이나 서방의 선진국들이 2~3백 년 동안에 걸쳐서 이룩한 산업화의 성장을 우리나라는 반세기 만에 압축해서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을 아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운다는 한국어가 '빨리빨리'라는 한마디다. 이 말은 우리 사회의 산업화와 이를 통해 변화된 국민성까지 설명해 줄 수 있다. 

산업화 시대에는 오차를 최소화 하거나 없애는 대량생산과 효율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고 관리 포인트였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숙련되고 해당 분야에서 전문성이 있는 프로 인력을 원했고, 제대로 된 국제화가 시작되기 전인 1997년 IMF 이전에는 대부분 소양과 적성을 가진 신입사원을 뽑아서 오랫동안 업무 교육과 경험 축적을 갖게 함으로써 회사와 산업이 성장했다. IMF후에는 급격한 국제화로 해외에서 이론적 배경과 실무적 경험을 갖춘 전문가들이 대거 한국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신입사원에 의존하던 순혈주의가 급격히 타파되고 경력 우대의 채용 환경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제화와 더불어 새롭게 발달한 기술과 기계로 인한 시스템의 발달로 종전의 숙련에 의존하던 오차 제로의 효율성 생산시스템이 기계화되고 자동화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점차 많은 인력이 불필요하게 되고, 특히 제조업이나 기술 관련 제품의 개발과 생산이 기계화되어, 이 분야를 담당한 이공계 인력들을기획이나 영업 분야를 맡았던 인문계 인력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른바 절대 인력의 수요가 줄어드는 성장 정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요즘 주위를 돌아보면 가치관의 평준화, 획일화 현상이 뚜렷해 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대학을 가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이후 결혼을 하고, 집 장만과 자녀 교육에 등이 휘는 세대가 되는 일반적인 틀을 따라간다. 오직 남보다 먼저 출세하고, 돈을 더 많이 벌고, 그것도 어려워 보이면 자기는 포기하더라도 자녀들에게 인생을 올인하여 자기가 못다 이룬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심지어 자식의 성적이나 취업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며, 또한 일가를 이룬 부모들은 그들이 확보한 기득권을 자녀들에게 까지 연속하여 지켜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순환고리도 점차 느슨해 져서 대학을 졸업을 해도 취직이 여의치 않고, 취직을 하더라도 집장만과 자녀 교육만으로도 등골이 휜다. 

기업은 기업대로 기계화의 의존도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성장자체가 둔화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어렵게 취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 또는 둘씩 낳아서 곱게 길러진 신세대는 직장 생활의 적응 조차 어렵다.

획일된 가치관과 물질만능주의는 제로섬(zero sum)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아 나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남의 것을 빼앗아야 된다는 사고가 굳어졌고, 도덕교육과 인성교육을 통해 배웠어야 할 남에 대한 배려나 희생은 기대하기가 힘들다. 나보다 더 낫기는커녕 생존의 문제로 모든 것이 살벌한 전쟁터로 바뀌고는 한다. 대학에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고 융합에 대한 교육과정이 늘어나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경쟁에서 살아남고 안전한 것을 추구해온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들은 GPA을 올리는 과정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융합은 학문과 산업도 자기의 가치에 남을 인정하고 남의 가치를 배려해야 하는 기본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쉽지가 않다.

학교나 학생들이 분포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학생들의 진로를 물어보면 의외로 창업 희망자가 많다. 취직이 1/3, 진학이 1/3, 그리고 창업이 1/3 된 집단이 있는데, 동기를 물어보면 세 그룹 모두 다 뚜렷하지가 않다. 앞서 열거한 비슷한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취직, 진학, 창업을 희망 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도전과 열정, 그리고 새로운 기회포착을 위한 창업이 아니라 어려운 취직의 대안으로 창업을 시도한다면 성공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유럽이나 일본 또는 미국에서 성공한 모델을 그대로 벤치마킹 하여 고속성장을 해온 우리가 이제 선진국의 오리지널과 싸워야 된다. 예전의 롤모델을 따라만 하던 시대와는 크게 다른 게임이다. 전문성은 기본이고 이제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성과 융합성을 발휘해야 한다. 지난 시대의 대기업 성공 사례와 직장생활을 그리지만 한정된 일자리와 취직 후 치열한 전쟁터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눈길을 해외로 돌리거나 창업을 생각해 봄직하다. 물론 초창기의 어려움과 리스크를 각오하기만 하면 여전히 기회는 많다. 다만 창업을 시도하는 동기와 각오는 기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의 대안이어서는 곤란하다. 

미국은 유럽의 문화국가와 아시아 신흥국의 중간에 있으면서 창의적인 스타트업 회사의 산실로 유명하다. 전통을 지키고 고유의 가치를 이어가는 유럽이나 일본의 오래된 전통 회사와는 달리 미국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회사가 설립되고 성장하여 미국 경제의 초석이 되고 있다. 여러 가지 벤처 생태계가 잘 발달되어 있고 미국의 자국 인구만으로 성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성공하면 세계로 확산되는 이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타트업의 태생부터가 단순 명쾌하다.

 

현재의 불편함과 문제점을 관찰한 몇 명의 학생들이 캠퍼스를 중심으로 모여서 아이디어를 모은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큰 투자 없이 작은 모델(프로토타입)로 만들고 이것의 가능성으로 보여준 다음 투자유치(펀딩)이 이어진다. 차고나 창고 창업으로 표현되는 실리콘 밸리의 창업신화는 초기 고정비를 대폭 낮추는데 있다. 창고나 차고에서 허름한 중고 가구 위에 중고 컴퓨터 한 두대로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이들 통해 아이디어와 테스트 제품을 만들고 한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간다. 실패하더라도 인생의 큰 빚으로 남는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재기불능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는다. 실패의 경험은 다음의 성공을 위한 보약이지 밑거름이 된다.

아이디어 하나로 정부나 민간자본의 투자를 받아서 사무실을 구하거나 넓히고, 인테리어에 신경을 써서 창업을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비싼 기기와 인력을 뽑아 장밋빛 미래로 가득찬 창업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자리도 잡기 전에 대부분의 기업은 자금이 떨어지고, 뭔가 알 듯 하고 잡힐 듯 할 때대는 이미 자금이 바닥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초기 고정비가 너무 많이 들어 본격적인 운전 자금이 필요할 때 이미 자금이 고갈되거나 투자자의 회수 압박에 쪼들리고, 그러다보니 기술개발과 영업은 뒷전이고 투자금 사용 보고나 신규 투자를 위해 동분서주 하는 많은 벤처인 들의 애환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젊었을 때 자주하는 배낭여행은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수많은 실패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사전에 계획된 여행길에서 벗어나 보기도 하고, 식당에서 외국어로 음식 주문을 하다가 입에 맞지 않는 엉뚱한 토속 음식을 받아 먹어보기도 하고, 한국식 영어로 질문을 하다 황당한 답변을 듣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실수이면서 곧 실패다.

굳이 해외여행이 아니라도 출근이나 통학 시에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각기 다른 출퇴근 방법을 사용해 보면서도 새로운 시도의 실패를 맛보게 된다. 똑 같은 식당만 다니고 꼭 같은 길만 다니는 사람이 운 좋게 사업 자금을 받아서 창업을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라고 누구나 이야기 하지만 실생활에서 실패를 용인 하는 사람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도덕적인 실패, 무모한 실패,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실패일 수도 있다. 부모 몰래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다가 운동장에서 넘어져 팔이나 다리에 상처가 나면 부모를 속일 수도, 혼자 참을 수도 있고 부모님이 안다고 하더라도 용인 될 수가 있다. 하지만 평소에 준비도 안되고 연습도 안된 상태에서 자전거도 못 타는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시도하거나, 번지 기초훈련도 안 마친 상태에서 멋있어 보이는 번지 점프를 시도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다. 운 좋게 성공을 한다고 해도 남들이 절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큰 실패가 예상되는 일은 반드시 작은 실패를 많이 하여 연습과 시행 착오를 거쳐야 이룰 수 있다. 이제는 무작정 실패를 용인한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가정이나 조직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여유 있게 넉넉히 정해주고 또 실패의 단계나 종류부터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작은 실패,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시작된 작은 시도로부터 일어나는 작은 실패부터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할 때 체력도 커지고 경험도 쌓여서 단계적으로 새로운 일과 시도를 해 나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이디어나 생각 하나만으로 큰 돈을 들여서 사업을 시작했다가 집안이 망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어가는 주위의 많은 창업자(오히려 어쩌면 이분들은 창업자가 아닌 개업자 인지도 모른다.)를 보면서, 작은 시도 작은 변화를 통한 린스타트(lean Start), 단계적인 시도를 통한 점진적 확장 전략을 쓰는 선택(Real Option)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평소에 생활 속에 관찰력과 호기심을 통하여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 사람에게 창업을 지원하는 것은 정부나 기업 엔젤 투자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성장이 정체된 이 시대에 취직을 대신할 창업 유도와 지원은 벼랑에서 '낙하산도 없이 뛰어 내리라!'는 것이다. 낙하산을 메기만 해서도 안 된다. 안전장치가 되어 있는 훈련장에서 낙하산 펴는 법과 낙하하는 법, 그리고 착지하는 법을 충분히 연습하고 뛰어 내리게 해야 한다. 

이 시대에 창업 열풍은 바람직 한 것이다. 다만 학생들이 나에게 와서 졸업 후 취직을 하는 것이 좋은지, 창업을 하는 것이 좋은지 질문해 오면 나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취직하는 게 낫다고 훈수한다. 그러나 끝까지 창업하겠다고 우겨서 테스트에 통과하면 내가 오히려 창업자금을 지원해 줄 것이다. 이러한 준비된 학생들은 실패해도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다시 일어난다. 실패하면서 몸집이 단련되는 학생들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목이기에 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2, 2015년 4월, 권강현, 서강대 교수/전(前) 삼성전자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