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거침 없이 진실을 말할수록 예수님 주변에는 감시와 통제가 심해졌다. 그는 유대지도자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범 1순위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언어는 유대종교시스템을 붕괴시킬만한 폭탄이었다. 결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과 결코 동거할 수 없는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예수님 주변의 감시망이 감지되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인신을 구속하고 체포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대종교세력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도피한다. 그곳은 요단강 건너편의 광야였다. 세례 요한의 활동근거지이자, 구도자들이 모이는 지역이었다. 종교권력의 외적인 권위가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 사막까지 예수님을 추적해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예루살렘 권력층들에게 구도자적 삶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이 집결한 이곳까지 종교적 사법권을 행사하기에는 무리였다.
간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속적인 감시, 시험, 미행, 음모로 가득 찬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였다. 예수님의 절친한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 곁을 지키면서 수고했던 사람들이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거나, 사역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질 때, 예수님은 이 나사로 가족을 찾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이해해주었고, 예수님의 사정에 공감해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였다.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베다니 나사로 집이었다. 베다니는 예수님에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돌아갈 집이 있었다.
그런데 전해진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당연히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사로에게로 달려올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틀 동안이나 요단강 건너편에서 머물렀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답변은 뭔가 안이한 데가 있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날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죽어가는 오빠를 앞에서 두 자매는 심한 정신적 붕괴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이라는 피상적인 답변만 늘어놓았다. 지금 당장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잘 될 거라고,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는 둘 중의 하나다. 우선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정말로 무책임한 경우다. 이 경우는 그런 상황에 대해 신중한 고려가 결여된 채 좋은 것이 좋다고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것이다. 아니면, 고통 속에 있는 사람과 의례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에 적절한 표현이다. 서로 가깝지도 않은데 너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해도 위로 받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수 있다. 인사를 주고 받아야 하는 적절한 거리를 둔 관계에서는 일이 잘 풀릴 것이고, 병세로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적절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절친의 치명적인 질병 앞에서 의례적인 관계에서나 주고받을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언어가 너무도 무책임하고, 부주의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죽을 병이 아니고, 잘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답장을 전해들은 두 자매의 마음이 어떠했을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예수님이 무책임하게 느껴졌고, 그에게 서운했을 것이다. 늦게 오면 그 이유라도 말해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납득할 수 없는 값싼 위로를 위로랍시고 하는 예수님에게 짜증이 치밀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을까? 나사로의 병세에 관해 들었을 때, 예수님은 본능적으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이뤄질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유대에서 도망자 신세로 광야에 나온 자신과 제자들을 생각해 보니 답이 없었다. 지금 이 시점에 유대 땅을 밟는다는 것은 명백한 자살행위였기 때문이다. 유대지도자들이 전유대 지역에 걸쳐 정보원을 배치해두고 예수님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쉽게 유대로 몸을 움직일 입장이 못되었다. 본인과 제자들의 생명이 위협에 처했다. 이런 와중에 들려온 나사로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예수님의 귀에 당장은 들어오지 않았던 듯하다. 중병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좀 더 가볍게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틀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생각을 가다듬자, 예수님은 나사로를 만나러 유대땅 베다니에 직접 가야 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가벼운 병이라고 생각하면서 들었는지 몰라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중병이라는 말이 예수님의 생각과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한다.
“다시 유대로 가자.”
제자들에게 이 말을 자살하러 가자는 말로 들렸다.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유대땅으로 가는 것은 폭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드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대답한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제 주변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지켜보고 있어요. 저를 음해하려 하는 사람들도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제게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에요. 제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어요. 저는 그를 깨워야 해요.”
제자들은 대답한다.
“나사로 병도 한 숨 푹 자고 나면 낫겠지요.”
예수님은 이제 분명하게 말한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어요. 제가 거기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네요.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에게도 새로운 마음이 찾아올 겁니다.”
이런 각오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베다니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곳은 마을 전체는 소중한 지도자를 잃었다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다. 마을 전체가 그림자로 덮여 있는 듯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지켜주고, 돌봐주던 유일한 오빠였다. 그의 자리가 너무도 커서 두 자매는 슬픔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를 이대로 떠나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나사로의 사람됨에 매료되었던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와 두 누이를 위로했다.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마르다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리아는 얼이 빠진 채 허공만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말한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제 오빠가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예수님이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마르다는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예수님을 찾았는지 떠올렸다. 죽어가는 오빠는 임종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사로 가족이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지역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사실에 분노했다. 예수님 앞이라서 에둘러 말했을 따름이지 이 말의 진실은 이렇다.
‘우리 오빠가 사경에서 헤매다가 죽어갈 때 예수님은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과 친가족과 다름없는 각별한 사이 아니었던가요? 우리는 예수님이 힘들 때 옆에 있어줬어요. 저희 마음이 이렇다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린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좀 뜬금없는 대답을 한다.
“마르다, 오빠는 살아날 거야.”
마르다는 귀를 의심했다. 이 말은 위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시험처럼 들렸다. 그래서 즉시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예, 마지막 날에 오빠도 부활하겠지요. 그 때 다시 살아나겠지요.”
예수님은 이제 도발적으로 나온다.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단다. 지금 이 순간 부활과 생명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 나의 마음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어.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니?”
마르다는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듯이 답변한다.
“알 것 같아요. 예수님과의 만난 뒤로 제 삶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겼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되었잖아요.“
마르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빠를 살린다는 말이 고맙기도 하고, 너무 허황되게 들렸다. 이럴 때 예수님과 말이 잘 통하는 마리아를 불러오는 것이 상책이었다. 마르다가 마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예수님이 너를 찾으신다.”
마리아는 정신이 나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달려간다. 마리아가 죽은 오빠를 위해 애도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착각한 많은 유대인들도 따라갔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 발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마음에 있는 말을 쏟아놓는다.
“예수님, 도대체 어디 계셨어요? 함께 계시기만 했어도 오빠가 이리도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하던 예수님도 마리아의 한 마디에 감정이 복받친다. 마리아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줄 예수님을 만나자 이제 마음 놓고 자신의 슬픔을 쏟아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오빠를 만난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물이 그 자리의 주변사람들에게 전염되었다. 예수님도 울었다. 나사로가 그리웠고, 그와의 함께 한 시간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에 스쳐갔다. 나사로는 예수님에게 각별한 친구였다. 나사로는 나사렛에서도 온 예수를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촌동네 목수라고 무시할 때도 예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중했다. 예수와 그는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격의 없는 태도와 진실함을 좋아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쉼을 누렸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눈먼 사람의 눈도 뜨게 한 사람이 정작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방치했다고 비난했다. 요단강 건너편에서 이틀이나 되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방문을 늦춘 예수님의 게으름과 무책임함에 대해서 한 마디씩 했다.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그런 비난이 들리지 않았다. 예수님은 격정에 휩싸였다. 그 격한 감정은 분노였다. 그것은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이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죽음으로 친구를 상실한 사람이 절망의 심연 속에서 느끼는 분노이기도 했다. 무기력감과 상실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수돗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친구를 생각만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혀있는 자그마한 굴 앞에 선다. 돌을 치우게 하고 기도를 시작한다.
“하나님, 당신은 따스한 아버지입니다. 늘 제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지요.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저와 함께 하시지요. 오늘 제 마음은 옆에 서있는 이 사람들 때문에 무너집니다.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세요.”
이제 예수님의 음성은 선포로 바뀐다.
“나사로, 나오거라!”
그러자 온 몸에 천을 감긴 나사로가 얼굴에 덮은 수건을 뒤집어쓰고 굴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덧붙인다.
“편하게 움직이게 천을 풀어주세요.”
나사로가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걸어 나왔다. 예수님의 친구,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베다니 마을사람들의 이웃이 돌아왔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던 죽음의 심연이 순간 정지되었다. 절망이 희망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이런 극적인 사건은 인류역사에 흔치 않았다.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상처를 강요했고, 우리는 무기력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근원적인 상실을 경험하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의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참 연약한 존재방식이라는 것을 받아 들어야 했다.
이런 죽음에 새로운 빛이 찾아오는 경험했다.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이런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픔을 신적인 공감으로 확장시키고, 신과 하나된 삶의 발걸음이 우주적인 기적을 만들어낸다. 놀라운 기적은 아픔을 아픈 그대로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고, 무력감에 분노하고, 답답한 현실에 허기진 과정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존재가 그런 상처, 아픔, 고통, 분노에 충분히 머물면, 구원이 찾아온다. 우리의 마음은 조급하다. 이런 고통 자체를 겪지 않으려 한다. 죽기 전에 나사로가 치료되면 좋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갈등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
완벽하고, 편안하며, 건강한 상태가 영속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처럼 삶은 죽음을 벗삼을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신을 욕한다. 인류에게 왜 고통이 따라다니는지 묻는다. 우리의 질문에는 끝이 없다. 고통을 피하고 싶고, 고통을 받아들이기 싫고, 고통에 머물기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으로 고통을 부정한다. 하지만, 고통을 이기는 길, 고통을 치유하는 길은 예수님처럼 모두가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다. 서로 가슴 아파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우리는 고통 없이 안정된 마음으로 넘어가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이 존재한다. 이를 거절하면, 우리는 무감각의 저주에 빠진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눈에 수도꼭지가 풀린 사람처럼 펑펑 울어야 한다. 이런 눈물과 애도의 순간이 지나면 나사로가 살아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구원이 찾아오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적인 사건 이전에 예수님에게는 너무도 많은 상처, 고통, 눈물이 있었다. 이 과정이 예수님을 공감의 자리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자리로 이끌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된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6, 2015년 6월, 박현욱,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