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대한민국을 매료시킨 이 만화영화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멋진 음악과 현란한 3D 테크닉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어떤 측면과 공감대를 이루었다고 본다. 우리가 경험하고는 있지만 아직 정립된 내러티브를 갖지 못한 삶의 특정 부분을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 틀을 이 영화가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공감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겨울 왕국>은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쓴 것이다. 안데르센의 원작에 등장하는 눈의 여왕은 얼어붙은 먼 왕국에 사는 마녀로, 아이들을 잡아가 자신의 얼음성에 가두고 망각의 키스로 살던 세상을 잊게 만든다. 원작에서는 <눈의 여왕>이라는 제목이 무색하리만치 눈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반면 <겨울 왕국>은 눈의 여왕이 왜 홀로 외딴 곳에 고립되어 살았는지 그 뒷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엘사는 손 닿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마법의 힘을 가졌다. 철없던 유년기에 동생 안나와 마법의 힘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놀다가 그만 실수로 안나를 다치게 한다. 이후, 엘사는 자신의 능력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철저히 외부와 고립된 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왕과 왕비인 부모님이 불의의 사고로 죽자, 성년이 된 엘사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여왕대관식 도중 여태껏 숨겨온 엘사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고, 사람들을 그녀를 마녀라 부르며 두려움에 떤다.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힘으로부터 동생 안나와 자신의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엘사는 산으로 들어가 숨어버린다. 눈 덮인 산 속에서 홀로된 엘사가 처음으로 자신을 긍정하며 부르는 노래, 그것이 “겨울왕국”의 OST “Let it go”다. 사람들을 열광케 한 이 노래에 이 영화가 가진 흡인력의 단서들이 요약되어 있다.
1.
눈 덮인 산의 적막 속에 홀로 선 엘사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기보다 이제 아무도 없는 눈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열정을 노래한다. 차가운 겨울 바람은 엘사의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내면의 폭풍처럼 울부짖고, 처절한 고독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제 “이 (얼어붙은 겨울)왕국의 여왕”임을 깨닫는다.
The snow glows white on the mountain tonight
Not a footprint to be seen.
A kingdom of isolation,
and it looks like I'm the Queen
The wind is howling like this swirling storm inside
Couldn't keep it in;
Heaven knows I've tried
오늘밤 산 위의 눈이 빛나요.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네요.
고독의 왕국 내가 그 나라의 여왕인가 봐요.
더 이상 가둘 수 없는 내 안에 휘몰아치는 이 폭풍처럼
바람이 울부짖어요.
내가 얼마나 참으려 애썼는지 하늘은 알겠지요.
엘사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능력, 그것은 주변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이다. 그 힘을 가다듬고 제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힘을 표출하고 연구하고 단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지 다른 누구도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라는 이유로 엘사는 그 능력을 감추고 자신을 부정해야 했다. 만일 그 같은 능력이 남자아이에게 주어졌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제 자신이 몸담고 있던 공동체를 벗어나 홀로 된 엘사는 억눌러왔던 재능과 열정과 자기표현을 “Let it go”라는 노래를 통해 폭발적으로 쏟아낸다.
2.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로 여겨졌고, 그녀들의 유일한 임무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서구 여성들은 참정권과 재산권을 획득했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모든 방면에 진출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교육과 사회진출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가부장적 유교사회 전통이 이상화 하는 순종적인 여인상은 여성의 사회진출에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서구사회에서도 70-80년대까지 강한 자아실현 욕구를 가진 여성들은 결혼과 일, 둘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곤 했다. 하물며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자아실현이란 일부 혜택받은 여성들의 유희 또는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일부 비정상적 여성들의 행태로 폄하되기도 했다. 조선후기의 허난설헌, 개화기의 나혜석, 20세기 중반 전혜린 같은 사람들은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다 비극적인 인생을 마친 대표적인 예다.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쥬디스라는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을 창조해냈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 영국에서 셰익스피어와 동등한 재능을 타고난 여자가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을 화두로하여 역사적 지식과 소설가의 상상력을 결합하여 설득력 있는 여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셰익스피어처럼 어려서부터 책과 연극과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는 쥬디스에게 그녀의 부모는 여자아이에게 글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닭장의 닭이나 돌보라고 한다. 하지만 쥬디스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오빠의 책을 몰래 훔쳐보며 다락방에 숨어서 독학으로 글쓰기를 익힌다. 그녀가 10대 소녀가 되자 부모는 이웃에 사는 부유한 양털업자 아들과의 혼담을 추진한다. 당시 부모의 뜻을 어기고 결혼을 거부하면 부모는 딸을 수녀원에 보내거나 때리거나 굶겨 죽일 수도 있었다. 오빠처럼 글을 쓰고 무대에 서고 연극의 세계에서 살고 싶었던 쥬디스는 어느 여름날 새벽 가출을 감행하고 런던으로 가서 극단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에 여성은 무대에 설 수 없었고, 여자역은 여장을 한 소년들이 대신했다. 여러 극단에서 조롱받고 문전박대를 당한 후, 그녀를 가엽게 여긴 어느 극단 감독의 호의로 허드렛 심부름을 하며 극단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 해 겨울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천재 소녀는 감독의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마차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만다. 울프가 그려낸 셰익스피어의 여동생 쥬디스의 이야기는 재능을 타고난 여성이 남성중심 사회의 편견과 제도적 제약에 의해 어떻게 억압받아 왔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성들은 이제 결혼과 일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맞벌이를 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은 결혼시장에서 기피대상이 될 만큼 여성의 일과 경제력은 결혼에서조차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새로운 여성의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틀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여성의 삶은 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여자아이들이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아름답고 연약한 공주이야기를 듣고 보고 자란다. 결과 여자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쁘고 착한 사랑스런 여자가 되어 자신을 지켜줄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 할 자율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상반된 코드가 여성들로 하여금 자기모순에 빠지게 한다. 이것은 비단 여성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다. 이러한 문화코드는 남녀노소가 공유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여자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는 외모지상주의, 소위 취집이라 비하되는 결혼을 통한 사회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일부 여성들의 결혼관, 남성중심적 결혼문화, 시집살이 등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얽혀있는 미묘한 문제이다.
10여 년 전부터 디즈니를 비롯한 미국 만화영화 시장은 <쉬렉>을 필두로 자율적이고 용감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새로운 공주이야기들을 선보이고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 대신 전장에 나가 혁혁한 공은 세우는 <뮬란>, 북미대륙에 상륙한 영국인과 사랑에 빠져 용기있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원주민 공주 <포카혼타스>, 마법성에 갇힌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용감한 왕자가 아니라 못생긴 괴물 쉬렉이라는 것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괴물이 되기를 선택하는 피오나 공주 등,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는 전통적 이야기틀을 부수고 새로이 쓰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겨울왕국>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다음 편에 계속]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4, 2014년 4월, 손현주,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