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큰형의 여러 장점들을 이야기하시다가 작은 형의 장점으로 옮겨 갔다. 그날은 아마도 우리 형제자매 모두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실 모양이었다. 오줌이 마려운 것 참고 귀를 쫑긋이 하여 들었다.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나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실까 궁금해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바로 위의 누나 이야기가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이다. 돌연 아버지의 큰 한숨.

당시 5 ~ 6살의 어린 나이로 기억하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다. 그리고는 바로 동생의 여러 장점 이야기로 넘어 갔다. 조금 전까지도 오줌이 마려웠던 것을 참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요기를 느끼지도 못하고 짧지만 긴, 절망스런 시간이 흘렀다. 동생까지 평론을 마치고 난 뒤 한참을 지나고 절망 속에 숨죽여 누워있는 나에게 들리는 어머님의 한 말씀. 

50년이 훌쩍 지나간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작년 여름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불현듯 생각나면서 가장 오래된 기억 속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세상에는 좋은 말들이 많다. 특히 고전을 읽으면 옛 선각자들의 경륜과 경험이 아우러진 좋은 글들이 너무 많다. 어디 고전뿐이랴. 도서관은 물론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서점에 즐비한 신간서적을 읽어도 끝이 없다. 하지만 절망 속에 있던 어린아이의 마음에 인생의 단비와 같았던 어머님의 정제되지 않은 격려의 한마디가 어떤 경전이나 고전의 금언보다 뼛속 깊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계실 때 회사에 휴가를 내어 어머니와 같이 한 주 동안을 병실에서 같이 있을 기회가 있었다. 평소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지만 가끔 들르면서도 못했던 어린 시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가장 묻고 싶었던 이 이야기를 해 드렸다. 

힘없이 엷은 미소를 보이시면서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 모습에 내게는 평생의 힘이 된 한줄기 희망의 말씀을 어머니는 기억도 못하신다고 하시지만 그 세월과 자식사랑의 설명이 생략된 미소에 실망 보다는 울컥 감사의 눈물이 맺혔다. 어머니의 사랑은 마음이 자연스레 표현되는 것이지 기록된 말이나 장식된 것으로 일부러 말로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닐 거니까.

시골 그것도 평지가 아닌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4남2녀중 다섯째로 태어난 나는 위로 형님 둘, 누나 둘, 그리고 나와 남동생인데 어릴 때부터 수줍고 발육이 늦었다. 위로 형이나 누나 아래로 동생과 비교하여 체력이나 순발력, 그리고 인물은 물론 총기가 좀 떨어진다고나 할까? 무슨 일이든 남들이 한번에 이해하는 것도 나는 한번에 못하고 두 번 세 번 만에 이해하고 상급학교 진학도 한번에 안되거나 겨우 합격권에 들어 입학하기를 반복해 온 것이다. 다행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며 입학 때보다도 졸업 때의 성적이 더 좋았고, 시골학교에서 점차 도시로, 더 큰 도시로 진학을 할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녀오면 늘 부모님과 형제들은 먼 길 밭과 논에 나가셔서 난 혼자였고 밥을 찾아 먹어야 했고 혼자서 풀을 베러 가거나 소에 꼴을 먹이러 가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집안에 도움이 될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늘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은 기억이 많았다. 부모님께 도움은커녕 소위 사고만 친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곧, 논두렁의 잔디를 파내고 콩을 심어 나중에 크게 야단을 맞은 사건과 텃밭 상추에 물을 주고 상추를 말려 죽인 사건이다. 

시골 농사꾼에게서의 땅은 생명줄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 뒷산의 큰 바위나 언덕도 어른이 되어서 가보면 놀라울 정도로 작아 보이는 게 보통인데 어린 시절 우리 집의 논과 밭은 얼마나 작았는지 그 당시 어린아이의 눈에 보기도 너무 작아 보였다. 어느 날 하루는 학교를 다녀와서 부모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집 뒤에 있는 논의 논두렁을 보니 경사지게 생겼는데 농작물을 심지 않고 잔디만 무성했다. 산비탈이어서 논두렁이 어느 논두렁보다 경사도 있고 넓어 보였다. 어린 나에게 아이디어가 반짝 나타났다. 그래, 논두렁 언덕의 저 잔디를 파내고 콩을 심자. 그러면 부족한 농지를 개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버지도 나중에 칭찬을 하실 거야 생각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개간 아닌 개간을 하여 잔디를 파내고 콩을 심었다. 

그날 저녁 나는 자랑 삼아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고 돌아온 건 칭찬이 아닌 머리에 꿀밤을 하나 맞고 꾸지람만 들었다. 꿀밤은 어른의 손가락을 튕겨서 아이의 이마에 때리는 애교석인 야단이어서 그리 심하게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날 밤 억울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분한 마음에 한숨도 못 잔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내가 잘못하면 잘못한 결과만 지적하시고, 잘못한 이유는 늘 그 자리에서 즉시 말해 주시지 않으셨다. 나중에 스스로 잘못한 이유를 알아내고 내가 알아낸 잘못된 이유를 아버지에게 직접 설명하라는 교육방침이신 것으로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성인이 되어 그때의 이유를 설명 드렸더니 참으로 좋아하셨다.

하시며 논두렁 같은 버퍼의 역할과 부분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보라시던 친절한 해석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금새 죽어가던 상추가 파랗게 살아나는 느낌으로, 저녁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 자랑을 했다. 칭찬을 받고 싶은 어린 마음에 칭찬을 기대한 순간 아버지의 말씀은 

하시고 또 이마에 손가락을 튕겨서 꿀밤 하나. 눈물 뚝 흘리면서도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억울하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어떻게 죽어가는 상추에 물을 주었는데 살아나기는커녕 도리어 죽는단 말인가. 그 의문은 그 2~3일 뒤 바로 증명이 되었다. 아버지 말씀처럼 상추가 다 말라 죽었다.

오랫동안 그 이유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스스로 생각해도 전혀 몰랐는데 중학교 과학시간에 배운 삼투압 수업을 듣고 그 이유를 찾아서 아버지께 말씀 드렸더니 참으로 좋아하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물면 땅의 수분이 거의 증발이 되어 땅 표면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피자 껍질처럼 딱딱해 진다. 자연히 수분도 부족하여 식물도 말라 죽게 되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을 딱딱한 지표면이 보호막(Shelter)이 되어 보호하고 있는 땅속에 남아있는 적은 양의 물이 식물의 최소공급원이 되어 식물이 당장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사귀 하나 정도는 그 물로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가뭄이 지나고 충분한 단비가 내리고 땅이 풀리면 해갈이 되지만,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 어설프게 인위적으로 물을 주면 식물이 우선은 뿌리와 줄기가 물을 공급받아 생명에 도움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딱딱한 지표면이 물로 인하여 부드러워지고(무장 해제되고) 다음날 강한 햇볕에 의해 내가 준 물이 증발되면서 딱딱해서 차단제 역할을 하던 땅 지표면의 보호막 역할이 해제되어 삼투압에 의해 지표면 아래에 조금 남아있던 물까지 모두 증발이 되어 결국은 식물이 말라 죽는 것이다.

아버지도 오랫동안 경험하시고 어른들로부터 듣기는 하여 현상만 알지 과학적인 이유는 잘 정리가 안되었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공부와 연구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금의 벤처 지원정책이나 기술지원 제도들이 충분한 해갈이 안되고 어린아이 양동이 물이 되어 오히려 자라나는 새싹인 벤처가 식물처럼 말라 죽는 것이 아닌가 하고 대비해 보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한 푼이 아쉬운 처지의 벤처 사장님들은 화가 날 지나친 억측이 아니었으면 한다.

중고등학교 때의 친구 중 졸업 후 못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한참 뒤 최근에 동창회에 오랜만에 나온 친구들은 내가 대학 때 학군단후보생이었고 군대도 장교출신이라고 하면 믿지를 않는다. 그만큼 어릴 적 친구들 보기에 나는 체력과 훈련으로 인식되는 장교후보생과는 거리가 멀었나 보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늘 공부가 지쳤다. 남들보다 두 번 세 번 노력해야 하는 입장에 몸까지 약하니 공부를 제대로 해 내기가 어려웠다. 

대학에 들어와서 느낀 것은 결국 공부와 체력관리가 관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된 뒤 본사활동과 서클활동을 하면서도 그런대로 성적은 유지 했으나 점차 체력의 한계를 느끼던 시절, 나름의 고민 끝에 학군단에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 체력이 좋거나 체육전공자가 응시를 했는데 몸이 약한 내가 학군단에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했다. 역시나 체력시험에서 겨우 과락을 면했으나 1차 합격에선 탈락하고 예비합격자에 들어갔고 합격자 포기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하면 학군단 입단의 기회는 끝났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고 있는데, 학군단에서 장기복무 장교후보생에 한 명의 결원이 생겨 장기근무자로 입단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 의사를 묻는 연락이 과 사무실 조교를 통해 전해왔다. 단기근무 장교후보생은 임관 후 의무 근무기간이 2년 반인데 비해, 장기근무후보생은 의무복무를 5년 이상 근무를 해야 하고 대부분 직업군인으로 남게 되는 제도로, 대신 3,4학년 학비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나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행정실로 가서 입단을 하겠다고 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가족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형님과 형수 그리고 누나와 온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봉착했다. 어떻게 직업 군인이 될 생각을 했느냐? 그러려면 차라리 육사를 가지. 실수한 거야. 성토장으로 변한 우리 집. 야단을 맞았지만 마땅히 취소할 방법도 생각도 없어 침묵으로 피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입단후보자 사전 체력훈련도 지옥훈련이다. 훈련자체가 지옥훈련으로 불릴 만큼 힘은 들었지만 다행히 나를 포함하여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모진 체력훈련이 끝나고 정식으로 학군단 입단이 예정된 하루 전. 또다시 학군단 행정실로부터 과 사무실로 연락이 왔다. 혹시 장기근무후보생에서 단기근무 후보로 바꿀 생각이 없냐고. 탈락될 뻔한 사람을 구해 주었으니 이번엔 협조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사연을 들어 보니 단기후보생 한 명의 부친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할 수 없이 장학 혜택을 받는 장기근무 후보생으로 바꿔야 하는데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으니 자네가 바꾸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초 단기로 지원했다가 체력시험에서 떨어졌다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장기근무 후보생으로 되었으나 외부요인으로 인해 다시 단기근무 후보생으로 돌아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도 없는, 누군가의 프로그램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안 것은 인생의 중 후반에 들고 나서다.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하고 통신학교에서 6개월간의 후반기 훈련을 받은 뒤 전방 포병부대 통신장교로 부임을 받고 나서 새로 바뀐 대대장은 마침 고등학교 12년 선배였다. 주말에는 장교들의 외출 외박이 허락되는 것이 관례인데 대대장님은 유독 나의 외출 외박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말에 테니스를 치자고 하거나 아니면 사병들 종교시설 인솔을 맡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집으로 초대하여 바둑도 두고 저녁식사까지 하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하여 외출 외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뿐만 아니라 부대 일일 조례나 주간회의 때에는 나를 집중적으로 야단을 치고 시범케이스란 시범 케이스는 모두 내가 해야 했다.

하루는 회식이 끝나고 술기운을 빌어 집으로 쳐들어가서 따진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취해 있었기도 했지만 맨 정신이라고 해도 도저히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배를 위하면 위하는 것이지 왜 위하지 않는 것이 위하는 것이라뇨? 심리학을 전공한 선배의 후배 훈련법을 내가 어떻게 알리요.

곧이어 진행된 차차 상급부대인 군단 XX경연대회 장교대표로 나가서 시험지를 백지로 내어 꼴지를 했다. 당연히 징계감이다. 대대장인 선배를 나를 불렀다. 그리고 앞으로 나갈 사회에서 이겨나가려면 여기는 훈련장이고 광야이니 힘들더라도 훈련하고 견디고 실력을 쌓아 나가야 한다고 부드럽게 부탁하시고 용서해 주셨다. 물론 대대장님은 다음 번 경연대회에도 장교 대표로 보내주셨고 그 대회에서는 우승으로 미래를 위해 나를 위해 주신다는 선배 대대장님의 용서에 보답할 수 있었다. 대신 6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반복해서 훈련하고 연습하고 잠을 아끼며 노력했었다. 현역에서 3성 장군까지 역임하시고 지금은 퇴임하셔서 봉사활동 하시고, 손자, 손녀 보시면서 노년을 보내시는 그 선배님과 젊을 때 그 부대생활과 동료들이 그립다.

지금은 부모님 두 분께서 모두 돌아가셨지만 어릴 때의 인생의 선배님이고 솔선수범의 가르침이셨던 어머니와 아버지, 학식이나 지식은 비록 세상 기준으로 보면 약할지라도 삶의 지혜와 자식사랑은 크고도 위대하셨다. 세월이 지나 어떤 즐거운 추억을 잊더라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사랑이어라. 

이렇게, 저렇게 지금의 나의 인생근육은 만들어졌고 지금도 그 근육쌓기가 반복되고 있다.  ‘보고 싶습니다. 눈감으면 지금의 나의 나이보다 젊은 날의 어머니, 아버지, 선배님...’ 그분의 말씀은 내 한발자국마다의 작은 등불이요, 내 인생길에 빛이셨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