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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23 11:00

누가를 그리워하며 (6): 묵은 포도주

글쓴이 : 아포리아

누가를 그리워하며(6): 묵은 포도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누가복음』 5:39)

1.
숙성을 통해 그 맛의 풍부함을 더하는 음식들이 있다. 김치도 익어야 맛있고, 된장도 오랜 시간동안 발효되어야 제 맛을 낸다. 치즈와 보이차도 그렇단다. 오랜 숙성을 통해서만 각별한 맛을 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숙성 기간이 그 음식의 가치와 품질을 재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을 통해 환경에 길들여지고, 드러나고 모난 부분들이 길들여지며, 그럼으로써 그 자체에 숨어있던 성격들이 어우러지면서 작품이 되어가는 음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5장 39절의 말씀은 이런 상식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는 말처럼, 익숙한 옛 것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은유’의 묘미를 몰라서가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묵은 포도주’와 관련된 말씀이 조금 차이가 있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포도주를 오래된 부대에 담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된다. 『누가복음』 5장 37절에 설명되어 있듯이, 새로운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이미 낡고 얇아진 가죽부대는 팽창과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듯 과학적인 지식을 갖춘 누가가 ‘묵은 포도주’와 관련된 비유에서는 왜 이리도 비상식적인 것일까? 의사였던 누가는 이 비유를 옮기면서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그럼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새 것’을 위해 ‘좋은 것’을 버리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2.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새로움’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 반면 어린 시절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롭고, 그래서 모든 것이 신기했다. 자녀를 둔 사람들 모두가 경험하듯이, 아이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때로는 위험한 것, 징그러운 것도 서슴지 않고 손을 뻗어 만져보고, 조금만 더 자라면 소리를 지르며 기겁할 덩치 큰 동네 개에게도 거침없이 다가간다. 요즘 아이들이 아주 일찍부터 자기주장이 강하다고 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새로운 것에 재미를 느낀다.

그러나 삶의 세계는 늘 ‘새로움’이 던져주는 두려움과 기대의 길항 속에 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은 ‘새로운 것’이 가져오는 어려움들을 철학적 성찰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 중 하나도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신들’(kainous theous)을 소개한 것이었고, 『예기』의 「학기편」은 새로움에 대한 회고적 성찰이 없는 지식은 피상적이라는 의미에서 ‘기문지학’(記問之學)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듯 새로움이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것들에 대한 인간적 애환, 특히 결코 잡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고민을 새로움을 의미하는 두 단어 속에 담아두었다. 하나가 ‘새로움’ 또는 ‘생소함’이라는 의미를 가졌던 ‘카이노스’(kainos)다. 이 단어는 과거부터 존재했지만 아직 실현되지 못했던 것을 지칭하고, 그 결과 시간적 의미에서 발생했거나 선재했던 과거의 것들과는 다른 사물 또는 사건의 질적인 특성을 전달한다. 또 다른 하나는 ‘네오스’(neos)다. 이 단어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바, 그래서 시간적으로 미래적 시점에 존재 또는 발생할 사물 또는 사건을 의미한다. 라틴어의 ‘노부스’(novus)에 상응하는 이 단어는 젊음 또는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닌 무언가를 지칭한다.

이러한 용례에 기초한다면, 예수님이 가이나(Kaynah)에서 최초의 기적을 보여주시며 하신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새(neos) 술은 새(kainos)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의 용례에 비추어 보면, 이 때 ‘새 부대’(kainous theous) 란 전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실현되지 못했기에 생소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약속을 의미한다. 결국 '새 부대'란 인간에게는 새롭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새롭지 않은 약속, 다시 말해 인간이 잘못 이해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훈계인 셈이다.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벗어날 수 있는 방식이 담겼을지도 모른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는 말씀같이, ‘어린 아이’(paidion)처럼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으려는 열정만이 우리를 스스로의 고집스러운 틀로부터 해방시켜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 속에 ‘진정’(amen)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경청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람, 그것이 오랜 약속이었다 하더라도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3.
당시 유대 사람들은 3년 이상 된 포도주를 ‘묵은 포도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 ‘묵은 포도주’는 부드러워진 맛보다, ‘3년 이상’이라는 기준에 따라 분류된 하나의 습관을 대변한다. 즉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숙성되지 않아도 ‘좋은 포도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런 ‘우연’과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또는 ‘율법’의 세계에 익숙해진 인간의 태도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가는 마태와는 달리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카이노스’(kainos)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방인인 누가에게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던 복음은 진정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사건’(neos)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 중에서는 아프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이 먼저 예수님의 새로움에 눈을 뜬다. 이들에게는 익숙한 세상의 율법과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오히려 자기들을 옭죄었던 굴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 이 마음은 우리가 세운 여러 기준들을 한꺼번에 하나님 앞에 내려놓도록 도와줄 것이다. 『누가복음』 5장 8절의 시몬 베드로처럼,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마음, ‘자기의 것’이 아빠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버리고 아빠의 손을 잡고 ‘새 것’을 찾을 준비가 된 아이의 마음, 바로 아이의 ‘새로움’에 대한 열정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할 때다. 누가는 바로 이런 마음과 열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과 동행한 것은 아닐까. 이런 마음이 있다면 '묵은 포도주'도 '새로움'으로 가득차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Diagog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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