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믿음에 대해서 섣불리 논하기는 어렵다. 특히 체험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그런 논의자체가 금기시된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인간은 믿음을 기초로 하여 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는지, 현대사회에서 믿음의 기초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것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믿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한 확신인 것 같다.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믿고 있다. ‘종교’, ‘자신’, ‘과학’, ‘전문가’, ‘민주주의라는 이상’, ‘돈과 권력’, ‘희망’ 등 뭔가 사람들이 의지하고 싶은 모든 것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따라 다닌다. 이러한 믿음들은 교묘하게 서로 얽혀있고, 상반된
믿음들이 모순덩어리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믿음은 처음부터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믿음의 과정은 정확한 메커니즘을 규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작은
체험의 축적’ 혹은 ‘충격적인 한번의 체험’에 의해 생성되고 발전되는 것으로 보인다.
2.
종교에 대한 믿음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간에 입장이 너무 달라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은 체험의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다고들 한다. 기독교의
뿌리는 구약에 기반한 유대교에 있으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는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어서 그런지 잘 믿는 기독교인들도 살면서 믿음이 생겼다가도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도 다시 생기게 되는 전철을 밟는다고들 한다. 이천년 전 사도들조차 예수를 직접 체험하였지만, 결정적 순간에 믿음을 잠시나마 저버린 바 있으며,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의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이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진다면, 우리가 사도의 입장이라면 과연 우리는 온전히 이러한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결국 자기 확신에 이르기 전까지의 체험은 믿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자신의 경험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믿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경험담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그 내면에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수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고수로 인정받는다. 아니
고수라고 믿어준다. 진정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겪기 때문에 경험의 축적에
의해 자신을 믿게 되는 것이며, 타인도 이를 인정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은 부족하지만 든든한 후견인이 있을 경우 즉 좋은 배경이나 환경도 자신을 믿게 만드는 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배경이나 환경을 의지하는 것이며, 후견인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함께 사라지게 된다. 결국 자신을 믿는 것 조차도 체험적 확신을 갖는 고수의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는 온전하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시공간은 한쪽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믿고 있다. 과거는
시공간의 특정좌표 속에 갇혀있으며,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상상하며
살아간다. 만일 타임머신에 의해 과거가 바뀔 수 있다면, 지금
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도 불확실해 지는데, 과연 우리가 현재를 자각하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
또한 허구적인 믿음이 아닐까? 만일 나랑 같이 얘기를 나누던 존재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과연 지켜낼 수 있는 것일까?
한편 과학적 사실만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과학적 사실’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당시의 ‘과학적 패러다임’을 믿는 것일까? 과학적
패러다임은 천재적인 과학자가 출현하여 물리적 현상을 재해석할 때마다 크게 바뀌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의 관측 가능한 수준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패러다임을 믿고 있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과거의
믿음은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이천년 후의 사람들은 어쩌면 현재의 과학적 사실에 대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도 어리석다고 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또한 전문가의 권위에 대한 믿음도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데,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특정분야에서 연구하고 활동해 왔기 때문에 자신에 비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문가들이 특정이익 집단을 대변하거나, 오히려 아집에 빠져 사리분별을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심하면 믿느니만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지혜와 통찰력을 갖는
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남종면 남한강변] 저 강물은 자신이 바다의 일원임을 믿고 있을까?
3.
사람 “人”字는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도 홀로 설 수 없는 형상이다. 상대를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상대를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언제든지 자신을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홀로서기를 선택할 것이다. 상대를
믿는 믿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서로를 배반하지 않는 경험이 축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축적이 믿음의 근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부모자식
간에도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상호신뢰의 프로세스를 지속적으로 운영하여 서로를 사랑하며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기초는 이러한 믿음 즉 신뢰의 프로세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사람들의 믿음체계는 시공간의 좌표에 따라 그 대상이 많이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사상체계가 시대의 표준이며, 국가를 유지하는
기초가 되었다. 많은 선비들이 이러한 믿음에 의지하여 모든 생각이나 행동의 잣대를 유교적 시스템에 맞추었고, 절차탁마를 통해 그 시대의 특수한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변화의 물길은 막을 수 없어 서구문명과의 충돌과정에서 결국 유교시스템은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를 좌지우지한 유교적 가치에 대한 믿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사실은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그 시공간의 좌표 속에 갇혀있을 뿐이다. 시공간의 변화는 믿음의
체계를 계속 변화시켜 나간다. 이러한 것도 다 하나님의 작품이겠지만.
우리는 때때로 특정좌표 속에 갇혀있는 믿음체계를 끄집어 내어 필요에 따라 현실에 적용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버릇없이 군다면 유교적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끄집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이 왜
믿음에 기초하여 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즉 사회적 패러다임을 정하고
이를 믿음으로서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인 것이다.
[경희궁 숭전전] 그 많던 유교적 가치는 어디로 갔을까?
4.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이 극단적으로 꽃피는 사회이며,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상이나 가치보다는 물질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과거 어느 시기보다 굶주림이 적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물질을 이처럼 따르는 시대가 된 것이 한편으로는 놀랍다. 사실 여기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물질적 쾌락, 소유에 대한 욕망들이 내재하고 있다. 믿을 건 돈 밖에 없어. 돈만 많으면 노동을 하지 않고 즐기면서 살 수 있어. 저 물건은
돈만 있으면 가질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나, 결국
인간의 시계는 한정되어 있고, 쾌락의 기쁨도 영원할 수 없으며,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믿음의 대상을 물질에 두는 것은 자칫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다. 물질은 믿음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물질이 없다고 해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며, 물질이
많다고 해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선한 가치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믿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석촌호수] 찰라의 쾌락
이 글을 통해 믿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생각해 보고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이제
과연 나는 무엇을 믿고 있으며 또 무엇을 믿을 것인지를.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3, 2014년 3월, 이재호, SK 이노베이션 글로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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