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있었다.” 『누가복음』 2장 19절 (표준새번역)
1.
산을 오르다보면 길 옆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야생화들을 발견하게 된다. 크기도 작고, 작은 비에도 쓰러질 것 같은 줄기가 안쓰러운 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무리지어 있지 않거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꽃들은 더욱 아련하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안타까움은 이내 탄성으로 바뀔 때가 많다. 애써 눈여겨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저마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이, 의연하면서도 소중하게 자기만의 향기를 마음껏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2.
성경 속에 등장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야생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누가복음』의 시므온과 안나의 일화가 그렇다. 실제로 두 사람은 세상의 주목을 받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지만(누가 2:26), 시므온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성전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예언가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안나도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비록 성전에 머무르며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이지만(누가 2:37),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늙고 불쌍한 과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표적’(semeion)을 확인해 줄 수 있으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시므온은 ‘올바르고 신실’(dikaios kai eulabes)했고 (누가 2:25), 안나는 당신의 말씀을 전할 ‘예언자’(prophetis)로 선택받은 사람이다 (누가 2:26). 여기에서 ‘올바르다’는 말은 시므온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는 말과 같다. 요셉이 보잘 것 없는 다윗의 후손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의로운 사람’(dikaios)이었듯이 말이다 (마태 1:19). 또한 ‘선지자’가 곧 ‘하나님의 입’(dabar pe)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신명기 18:18), 안나의 예언은 다윗 왕 앞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은 나단의 거룩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는 바로 이들로부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누구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구에게는 ‘비방의 표적’이 되신 것일까(누가 2:34)?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며 오래 전에 마음에 두었던 두 구절들이 생각났다. 하나는 이삭의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훈계다.
3.
이삭은 아브라함과 야곱에 가려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의 행적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보람의 열매지만, 이삭은 이상하리만큼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인물로만 비쳐진다. 그나마 묵묵히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에 있는 산으로 오르는 부분은 작은 위안이다. 그것도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이삭의 질문을 읽고(창세기 22:7), 아브라함이 그를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았다는 사실을 함께 묵상할 때에만 가능한 추측이다. 순종하는 모습, 묵묵히 따르는 모습을 어렵게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야곱의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이삭의 모습은 참으로 딱하기까지 하다. 눈이 어두워 야곱을 에서라고 착각한 것을 제외하고도 말이다(창세기 27:33). 그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있는 에서를 사랑했지만(창세기 25:28), 스스로는 다른 사람과의 다툼을 싫어하는 지극히 소심한 농부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성공을 시기해서 다른 곳으로 가라면 말없이 삶의 터전을 옮기고(창세기 26:17), 주변 사람들이 시비를 걸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자기의 지평을 넓혀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 위인이다(창세기 26:22).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삭은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의 소유자였고,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아버지의 종이 데리고 온 미래의 아내를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삭의 순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그의 일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저녁에 이삭이 산책을 하려고 들로 나갔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낙타 행렬이 한 떼 오고 있었다.” (『창세기』 24:63, 표준새번역).
위에서 ‘산책을 하려고 들로 나갔다’(yatsa’ suwach sadeh)는 표현에서 ‘산책’이 갖는 의미는 중의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걷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거닐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기에 개역개정 성경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니 낙타들이 오는지라”라고 번역한 것이다. 즉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곰곰이 묵상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4.
아마도 예수님께선 당신이 오신 때에 ‘스스로를 의롭다’고 말하던 사람들에게서 이삭의 것과 같은 기다리는 신앙을 찾아보실 수 없으셨나 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다림을 상실한 세대에게 던지는 탄식을 읽을 수 있다(마태 9:13). 이미 기다림의 신앙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구세주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없도록 자기에게 도취된 선생들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의롭다’ 칭함을 받기를 더 바라던 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에 악한 생각’(poneros en hymom kardia)을 버리라고 충고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 ‘죄인들’(hamartolos)을 찾아 오셨다는 말씀에 마음이 저려온다(마태 9:13).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갈급함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태도임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가 기다림이 예수님께서 ‘위로’(paraklesis)가 되는 이유이고(누가 2:25), 바로 기다림의 부재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반대할 표적’(semeion antilego)이 되신 이유라고 말할 때(누가 2:34), 기다릴 이유조차 몰랐던 이방인에게까지 ‘빛’(phos)’이 되신 예수님의 은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누가 2:32).
5.
시므온과 같이 오랫동안 죽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바라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일 게다. 그러기에 바리새인들도 최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찾으려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하나님께 받을 위로를 세상에서 모두 받아버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을 묵묵히 기다린 시므온처럼 살아가야 할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아포리아 편집부, Diagog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