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졌던 적대감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일정정도 경험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우선 기원전 722년으로 앗시리아인들이 북유대 왕국인 이스라엘의 수도(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 곳에 이방인들을 거주하면서 발생한 인종적 혼혈과 종교적 혼용이 생긴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열왕기하 17:27-33). 그리고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에 남유대 왕국이 완전히 멸망당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가, 70년이 지난 후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한 시기를 함께 살펴보아야한다(에스라 1:3). 왜냐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갈등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과 피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잡다한 다른 종교의 의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더렵혔다며 경멸했고, 온갖 어려움에도 고향을 지키며 이스라엘인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이 오히려 못마땅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새로지은 예루살렘 성전에 사마리아인들의 출입을 금하자,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5경을 따라 그리심(Gerizim) 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마련했다. 성전을 두고 벌어지던 이들 간의 대립은 기원전 164년 사마리아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일명 시리아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더욱 깊어졌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이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에 더욱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128년경 셀레우코스 왕조의 위세가 기운 틈을 타서 쳐들어간 유다의 힐카누스(Yohanan Girhan) 왕이 그리심 산의 사마리아인 성전을 파괴한 후, 이들간의 대립은 더 이상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반목에 큰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당신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밝히신 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조차도 거들떠 보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요한복음 4:26).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가르치신다 (요한복음 4:21). 여인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모세 5경을 따라 그리심 산에 예배를 드리는 사마리아인들이 옳은지, 아니면 오직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어야한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이 옳은지를 물었던 질문에 대답하신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그들의 반목을 가져온 순혈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령(pneuma)과 진정(aletheia)'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4:23-24). 예수님의 눈에는 유대인도 사마리아인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이다.   

 

누가는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예화를 통해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담아낸다. 사실 이방인 누가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했던 터다. 누가는 주님을 따른다고하면서도, 여전히 사마리아인들에겐 축복보다 저주가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수 많은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왜 '자비'(eleos)라는 단어로 옮겼는지 궁금해진다. '적과 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모두가 '이웃'이 될 수 있는 단초를 왜 '자비'에서 찾았는지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자비'(eleos)는 이성적 판단이기보다 감성적 자각에 가깝다. 그러기에 비극에서 '연민' 또는 '동정'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고, 종종 '절제'와 같은 성찰적 이성의 잣대로 치유되지 않는 인간적 흠결에 대한 고뇌를 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은 '자비'나 '연민'이라는 단어를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사용하는데 인색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상호 공감의 근거가 확보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그리스 비극의 주제가 '죽음'인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다.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모든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인들은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적에게 '자비' 또는 '연민'을 느끼기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말이 된다. 즉 '자비'는 잣구대로는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되지만, 실제로는 엄연히 '적과 친구'라는 이분법을 속에서 다루어졌던 것이다.   

 

누가는 이러한 그리스적 사고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먼저 누가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oiktirmon)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옮길 때(누가복음 6:36), 그리스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취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른바 모세가 새로 만든 돌판을 들고 하나님께 용서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운(rachuwm channuwn)" 분이라고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과 동일한다. 즉 동일한 처지 또는 공감에서 느끼게 되는 '측은함'(racham)을 넘어, 아랫 사람 또는 부족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관대함'(chanan)까지 모두 포괄한 의미로 '자비'를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가 말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화에서 사용하는 '사랑' 또는 '자비'라는 말은 자기에게 후대하는 사람을 사랑(philia)하는 우애도 아니요, 차지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eros)하는 열망도 아니다. 아무 것도 우리에게 기대할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시듯, 아무 것도 잘못함이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듯이, 우리도 원수에게조차 '자비'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평생토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던 누가가, 어떻게 이런 '자비'를 알게 되었을까? 바로 바울이 고백하듯,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charis)가 아니었으면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에베소서 2:8). 이런 확신이 없었다면 이방인 누가에게 하나님의 '선하심'(chesed)이 보였을리 만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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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눈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읽을 때, '자비'는 부족한 사람에 대해 취하는 연민이나 용서로 보이지 않는다. 나도 동일한 처지에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일 뿐이라는 자각만이 남게 된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splagchnizoma) 가까이 다가간다(누가복음 10:33). 그에게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오랜 반목은 이미 뇌리에 없다. 예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울고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splagchnizomai) 마음만이 그의 마음 속 깊이 새겨있다(누가복음 7:13). 그러기에 그는 쓰러진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는 것도 모자라 돌아 올 때까지 보살펴주라며 가진 것도 내어놓는다(누가복음 10:34-35).

 

사마리아인의 피가 섞인 헤롯왕의 손에 세례 요한이 죽었기에, 예수님께 훈련받은 제자들조차 사마리아인에 대한 미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누가복음 9:54). 그리고 우리도 때로는 정의감으로 때로는 오만으로 누군가를 적대하며 멸시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주의 자비하심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정의감과 우리의 우월함은 어린아이의 무지함보다 훨씬 못하다는 누가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누가복음 10:21).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3, 2013년 11월, Diagog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