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사무엘상 17:39-40]
1. 목표와 비전은 아주 크게, 실행과 실천은 아주 작게. 믿음(비전)에 의지하여 반복 또 반복…
1.1. 학교 졸업 후 진학을 꿈꾸다가 졸업도 하기 전에 우연히 시작한 직장생활, 꼭 3년만 다니기로 하고 작정하고 출발한 직장생활이, 그것도 같은 직장에서만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오랜 직장생활과 사회생활 그리고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을 통하여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앞으로 또 다른 30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면서 나 스스로 정리해 본다. 누구한테 훈수하기 위함이 아닌 나의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이제야 겨우 아는 것과 실천의 뚜렷한 차이를 어렴풋이 알듯 말듯하다. 이 느낌을 한마디로 말하면 “목표와 비전은 크게, 실행과 실천은 작게(아주 작게) 잘라서 계속 반복하면서 쌓아 나가는 것”이다. 목표와 비전은 세우는 것만으로는 내 것이 아니다. 결국 목적과 비전이 바탕이 된 나의 목표를 한입으로 먹고, 한발자국으로 걸을 수 있게 잘게 쪼개서 매일 실천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다. Big Thing, 대박, 큰 성공 이런 큰 것은 마차(馬車)와 같다. 결코 마차를 실천이라는 조랑말(馬) 앞에 세워서는 안되겠다. 나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나 혼자 만으로는 결코 내가 아닌 것 같다. 나와 주위의 합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굳이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진정한 나”는 나 스스로가 아닌, “천운(하늘의 뜻)과 나(기술)와 이웃(대중의 필요)의 합(合)”이라고 할까….
1.2. 70-80년대 즐겨보던 인기 외화 TV방송 드라마가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소위 미드 이다. 맥가이버(리차드 딘 앤더슨)와 원더우먼(린다카터), 그리고 600만불의 사나이. 모두가 영웅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웅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단골 메뉴이다. 내가 현실에서 못하는 것을 영화에서나마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인데 이 중에서 맥가이버라는 드라마는 나에게 좀 다르게 느껴졌던 드라마이다. 맥가이버 하면 맥가이버칼 이라고 하는 만능칼이 생각나지만 내가 느꼈던 드라마 주인공인 맥가이버는 이런 맥가이버 칼과는 거리가 멀다.
인기 드라마 맥가이버는 1985년 가을부터 1992년 봄까지 총 7시즌 139회라는 대장정을 통해 미국 ABC방송국에서 높은 시청률을 올렸고 한국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언뜻 본 그때의 꽁지머리 맥가이버 역의 주인공 리처드 딘 앤더슨은 이제 나이가 들어 중후한 모습의 회갑을 넘은 초로의 중장년이 되어있다. 하긴 이제 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형편이니.
이 드라마의 첫 장면은 대개 이렇다. 적에게 체포되어 밧줄로 묶여서 트럭에 실려 매를 맞고 발길로 차여 상처투성이 얼굴과 거의 실신 상태의 몸으로 군화 발길에 차여 먼지 가득한 사막이나 황량한 들판에 버려지기도 하고, 억류 상태에서 수송되는 차량에서 묶인 채로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초능력으로 상대방을 제어하는 원더우먼이나 6백만불의 사나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밧줄에 묶여 탈출하거나 버려진 맥가이버는 만능칼이나 초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밧줄에 묶인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주위에 있는 깨진 유리조각이나 녹슨 철사, 아니면 모난 돌조각을 이용하여 밧줄부터 푼다. 첨단 핸드폰으로 구조를 요청하거나 지나가는 힘세고 무장한 군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결국 내 눈앞에 보이는 것,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1.3. 우리는 대부분 일이 잘 안될 때에 내 탓이 아닌, 환경이나 조직이나 다른 사람 탓을 하면서 살아간다. 학교나 선배, 또는 책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해도 뭔가 늘 부족하다. 시간이 부족하고, 자원이나 돈이 부족하고, 사람이 부족하다. 도대체 이런 저런 준비가 안 되어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맥가이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주위에 있는 것들로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깨진 유리조각은 잘 드는 칼이나 좋은 도구보다는 사용도 불편하고 오히려 손에 상처가 날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 있는 좋은 도구를 무작정 기다리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다시 붙잡히거나 굶어 죽을 수도 있다.
필자가 다니는 직장에서 오래 전에 어떤 회사를 방문했는데 그 회사 회의실 벽에 걸려 있던 '개선'이란 말의 정의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개선이란 돈을 들이지 않고 생각이나 순서를 바꿔 이전보다 더 좋게 하는 것이다" 라는 이상한(?) 정의였다. 처음에는 뭐 이런 말이 있나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다. 돈을 들이고 주위의 도움을 받으면 단기간에 이전보다 더 좋아지겠지만 늘 지속성이 문제이다. 좋아진 것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산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개선이라는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까지는 좋으나 오히려 더 나빠지거나 쓰레기로 바뀌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우리가 많이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늘 나로부터 멀리 있는 것을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이나 공부가 너무 바빠서 시간을 못 내고,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고, 환경이 안 되어 공부도 운동도 못하고…. 이러다가 해가 저문다. 업무로 바쁜 와중에 차를 타고 헬스클럽으로 가서 엘리베이터 가까운 곳에 주차공간을 찾다가 뱅글뱅글… 시간 다 쓰고 정작 문을 닫는 시간 때문에 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운동을 하기가 어려운 좋은 핑계가 만들어질 뿐이다.
직장인은 이래저래 바쁘다. 바빠서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하기도 어렵고 운동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바쁨에도 불구하고” 운동이나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다. 참 신기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장을 바꾸어 보자. “바쁨에도 불구하고” 를 “바쁘기 때문에”로. 그 바쁨을 통해 뛰어 다니고 바쁨을 통해 이것 저것 부딪쳐서 삶의 현장에서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논리로 “자원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가 아닌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한 사람은 어쩌면 “가난함 때문에” 그 절실함으로 삶이 바뀌지 않았을까?
필자의 사무실은 최근까지 4층 건물에 위치했다. 4층 사무실은 별도의 엘리베이터가 있기는 하지만 계단으로 걸어서 다니기에 아주 적당하다. 그 사무실은 예전에 공장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하여 사무공간으로 만든 것인데, 층고가 높아서 한층 당 계단이 30개씩이고 3층에서 작은 계단이 하나가 더 있어서 4층까지 계단이 모두 91개 계단이다. 출근과 퇴근을 걸어서 하고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오르고 내리면 그것만으로 그냥 네 번씩 왕복이니 364계단을 반드시 걷게 된다. 거기다 아래층과의 업무회의나 다른 빌딩 사무실 갈 때도 걷고, 출근 시 승용차를 안타고 지하철, 버스를 타면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그 4층 건물에서 27층 건물의 24층으로 이사를 했다. 이제 출퇴근을 걸어서 오르내리기는 다소 부담스럽지만, 이사 첫날부터 점심식사 후에는 대개 걸어서 올라온다. 사무실의 높이가 달라져서 계단도 당연히 많아지고 근무환경이 바뀌어 힘들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4~5차례 걸어서 올라 다니다 보니 금방 익숙해 지고 자연스럽게 운동도 된다. 573계단. 이것 작은 숫자도 다른 한걸음 한걸음과 쌓여서 하루 1만보가 되고 일주일 5만보 이상이 된다. 또한 지금 사는 집이 교회와 가까워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니 걸어서 다니기가 아주 적당하다. 새벽기도를 다닐 때나 주일 예배를 참석할 때 걸어서 다니니 자연히 운동이 되고 습관을 통해 걷음에 익숙한 몸이 만들어 진다.
2. 나는 나만으로 내가 아니다. 나와 이웃이 합하여야 비로소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2.1. 우리가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이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많은 이유들이 바로 환경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구하거나 당장 쓸 수 있는 재료나 시간, 공간들을 얼마나 자유롭게,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특수한 재료나 도구는 기능이 우수하고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가 이미 승패가 갈린다. 하지만 들풀이나 자갈, 같은 주위에 누구나 구할 수 있는 것은 누구한테나 가질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지 때문에 이러한 흔한 재료를 얼마나 능숙하게 잘 사용하느냐는 주위의 환경이 아닌 바로 나의 노력과 능력의 문제이다.
좋은 재료나 도구는 나쁜 도구나 재료보다는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구하는 이러한 좋은 재료에는 지속성, 연속성이라는 한계가 있다. 좋은 재료를 주면 잘 할 수 있고 나쁜 재료를 주면 잘 못하는 것은 차별화가 아니다. 물론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 보다는 낫지만, 이건 논외로 하고자 한다. 공산품이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반드시 좋은 재료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더 이상 외부에 핑계를 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2.2. 누구나 다 아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있다. 성경의 한 구절인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엘라 골짜기로 돌아가 보자.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많이 사용하는 것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이야기" 이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리 대부분은 "다윗=작고 약한자" 로, "골리앗=크고 강한자"로 단순정의를 한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그러면 단순히 "작고 약한 자"가 "크고 강한자"를 이긴다? 그래서 작은 벤처기업이 대기업을 대항하여 간혹 이김을 다윗과 골리앗으로 비유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다윗은 골리앗에게 무참히 깨진다. 왜일까? 설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작고 약하지만 결코 약하지 만은 않다, 왜냐하면 골리앗이 가지고 있는 근육의 힘과 갑옷과 큰 칼과 무기는 없지만 골리앗이 가지고 있지 않은 다윗 자기만의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양털로 엮어 만든 물매(무릿매. Sling)와 엘라 골짜기에 널려 있는 작지만 반질반질한 강한 돌 다섯이다. 그 무기는 비록 비싸거나 강하거나 구하기 힘든 것이 아니고, 주변에 흔한 것이지만 단지 흔한 것만은 아니라 그 흔한 것을 잘 다룰 만큼의 훈련과 생활의 달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블레셋 군대의 대장 골리앗과 이스라엘 군대의 사울 왕이 가지고 있는 갑옷과 창과 칼 같은 전통 무기 는 없지만 다윗은 다른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창조주를 믿는 굳은 믿음과 평소에 자기가 양을 치고 맹수로부터 보호하면서 수없이 연습하고 사용했던 하찮지만 강한 무기인 "물매"와 "자갈돌"을 잘 던질 수 있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
2.3. 민들레라는 식물이 있다. 시골집 울타리에도 흔하게 있고 들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인데 효능이 대단하다. 민들레에는 철분, 칼슘, 인, 마그네슘 등 우리 인체에 필요한 영양분 덩어리라고 한다. 민들레는 인삼이나 녹용처럼 비싸지도 구하기 어렵지도 않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 준비해 주시고 계신다고 한다.
경영학자들은 종종 "대칭경영"과 "비대칭경영"을 이야기 하곤 한다. 대칭경영은 경쟁자나 시장의 잣대와 같은 것을 가지고 경영한 것이고, 비대칭 경영은 서로 같지 않은 자원이나 전략으로 경영하는 것을 이야기 한다. 요즘 들어서 화제가 된 창조경영이나 혁신은 모두 비대칭 경영에서 나온다. 비대칭 경영은 이길 확률과 효용(Efficiency)에서는 기존 방식보다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다양성과 흔함(콜럼버스의 달걀)에서 비대칭 경영의 특별한 기회가 있다. 벤처뿐만 아니라 기존기업도 비대칭경영을 많이 하게 되어 업종간 경계도 와해되고 있다.
지식이든, 자원이든, 시간이든, 친구이든, 중요한 것은 대개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고, 실천하는 것은 내 몸이지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도구나 몸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빈곤과 부족의 시대를 살았지만 요즘은 소위 잉여시대, 풍요의 시대 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풍요롭고 자원이 남는 것이 아니다. 소위 빈익빈, 부익부 시대로 남는 곳은 남아서 오히려 보관료가 들거나 치우는 비용이 들지만 없는 곳은 없어서 굶기도 한다. 이웃의 필요와 나의 존재가 결합될 때, 이웃에 남는 것을 재활용하거나 서로 활용을 할 때 진정한 "지속적인 상생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의 다윗으로 불리고 싶은 작은 시작의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다윗의 물매와 시냇가의 작은 돌맹이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기술과 고유한 삶의 이야기가 있는가?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권강현, 삼성전자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