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부딪히는 ‘현실’의 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돌처럼 냉정하게 굴러가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흙처럼 부서져 내리는 ‘인간’입니다. 교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을 노래하지만, 교회 밖으로 단 한 발자국만 나가면 사랑이 없는 냉정한 ‘세상’이 모든 사람을 감싸 안습니다. 교회에서는 사랑의 원리로 굴러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이 빛이 되지만(시편 119:105), 교회 밖에서는 이해관계의 원리로 굴러가는 세상의 질서가 내 발에 전등이요 내 길에 조명으로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믿는 자로서 거룩하고 선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이 힘이 들 때, 다른 사람하고 부딪힐 때,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에, 나와 너와 우리의 비루하고 악하고 미워하고 독단적인 ‘인간’성은 에누리 없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우리의 행동을 통제합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흔들리고 믿음의 일들이 헝클어지며, 믿는 사람들은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의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은 일반적으로 첫 번째 처방,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 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개인경건생활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듣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힘’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의 신앙활동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첫 번째 처방의 선결성과 중요성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는, 하나님의 평안과 성령의 격려를 얻지 않고는, 우리의 신앙은 빈들에 메마른 풀처럼 시들어 버리고 사막의 건조함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세상에 대한 지식은 세상에 대한 맹목적 찬양이나 세상에 대한 끝없는 절망을 낳고,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지식은 분수를 모르는 교만이나 암담함 속의 자포자기를 낳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서 부딪히는 ‘현실의 벽’이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자동차에 하나님의 기름이 가득 차 있어도, 세상의 복잡한 길을 잘 모르고 사람이 운전을 능숙하게 할 줄 모르면, 벽에 부딪혀 차가 망가지거나 사람이 상하거나 헛바퀴를 돌리며 멈춰 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벽, 인간의 벽에 번번이 깨지고 주일에 교회에 돌아와 위로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지만, 믿는 우리들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거칠고 냉혹함에 질린 사람들은 난민처럼 교회로 도피하기도 하고, 기가 눌려서 세상에 순종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안팎에서 인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모습이나 고집스럽고 험악한 모습에 질린 사람들은 교회에도 마음을 못 붙이고 세상에도 마음을 못 붙이고 우왕좌왕 방황을 하게 됩니다.

이 글에서 집중해서 논의하려는 것은 두 번째 처방, 즉 신앙인의 입장에서 ‘세상’과 ‘인간’의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감당하는 일입니다. 이 주제에는 우리가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과 한계에 대해서 우리 경력직 기독교인들이 실천적, 이론적으로 느끼는 답답함과 고민들이 들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긴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망각하기 쉬운 신앙적 태만이 있고, 사회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의 정의를 강조하는 가운데 인간의 불의와 한계를 망각하기 쉬운 신앙적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정치나 세상 얘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집중하려는 절반은 타당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인식 자체를 두려워하고 아예 회피하려고 하는 절반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세상을 가르치지 않고 기독교 신앙으로 세상을 배우기도 어려운 것, 이것이 경력직 기독교인, 경력직 평신도들의 첫 번째 고민입니다.  

믿음은 기독교인들을 구원해 주지만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악(惡)을 일거에 말소해 주지는 않습니다.(3) 바울 사도의 처절한 고백처럼 예수를 믿고 열심히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인간의 악과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완고함은 그대로 남아서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수시로 수면 위로 올라와 용틀임을 칩니다(로마서 7:21-23). 냉정하게 고백하자면, 현실의 인생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과 함께 이 세상의 온갖 악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온존시키는 주체들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악이 없고 비기독교인들의 세계에만 악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악은 기독교인들의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안에, 기독교인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많은 경우 독실한 경력직 평신도들과 신앙을 가르치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적 생각과 행동을 지나치게 옳고 의로운 것으로 확신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 경우 독실한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함께 의로운 자가 되어 더 이상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독단과 교만으로 빠져들게 됩니다.(5)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나와 너와 우리 동료 기독교인들이 기도와 말씀을 통해 ‘최대한으로’ 이기심과 연약함에서 탈출해서 거룩하고 착하고 온전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인간관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선악의 분량에 편차가 있고 동일한 사람에게도 인생의 때와 장소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하나님이 아닌 인간은 아무리 엄청난 기독교인 할아버지라고 하더라도 100% 착하고 헌신적이고 이타적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무궁무진한 악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착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아주 착하다고 자부하는 그 자체가 악을 만들어 냅니다. 아주 거룩한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그 거룩함 자체가 독을 내어뿜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기독교인에 대한, 지나친 희망과 기대는,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동료들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결국 자신에 대한 실망과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빠져들게 하는 함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기독교인을 포함한 “인간”의 죄와 악과 한계에 대해서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 충실히 배우지 못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이상과 인간의 현실 사이에 끼어 꼼짝달싹 못하고 갈피를 못 잡으면서 희망과 낙담과 포기 사이를 오고 가는 것, 이것이 경력직 기독교인, 경력직 평신도들의 두 번째 고민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새겨 주신 십계명에는 두 개의 돌판이 있습니다.(5)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돌판은 ‘사람의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은 부모와 자식[5], 살인과 폭력[6], 남편과 아내[7], 소유와 탈취[8], 거짓과 재판[9], 탐심과 분쟁[10]으로 분야를 나누어 ‘세상’과 ‘인간’의 ‘현실’에 관한 모든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두 차례 돌판에 새겨 주셨는데 (출애굽기 32:15-16, 34:28-29), 두 번의 경우 모두 수고스럽게 ‘굳이’ 두 개의 돌판으로 나누어 새겨주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에 관한 첫 번째 돌판’만큼이나 또는 그에 버금가게 ‘사람의 세상에 관한 두 번째 돌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고 결코 버리시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공부하지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고 경시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주제가 하나님에 관한 첫 번째 돌판과 사람의 세상에 관한 두 번째 돌판에 양대 항목으로 나뉘어서 전개된다는 점은 구약의 십계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두 가지의 강령, 이중계명과 주기도문도 정확하게 ‘하나님을 아는 일’과 ‘세상의 현실에 대응하는 일’의 양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은 예수님의 첫 번째 대계명인 ‘하나님 사랑’(마태복음 22:37)(6)에, 두 번째 돌판은 예수님의 두 번째 대계명인 ‘이웃사랑과 자기사랑’(마태복음 22:39)(7)에 대응합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과 하나님 사랑의 첫째 계명은 또한 주기도문의 전반부 세 가지 ‘하나님 기도’에 (마태복음 6:9-10),(8) 두 번째 돌판과 이웃사랑의 둘째 계명은 주기도문의 후반부 세 가지 ‘인생(人生) 기도’에 (마태복음 6:9-11)(9) 각각 연결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직접’ 주신 강령인 십계명과 이중계명과 주기도문의 세 가지가 모두 ‘하나님’에 대한 내용과 ‘세상과 인간의 현실’에 대한 내용의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마태복음 23:23),(10) 우리들은 ‘이것만 하고 저것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첫 번째 돌판에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고 두 번째 돌판을 지나치게 경홀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돌판을 경홀히 여긴다 함은 (i) 두 번째 돌판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이생의 삶은 무의미하므로 신경 쓸 것이 없다고), (ii) 두 번째 돌판을 너무 ‘쉽고 안일하게’ 생각하거나 (살인하거나 간음하거나 도둑질하거나 거짓말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부작위의무로), (iii) 두 번째 돌판을 너무 ‘단순하거나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사회적 선행 또는 사회개혁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몇 가지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글의 구체적인 목표는 기독교 신앙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이해(理解)를 ‘두 번째 돌판 위의 인생과 신앙 (두 번째 돌판 위의 신학)’으로 정리해서, 우리 경력직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안과 밖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일종의 교안 내지 교재의 시안(試案)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기독교적 실천규범이나 윤리의 제시에 앞서 세상과 인간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기독교적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자는 구호의 조급성보다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을 감당해 내는 삶의 단단함을 추구합니다.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한국교회가 결여하고 있는 ‘성도의 공생활(公生活) 원리’의 구성으로 연결되고,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착하게 잘 살자”는 피상적 차원을 넘어서는 심층적인 ‘성도의 사생활 원리’로 연결됩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이 글에서는 ‘두 번째 돌판 위의 신앙과 현실’에 관한 총론으로서 (1) 먼저 우리 신앙생활의 현실 속에서 ‘두 번째 돌판 위의 신앙’과 ‘첫 번째 돌판 위의 신앙’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세상과 신앙, 이상과 현실, 교회와 사회, 초심자와 경력 신자, 목회자와 평신도, 신학과 일반 학문 등을 대조하면서 검토하고, (2) 두 번째로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서 두 번째 돌판의 신앙이 충분히 존중되지 못하고 경시되어 온 이유를 신학적, 이론적, 제도적 및 실천적인 측면에서 간략히 검토하며, (3) 세 번째로 두 번째 돌판을 연구하기 위한 기준과 원리로서 첫 번째 돌판(교회)과 두 번째 돌판(사회) 사이의 긴장, 두 번째 돌판 위에 선 인간 내부의 긴장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악), 즉 ‘불의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정의’라는 명제가 내포하는 긴장과 모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그리고 ‘두 번째 돌판 위의 인간현실’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직접 주신 세 가지 계시, 즉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 두 번째 이중계명의 이웃사랑과 자기사랑 및 주기도문의 후반부 인생기도들을 어떻게 종합하여 검토할 것인지의 문제들을 순서에 따라 검토합니다. 

이러한 총론적 검토가 이루어지면, 그 다음의 후속 글을 통해서 ‘두 번째 돌판 위의 인생과 신앙’에 관한 각론으로서 이 글의 목적지에 해당하는 ①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 (성도의 공생활 원리)’과 ② ‘두 번째 돌판 위의 인간 (성도의 사생활 원리)’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구체적인 세부 항목에 따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이 글의 다소 용감한 목표가, 가는 길에 샛길로 빠지지 않고 우리 한국교회와 경력직 기독교인들의 고민을 위해서 조금이나마 유의미하고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이 글을 읽으시는 가운데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길을 잃고, 세상에 버림받고, 또 세상에 절망해서 교회로 옵니다. 교회에 와서, 성경을 읽으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합니다 (요한복음 14:27).(11) 그리고는 또 다시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아가서, 일주일 내내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사람들과 서로 부대끼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해관계가 적은 교회에서는 가급적 서로 웃음 짓고 평안한 안식을 누리려 하지만, 이해관계로 가득 찬 세상에 나가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남한테 당하지 않아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이해관계로 굴러가는 냉정한 세상에는 사랑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밖에 없습니다. (대다수의 신도들에게) 이해관계가 별로 크지 않은 교회에서는 누구나 사랑을 강조하고, 때로는 사랑이 너무 많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어, 교회에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따듯한 얼굴로, 세상에서는 뱀같이 긴장하고 냉담한 얼굴로 살아갑니다. 두 개의 다른 원리가 우리의 삶을 나누어 지배합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사회에서는 세상의 냉정한 법이.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운명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이생이 끝나면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되는 것 아닌가? 이 입장에서 볼 때, 이익추구로 가득한 육체적 정욕의 세상은 우리의 신앙이 ‘버리는’ 대상으로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세상은 신앙적 대화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뭐 하러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와 내 가족과 내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다시 묻습니다. 진짜로 그런가? 진짜로 ‘그것뿐’ 인가? 여기서 우리의 답변은 조금 흔들립니다. 글쎄......어차피 살 거라면 잘 사는 게 좋지 않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세상에서도 잘 지내고 믿음으로도 잘 지내는 것이, 우리에게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은 것 아닌가? 이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우리의 신앙에 딸려오는 일종의 ‘별책부록’ 비슷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지만’, 우리가 열심히 믿으면 ‘세상도 부록으로’ 따라옵니다. 그러니 이 입장에서도 ‘부록’에 불과한 세상은 진지한 신앙적 대화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이래서 우리에게는 믿음과 세상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교회에서는 사랑과 희생으로 충만하지만, 세상에서는 이익과 욕망으로 충만합니다. 세상은 신앙과 무관(無關)하게 굴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 대해서 무지(無知)하고 무력(無力)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교회는, 안타깝게도, 세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심자 단계에서는 이것이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이 꽉 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입니다. 신자가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다고 해서 금방 하늘나라로 직행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장기간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경력직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면 신앙적으로 방황하게 되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신앙적으로 태만해집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재해석하지 못하니, 믿음과 인생은 서로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됩니다. 세상과 삶을 통해서 믿음의 내용물을 채우지 못하니, 믿음은 개인구원과 개인적 위로 차원으로 퇴행해서 계속 맴돌게 됩니다. 답답하고 실망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하지만, 교회 밖이라고 해서 금방 답이 찾아지는 것은 아닐 터이니 이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세상의 거리가 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 기독교인들의 교회생활과 세상살이 사이에는 분단의 38선이 그어져 있는가? 교회는 착한 나라이고 세상은 나쁜 나라라는 흑백논리도 이제 더 이상 장담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관계를 모르는 첫 번째 돌판의 믿음과 이해관계로 가득한 두 번째 돌판의 세상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재정립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경력직 기독교인들의 고민과 질문입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문득문득 자기 자신의 불의를 잊어버리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거꾸로 인간의 불의와 죄성을 심각하게 묵상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어느덧 정의라는 말 자체를 불편해 하고 오히려 세상의 불의를 편안하게 느끼는 성향이 발생합니다. 전자는 교만한 정의의 위험에 빠지고 후자는 오만한 불의의 늪에 빠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 믿음,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믿음을 탐구하고 토론할 때에, ‘우리가 불의한 자로서 정의를 추구한다’는 근본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긴장감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앞장서 뛰어가려던 나 자신의 발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이 나쁜 놈인가?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내가 바보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신앙적, 종교적으로 거룩함과 사랑의 헌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나와 너와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진, 쉽게 부서져 내리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거룩함과 사랑과 헌신을 추구하는 일의 소중함을 부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얼마나 건조한 것인지, 사랑이 없는 현실주의가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적인 것인지, 자기만 아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가 없는 것인지,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거룩함’과 ‘사랑’과 ‘헌신’이 ‘나 자신’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거룩한 목회자도, 아무리 헌신적인 평신도도, 아무리 사랑이 넘치는 성자 같은 봉사자에게도, 그 속에는 부서져 내리는 인간의 내면이 있습니다. 서서히 부풀어가는 교만이 있고, 욕을 먹을 때 참기를 힘들어 하는 자랑이 있고,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어려운 자신감이 있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지겨워지는 피곤함이 있습니다. 욕망과 미움과 폭력과 공격성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거룩한 목회자와 헌신적인 성도와 사랑을 베푸는 봉사자들의 노력에는 세상이 무한한 욕망의 충돌 속에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문제는 ‘한계(限界)’를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 거룩함과 헌신과 사랑의 추구는 썩지 않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도 ‘겨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한계를 잊어버리게 되면 어느 순간 거룩함의 추구는 완고한 독단으로, 사랑의 봉사는 자랑의 봉사로, 헌신적인 노력은 맹목적인 질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는 사회혁명가들과 비슷하게 거룩함을 위해서 인생을 바치려는 우리들 신앙인에게도,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려는 태도와 경향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허락된 분량(share)과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용량(capacity)을 넘어서 자기와 타인을 강제하는 것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자기자신은 언제 어떻게 무너질 지 모르고, 다른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이상(理想)과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실(現實)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상을 추구하지 않고 현실에만 안주하는 신앙은 진지한 신앙생활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현실을 모르고 이상만을 강조하는 신앙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을 신앙적 낙오자와 탈락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에게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 올라갈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체질과 조건이 맞는 몇몇 사람은 정상까지 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도중에 주저 앉아 신앙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무리하게 절벽을 오르려다가 떨어져서 몸과 마음을 상(傷)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현실 속에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의 재미가 없어지거나 슬퍼지고, 이상을 추구하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이 힘에 겹거나 쓸쓸해집니다.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을 좇는 ‘이상’을 두 번째 돌판 위에 서 있는 인간의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것, 기독교 신앙의 ‘당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함께 찾아내야 하는 경력직 기독교인들의 고민과 모색입니다.

몇 년 전, 교회 구역모임에서의 일입니다. 동료 집사님들하고 은혜롭게 성경공부를 하고 다정하게 신앙생활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다가오는 선거와 관련하여 정치 얘기가 나왔습니다. 물론 나도 내 나름대로 정치적 소견이 있고 진지하게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신앙적으로 친절하게 지내던 집사님 한 분이 내가 지지하는 정당과 단체를 격하게 비난하면서 “집사님 생각도 그렇지요?” 라고 나의 동의를 구해왔습니다. 나의 입장에서는 그 의견에 결코 동의를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교회 모임에서 논쟁을 하면서 다투기도 그래서, 당혹감에 얼굴이 벌개진 채 못 들은 척 딴청을 하며 말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무척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은 모든 경력직 기독교인들의 공통된 경험일 것입니다. 평신도와 평신도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강단 위의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서도 벌어집니다.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부딪히면 신앙적으로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돌아다니는 경구(驚句)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세상 얘기나 정치 얘기를 하지 말라! 은혜가 안 된다.”

‘교회에서는 신앙 얘기만’ 하고, ‘정치 얘기는 교회 밖에서만’ 하자는 것입니다. 이 처방을 따르면, 교인들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은 상당히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정치적 침묵(沈默)’의 처방에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결국에는 교회가 첫 번째 돌판 만을 붙잡고 두 번째 돌판은 교회 밖으로 내다 버리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잃어버리고, 기독교인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신앙과 무관한 세속적인 관점의 당파적 정치관과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 개의 돌판 중 우리 마음대로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개별교회와 개교회의 교인들이 정치적 논쟁이 초래하는 갈등과 미움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해도, 전체로서의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의 경력직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으로, 현실적으로, 정치를 이해하고 고민하고 논의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사랑에는 자발적인 기부와 자선을 통한 ‘사적(私的) 이웃사랑’뿐만 아니라 강제적인 세금과 복지를 통한 ‘공적(公的) 이웃사랑’이 있습니다. 자기사랑에도 개인적으로 일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 몸을 지키는 ‘사적(私的) 자기사랑’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헌법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지키는 ‘공적(公的) 자기사랑’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사회제도를 통한 공적인 이웃사랑과 공적 자기사랑의 방법을 알고(마태복음 22:39), 정치적 논쟁과 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우리가 들게 되는 사회적인 시험을 감당해 내고(마태복음 6:13a),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정치와 경제와 사회관계의 크고 작은 힘(권력)을 통해서 뿜어 내는 현실적 악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악에 맞서 감당하고 이겨내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마태복음 6:13b). 

문제는 두 개의 돌판 사이에 ‘긴장(緊張)’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긴장 때문에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해야 한다’고 우리의 명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은 ‘하나’인데, 두 번째 돌판 위의 정치적 지향은 거의 항상 ‘두 갈래’ 이상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로마서 13장의 질서(칼)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에 대한 저항’을 강조합니다. 교회에서 정치 논의를 하면 자칫 십계명의 두 돌판이 다시 네 조각으로 갈라질 위험이 생깁니다. 두 번째 돌판 위의 진보주의는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을 약자를 옹호하는 진보적 하나님으로 찾고, 두 번째 돌판 위의 보수주의는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을 질서를 유지하는 보수적 하나님으로 찾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돌판의 분열로 말미암아 첫 번째 돌판조차도 다시 두 개로 갈라지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반쪽 돌판 두 개를 들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진보적인 반쪽 돌판 두 개를 들고서, 서로 자기 쪽에만 진정한 하나님과 진정한 정의가 있다고 대립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교회에서 정치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망(無望)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정치적 당파성(partisanship)과 교회 내부의 정치적 당파성이 똑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인정하고 연구하며 토론할 수 있는 기독교적 정치관의 기준과 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첫 번째 돌판 위의 신앙과 두 번째 돌판 위의 갈라진 정치를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경력직 기독교인, 경력직 평신도들이 갖는 신앙과 정치에 관한 고민과 질문입니다.

해답의 실마리 또한 두 개의 돌판 사이의 ‘긴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돌판 위의 인간은 ‘복잡’합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의 정치적 지향은 최소한 두 개 이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함과 지혜도 있으나, 흙으로 빚은 인간의 악과 욕심과 미움과 폭력성도 함께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의 분리 및 배합은 정치적 낙관주의와 정치적 비관주의, 정치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정치적 극단주의와 온건주의 등 여러 가지 정치적 태도와 경향들을 생산해냅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초월성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공적 박애주의만 있는 것도 아니며, 생존과 이익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사적 이기주의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 가지가 다 함께 섞이고 뒤엉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다 진보적이거나 모든 사람이 다 보수적이기보다는 일부 사람들은 진보적이고 일부 사람들은 보수적인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의 인생에는 ‘겨우’ 사는 인생의 절박함과 ‘그냥’ 사는 인생의 맹목성과 ‘한껏’ 살아보려는 인생의 호기(豪氣)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정치적 이상주의자와 정치적 현실주의자로 갈라지고, 또한 똑 같은 한 사람 속에서도 정치적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정치적 용기와 비겁함이 뒤섞여 나타나기도 합니다. 첫 번째 돌판 위의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두 번째 돌판 위의 사람은 여럿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돌판 위의 정치가 갈라진다고 해서 첫 번째 돌판 위의 신앙이 갈라질 필요는 없고, 첫 번째 돌판 위의 신앙이 하나라고 해서 두 번째 돌판 위의 정치도 반드시 한 가지 입장으로 통일되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두 돌판 사이의 긴장과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두 돌판의 관계를 평면적, 단선적으로만 바라본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정치와 인간의 정치를 모두 오해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 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글에서 정리하는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 성도의 공생활 원리’를 통해서 진행하고자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첫 번째 돌판 없이’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자기 인생을 붙잡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다정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고 냉정하고 험악하고 또 바쁩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 속에서 자기를 팔아야 합니다. 물건을 팔고 서비스를 팔고 능력을 팔고 지식을 팔고 사상을 팔고 이념과 비전도 팔고 웃음과 슬픔도 팔아야 합니다. 팔지 못하면? 위기에 빠집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돌판 위의 인생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의 실존이 주는 무거움과 막막함, 괴로움과 부대낌의 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때가 가고 곤고한 날이 오며 내 인생에는 아무 낙이 없다고 탄식을 하게 될 때 ,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변화는 ‘두 번째 돌판 위의 인생에서 첫 번째 돌판 위의 삶으로의 급격한 이동(移動)’입니다. 두 번째 돌판으로부터의 탈출(출애굽, Exodus)이요, 첫 번째 돌판으로 넘어가는 유월(逾越, Passover)입니다. 새롭게 믿음을 가진 초심자는 세상이 주지 않는 평안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해방감을 경험하고,(13) 세상과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쉬라는 안식으로의 초대를 받습니다.(14)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요(人生苦海), 불타는 집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우리 인생의 실상을 알게 된 사람에게 이 탈출과 평안과 안식은 실로 구원의 복된 소식(福音)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성령(Holy Spirit)의 임재는 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의심과 불안을 거두어 주고, 우리로 하여금 첫 번째 돌판 위의 해방과 구원을 계속 붙잡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것이 첫 번째 돌판의 힘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어 세상과 인생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로 인도해 주는 복음전도의 위력과 필요입니다. 두 번째 돌판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노력은 억압과 불의를 완화시키고 자유와 민주가 무시당하지 않는 차선(次善)을 이룰 수는 있겠으나 최선의 이상사회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내 밖의 악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지만, 그 악과 싸우는 내 안의 악도 만만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성선설적 인본주의의 극한을 추구한 공산주의 혁명의 실패가 이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최선의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한 인생은 다른 사람들의 쓰라린 실패 위에 서 있습니다. 잘난 사람의 앞에는 항상 더 잘난 놈이 있습니다. 명예로운 인생은 한 순간 모욕으로 무너지기 쉽고, 착하고 훌륭한 사람은 그 착하고 훌륭한 것으로 자기자랑에 빠지고, 부자들은 언제 망할까 두려워합니다.(15) 두 번째 돌판에는 구원이 없고, 구원의 힘은 첫 번째 돌판에 있습니다.(16)  

많은 믿는 이들에게 첫 번째 돌판으로 넘어오는 이 시기는 감격과 기쁨으로 경험됩니다.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오직 자기의 힘으로, 허공 중의 줄타기를 하듯 불안하고 고독하게 살던 사람이,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그러나 인간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 모든 고통과 고독과 불안이 일순간에 다 사라지는 기쁨을 맛봅니다. 더구나 초심자 시절의 몇 년간, 신앙의 밀월기에는 마치 하나님의 프로모션 행사기간인 것처럼 기도만 하면 응답이 되고, 성경만 읽으면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고,(17)  교회만 오면 마음이 편안하고,(18) 세상과 나는 간 데가 없고 오직 구속(救贖)한 주만 바라보이는 신앙의 기쁨이 충만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기는 무한정하게 지속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나이가 들면 젖을 떼야 합니다.(19)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함께 보는 초월적인 기쁨에 취(醉)하여 변화산에 초막을 짓고 머물러 살기를 구하였으나,(20) 예수님은 냉정하게 끊고 베드로를 끌고서 산을 떠나 위험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어른이 되면 학교를 졸업하고 하산(下山)해서 세상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탈출과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에서 받은 두 개의 돌판을 들고 사십 년을 광야에서 헤매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류 역사의 신기원(新紀元)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인류는 역사 속에서 세상의 싸움과 인간의 악을 다루며 고통스러운 씨름을 해왔고, 우리들 모두는 첫 번째 돌판으로 넘어가는 구원의 기쁨을 맛본 후로도, 몇 십 년 동안 이 땅에서, 두 번째 돌판의 세상 속에서, 일하고 먹고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사랑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믿기 전에는 ‘첫 번째 돌판 없이’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살았지만, 믿은 후에는 ‘첫 번째 돌판을 가지고’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소망이 없는 험악한 인생이지만, 후자는 소망이 있는 ‘험악한 인생’(21)입니다.   

이제 초심자의 감격을 벗어난 경력직 기독교인들은 두 개의 돌판을 모두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첫 번째 돌판의 신앙을 꼭 붙들고 두 번째 돌판의 세상 위에서 살아야 합니다. 첫 번째 돌판의 일도 해야 하고 두 번째 돌판의 일도 해야 합니다. 두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경력직 기독교인들의 신앙실천 과목이 첫 번째 돌판의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어서 두 번째 돌판의 세상과 인생에 관한 신앙실천 과목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전체적인 기독교 신앙실천의 모습이 ‘초심자 위주의 신앙’으로만 집중되고, 경력직 기독교인(교회 일꾼)들은 초심자의 신앙을 위해서 활용되는 신앙도우미적 역할에 멈추어 서서, 정작 경력 신자들 자신의 신앙적 고민은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한 채 정체되는 소외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둘째는 경력직 기독교인들 내에서 적극적 신앙역량의 배치가 공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첫 번째 돌판(교회)에서의 신앙 일에 과다한 역량이 투입되고 두 번째 돌판(세상)에서의 신앙 일에는 역량의 공백, 관심의 공백, 이론과 실천 상의 공백을 낳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불신자의 ‘전도’와 초심자의 ‘양육’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첫 번째 돌판의 일입니다. 전도는 두 번째 돌판에서 첫 번째 돌판 위의 삶으로 넘어오는 것(Passover)이고, 양육은 첫 번째 돌판으로 막 넘어온 사람이 첫 번째 돌판의 삶과 원리에 대해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는 오리엔테이션입니다. ‘전도’와 ‘양육’의 초심자 단계를 거친 경력직 기독교인들에게 다음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리더로서의 ‘헌신’과 ‘봉사’입니다. 여기에서 ‘헌신’이라 함은 대체로 ‘전도와 양육’에 대한 헌신이고, ‘봉사’는 ‘전도와 양육을 하는 교회의 기능과 활동’에 대한 봉사로 나타납니다. ‘헌신’도 기본적으로 첫 번째 돌판의 일이고 ‘봉사’도 원칙적으로 첫 번째 돌판의 일입니다. 전도와 양육, 헌신과 봉사는 모두 교회 안에서 하는 신앙 일의 과목들입니다. 경력직 평신도는 마치 교회라는 학교에서 신입생들의 공부를 돕는 선배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선배들은 신앙 공부를 마치고 졸업을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지를 않습니다. 교회 밖 세상에 나가서 신앙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운 과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실천 가능한 현실적인 해결책이 있습니다. 경력직 기독교인들을 위한 신앙실천의 과목을 보충하고 추가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대일 성경공부를 생각한다면 초심자가 아닌 경력 신자들을 위한 신앙교육의 주제들로서 ‘신앙으로 읽는 세상 – 성도의 공생활 원리’ 과목과 ‘신앙으로 읽는 인간의 현실 – 성도의 사생활 원리’ 과목이라는 두 Chapter를 추가하고, 신앙의 실천에 관해서는 경력직 신자들을 교회봉사와 교회사무에 묶어놓지 말고 세상과 직업에서의 신앙실천에 좀더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파송하고 풀어놓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조금 더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적극적 신앙역량의 공간적(空間的) 편중’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적 헌신과 봉사의 길을 놓고 경력직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생활방식으로 갈라집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와 세상에서 일하는 ‘경력직 평신도’입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는 첫 번째 돌판 위의 인생을 살고 세상에서 일하는 평신도는 두 번째 돌판 위의 인생을 삽니다. 일반적으로 좀 더 신앙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신학교를 나와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나 해외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되고, 상대적으로 열심이 적거나 신앙적인 투신을 각오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하는 경력직 평신도가 됩니다. 그 결과 신앙역량의 배치상 중요한 왜곡과 불균형이 나타납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신앙의 장군과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에 모여 있고 (첫 번째 돌판), 거대한 규모의 신앙의 사병(士兵)들은 장군과 장교 없이 세상에 방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판). 교회에서 일하는 신앙의 일꾼들과 세상에서 일하는 신앙의 일꾼들은, 배치와 임무와 부대와 병과와 특기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장교들은 세상에 있는 사병들을 교회로 불러서 교회 일을 시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에서 일하는 장교들은 (자기의 병과나 주특기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신앙적 전투에 대한 지식이나 병법을 가르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병들은 세상에 장수가 없으니 세상에서 신앙으로 싸우지 못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찾아 교회로 모여듭니다. 주중 6일간 세상에서 패잔병이나 포로로 살고, 주일 하루만 교회에서 용사가 됩니다. 세상에서 일하는 사병이 신앙의 장교가 되려면 신학교를 가야 하니, 포기하거나 타협하고 그냥 평생 신앙의 사병, 평신도로 살아갑니다. 뭔가 더 하고 싶지만 막연하고 길이 애매해서.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첫 번째 돌판을 들고 두 번째 돌판 위에 살아가는 경력직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총체적으로 발전하고 힘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신앙역량이 두 개의 돌판 즉 교회와 세상에 골고루 적절하게 재배치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신앙의 장군과 장교들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도 신앙의 장군과 장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모여있는 일꾼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방법과 함께 세상에 있는 일꾼들을 장군과 장교로 승진시키는 방법도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교회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에서도 움직이고 세상에서도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내용은 교회에서도 배워야 하고 세상과 현실에서도 배워야 합니다.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과 교회 밖에서 할 수 있는 일, 교회에서 배울 수 있는 것과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정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개별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과도한 기대도 하지 않고 불필요한 실망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할 믿음의 일을 충실하게 하고, 세상에서는 세상에서 해야 할 믿음의 일을 능동적으로 해 나가는 실질적인 방법과 전망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교회를 괴롭히는 교회의 과잉과 세상의 결핍을 해소할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모든 기독교인이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목회자이거나 평신도이거나, 신앙의 아마추어를 벗어나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주체성을 가지는 일이 관건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신학은 신학교 또는 신학과에서만 가르치고 연구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세속의 인문과학, 사회과학, 법학, 자연과학과 공학, 의학 등은 세속 대학 또는 세속 학과에서만 가르칩니다. 선명한 분리요 명쾌한 단절입니다. 신학은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집중하고, 세상의 학문들은 두 번째 돌판의 사람에 대한 지식을 추구합니다. 첫 번째 돌판의 신학은 대체로 두 번째 돌판 학문들의 인본주의적 성격으로부터 오염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두 번째 돌판 학문의 기세에 밀려 첫 번째 돌판의 많은 것을 포기한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두 번째 돌판 학문의 기세에 반발하여 첫 번째 돌판의 무오류성과 독점성에 올인(all-in)한 것이 근본주의 신학입니다.(22)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 학문들은 아예 하나님이든 다른 신이든 첫 번째 돌판의 초월적, 초자연적인 주제를 미신이나 난센스처럼 배척합니다. 법은 사람의 법이고, 철학도 사람의 철학이고 정치도 사람의 정치이고, 과학기술도 사람의 과학기술입니다. 사람의 학문에는 하나님이나 신이 끼어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존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지식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23) 신학과 세상 학문의 분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첫 번째 돌판의 신앙’이 ‘두 번째 돌판의 현실’ 쪽으로 움직이는 길을 막거나 좁게 만들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를 두고 세상 학문의 자율성과 독립이 기독교 신앙의 퇴각과 하나님의 영역 축소를 낳았다고 설명합니다.(24) 그 이유는 “근대 이후 진행된 인간의 자율성(autonomy of man)이 성년기에 이르러(come of age) 하나님에 의탁하지 않고도 인간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을 설명할 수 있게 됨”에 따라,(25) 당시의 독일 기독교는 “세상과 인간의 공적 영역에서 퇴각하게 된 하나님의 안전한 영역을 오직 인간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이 의견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안고 있는 현실적 제약이나 한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경청할만한 진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救援)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좁은 곳에 구속(拘束)하였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이제 퇴각하고 포기한 세상 학문의 영역, 잃어버렸거나 혹은 놓아버린 ‘두 번째 돌판의 인생영역’으로 다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탁하지 않고 (자유롭게 혹은 간섭을 받지 않고) 인간의 자율성(autonomy of man)을 추구한 세상의 학문은 그 끝을 보았는가? 끝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끝은 ‘완성(completion)’으로서의 끝을 본 것이 아니라 ‘한계(limitation)’로서의 끝을 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27)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그 영원의 자리에 둔 것이라면, 세상의 학문들은 ‘사람’을 그 영원의 자리에 놓으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신뢰와 신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년왕국을 인간의 천년왕국으로 대체하여 이 땅 위에 세우려고 한 칼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종교(신)는 진정한 태양(true sun)인 인간의 둘레를 돌고 있는 가공(架空)의 태양(illusory sun)에 불과하다”(28)고 선포한 바 있는데, 이 신념은 공산주의(Communism)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생산력을 숭배하는 자본주의(Capitalism)와 자연을 인식, 개조하는 인간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확신한 과학주의(Scientism)에도 공통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 자본주의 제국들의 경쟁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문명적 파괴와 살육을 일으켰고, 20세기 내내 전세계를 혁명의 열정으로 흔들었던 공산주의는 20세기가 끝나기 직전 참담한 실망 속에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으며, 자연과학적 지식의 절대성에 대한 신념 또한 20세기 초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원리를 통해 그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은 힘을 내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부와 상품소비문명을 창조해 냈지만, 21세기에 들어와 모든 인간은 ‘꿈도 없이’ 더 ‘불안’해 졌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정치학의 열정과 경제학의 낙관과 철학의 자신감과 물리학의 신념이 함께 벽에 부딪치고, 모든 세상 학문은 ‘인간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세상 학문 중 가장 오래된 편인 법학은 원래부터 인간의 이기심과 한계에 대한 불신을 기초로 했다는 점에서 다소 예외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 번째 돌판의 신학에서 분리, 독립하여 첫 번째 돌판의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내면적 영역만 겨우 붙잡고 유지할 정도로 거세게 몰아붙였던 두 번째 돌판의 세상 학문 또한 그 장성한 분량을 채우고는 이제 멈추어 섰거나 방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9) 세상 학문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하나님 대신 인간을 ‘영원’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이제는 사람이 영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상(理想)과 함께 하거나 또는 이상과 대치한 현실은 힘이 들어도 치열하고 아름답지만, 이상을 잃어버리고 혼자 남은 현실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냉혹하나 어리석고, 막연하며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전도서 3:11), 사람들은 ‘영원’의 공백, 영원의 진공상태(眞空狀態)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두 번째 돌판의 세상 학문도 ‘영원’을 추구하는 첫 번째 돌판의 지식을 다시 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먼저 인식하고 이를 모든 지식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첫 번째 돌판의 학문이, 이제 막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된 두 번째 돌판의 세상 학문보다 더 선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이전에는 신학이 힘으로 인간의 학문을 억압했다면, 이제는 신학과 세상 학문이 다시 자발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공통의 키워드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제 신학은 두 번째 돌판으로 나아가 인간의 내면적 세계로 고립된 기독교 신앙을 해방시킬 절실한 필요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성년기(Come of Age)를 외쳤던 세상 학문은 이제 첫 번째 돌판이 가진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지식을 숙고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이야기가 역사를 통해 다시 전개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학문은 하나님을 뿌리치고 인간의 힘으로 선과 악을 아는 지혜를 알기 위해 역사의 선악과 나무로 나갔습니다(창세기 3:6). 많은 지식을 얻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학문은 결국 인간의 악을 보았고 인간의 벌거벗은 한계를 발견했습니다(창세기 3:7). 이런 맥락에서 세상 학문의 발전은 칼빈이 말한 ‘두 가지 지식’ 중 ‘인간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 단계에서는 ‘인간의 힘(하나님의 형상을 닮은)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었고, 뒷 단계에서는 ‘인간의 한계(인간의 악과 죄성)에 대한 지식’이 쓰라린 역사적 경험 속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 학문의 발전을 일면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인본주의 세력의 책동으로 배척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심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의 전개와 발전’으로 재해석하고 적극적으로 소화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통합의 방법은 두 번째 돌판 학문과 첫 번째 돌판 학문 간의 진정한 대화입니다. 두 번째 돌판의 세상 학문을 첫 번째 돌판의 신학과 연결해서 두 번째 돌판의 신학을 형성하는 진지하고 심각하고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첫 번째 돌판의 학문을 하는 사람과 두 번째 돌판의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돌판의 세상 학문 관여자 중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사명감을 가지고, 지혜롭게, 두 지식,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 간의 대화 또는 상호작용의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두 번째 돌판의 학문 관여자 중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과도, 전도와 개종과 신앙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세상의 현실’에 관한 지식을 함께 토론하는 유의미한 대화와 상호 경청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돌판의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도 세상 학문이 쌓아 올린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식을 존중하고 배우고 재해석하려는 겸손하고도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지식의 구체적인 통합의 분야들은 다음 글의 주제인 ‘두 번째 돌판의 신앙(신학)’, 곧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 – 성도의 공생활 원리’, ‘두 번째 돌판 위의 인간- 성도의 사생활 원리’가 다루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법학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인간의 현실과 제도, 죄와 벌, 이익과 분쟁의 원리 및 그 해결에 관한 지식을 돕고, 정치학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세상의 싸움, 힘(권력)이 주는 악과 폭력, 공적 이웃사랑과 공적 자기사랑의 역동성에 관한 지식을 보완해 줍니다. 경제학은 인간의 노동과 생산, 소유와 분배를 통해 우리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나누는 일, 생산과 분배의 경제활동 과정에서 우리가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시험에 들고 악을 행하고 당하는 일들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 보충해 줄 수 있고, 최근 크게 발달한 심리학과 뇌신경의학 등은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배운 인간의 본성적 한계와 악과 폭력성과 가능성들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몸 안에서 움직이는가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적 실천의 한계와 가능성과 균형에 관한 방법론을 보충해 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지식의 구체적인 결합에 관한 논의는 뒤에 성도의 공생활 원리와 성도의 사생활 원리에 관한 논의내용 중에서 더 적극적으로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기만 하고, 그 뒤에는 아예 보따리를 건네주지 않거나, 거의 텅 빈 보따리를 주는 일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두 번째 돌판이 필요 없거나 필요해도 아주 조금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어 있고, 신앙적으로 볼 때 세상의 일, 세상의 삶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왜 이런 분리가 일어났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쉽게 생각나는 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생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입니다. 이 세상은 정욕과 죄로 가득한 곳이고 그 세상 속의 삶은 허망한 것들을 쫓는 무의미한 삶이니,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 땅을 나그네처럼 살다가 생명이 다했을 때 우리의 본향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보혈에 힘입어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기는 소망에만 의지하여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도 근거구절들이 있고, 우리가 수 년 수십 년 간 들어온 수많은 설교들의 주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신앙관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세상과 나는 간 데 없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복음, 나는 완전히 나쁜 놈이고 희망 없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서 내 죄를 몽땅 갚아주셔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게 하셨으니, 그 구원의 확신에 굳건히 서서 죄책감 없이 살아가고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자는 신앙입니다. 

그렇지요. 인간도 전적인 죄인이고 세상도 전적인 죄의 소굴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우리의 세속 인생에는 아무 소망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교회 생활은 소중하고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오는 불신자 전도는 매우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 내가 맡은 일, 사람들하고 다투는 일, 이해관계로 씨름하는 일, 직장을 잡고 유지하려고 벌이는 싸움과 다툼, 힘이 없어서 당하거나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이 모든 이생의 일은 별 의미가 없는 일로, 우리 신앙과 우리 복음의 주된 주제가 되지 못합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내 마음의 평안이 흔들리지 않도록, 가급적 착한 마음을 먹고, 나를 못되게 군 놈들하고도 가능한대로 싸우지 말고, 세상이 주는 시험들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주께 매달리는 정도, 즉 ‘이생을 나그네로서 착하고 담담하게 살아가기’ 정도가, 우리가 그 동안 교회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신앙의 실천적 내용입니다. 논리적으로 이 소극적인 복음의 내용이 이어지는 곳은 ‘(개인적으로) 세상의 고요하고 평안한 삶, 순탄하고 형통한 삶’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험악하고 불안하고 실패의 공포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삶, 순탄하고 형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공부를 잘 하고,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우리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우리가 건강하기 (요한3서 1:2, 새번역)’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복음은 우리의 ‘개인적인 샬롬(shalom)’을 지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으로 값없이 공짜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나아가 내세에서 천국과 부활과 영원한 사면까지 보장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그냥 개인적으로 ‘열심히’ 살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제목들은 ‘정당하게’ 세상의 모든 것을 애타게 기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잘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나와 내 가족이 잘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이웃사랑’은 어떻게 되느냐? 나처럼 개인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전도하면 됩니다. 내가 살만큼 살면서 내 밭 둘레의 ‘이삭’만큼을 구제와 봉사로 나누면 족합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어떻게 되느냐? 먹고 살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거기에서 시간을 내서 교회생활에 열심과 희생으로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기 부인인가,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수면의 유혹마저 물리치면서 매일 새벽기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자기십자가인가? 

이렇게 배운 ‘개인적인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하고, 힘과 권력을 얻고, 힘 있는 사람에게 적응하고 아부하고 간신 노릇까지 합니다. 죄의 권세, 힘과 이익의 충동으로 거칠게 충돌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배운) 기독교인의 착함과 인내와 사랑과 순종함’을 가지고, 세상의 힘과 이익에 착하게 인내하고 사랑으로 순종합니다. 이래서 우리가 배운 ‘개인적인 구원의 복음’은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세상의 죄와 힘과 이익에 대한 순종의 복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죄의 복음’으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약 모르고 오용 말고, 약 좋다고 남용 말자”는 표어가 있었지요? 지금 우리의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구약 모르고 오용하고, 신약 모르고 남용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 개신교회는 가장 윤리의식이 뒤처지고 민주적인 공적 질서도 없는 곳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개인들도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보수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조금 지나친 비난도 있겠지만, 아니라고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구원’만을 추구하는 복음, 첫 번째 돌판에만 치우친 신앙의 실패입니다. 물에서는 건짐을 받았으나, 이생에서 들고 다닐 ‘보따리’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복음은 오염되었지만 훼손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해하고 남용하고 잘못된 길을 걸었지만, 아직 은혜가 남아있고 뜨거운 열정이 살아있고 돌이킬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으며, 무엇보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가 있습니다. 더 이상 일평생을 나 혼자만을 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곤란합니다. 나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응석을 부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고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모든 일을 상의하실 수 있는 장성한 어른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매일 맞고 돌아와 하나님 앞에 징징거리는 나약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용기를 가지고 세상의 힘과 이익과 죄에 당당하게 맞서고 이기거나 지거나 어른처럼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하고 단단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과 신앙실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이웃의 모든 자원을 ‘나’와 ‘개인’의 구원과 평안을 위해 빨아들이는 ‘개인주의적 복음’의 완고한 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은 용서를 해 주신다는 ‘방종한(indulgent) 무죄사면의 복음’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중시하는 복음, ‘나와 이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중시하는 ‘두 번째 돌판 위의 신앙’을 함께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두 가지를 다 해야 합니다.(30)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과 성령의 위로’로 다시 일어나는 첫 번째 돌판의 신앙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의 격려하심’으로 이 세상의 삶에 도전하고, 나와 너와 우리 자신의 악과 한계를 냉정하고 정확히 봄으로써 무모한 도전과 참담한 실패를 만들어내지 않고, 동시에 죄와 힘과 이익의 권세에 간신처럼 순종하지 않고, 세상이 주는 시험을 감당해내고 거꾸로 세상을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 들게 하는, 두 번째 돌판의 신앙을 함께 연구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 다음 장 이하에서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두 번째 돌판을 잃어버리거나 경시하게 된 이유를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간단히 살펴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종합하기 위한 두 번째 돌판의 신앙에 관한 기준과 원리를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 사이의 긴장 (칭의와 정의), 두 번째 돌판 위의 긴장 (인간의 가능성과 악), 불의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정의의 긴장 (불의와 정의) 등의 순서로 검토하면서, 이 글의 궁극적인 과제인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성도의 공생활 원리’와 ‘두 번째 돌판 위의 인간–성도의 사생활 원리’에 관한 각론적 내용으로 나가는 길을 준비해 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초월적인 인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사, 공, 초월의 세 가지 인생이 다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가정생활을 하고(‘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스리거나 다스림을 받고, 사람들 간에 서로 다투면서 고통을 주고 받고, 집단적으로 대립되는 정치적 신조들을 주장하며 살아갑니다(‘공’).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초월’). 여기에서 사와 공의 영역은 두 번째 돌판의 영역에 해당하고, 초월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첫 번째 돌판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먹고 사는 ‘사’적 성격의 직업(농업, 공업, 서비스업, 가사업)을 가지고, 1-2할의 평신도들은 공동체를 다스리거나 관리, 유지하는 ‘공’적 성격의 직업(공무원, 교사, 공공서비스업)을 가지고 살아가며, 직장이 쉬는 주일이나 주중 여분의 시간을 이용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기독교 평신도들의 삶은 두 번째 돌판 위의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본업에 해당하고, 첫 번째 돌판 위의 신앙생활은 부업에 해당합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선포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초월’적인 영역의 신앙활동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삶에도 목회자의 직책 기타 다른 방법을 통해서 나와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적 인생의 요소가 있고, 개인적인 시민 자격에서 또는 교회의 목회자 자격에서 사회와 세상의 일에 참여하고 관여하는 ‘공’적 인생의 요소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삶에서는 첫 번째 돌판 위의 신앙활동이 본업이지만, 두 번째 돌판 위의 직장생활 및 가정생활도 부업처럼 함께 존재합니다. 

이 글은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제로, 이 신앙이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과 인간의 현실에서 어떻게 감당되고 실현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첫 번째 돌판 위의 신앙만을 중시하고 두 번째 돌판의 현실에 대해서는 무시를 하거나, 경시를 하거나, 지나치게 간단한 것으로 취급을 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 기독교인의 인생에는 (평신도와 목회자의 구분을 막론하고) 사와 공과 초월의 세가지 영역이 모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독교인의 초월적인 인생에만 집중하고, 기독교인의 사적인 인생과 공적인 인생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또는 관심을 가지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하에서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두 번째 돌판의 현실을 경시하게 만든 세 가지 이론적, 실천적 배경들을 간략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성속이원론에 이런 문제가 있다면, 그 반대로 속세의 일에도 성스러운 점이 있다고 성속일원론(聖俗一元論)적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지만, 이것도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의 직업소명설은 사제가 아닌 평신도들이 수행하는 세속적인 직업에도 하나님의 소명(calling)이 있다고 하여, 극단적인 성속이원론을 완화하고 세속의 일에서도 거룩함을 찾는 ‘출발점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 ‘출발점의 역할’에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적 노동윤리에 크게 힘입었다고 분석한 것(31)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혹시 ‘너무 세상친화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됩니다. ‘사람이 착하고 근면하고 성실하고 창의적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성공을 하고 많은 부를 창출하는 것’ 자체를 나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솔직히 마음 속으로는 이런 류의 성공을 바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세속 직업을 통한 근면과 성공 자체가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삶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 신앙이 너무 쉬워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신앙과 세상의 신앙(성공)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굳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던 것인지조차도…, 조금 애매해집니다.   

사람의 직업과 노동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은 ‘일면’ 타당한 이야기이지만, 사람의 직업과 사람의 노동 전부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긍정하고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납니다. 사람의 직업, 사람의 노동에는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 1:28)”고 명하신 하나님의 소명 내지 위임사무로서의 긍정적이고 밝은 측면(bright side)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의 직업, 사람의 노동에는 인간의 실낙원 이후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고 선고하신 죄의 처벌이자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대가로서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측면(dark side) 또한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직업과 노동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선’한 것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하는 ‘악’의 요소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전부 속되다고 버리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창세기 1:28)을 버리는 것이고, 이것을 모두 그냥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창세기 3:17)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독교신앙은 관념적으로는 성속이원론적 경향을, 실천적으로는 성속일원론적 경향을 추구합니다 결벽적인 성속일원론은 ‘삶의 현실’을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몰아내지만, ‘편안한’ 성속일원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독교 신앙에서 몰아냅니다. 전자는 십계명에 ‘두 번째 돌판’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고, 후자는 두 번째 돌판도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세상에서 성과 속이 깨끗하게 단절된다고 생각하는 성속이원론도 틀리고, 속된 것이 ‘모두’ 성스러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성속일원론도 맞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는 속된 일에도 성스러운 것이 들어있고, 사람이 하는 성스러운 일에도 속된 것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의 인생에 적용되는 성과 속’에 대해서는 “두 개’로의 명확한 단절도 아니고(성≠속), ‘한 개’로의 타협적인 일치도 아니며(성=속), 오히려 성과 속이 서로 안팎으로 얽혀있는 ‘2×2’의 복합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성"⇆" 속).   

이처럼 개인주의적 복음, 개인주의적 구원관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공공적 복음의 방향으로 움직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또한 그리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 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살기도 합니다. 사회 속의 ‘함께’는 사회적 정의와 공공의 이익과 이타적 박애주의와 희망을 추구하지만, 사회 속의 ‘혼자’는 생존의 절박함과 경쟁의 쪼들림과 탈락의 불안감과 인생의 절망을 직면합니다. 기독교인들의 공적 노력에는 이처럼 세상에 대한 성선설적 희망의 요소와 성악설적 한계의 측면이 공존합니다. 따라서 공적 지향의 기독교가 전자의 ‘가능성’에만 집중하고 후자의 ‘한계’를 잊어버리게 되면, 사회의 진보적인 사회개혁운동과 거의 비슷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에게 매달릴 필요가 조금 흐릿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개혁적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다수파 주류’ 기독교와 공존하는 ‘안정적인 소수파’의 지위에 만족하고 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은 ‘구원’의 문제보다도 ‘악’의 문제로 접근할 때 그 필요성이 더 선명해 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deliver us from the evil)’라는 주기도문 마지막 인생기도의 ‘악(惡)’에는 ‘영적 악’, 사탄, 즉 악한 영의 악과 믿지 않는 우리 영의 불신(不信)의 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만들어내는 ‘공적 악’, ‘현실적 악’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악이 있고, 세상 속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악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는 나의 밖에서 나와 우리를 억압하는 세상의 구조적이고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악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적 악’), 나와 우리가 이 세상의 구조에 참여해서 적극적, 소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악들이 있습니다 (‘참여적 악’).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악에도 다른 악한 사람(타인)이 선한 나와 우리에게 가하는 외부의 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악’), 나와 우리들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 타인을 침해하는 내부의 악이 있습니다 (‘자신의 악’).  비기독교인들만 악을 저지르고 비기독교적인 세상만 악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악을 저지르고, 기독교적인 현실교회도 악을 만들어냅니다. (이 양자 사이에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진지하고 솔직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구원은 죄와 악으로부터의 구원인데,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이 이 공적, 사회적 악의 문제를 직시하고 감당하고 씨름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구원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것 같기도 한’ 애매하고 혼몽(昏懜)한 기독교인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강경보수적인 입장의 문제는 구조적인 악, 타인의 악에 대항하지 않고 참여적인 악, 자신의 악에 너그럽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강경진보적인 입장의 문제는 구조적인 악, 타인의 악에 대항하는 정의감과 헌신이 강한 반면에, 참여적인 악, 자기자신의 악에 대한 인식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공적 지향의 기독교가 구조적 악, 타인의 악에만 집중하고 참여적 악, 자신의 악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하면 ‘개인주의적 복음의 공적 영역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적 지향의 기독교가 구조적 악, 타인의 악을 척결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 참여적 악에 대한 극복의 노력까지도 함께 포괄해 낸다면 개인주의적 복음의 한계를 해결하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 정치권력의 ‘힘’ – ‘공적 영역’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회피’ 

강한 정치권력, 야수 같은 정치권력은 모든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전제왕정은 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역자라 하여 처형합니다. 타 민족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식민지 권력은 지배 받는 민족과 공동체의 독립과 자존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제거합니다.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권력을 뺏은 독재권력은 정상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벌하고 억압합니다. 독일의 히틀러 정권과 같은 전체주의 권력은 정상적인 선거절차를 통해서 권력을 차지한 후 지지대중들을 열광적으로 동원해서 (실정법상) 합법적으로 소수민족을 학살하고 합법적으로 반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정치권력의 힘과 폭력성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초월’의 세계로 도피하고 ‘공적 영역’의 악에 대한 대응을 회피하게 합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초기 3.1.만세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한국 교회가, 이후 점차 일제 권력에 대한 반발이나 대응을 회피하다가, 결국에는 일제의 압박에 밀려 교단들의 공식적 결정에 따른 집단적 신사참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이를 보여줍니다. 해방 이후 군부독재시대에, 특히 광주사태의 비극 직후에도 명망 있는 목사님들이 국가조찬기도회에 나가서 나중에 국가내란죄로 공식 처벌을 받은 5공화국 정권의 주체들을 인정하고 축복했던 일도 마찬가지 맥락의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20세기 일백 년의 역사를 통해서 뼈저리게 경험했듯이, 식민지 지배자나 군부독재권력과 같이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결여된 세력은 정치적 반대 자체를 ‘극도로 두려워해서’, 조금이라도 반발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총과 칼로 죽이고 해치고 가두고 억압했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다치는 것을 각오하고 반발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서 참고 굴복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곧 생명과 신체와 재산의 위험을 초래하는 일이고, ‘공적인 영역에 대한 무관심’이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다수의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을 회피하고 초월적 영역의 신앙으로만 집중한 것에는, 신앙의 원리보다 ‘정치권력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솔직한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여기에 일제 식민지권력이나 쿠데타 권력에 대해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모름지기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에 대해서 순복해야 한다’고 로마서 13장의 신앙교리를 선포하는 교회들이 있었다면, 이는 권력자들에게 (그들의 신앙 유무에 무관하게) ‘한량 없으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한편 교회가 직접 정치권력을 가지거나 정치권력과 동맹관계를 가지는 경우에도, 기독교의 ‘공적 영역’에 대한 태도는 상당한 왜곡을 경험하게 됩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한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기독교왕국(Christendom)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와 종교가 융합되어 있었습니다. 왕권은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는 왕권에 기름을 부어주는 동맹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왕권에 저항하는 자도 반역자로 처벌을 받았지만, 신앙적 견해가 다른 자도 이단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교황권과 왕권은 지속적으로 서로 갈등하고 다투었지만, 여기에는 권력의 귀속을 놓고 갈등하는 권력진영 내부의 경쟁이라는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교회가 인정하고 대관식에서 기름을 부은 기독교 왕(Christian King)이 다스리는 기독교왕국에서는 당연히 국가의 공적 질서에 대해서 로마서 13장의 ‘하나님의 칼’이라는 선한 역할을 강조하고 왕권에 대한 국민의 순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고하게 됩니다. 기독교를 믿는 왕을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으로 규탄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기독교 왕은 국민을 탄압하기는 해도 교회를 탄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탄압해도 교회를 탄압하지만 않으면, 교회가 항거해야 하는 짐승은 아닌 것 같은데……’, 독일 교회는 이렇게 생각했다가 히틀러와 함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비기독교 국가의 역사에서는 교회가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 정치권력의 폭력이 ‘두려워’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을 회피했습니다. 유럽과 같은 기독교 국가의 역사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다스리는 자의 입장’에서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승인(endorse)’하고 용납했습니다. 위치와 방식은 다르지만, 두 가지 경우 모두 교회가 정치권력의 힘과 폭력성을 두려워해서, 또는 정치권력의 힘과 폭력성에 동참해서, ‘공적 영역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회피했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공적 질서나 공적 활동에 대한 관점과 입장에는 ‘다스리는 입장에서의 공(公)’과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의 공(公)’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본다면 ‘다스리는 입장의 공’은 모두 ‘악’이고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의 공’은 모두 ‘선’으로 됩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그룹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스리는 입장에서의 노력과 애환’은 모두 ‘선’이고,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의 대항적 공’은 모두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완전한 선이나 완전한 악은 없습니다. 둘 다 선과 악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다스리는 입장의 공(公)’에서 정치권력이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훔치는 범죄자를 처벌하고 사회공동체의 유지비용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은 로마서 13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칼’의 ‘선’한 기능입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그 칼을 이용하여 (대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힘 없는) 사람들의 재산을 뺏는 것은 (교회를 탄압하는 것 못지 않게) 요한계시록 13장이 말하는 짐승의 ‘악’입니다.  같은 원리에서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의 공(公)’이라고 해서 모두가 ‘선’인 것은 아닙니다. 정치권력의 폭력성과 부당한 억압에 대항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자유롭고 평등하고 박애적으로 실현할 기회를 만들자는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대항적 공’은 대체로 ‘선’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공’에는 사회공동생활의 유지와 경제적 생산활동(일용할 양식)의 보장에 관한 경험과 경륜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다는 한계나 위험성이 있습니다. 

‘다스림을 받는 입장의 교회’가 정치권력을 두려워하여 그 짐승적인 성격을 모르는 척 하는 것, ‘다스리는 입장의 교회’가 정치권력의 일부가 되어 그 짐승적인 폭력을 용인하는 것은, 둘 다 하나님 앞에서의 악입니다. 다스림을 받는 입장의 기독교인이 정치적인 악과 거짓을 외면하고 침묵 속에 동조하는 것, 다스리는 입장의 기독교인이 정치적인 악과 거짓에 참여하여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폭군이나 간신 노릇을 하고 공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둘 다 하나님 앞에서의 악입니다.(34)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자 자기의 일을 하나님께 자백하고 직고해야 한다면(로마서 14:10-12),(35) 이 일들이 과연 어떻게 처리가 될 것인지 우리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가. 기본적 출발점 – 인간의 현실적 상황, 해석론(解釋論)적 접근  

세상의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에 객관적 현실을 법에 적용하는 변론의 방법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해석론(解釋論)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입법론(立法論)적 접근입니다. 해석론적 주장은 주어진 법률과 제도의 해석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구체적 정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입법론적 주장은 현재의 법률과 제도를 고쳐서 더 나은 정의의 내용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해석론과 입법론의 두 가지 접근법은 우리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해석론적 인생(人生)’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질서와 법률과 제도와 현실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 공간 안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구체적인 정의를 찾아내는 삶의 양식입니다. ‘입법론적 인생(人生)’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질서와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법률과 제도 자체를 변화시키고 개조함으로써 더 나은 정의의 틀을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삶의 양식입니다. 해석론적 인생은 사적으로 먹고 사는 일을 하며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 앞에 놓여 있는 삶의 방법이고, 입법론적 인생은 공적 일을 담당하고 집행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는 공직자, 정치인, 운동가, 학자, 언론인 등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해석론적 인생은 현실에 바탕을 둔 단단함이 있으나 현실에 붙잡혀 있는 답답함이 있고, 입법론적 인생은 현실에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으나 현실적인 뿌리가 미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석론적 인생은 다소 현실적이고 입법론적 인생은 다소 이상적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과 인생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공의와 이웃사랑의 헌신과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사는 이상의 좋은 것들을 강조하는 입법론적 접근이 중요한 만큼, 사람들이 놓여있는 세상의 현실, 인간 속에 살아 움직이는 악과 불의의 무궁무진한 모습, 생활과 생존에서 나오는 인생의 묶임과 무시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들을 기독교적 시각과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면밀하게 새겨보고, 그 속의 좋고 나쁜 내용들을 치밀하게 인식하고, 세상의 거시적(巨視的)인 상황과 우리 인생의 미시적(微視的)인 대응, 한 사람의 개인적 인생에서 조금씩 바꾸어갈 수 있는 미분(微分)적인 정의와 그러한 노력들이 집단적 인생으로 함께 모여서 이루어낼 수 있는 적분(積分)적 정의를 함께 바라보는 해석론적 접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길을 찾아나감에 있어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지에 대한 입법론적 인생의 대답을 서둘러서 먼저 제시하는 것보다, 우리가 놓여진 현실이 어떻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론적 인생의 질문들을 먼저 규명하고 그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단단한 대답을 찾아나가는 노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인간의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앞서, 먼저 인간의 현실성을 철저히 규명하고 해석하는 것, 이것이 ‘세상을 모르는 기독교’를 벗어나 ‘세상을 아는 기독교’로 나아가기 위한 우리의 기본적인 출발점입니다.

첫 번째 돌판의 주체인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다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돌판 위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불의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무력하고 하나님은 전능합니다. 사람은 절망적이고 하나님에게만 소망이 있습니다. 첫 번째 돌판의 일,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일은 주로 ‘교회(Church)’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원리는 ‘불의한 인간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 즉 칭의(稱義, Justification)입니다. 

두 번째 돌판의 주체인 사람과 사람들은 ‘서로 같습니다’. 조금 더 악하기도 하고 조금 더 선하기도 하고, 조금 더 크기도 하고 조금 더 작기도 하고, 여러 가지 부분적인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존재입니다. 다 땅에 붙어있는 존재이니, 사람은 아무리 잘나 보아야,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입니다. 누구나 땅에서 나와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은 본질적으로 평등합니다. 땅 위에서 누리는 권력과 부귀영화와 명망과 환호에 취하여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나 된 양 우쭐거리지만, 다 한 때이고 천만에 말씀입니다. 높이 올라간 사람은 그만큼 추락의 공포에 떨어야 합니다. 천하의 임금과 황제와 대부호도 울면서 태어나 슬픔과 불안 속에 살다가 고통 중에 죽어갑니다. 두 번째 돌판 위에서 모든 사람은 불의하고 그 누구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력하고, 조금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절망적이고 아무도 자기의 힘으로 완전한 희망을 주장하고 책임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돌판의 일,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세상 속의  ‘사회 내지 국가(State)’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국가(사회)의 원리는 불의한 인간들이 서로의 생존과 자유를 위하여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고 공익적 질서를 유지 관리하는 것, 즉 정의(正義, Justice)입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을 통해 우리는 ‘교회’와 ‘세상(국가 내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시각을 재정립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칼 바르트가 논의한 교회와 국가의 변증법적 기능 구분은 우리의 논의에 상당한 시사점을 줍니다.(38)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Church)와 국가(State)는 둘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가장 중요한 기관(Institution)인데,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칭의(Justification)의 기능을 담당하고, 국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정의(Justice)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이 논의를 십계명의 두 돌판에 적용하면, 첫 번째 돌판은 교회와 칭의의 법에,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은 국가(사회)와 정의의 법에 해당합니다. 교회와 국가는 둘 다 하나님의 기관이고, 칭의(믿음의 법)와 정의(세상의 법) 모두 하나님의 법이니, 우리는 믿음으로 교회와 칭의도 연구하고, 믿음으로 국가(세상)와 정의도 규명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제대로 알고, 가이사(Caesar)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일과 세상의 일은 그 원리가 똑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God)’과 ‘인간(Humanity)’에 대한 선명한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Yes’와 인간의 죄성에 대한 ‘No’는, 하나님인 예수의 인간으로의 성육신과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No)’이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Yes)’로 극복되는 변증법적 종합(dialectic synthesis)으로 나타납니다.(39)  

칼 바르트의 1938년 논문 ‘Church and State (일명 Justification and Justice)’(40)는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와 종합에 관한 위 원리를 교회와 국가에 적용하여, ‘하나님이 교회에 대하여 부여한 칭의(Justification)의 기능’과 하나님이 국가(사회)에 대해서 부여한 정의(Justice)의 기능’에 대한 선명한 분리와 구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기능과 국가의 기능은 명백히 다릅니다. 교회의 기능은 불의한 인간을 의롭다 하는 ‘신적인 칭의(Divine Justification)’를 선포하는 것(proclamation)이고, 국가의 기능은 ‘인간 사이의 정의(Human Justice)’를 관리하는 것(administration)입니다.(41) 교회와 국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땅에서 행하는 거룩한 기관(instrument)이지만, 교회와 국가의 차이가 결코 무시되거나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신적 칭의(Divine Justification)와 인간적 정의(Human Justice)는 명백히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또한 교회는 ‘자발적으로(voluntarily)’ 모인 신자들로 이루어진 기관이므로 ‘기독교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즉 칭의(Justification)가 주된 작동 원리이지만, 국가는 한 지역의 국민이면 기독교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두 ‘강제적으로(mandatorily)’ 포함시켜 작용하는 기관이므로 ‘모든 사람에 대한’ 정의(Justice)의 요구가 주된 작동원리로 됩니다.(42) 그러므로 칭의를 담당하는 교회가 국가의 정의 기능까지 차지하려는 신정국가(Church-State)가 되면 중세 교황시대의 종교재판소(Inquisition)나 최근의 이슬람국가(ISIS)에서 보듯이 사회의 정의 기능이 무시되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크고(특히 믿지 않거나 다른 신앙/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43) 인간 사이의 정의를 담당하는 국가가 국가에 대한 신적 존경과 숭배를 요구하는 국가교회(State-Church)로 나아가면 히틀러의 독일 나치즘, 천황숭배의 일본군국주의, 스탈린의 공산주의 공포정치처럼 악마적 국가(Demonic State)가 나타나게 됩니다.(44) 중세적인 신정국가들은 첫 번째 돌판의 교회권력이 두 번째 돌판의 세상까지도 수직으로 세워 올려서 첫 번째 돌판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리려 한 것이고, 전체주의의 국가교회는 두 번째 돌판의 세상권력이 스스로를 수직으로 세워 올려서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을 대체해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한편으로는 크리스천으로서 인간의 불의와 칭의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과 함께(Christian Proclamation),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공동의 정의를 유지, 수호, 발전시켜야 하는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사회적 권리와 책임을 다 하는 것에 있습니다(Christian Responsibility).(45) 이 때 근본적으로 칭의의 담당기관인 교회는 복음에 근거해서 국가의 정의기능에 대한 예언자적 조명을 할 수는 있지만, ‘교회 자체가 국가의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46) 그리고 사회의 정의기능을 담당하거나 요구하는 시민으로서의 기독교인에게도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책임’과 함께 ‘자신의 불의를 인식하고 자제하는’ 변증법적 긴장이 요구됩니다. 

기독교인이 칭의에만 매달리고 정의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국가(사회)는 완전히 불의에 빠져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회적 정의만을 추구하고 인간의 본질적 불의, 즉 칭의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면, 실제로는 ‘인간의 불의에 침윤된 불완전(不完全)한 사회적 정의’를 ‘의로운 인간들이 성취하는 완전(完全)한 사회적 정의’로 착각하게 되어, 정의의 과잉(過剩)에 의한 또 다른 불의와 폭력 및 실패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구원도 구하고 사회의 정의도 추구하면서, 동시에 불의와 정의 사이의 긴장을 지극히 예민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위험에 빠집니다. 인간의 불의에 안주해서 사회적 정의를 배척하는 것도 죄악이고,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불의를 잊어도 죄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인간의 불의를 고백’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정의를 추구’합니다. 인간의 불의는 첫 번째 돌판의 신앙적 주제이고, 사람들 사이의 정의는 두 번째 돌판의 신앙적 주제입니다.  첫 번째 돌판 위에서 사람의 정의를 주장하면 하나님을 믿는 일과 하나님의 필요성이 애매하고 흐릿해집니다.(47)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사람들 사이의 정의를 주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사람들의 인생이 악과 불의에 무너집니다.(48) 우리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일에 합당하게, 가이사(세상)의 것은 가이사의 일에 합당하게 다루어야 합니다(마태복음 22:21).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불의함을 묵상하고, 가이사 앞에서는 인간의 정의를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첫 번째 돌판 위에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불의를 인식하는 겸손한 처절함으로 살고, 두 번째 돌판 위에서는 나와 너와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악과 씨름하며 사람들 사이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인생에서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 인생의 ‘자기 십자가’(49) 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철학과 사람들이 이 문제들을 두고 논리적인 말싸움과 현실적인 몸싸움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이 문제들을 두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을 해 왔습니다. 과연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행동’들이 이 문제들을 잘 판단하고 잘 다루어왔는지,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냉정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도 이 문제를 두고 충분히 헤매왔고 지금도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과 하나님의 계시에는 이 문제를 올바르게 다룰 재료들이 충분히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고민에 대해서 개개의 윤리적 요구사항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민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재료들을 가지고 제대로 요리를 하지 못해온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단순하거나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만 취하고 다른 것은 버리는 것, 그 결과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정수(精髓)와 같은 말씀들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악하게 봅니다.(50) 세상도 악하게 봅니다.(51) 사람의 악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항복을 가능하게 하고, 세상의 악에 대한 선언은 세상에 대한 숭배와 찬양과 집착을 멈추게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의 불의와 악에만 착념(着念)하고 사람의 선한 의지와 사랑의 가능성을 부인하게 되면, 결국 실천적으로는 세상과 인간사의 정의를 포기하고 오히려 세상 속에 가득 찬 구조적이고 개인적인 악과 불의들을 옹호하고 그에 안주하는 ‘기독교인의 악’을 낳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인간의 선한 측면도 제시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52)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믿으면 지난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53)고 가르칩니다. 원래의 아담도 선했고 다시 태어난(born again) 크리스천도 의로워집니다. 그 결과 선한 크리스천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정의롭게 변화시킬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의 선하고 의로운 가능성과 희생과 사랑의 헌신성에만 집중하고,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인간 모두에게 펄펄 살아 움직이는 악과 불의와 욕망과 이기심과 초조함과 미움과 폭력성이라는 인생의 냉정한 현실성을 부인하게 되면, 결국 실천적으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이상주의적 정의파가 되거나 지나치게 의로운 독단적인 정의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쪽은 인간의 악만 보고 인간의 선한 가능성을 놓아버린 것이고, 다른 쪽은 인간의 선만 보고 인간의 악한 현실성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두 가지의 경우 모두 ‘긴장’을 상실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 번째 돌판의 불의한 인간은 두 번째 돌판의 세상과 인생에서도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번째 돌판에서 정의를 추구할 때에도 자신과 타인의 불의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첫 번째 돌판의 불의한 인간은 두 번째 돌판에서 서로 간의 정의를 위해 조금이라도, 방어적이라도, 소극적이라도, 최소한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노아의 홍수가 아닌 ‘인간의 악과 불의의 홍수’에 휩쓸려 다 죽고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이 악의 홍수는 내 밖의 다른 나쁜 놈들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과 싸우지 않고 악을 스스로 행하는 나와 너와 우리들 자신의 악이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도 인간의 불의를 잊지 말고, 인간의 불의를 묵상하는 사람도 인간의 정의를 위해 움직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 인생이 두 번째 돌판 위에서 놓지 않고 유지해야 하는 긴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체적 본질(本質)은 ‘하늘의 하나님(Heavenly Father)과 땅의 사람(Earthly Human) 사이의 긴장’입니다. 십계명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삶은 ‘첫 번째 돌판(교회)의 칭의와 두 번째 돌판(사회)의 정의 사이의 긴장’으로 구성(構成)됩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두 번째 돌판 위의 삶과 정의’ 또한 인간의 선한 본성(정의)과 악한 본성(불의)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 전개(展開)됩니다. 이 긴장의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성경적으로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서로 현격히 다른 모순된 본성이 있습니다.(55) 그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대로 창조되었다’ 는 것이고, 그 둘째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하다’(56)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가능성이 있고, 세상에 가득한 온갖 악을 만들어내는 악한 본성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과 ‘악한 본성(Sinful Nature)’, 이 두 개의 극단 사이에 인간의 삶과 사람의 세상이 놓여있습니다. 천하의 악인에게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 있고, 천하의 착하고 의로운 사람에게도 악한 본성의 은밀하고 노골적인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암담한 비극이기도 하고 인간의 희미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의 두 가지 얼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선만 바라보는 것은 착각이고, 인간의 악만 바라보는 것은 착오입니다. 나의 선만 바라보는 사람은 위선에 빠지고 남의 선만 바라보는 자는 배신을 당하고, 나의 악만 바라보는 자는 우울에 빠지고 남의 악만 바라보는 자는 원망에 빠집니다. 두 번째 돌판의 수평(水平)은 얇고 단일한 한가지 속성의 직선(直線)이 아니라, 상당한 높이와 상당한 깊이의 두께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선과 악이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대류(對流)하는 복잡한 속성의 공간(空間)입니다. 인간 속의 하나님 형상은 두 번째 돌판의 평면 위쪽으로 사람들을 상승시키고 고양시키지만(ascension), 인간의 악한 본성은 돌판의 평면 아래쪽으로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추락시킵니다(dissension).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신적 본성 내지 인간의 선하고 이성적인 가능성에 초점을 둔 사람들은 성선설(性善說)적인 인간관을 전개하고, 인간의 악하고 이기적이고 욕망에 가득한 성격에 초점을 둔 사람들은 성악설(性惡說)적인 인간관을 천명해 왔습니다.(57) 현실주의자들은 성악설에 기울어지고 이상주의자들은 성선설에 기울어집니다. 법률과 법학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독단적인 본성을 전제로 재판을 받는 사람과 재판을 하는 사람 양쪽을 모두 불신하고, 이를 정교한 법적 절차를 통해서 통제하려고 하는 성악설적인 입장을 발전시켜 왔고, 진보적인 정치이념은 공동체적 이타주의와 평등의 가능성을 믿는 성선설적 지향을, 보수적인 정치이념은 인간의 개인주의적 이기심과 욕망에 기초한 자율성을 강조하는 성악설적인 지향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거룩한 이타주의(집단주의)에 대한 성선설적 믿음의 극한을 추구했던 공산주의는 다스리는 사람들의 숨어있는 악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눌려진 욕망에 패해서 무너졌고, 개인주의적인 인간의 욕망을 ‘보이지 않는 (거룩한) 손’으로 신뢰하는 성악설적 믿음의 극한을 달리고 싶어했던 자본주의도 거듭되는 경제공황과 시장의 실패를 겪으면서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고백을 철회하고 국가와 사회에 의한 공동체적 자본통제를 부분적으로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대체로 인류의 역사에서 진보적인 이념은 인간에 대한 성선설적인 관점을, 보수적인 이념은 인간에 대한 성악설적인 관점을 취해온 것으로 관찰됩니다. 

여러 가지의 관점과 이념들을 조금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각각의 경우 안에서도 인간에 대한 성선설적 관점과 성악설적 관점이 모든 사람, 모든 그룹들과 모든 상황에 일률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맑시즘은 부르주아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명확한 성악설적 입장을 가지면서도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 없는 성선설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 중의 일부 집단은 성악설적 집단이고 일부는 성선설적 집단인 것이지요. 반대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입장에서는 사적 소유와 인간의 이기심(경제적 효율성)과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의 교리(dogma)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온하고 악한 세력이라고 배격합니다. 인간에 대한 선과 악의 기준이 정반대로 주장됩니다. 선악에 대한 판단과 정치경제적 이익의 소재가 서로 뒤엉켜서, 20세기의 한 세기 동안 전세계 모든 대륙의 수십억 인구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선악과 나무 사이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세상의 질서에 많은 변화를 만들고 사람들의 인생에 많은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이 부딪칠 때에도, 내가 속한 국가/민족의 구성원들은 선하고, 다른 국가/민족의 집단적 이익은 악하다는 집단적이고 다분히 강압적인 인간관이 사람들을 압도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침략자와 피침략자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한 경우(예컨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는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의 구분이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장기간의 싸움 속에서 공격과 방어가 상호반복되고 원한과 복수가 중첩될 때(예컨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의 역사적 충돌과 대립)에는 본래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조차 불분명해져서 양쪽 집단 모두에서 ‘저들은 악하고 우리는 선하다’는 흑백논리가 모든 사람을 악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여기에서는 ‘나만(우리만) 선(善)하다’는 주장과 판단이 ‘인간의 가장 악(惡)한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물건을 만들어 팔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으면서 먹고 사는 사적(私的)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개인과 가정에게는 인간의 욕망과 생존과 이기심으로 무장된 ‘성악설적 인간관이 필요(必要)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망합니다. 먹고 사는 일에서 사람들을 너무 믿고 낭만적으로 살다가는 필경 큰 코를 다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너무 모르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남의 돈을 먹기가 어려운 만큼 나도 남에게 돈을 쉽게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사적 경제생활이 전적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과 욕망과 악한 본성에만 지배되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건과 서비스와 일용할 양식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경제활동에는 ‘거래상의 신의(信義, good faith)’라는 최소한의 기본 전제가 요구됩니다. 사람들이 서로 대가를 주고받기로 하는 약속들을 어기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거래 상대방이나 같이 일하는 동료의 이익을 100% 무시하고 전적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약은 사람은, 한번의 거래에서는 이익을 볼 수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사람과의 거래를 더 이상 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거래상의 신용을 잃었기 때문에), 자기의 못된 이익을 추구할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욕망과 남의 욕망이 부딪치는 사적 세계는, 타인의 이익에 대해서 최소한의 존중과 신의를 요구합니다.(58)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 관계의 거룩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적 계약관계의 거래상 신의에 아주 희미하게라도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의 사적 생활에는 ‘개인’의 이익과 생존을 위한 성악설적 인간 본성이 주인공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공동’의 거래와 교환에 내포되고 요구되는 만큼의 신의(faithfulness)라는 인간의 성선설적 측면도 함께 조연으로 출연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을 하는 사람이 외곬으로 성선설적 인간본성만을 추구하면 필경 망하거나 주변 사람을 굶깁니다. 이것은 선한 의도로 만들어내는 악입니다. 먹고 사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성선설적인 인간본성만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거나 권유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위험한 일입니다. 가능성과 현실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공상성과 명분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악설적인 세계에 성선설적인 인생을 요구하는 것은 실패와 좌절의 가능성이 지극히 높기 때문입니다.(59) 

사적 관계는 상하의 위계가 있는 공적 관계에 비해서 원칙적으로 대등(對等)합니다. 이익과 이익이 서로 원만히 조화를 이루는 경우보다는 이익과 이익이 서로 부딪치고 서로 대립되고 서로 억울해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 나의 생존과 타인의 생존이 부딪칠 때, 개인과 가정은 위기에 처하고 우리들은 ‘사적(私的) 시험’(60)에 들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사랑과 이웃사랑 사이에서 잠 못 이루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공격을 할 것인가 후퇴를 할 것인가 번민을 합니다. 용서를 할 것인가 복수를 할 것인가, 굴복을 할 것인가 대항을 할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에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나를 해치거나 남을 해치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61) 선을 행하고 싶지만, 삶의 조건은 쪼들리고 여유가 없고 불안하고,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서기가 힘든 절벽 같고, 타인을 밀어내지 않으면 내가 밀려나는 위기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옆 사람을 뿌리치기는 마음이 불편하지만, 옆 사람에게 양보를 하면 내가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아 겁이 나고 무섭습니다. 경쟁사회에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나의 이웃이 아니고 적이 됩니다. 궁지에 몰리면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잘 알기도 어렵고, 아예 따져보기조차 싫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수많은 악을 행하면서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인생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이미 행했고 지금 행하고 있고 앞으로 행하게 되는 크고 작은 악은 계속 무겁게 쌓여갑니다. 악한 사람도 악을 행하고, 착한 사람도 악을 행합니다. 나와 너와 우리들과 그들 모두 가운데 이 세상에서 악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62)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관리하는 사람들, 즉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차원에서는 대통령과 정치인, 공무원들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모든 단위와 단체에는 공동의 일을 처리하기 위한 지도자 내지 대표자가 필요하며, 넓은 의미에서 보면 공동체의 일을 알리고 비판하며 참견하는 언론인들, 공동체의 아이들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스리고 학문을 연구하는 학교의 선생님과 학자들,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고 고치려고 하는 NGO나 사회단체, 기관의 활동가들도 ‘다스리는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어떤 사람이 공공의 일, 다스리는 일을 하게 되면, 그 공적인 직무의 성격상 불가피하게 ‘공의’와 ‘정의’에 대한 생각과 논의와 주장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세금을 누구에게 얼마나 거두어서 어디에 얼마나 많이 써야 하는가에 관한 공적 논의는 세금(tax)과 재정(spending)의 정의(正義)에 관한 논의로 되고, 형사처벌과 행정규제의 대상을 정하고 집행하는 입법행위와 행정행위와 사법행위는 사회적 정의(正義)와 불의(不義)의 경계를 정의(定義)하는 행위이며, 정치권력의 소재와 귀속을 결정하고 견제하는 선거와 정당과 언론의 활동은 정치적 힘이 사회 속의 어떤 집단에 의하여 어떤 집단을 위하여 행사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정의와 불의의 논쟁터이자 승부장(勝負場)입니다.(63) 이처럼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를 다스리는 ‘일’들은 공적 기관의 사명(mission)으로서 공적 정의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적 영역의 논의는 (실질적이든 위선적이든) ‘인간의 이성과 공동체의 정의와 자유와 평등과 박애 등 공동선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성선설적 명분(名分)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스리는 ‘일’이 가지고 있는 이 객관적(客觀的)인 정의의 기능이,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관적(主觀的)으로 자기가 ‘정의롭고 의롭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당한 자부심을 줌과 동시에, 이를 넘어서 슬그머니 자기가 곧 ‘정의롭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는 부당한 자만심과 교만과 터무니없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64) 자기가 쓰고 있는 ‘모자(冠, hat)’를 ‘자기자신’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자를 벗으면 벌거벗은 인간일 뿐입니다. 전자의 정당한 자부심은 로마서 13장이 ‘하나님의 칼’로서 지지하지만, 후자의 부당한 자만심과 교만과 착각은 구약에서 한나의 기도(사무엘상 2:1-10)(65)와 신약에서 마리아의 기도(누가복음 1:46-55)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규탄하고 내리치는 ‘권세 있는 자의 교만’(66)입니다.   

공동체를 다스리는 일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성선설적인 순기능이 있음과 동시에, 그 기능을 수행하는 가운데 ‘인간의 악한 본성’이 극대화된다는 성악설적인 비극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공적 권력에는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제한하고 사람의 운명을 강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차등(差等)한 권력’의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 둘째 이 강력한 힘은 아직 악한 본성이 펄펄 살아있는 ‘사람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적 권력’이 개인적 이익을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집단에게 귀속되어 악용되면, 나머지 인생들 모두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와 행복은 풍전등화와 같은 ‘공적(公的) 시험’에 들게 됩니다. 공적 권력의 야수적인 힘 앞에서 공동체의 모든 사람은 감옥 문과 사형대의 바로 앞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됩니다. 참는 것은 모욕적이지만 대항하는 것은 두렵습니다. 모욕을 견디거나 두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우리 민족 전체가 그랬고,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과 양심적인 독일 시민들이 그랬으며, 우리나라의 독재시대에 민주주의를 요구하거나 희망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그랬습니다. 이것이 공적 권력의 첫 번째 악입니다. ‘공적 권력’의 기능과 행사에 ‘참여(參與)’하는 관원들, 즉 높고 낮은 공무원들과 언론인 등이 공적 이익과 개인적 사적 이익을 뒤섞어 혼동하고, 나아가 공적 직위를 통한 개인의 보신과 생존과 출세를 공적인 직무의 책임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세상의 간신 노릇들을 하게 되면, 그들이 가진 공적 직위는 정의의 수단이 아니라 불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악과 불의에 굴복시키는 공적 흉기(凶器)로 변신합니다.(67) 이것이 공적 권력의 두 번째 악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대등한 폭력보다 공적 권력과 개인이 충돌할 때 행사되는 차등한 폭력은 훨씬 강력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개인은 공권력에 항거를 할 수 없습니다. 집단적인 힘은 공권력에 대한 항거를 가능하게 하지만, 이러한 항거는 대부분 항거하는 사람의 사적 생활근거(신체적 자유와 직업과 생계)의 전면적인 박탈과 포기를 수반합니다.(68) 사람이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악들의 원천, 적어도 세상 악 중 절반 정도의 근원입니다. 공적인 힘은 선한 기능을 위해서 주어지지만, 사람에게 공적인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은 인간의 악한 본성이 그 힘을 얻어 즐거워하고 흥분하고 기뻐 날뛰고 춤추면서 타인을 해치는 악의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고의(故意)적인 악도 수많은 인생을 망치지만, 권력의 과실(過失)이나 무지(無知)에 의한 악도 수많은 인생을 해칩니다. 자신의 악을 알고 행하는 권력도 무섭고 악하지만, 자신이 악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부인하면서 악을 행하는 권력이 더 무섭고 악합니다. 자신의 악을 선이라고 착각하거나 자신의 악을 선이라고 우기는 권력은 그 악의 한계를 모르고 그 악행을 멈출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거짓이나 교만보다 다스리는 사람들의 거짓과 교만이 훨씬 위험하고 악합니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거짓 증거는 위증죄로 처벌을 받지만 다스리는 사람들의 거짓 증거는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거짓을 행하고 교만에 빠집니다. 착한 사람도 거짓을 행하고 훌륭한 사람은 더 교만해 집니다. 그 결과 살아가는 가운데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가진 권력의 크기만큼 크고 작은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권력이 크면 클수록 그 권력으로 행사할 수 있는 악의 분량이 커집니다. 악은 힘에서 나옵니다. 모든 힘은 크고 작은 악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권력을 가지고서 악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69)그래서 공적 세계는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이 우세한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공적 기능’은 사람들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호하고 실현시키기 위한 정의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성선설적인 면이 있으나,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악한 본성이 살아있는 사람들이고 공적 권력의 맛과 황홀은 다스리는 사람들의 교만과 악한 본성을 비약적으로 확대하는 성악설적 증폭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과 인생에는 ‘인간의 악한 본성(No)’과 ‘인간 속의 하나님 형상(Yes)’이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적 생활에도 그렇고 사람들의 공적 관계에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진보주의는 인간의 긍정적인 측면(Yes)에 이상과 소망을 두고, 사회적 보수주의는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No)을 현실적으로 바라봅니다. 동전의 반대면처럼 사회적인 진보주의에는 인간의 부정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잘 모른다는 단점이 있고, 사회적인 보수주의에는 인간의 긍정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이상을 향한 소망과 노력을 포기하고 무시하거나 싫어하기까지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비사회적인 기독교 신앙에는, 첫 번째 돌판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는 ‘인간의 죄와 악한 본성’을 치열하게 고백하는 것과 달리,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움직이는 인간(기독교인)의 악과 죄에 대해서는 가볍게 생각하고,(70)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전개되는 인간의 정의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문제점이 있습니다.(71) 이처럼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태도의 기독교 신앙은 그 앞에 놓인 두 가지의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죄와 악에 대한 추가의 숙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정의에 관한 신규의 숙제입니다. 첫째,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다’고 엄히 비판합니다.(72) 우리가 사적이고 공적이고 영적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적인 죄만 짧게 고백하고 사적이고 공적인 죄, 즉 세상과 인생에서 우리가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싸우지도 않고 입을 싹 씻는 것은, 예수님에게 꾸지람을 받고 징계를 받아야 할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인간의 죄’에 대한 묵상과 고민과 고백과 씨름을 할 때에, 영적이고 개인의 내면적인 죄에서 묵상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적이고 집단적인 죄와 악,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 속의 삶을 통해서 고의적이거나 또는 불가피하게 범하는 죄와 악에 대한 고민과 고백과 씨름으로까지 뚜벅뚜벅 걸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의 믿음을 얻었다면, 그 죄에 대한 고민을 끝까지 전개하는 것이 우리의 응당한 책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에게도 공의에 대한 관심과 실천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들 사이의 정의로 확장됩니다. 사람들 사이의 정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우리와 무관하고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고 당하는 모든 불의와 바로 붙어서 엎치락뒤치락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입니다. 세상과 인생의 불의를 그냥 놓아두는 것은 그 자체가 불의를 조장하고 격려하는 행위이고, 불의의 문제와 부둥켜 안고 씨름하는 것 그 자체가 정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의(義)로운 자로 인정받은 것’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세상의 의(義)와 사람들 사이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신앙적인 먹튀’가 아닐 수 없습니다.(73) 

      

일반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사회적인 기독교 신앙에는 ‘인간의 정의’와 ‘인간의 불의’ 사이의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숙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正義)로운 인간으로서 세상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不義)한 인간으로서 세상의 정의를 추구한다’는 긴장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숙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해서 세상에서의 정의를 외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쉽게 간과되거나 잊어먹게 되는 것은 ‘두 번째 돌판 위에서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람’ 속에 숨어있는 ‘첫 번째 돌판 위의 인간의 불의와 한계’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외치는 싸움을 할 때에, 우리는 먼저 ‘정의를 외치는 나 자신의 악과 한계’를 잊어버리고, 그 다음으로는 ‘나와 함께 정의를 외치는 우리들의 불의와 악’을 잊어버리게 되며, 마지막으로는 ‘세상의 불의에 억압당하여 함께 그 억압에 저항하는 집단과 계층의 한계와 욕망’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정의를 외치는 본인과 동료들과 집단, 계층의 노력에 의미가 없다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거나, 이거나 저거나 별 차이가 없다고 양비론을 펴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74)  다만 현실을 정확하게 아는 것, 인간의 본성을 정확하게 아는 것, 나와 너와 우리의 동기와 실력을 정확하게 알고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75) 자기 실력을 알고 싸우면 이길 수 있지만 자기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싸움을 벌이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76)  

우리가 두 번째 돌판 위의 정의를 추구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상’과 ‘인간의 현실’ 사이의 긴장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의를 외칠 때에 하나님의 공의와 기독교인의 이상으로서의 사회정의와 이웃사랑과 자기를 부인하는 헌신을 주장하지만, 그것을 하기 어려운 우리들 인간(기독교인들 포함)의 실력과 현실의 생존적 조건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정의가 필요한지를 알아도, 먹고 사는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일에 전적으로 투신(投身)할 ‘능력’이 없고 ‘조건’이 안됩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실천할 수 있는 정의의 필요와 내용과 실천의 원리와 실천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세상의 정의에 대한 주장은 사람들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구체적인 정의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현실 외부에서 움직이는 추상적인 정의가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상 정의를 위한 싸움에 참여하지 못하고 또다시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추구해야 할 세상의 정의, 기독교인들이 노력해야 할 사람들 사이의 정의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질적이고 세부적인 내용과 의제와 방법론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두 번째 돌판 위에서 기독교 신앙이 풀어내야 할 핵심적인 숙제입니다. 이는 동시에 정의와 불의, 인간의 악과 선에 대한 세상의 깊은 고민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이 원리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내용과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과 인생’에 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각론적 분석과 검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기본적인 초점은 인간의 규범적 당위보다 인간의 현실적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인간의 선의와 사랑과 희생에 의한 이상적 지향보다 인간의 악과 욕망과 불안과 미움에 따른 현실적 장애들을 우선적으로 규명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가능성과 희망보다 삶의 모든 방면과 모든 상황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악과 세상의 구조적인 악(evil)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규정짓고 나와 너와 우리들 모든 사람들을 절망적인 시험(temptation)에 빠지게 하는지를 선차적으로 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분석을 통하여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에 빠져 세상과 인생에는 아무 희망도 없고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적인 결론에 빠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시험에 빠지면 시험을 벗어나면 되고, 악에 휩쓸리면 악에 저항하고, 불의가 나타나면 가능한대로 굴복하지 않고 대항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인간에 대한 절망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근거를 찾아나가면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인간의 지혜와 경험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핵심적인 계시들이 우리들에게 근본적인 지혜와 소망을 제시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절망을 보고 인생의 희망을 찾아나가는 과정, 인간의 불의 속에서 인생들 사이의 정의를 찾아나가는 과정은, 어두움과 밝음 중 하나에만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불의, 인간의 악과 인간의 선, 타인의 악과 나 자신의 악, 세상(사회)의 순기능과 세상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악의 중력(重力, gravity), 인간의 소망과 현실, 겨우 사는 삶의 절망과 그냥 사는 삶의 일상 그리고 한껏 살아보려는 삶의 용기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 전개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과 인간을 공부하기 위한 성경의 기본적인 계시는 (i) 구약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주신 십계명 중의 ‘두 번째 돌판(제5~10계명)’, (ii) 신약에서 예수님이 정리해 주신 이중사랑의 대계명 중 두 번째 계명인 ‘이웃사랑과 자기사랑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ii)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 중 ‘세 가지 인생 기도 (일용할 용식, 빚과 용서, 시험과 악)에 핵심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두 번째 돌판의 세상(성도의 공생활 원리)’에 대한 검토와 ‘두 번째 돌판의 인간(성도의 사생활 원리)’에 대한 검토는 이 세 가지 강령의 유기적이고 중첩적인 적용을 통해서 더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 – 성도의 공생활 원리’는 십계명 중 두 번째 돌판의 여섯 계명을 기본 틀로 해서 검토합니다. 십계명 중 두 번째 돌판의 여섯 계명들, ‘살인하지 말라(제6계명), 거짓증거하지 말라(제9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제7계명), 탐내지 말라(제10계명), 부모를 공경하라(제5계명), 간음하지 말라(제8계명)’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공적이고 사적인 생활 전부를 포괄합니다. 제6계명(살인)과 제9계명(거짓증거)을 합하면 국가와 사회의 정치와 법률제도 전반을 이해할 수 있고, 제7계명(도둑질)과 제10계명(탐심)을 합하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경제생활의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측면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5계명(부모)과 제8계명(부부)을 합하면 부모자식과 부부간의 사랑을 통해 인간의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결합과 생존과 보호와 연결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정생활의 본질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 계명을 단지 윤리적이거나 법적인 금지명령으로만 이해하면 ‘나쁜 짓을 안 하면 그만’인 단순한 계명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이 여섯 계명에 예수님의 두 번째 대계명에 들어있는 ‘이웃사랑과 자기사랑의 긴장과 갈등’을 적용하면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해집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대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으로 이해하면 십계명의 뒷 부분 여섯 가지 계명들도 ‘네가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권면으로 착하게 읽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두 번째 대계명이 자기사랑을 이웃사랑의 기준 내지 대칭점으로 함께 제시한 것을 감안해서 다시 읽으면, 십계명의 뒷 부분 여섯 계명들은 인간의 자기사랑과 인간의 이웃사랑 간의 대립과 충돌이 정치와 경제와 법과 가정의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는 전쟁터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주기도문 중 인생기도들은 사람이 처하는 핵심적인 인생의 실제적인 상황들(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 피해를 입고 용서하는 일, 시험에 들고 악을 범하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는 두 번째 돌판 위의 여섯 계명들을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과 일상에서 전개되는 현실의 역동성과 연결시켜 줍니다. 구체적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놓고 예를 들어봅니다. 사람은 ‘자기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고(살인하고) ‘이웃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웃사랑으로 남을 해치지 않으면 남도 나를 해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역설적인 자기사랑). 그러나 내가 남을 해치지 않는다고 남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인간의 악). 이래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쳤을 때 내가 그 사람을 해칠지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해침을 당할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고 시험에서 벗어나는 일). 또한 나를 해친 자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지, 그냥 참고 넘어갈지, 어떤 것이 나에게도 유리하고 (자기사랑) 남에게도 도움이 되고 (이웃사랑)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하나님 사랑),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나에게 죄지은 자/빚진 자를 용서하는 일). 위와 같은 원리와 방법론에 따라 성도의 공생활 원리를 모색하기 위한 ‘두 번째 돌판의 세상’에 관한 세부목차는 다음과 같이 구상됩니다.     

      [세상을 모르는 기독교, 세상을 아는 기독교 (2)]

다음으로 ‘두 번째 돌판 위의 인간 – 성도의 사생활 원리’에 관한 검토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중의 세 가지 ‘인생기도’들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합니다. 우선 첫 번째 인생기도인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모든 사람의 생물학적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핵심적인 삶의 내용을 차지합니다. 경제생활에 대한 대의나 입법론적 정책보다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욕망과 노동이 어떻게 요구되고 실행되는지를 이해하고 규명해내는 방향에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인생기도인 ‘빚(피해)와 용서’, 세 번째 인생기도인 ‘시험과 악’은 모두 인간의 구체적인 불의와 인간의 구체적인 선의가 인생 속에서 부딪치는 현장들을 묘사합니다.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와 가해행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잘잘못도 모르면서 그냥 마구 용서를 하면 안 되고, 그런 식으로는 용서가 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려면 먼저 누가 빚진 자인지 (상대방이 빚진 자인지 거꾸로 내가 빚진 자인지)를 따져 보아야 탕감해 줄 권한이 있는 자가 탕감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되면 시험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당면한 시험의 내용과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을 해야 합니다. 사적 관계에서 온 시험인지 공적 관계에서 온 시험인지, 타인의 잘못이나 악의에서 비롯된 시험인지, 나의 어리석음과 실수에서 비롯된 시험인지, 세상의 구조적인 부조리와 고장(mal-function)으로 인한 시험인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시험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인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인지 피하고 도망가야 하는 것인지, 판단을 하고 대응을 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착하게 응대하고 순하게 침묵하는 것만이 기독교적 정답은 아닙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에는 시험에 들게 하는 악과 응당하게 대응을 하고 싸움을 하는 것이 더 기독교적인 정답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에는, 우리는 대체로 아마 그 악은 나의 악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악이거나 이 세상의 사탄(악한 영)에 의한 악이라고 마음 편하게 남에게 밀어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하는 나도 악합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나는 수시로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장본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보통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안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끊임없이 타인에게 악을 범하고 타인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심각한 죄와 악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는지, 우리가 왜 그런 악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타인의 악에 대해서 맞서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악에 대해서 맞서 싸울 수 있는지는 우리들 기독교 신앙의 심각한 고민과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성도의 사생활 원리를 모색하기 위한 ‘두 번째 돌판의 인간’에 관한 목차는 다음과 같이 구상됩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위와 같은 목차로 두 번째 돌판 위의 세상과 인간의 현실에 대한 각론의 검토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내외적으로 비판을 받는 ‘세상을 모르는 기독교’를 넘어서 ‘세상을 아는 기독교’, ‘세상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기독교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노력입니다. 마지막 목표 지점까지 이 토론이 잘 전개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