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8-31 22:02
[리씨 aporiart] 1. 장수 계획: 잘 사는 예술 서설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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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수 계획: 잘 사는 예술 서설

-사회가 예술가의 비극과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대한 저항



예술적 명제

리씨가 126세를 맞이할 때면 서력기원으로 22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시작)이다. 리씨의 “나는 그 때 죽을 것이다.”라는 진술은 예측인가 다짐인가. 괴에바(구아바가 아님에 유의) 칼럼*에서 따지고 있는 문제로 보인다. 이 진술 혹은 사실(미래에 확인될 확률적인)은 미술적 명제이다. 예술적 명제라는 이 낯설은 표현은 무엇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저자의 첫 글에서 이런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문장들로 시작하는 이 대담함은 뭔가 하겠지만, 나름 진지한 ‘상위차원의 계층’에서의 논리이다. 비논리와 비상식을 가장 많이 허용해주는 인간의 합법적인 분야는 ‘예술’이다. 시적 허용, 소설의 허구, 정념어린 퍼포먼스, 부조리 극, 자살 회화 등등.

 

예술과 비극

사회는 예술가들의 죽음을 기다린다. 비운의 드라마의 주인공 고호의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비교적’이라는 표현은 예술의 이슈가 워낙 일반 대중들의 삶 속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붙일 수밖에 없는 비교祕敎의 부적 같은 것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처럼 문학가를 비롯하여 근대 낭만주의 이후 위생학과 보건학이 확립되기 이전 불치병으로 시달리는 것은 뭔가 낭만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죽으면 천재가 된다. 천재는 비운으로 일찍 죽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물론 해맑게 천수를 누린 이미지도 있으나 그것은 과학 천재 아인슈타인 같은 예이다. 근대 예술(마케팅)은 그런 안위의 이미지를 배격해왔다.

 

예술과 저항

저항에 기름을 부은 것은 낭만주의 이후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는 반항과 저항의 이미지를 대중매체에 증폭시킨 철학이자 문예사조이다. 대표적 이미지**로 알베르 카뮈가 적합할 텐데 그의 비극적 죽음(자동차 사고로 죽은 그의 가방에는 ‘최초의 인간’ 미완성 원고가 들어 있었다.)은 그의 반항적 소설 이방인보다 더 극적이다. 영화에 묘사된 화가 잭슨 폴락의 이미지를 보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을 영혼에 가두고 있는. 예술가들이 ‘속세에 집착이 없음’ 내지는 ‘상식적 삶에 대한 반항’, 혹은 부조리한 관습에 적응할 수 없는 현신, 더 나아가 ‘폐덕의 윤리’***라는 고차원적 일탈을 자유롭게 일삼는 이미지를 만든 것이 이 낭만주의부터 실존주의까지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자유로운 영혼, 광기, 천재, 고뇌, 비운, 가난 이런 예술(가)의 연관어를 낳았다.

 

예술과 이미지

미디어를 통해서 100년가량 부정적(자기 부정, 공동체 부정) 예술가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었다. ‘부정(적)’이라는 것은 그 뉘앙스보다는 복합적이고 긍정적이다. 그것은 새로움을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진보도 그와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그 한 편에서 아방가르드라는 흐름이 나왔다. 미술사가라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로 특정해야 옳다. 진취적이고 참신하다는 의미로 ‘아방’하다고 일컫는 일반적 용례가 아닌 1900년대 초반 등장한 다다이스트에서 초현실주의 정도까지의 시기에 나타난 예술 운동의 주체를 일컫는다. 그 용어는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전위부대를 일컫는 명칭이 문화 용어로 자리 메김 한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두 얼굴

아방가르드는 이면상 처럼 두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낭만적 예술지상주의를 계승한 얼굴, 하나는 예술의 전통을 부수는 파괴자의 얼굴이다. ‘문화 아카이브’****는 이러한 파괴적 행위와 저항의 몸짓조차도 예술의 역사에 포섭해오고 있다. 최근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르셀 뒤샹 회고전이 열렸다. 뒤샹은 아방가르드 운동에 가담한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선구자이다. 뒤샹의 이미지를 보면 이 두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발견한 소변기는 현재 현대미술의 기원적인 작품(‘샘’이라는 작명도 의미심장하다)으로 표상된다. 처음에는 도발적인 소동의 도구로 치부되던 것이 이제는 그 복제품이 고가에 거래될 정도의 걸작으로 변했다.

 

아방가르드 강령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강령 중에 ‘삶과 예술의 비분리성’은 아직도 유효한 예술의 도전 과제이다. 부르주아 혁명이 가져온 시장 자유주의, 그 속에 상품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저항과 극복은 미술사에서 주요한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이다. 귀족을 흉내 내려는 구매력을 가진 부르주아지의 관조를 위해 복무하는 미적 상품으로서의 예술은 지적으로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예민한 근대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매혹이자 피하고 싶은 역겨움이다. 얼마 전에 화재가 되었던 뱅크시의 자기 작품에 대한 경매에서의 테러 행위와 그에 대한 냉소*****는 이 이중적인 딜렘마가 현대 미술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뒤샹의 후계자들

1차 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와서 뒤샹이 선보인 작업들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에 비로소 그 추종자와 향유자들을 만났다. 네오 아방가르드라 불린 집단과 지금 그보다 개인적으로 더 유명해진 팝아트의 선구 엔디 워홀이 그 추종자들이다. 발칙한 도발은 숭배되었고 뒤샹이 보기에는 퇴행적으로 다시금 양식화되었다. 엔디 워홀은 뒤샹보다 더 냉소적으로 보인다. 팝아트에 획을 긋고 그 안에서 비즈니스 아트를 창시한 워홀은 돈 버는 것이 예술이라는 경구를 선사한다. 요즘 말로는 미러링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이제 속세의 습속을 더욱 가속하는 현신이 된다. 시스템 속에서 회피하며 예술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실은 그들이 처한 현실이 가장 예술적이라는 역설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예술의 효능감

이 모든 것은 예술이라는 제도적 장치 안에서 유의미하다. 피카소가 그은 선이 내 아이가 그린 선과 뭐가 다른가 묻는 이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기만으로 보이겠지만, 문화아카이브의 문법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예술적 도발과 사회적인 것의 예술 안으로의 도착이 지적 감각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메트릭스에서의 숨막히는 권태감(사실 엘리트적이고 부르주아적인)에 잠시나마 파열을 내어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으로 예술은 그 메시아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 다음으로 예술은 기존의 예술에 대한 권위를 조롱하는 제스처로써 (문화자본이 있는)대중의 편에 서는 듯도 하다. 팝아트의 표상들이 대중매체에서 발췌한 익숙한 표상이기에 그런 듯하면서도 사실 팝아트는 제도 속에 위치할 때 위상이 빛나는 것이다.

 

잘사는 예술

리씨가 장수하려는 계획이 예술적 명제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하나는 예술이 삶과 맞닿아야 한다는 아방가르드적 신념에 의해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서, 하나는 장수하는 예술가 이미지가 문화아카이브에 등장한 적이 없는 힙한(새로운) 것이라는 이중적인 이유에서다. 두 번째 이유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여러 가지 추가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먹고사니즘에 연연하는 것이 주는 비루함은 예술이 배척하며 각을 세워온 경계지점이다. 여기에 예술적 윤기를 주려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파는 일보다 더 세련된 수사학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글의 저의 중 하나이다. 다른 난점은 자연적인 것인데 옛 말에도 건강과 장수를 장담하는 것이 금기시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리씨가 그의 주장과 달리 단명할 확률은 이 계획의 치명적 약점이다. 따라서 이 글의 두 번째 저의는 이 글을 쓰는 것과 글로써 소통하는 일이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씨

저자 소개인지 글의 귀결인지 모를 이 단락에서 리씨에 대해서 좀 더 소개해야겠다. 슈뤠딩거의 고양이처럼 리씨, 정확하게는 이 연재 속의 주체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리씨는 독자의 조회수나 댓글 수처럼 미래의 확률에 대해 그 존속 여부가 확정되는 존재(이미지)이다. 그 캐릭터의 삶은 실재로 사람의 몸을 가지고 동시대에 연동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미술가로써의 리씨의 일면을 보려면 이 링크(https://www.youtube.com/watch?v=6-y0i2aE8wI)를 참조하라. 리씨가 어쩌다가 이 귀한 지면에 글을 싣게 되었는지는 도래할 과거로서, 미래 시점 언젠가에 연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측정자들의 관측행위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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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 [이상국 칼럼] - ‘괴델, 에셔, 바흐: 계층의 문제’ 참조.

**이미지라는 주어를 선별한 것은 나름의 직관적 계략에서이다. 앞으로의 글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이다’라는 경구처럼 문화 현상 속에서의 예술과 예술가 이미지를 주요하게 다룰 것이다. 우리의 이미지가 우리를 낳는다. 현재 우리는 저마다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소비하는 되먹임 구조를 함께 만들고 있다. 모두가 예술가가 되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에서 미디어가 부추기는 암묵적이며 때로는 명시적인 정언명령 중 하나이다.

***보들레르에서 기인한 예술적 일탈의 역사는 최근 제3페미니즘의 파고에 휩쓸려 ‘괴물’ 사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페미니즘은 그 일탈이 실은 남성지배 사회의 예술 빙자 폭력이었음을 의심케 한다. 혹자는 ‘괴물 사냥 현상’이 본산지에서 고상한 정신이 식민지에서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른다. 예술적 허용을 잠식하면 바로 모든 것이 투명한 투명사회의 감옥이 기다린다는 듯이.

****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움에 대하여:문화경제학 시론』 참조.

*****벵크시는 자신의 작품이 유명한 옥션에서 낙찰되는 순간 미리 액자에 설치해 놓은 문서 세절기를 원격으로 가동하여 그림이 액자 밖으로 나오면서 여러 갈래로 잘리게 조정하였다. 반 쯤 파쇄된 그림(본 기사 짤방 이미지 참조)은 멈추었고, 이 깜짝 소동으로 큰 뉴스가 되었고, 향후 반쯤 파쇄된 그림은 또 다른 구매자에게 매도되었다. 많은 이들은 이 소동이 천문학적인 값으로 거래되는 상품이 되어버린 예술을 비판하는 상징정 행위로 찬양하였지만, 일각의 전문가들은 이마저도 곧 거래될 것이고, 뱅크시가 소득을 노린 것은 아니지만, 상징자본의 추수를 위한 동일한 게임판 위의 불나방에 불과하다는 냉소어린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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