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1-19 10:15
난민 보호: 이방인과 이웃되기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4,312  


이방인과 이웃되기: Learning from the Stranger를 읽고
 
1.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시대에 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브라이언 월쉬가 말한 것처럼 ‘세계화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의 다른 표현인 과학주의, 기술주의, 특히 자본주의가 세계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된 세상이 동시에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3가지 절실한 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기독교가 제대로 된 의미에서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합리성은 개나 줘버려 라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신도 도달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대부분의 의미 있는 신념들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모더니즘과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과제는 본 주제와 관련이 없으므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두 번째는 기독교가 진리를 희생하지 않고도 얼마나 다원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짓되게 설정된 합리성이라는 잣대로 모든 다양한 것들을 획일화 시키는 폭력을 감행하는 모더니즘과 모든 것이 옳다고 하면서 불가공약적인 다양성을 누리는 것을 절대 선으로 여기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기독교라는 거대 이야기가 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대 이야기가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속임수요 이데올로기였던 모더니즘과 거대 이야기는 가능하지도 않고 언제나 폭력적이다라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과제도 마찬가지 이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과제는 특히 말로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진정한 해방(구원)과 다원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야기해야 함과 동시에 우리가 실제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착한 이야기를 사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2. 
이 글의 주제가 ‘이방인과 이웃되기’입니다. 주제를 이렇게 정한 것은 제가 이제껏 변호사로서 해온 일이 어떻게 보면 ‘이방인과 이웃되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계화된 포스트모던’시대에서 기독교가 거대 이야기 이지만 다양성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착한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길도 실제로 ‘이방인과 이웃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이방인들을 이웃 삼아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저는 30년 동안 그냥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범생이로, 입신양명을 꿈꾸며, 무미건조하고 지리멸렬한 인생을 살아 왔는데, 제가 변호사가 되기 전에 만났던, 그리고 변호사가 된 이후에 만났던 난민들은 모두들 용기 있고 흥미진진한 인생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살아왔는데, “그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가면 좋겠다”, “이들이 좀 더 나은 이야기를 살면 좋겠다”라고 느낀 것이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그들과 계속 함께 일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난민과 함께 일하면서 난민이야 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민이란 종교적, 정치적, 민족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을 위험 때문에 본국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인데, 국가가 보호해 주기는커녕 박해를 하고 있고, 도망 와서 보호를 요청한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난민제도는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트라우마틱한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난민들은 정신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여서 많은 경우 불면증과 대인기피증, 심지어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난민신청자에게는 일할 수 있는 권리도 생계지원금도 없어 사회적으로도 매우 열악한 상태여서 남자들은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불법 취업을 하였고, 여자들은 그러한 취업 자리도 없어 일부는 성매매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난민이야 말로 사마리아 비유에서 말하는 거의 반쯤 죽게 된 사람과 같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이들과 일하면서 그 취약성을 생생하게 본 것이 난민들과 계속 함께 일하게 된 또 다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민 중에는 외국인 구금소에 오래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구금된 이주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넓히게 되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외국인 구금 제도야 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야만적인 제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 구금은 정기적인 사법심사도 없이 무기한 구금이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신매매 피해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난민과 같이 인신매매가 강제 이주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미군 부대 주변의 성매매 산업에서 일하는 여성의 95%가 필리핀과 러시아 여성이라고 하는데, 이 분들은 기획사에 속아서 연예 흥행 비자로 한국에 온 뒤 인신매매 산업으로 넘겨져서 그곳에서는 빛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고 계속 성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인신매매에 대해서는 국내법이 미비해서 그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제가 난민과 인신매매 피해자 그리고 구금된 이주자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이들과 이웃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하는 ‘공익법센터 어필’에서는 이러한 취약한 이주자들 이외에 다국적 기업 특히 해외한국기업에 의해 인권 침해를 당한 외국인들과도 함께 일을 합니다. 아래에서는 어떻게 이러한 분들을 위해서 일하게 되었는지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
난민 중에 나이지리아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난민을 신청한 이유는 그곳에 있는 쉘이라는 다국적 정유회사 때문이었습니다. 쉘은 1958년 나이지리아의 니제르 델타의 오고니 지역에서 석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1976년부터 1991년까지 15년간 무려 3천번이 넘게 석유유출 사고가 발생하여 인근 토지와 수자원이 심하게 오염이 됐었고, 오고니 지역은 대기오염과 산성비로 고통 받았습니다. 자원의 저주라는 말이 있는데, 미안마도 그렇고 콩고도 그렇고 자원이 많은 나라 국민들이 더 잘살기는커녕 그 자원을 개발해서 얻는 이익은 부패한 정권에게 가고 백성들은 어 피폐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에 시달렸던 오고니 지역 사람들이 1992년 켄 사로-위와를 대표로 하는 ‘마솝(MOSOP)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대규모 저항을 했습니다. 쉘이 나이지리아에서 철수 한다고 협박을 하니, 전체 재정수입의 80%를 석유수출에 의존하던 나이지리아 독재정권이 마솝 활동가 2천명 이상을 살해하였는데, 이 때문에 8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고, 그 중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한국까지 도망쳐 온 것입니다.
 
다국적 기업의 인권 침해로 인해 난민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잠재적인 인권침해자가 이제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보다 훨씬 더 많은 자본을 가지고 활동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한국의 기업들이 행한 외국에서의 인권 침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포스코의 제철소 건설 때문에 생존권 박탈과 강제 이주의 위협에 시달리는 인도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으로 노동착취를 당하면서 온갖 협박 때문에 노동 3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방글라데시 수출자유구역에서 있는 한국 섬유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원양어선에서 일하면서 한국인 선원들로부터 성추행과 폭행을 당하고 임금도 받지 못한 사조 오양 소유의 선박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권리 구제를 위해 일을 해왔습니다.
 
최근에 저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은 우즈베키스탄입니다. 카리모프라는 독재자가 20년 이상 집권하고 있는 나라인데,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악명이 높지만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고등학교 학생들이 1년에 2개월 이상 강제 노동으로 목화밭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렇게 거두어들인 목화를 수출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목화를 한국 기업인 대우 텍스타일이 수입을 하고 있고, 공기업인 조폐공사가 지폐를 만들기 위해 사들이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돈이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아동 강제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4.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난민을 나의 이웃 리스트에 올릴 수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범위가 어떻게 인신매매 피해자와 구금된 이주자 그리고 해외 한국기업에 의해 인권 침해 당한 자들까지 확장되었는지 말씀 드렸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변호사가 되기 전에 NGO에서 일하면서 난민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의 취약성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을 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2년 반 동안 한국 라브리에서 간사로 일했던 경험입니다. 강원도 양양 산골짜기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삶을 관조적으로 보게 된 것도 나중에 공익변호사가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은 그동안 제가 알아온 복음적주의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복음주의에서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통합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 아는 것과 믿는 것의 통합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이라면 그 분이 종교적인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일하면서 들었던 고민은 복음주의자들이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 보수적인 이슈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영향 때문이기도 한 거 같습니다. 저는 왜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낙태나 동성애 문제에만 그렇게 신경을 쓰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 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나 생명도 기독교적인 가치인 것이 맞는데, 여성 차별의 문제, 환경의 문제, 국제 관계의 문제, 가난의 문제, 주거의 문제, 양극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왜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통합이 중요하고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면 이런 영역/아젠다도 여전히 기독교 세계관이 적용되어야 제대로 된 통합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믿는 것과 사는 것,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통합에 대해서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들 모두 다 매우 추상적인 것들인데 평소에는 믿는 바를 잘 외우고 있다가도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과 불일치하게 행동을 한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인식론에서는 어떤 믿음이 (질적으로 다른 지위를 갖게 되는 상태인) 지식이 되려면 정당화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정당화 과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자 마다 다른 주장을 하는데, 그 중에 기초주의라는 것 하나만 예를 들면, 그 믿음이 기초로 삼고 있는 믿음이 다른 믿음을 정초할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하고 그렇게 문제가 되는 믿음이 기초의 역할을 하는 믿음에서 정당하게 추론된 것이어야 그 믿음이 지식이 된다고 합니다. 저는 반드시 이러한 인지적인 정당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야고보서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실천적인 정당화 과정을 요구하는 것은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내가 가진 아주 추상적인 명제를 받아들인 믿음이 질적으로 다른 지위(진정한 믿음)에 오르려면, 실천으로 정당화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주의에 대한 반성(그러한 반성은 사실 통합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자체가 심어준 것입니다)때문에, 라브리 간사를 그만 두고 변호사가 되어서는, 그 동안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일하지 않은 영역에서 내가 믿는 바를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험하고 싶었습니다. 라브리에서 일할 때에는 앞에서 잠간 언급한 바 있는 기독교가 제대로 된 의미에서 합리적인지를 보여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면, 이제는 약한 자들과 이웃되는 것을 통해 내가 믿는 기독교가 거대 이야기(인류 역사에 관한 포괄적인 이야기)이지만, 다양성을 존중하며 고통 중에 부르짖는 자들을 해방(구원)하는 착한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제가 그동안 접한 복음주의에 대한 이러한 반성이 없었더라면 저는 제 이웃의 범위를 가족의 가치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일부 공화당의 아젠다(동시에 한국 복음주의자들의 아젠다)에 한정 시켰을 것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물어본 것은 자신이 한정해 놓은 이웃의 리스트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율법학자가 가지고 있는 이웃의 리스트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혀 버리십니다. 이처럼 우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웃의 리스트가 공화당의 아젠다에 해당하는 몇 몇 그룹들로 한정되어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5. 
지금까지 어떻게 이방인을 이웃 삼게 되었는지, 이방인을 이웃 삼아 어떤 일을 했는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이방인을 이웃 삼는 일이 기독교라는 거대 이야기가 다원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착한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방인을 이웃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한국의 인권상황이 발전한 궤적을 따라가 보면 우리라는 외연이 넓어지면서 과거에는 그 안에 들어오기 힘든 그룹들이 우리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성이 그렇고, 장애인이 그렇고, 아동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모두 남으로 취급되다가 우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들은 여전히 우리라는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룹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기 위한 이주한 외국인 여성은 그 나마 조금 우리라는 범주에 가깝습니다. 그 다음이 한국인들이 일하지 않는 3D 업종에서 일하기 위해 온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그런데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 나라가 있어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돌아갈 수조차 없는 난민, 강제로 이주해 온 인신 매매 피해자들은 우리라는 카테고리로부터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이들을 ‘우리’라는 범주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방식으로 이방인을 이웃 삼으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열풍인데, 다문화라고 할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 문화로 흡수된 외국인들이므로 그들을 이제 우리처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은 한계에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한국과 같이 인종차별이 심하고 소위 순혈주의, 단일민족이라 허구적인 개념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지는 곳에서 외국인은 끝까지 우리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을 확률이 큽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사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더 심각하기는 합니다. 21세기인데도 여전히 헌법에서는 인권의 주체를 ‘국민’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도 인권과 관련해서 개선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 외국인의 인권입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더라도 외국인의 구금, 강제추방, 난민 불인정이 항상 문제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이방인을 우리라고 치환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폭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방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잘 삼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부터가 제가 본격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우선 우리도 이방인이고 나그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방인을 선대하라고 하면서 그 이유가 너희도 애굽에서 이방인이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 뿐 아니라 출애굽 한 이후에도 너희는 여전히 나그네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편지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나그네다’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이 땅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죽어서 가게 될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라”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식의 플라톤주의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그네라고 할 때에는 늘 청지기 사상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청지기 사상은 플라톤주의와는 다릅니다. 청지기 사상은 내가 땅의 주인이 아니지만 맡은 바 성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는 이 땅의 것은 모두 사라질 허망한 것이니 여기에 아무 소망이 없고 앞으로 이데아만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좋은 이웃이 되려면 우리도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땅은 무엇입니까? 나의 기득권이고 나의 재산이고 무엇 보다 나의 재능입니다. 나의 달란트가 내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길이 따로 있는데 자신의 점수가 아까워서 점수 맞추어서 진로를 선택합니다. 자신의 점수와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법을 도무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 자기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낭비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선한 사마리안인 비유에서 반쯤 죽게 된 사람이 땅에 널 부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그냥 지나갔을 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아마 그들이 죽은 사람을 만졌을 때 자신이 더러워 질까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너무 가리는 것이 많았고 잃을 것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런 점에서 잃을 것이 없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만진다고 자신이 부정 타는 일은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렘브란트가 사마리아인 비유를 여러 번 그렸는데 한 그림에 개가 똥을 누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귀한 사람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가지만 자신을 똥개로 알고 있는 사마리아인이 이 다급한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고, 나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바로 똥개이고 사마리아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청지기의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똥개라는 깨달음이 있어야지만 반쯤 죽은 사람을 만질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어떻게 해야 나도 이방인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달란트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그것을 내면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달란트 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달란트 시장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이 주일학교에 오시면 가장 먼저 하실 일이 달란트 시장을 엎어버리는 일일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달란트 시장은 성경적인 달란트 개념과 다를 뿐 아니라 사실 정 반대의 개념을 가르칩니다. 성경의 달란트는 우선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뜻한 바대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시장에서의 달란트는 우리가 쟁취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요절 잘 외우고 출석 잘해서 얻어낸 것입니다. 성경에서 달란트를 주신 목적은 그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시장에서의 달란트는 철저하게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 달란트를 모두 다 자기를 위해서 떡복기 사 먹고 학용품 사고 장난감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란트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의 관심은 오직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내가 받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달란트의 종류와 양이 사람들 마다 다르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들을 섬기면 칭찬이 똑 같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리고 무슨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가가 초점이 아니라 어떤 달란트를 얼마나 가지고 있든지 간에 내가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쓸 것인가가 초점입니다.
 
6.
이방인을 이웃 삼기 위해서는 우선 나도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청지기에 불과하다 내가 많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고, 내가 가방끈도 길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나는 사마리아인이고 똥개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이방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잘 삼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우리도 이방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방인의 제대로된 이웃이 되려면 이방인을 우리의 선생으로 모셔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된 사람이 제사장도 성전 관리하는 사람도 아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로 물어보았던 율법학자에게 이방인인 그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것처럼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방인을 단지 나의 동정의 대상이나 사역의 대상이나 선교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나의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나의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면 이방문화가 유입되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나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가르치게 하면 우리 신앙이 위험해지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전제는 “우리 문화는 이방문화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잘 못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방 문화입니다. 우리 사회에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든지, 얼마나 법과 제도에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투영되었는지 상관없이, 우리 문화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하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은 어느 문화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문화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부분이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선한 부분이 있고 악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지만 타락한 인간이 만든 문화는 그렇게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은 이방문화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방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을 가진 채 우리 문화는 내가 극복해야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 말씀은 이방 문화 속에 있는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은(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은) 선한 것과 진리를 배우는 것은 합당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진리의 유일한 근원이 성령님이라면, 비그리스도인이 쓴 책에 담긴 진리를 무시하는 것은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를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이되 그것이 가진 악함과 한계를 봐야 합니다. 이방 문화에도 악한 요소가 있고 우리 문화에도 악한 요소가 있지만 우선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에게 공기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리 문화의 악함과 한계,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습니까? 대조 문화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초월적으로 우리 문화를 조망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문화가 얼마나 우수하고 대단한지 우리가 얼마나 짧은 시간 내에 잘 살게 되었는지 만 생각하고 우리가 얼마나 병리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문화의 한계와 악함을 보기 위해서라도 대조 문화로부터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한국에서 많은 교회들이 외국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들을 선교의 대상 이상으로 보는 경우는 드믑니다. 외국인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외국 사람들이 안방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구태여 선교하러 외국에 나갈 필요 없다. 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해외 선교다“라고 합니다. 북한과 관련해서 일을 하는 사람중에는 통일되면 북한 복음화 때문에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두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어떤 목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우리 시대의 과제는 기독교가 착한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가 “거대이야기다. 역사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이야기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의심스러운 주장입니다. 사람들은 거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권력을 이용해서 남을 속여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이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자들에게 접근하게 되면, 기독교가 착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는커녕, 기독교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그럴 듯한 말을 만들어 내는 이데올로기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방인을 대상화 하지 않고 진정한 이웃을 삼는 길은 그들을 우리의 선생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 이방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착한 이야기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을 이웃 삼는 방법으로 이방인을 선생으로 모시라는 것은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수행해야 하는 다른 과제, 즉 기독교가 얼마나 다양함을 존중하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와 연결 됩니다. 우리는 다원주의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하지만 성경이 얼마나 다양성을 높이 평가하는지 모릅니다. 삼위 일체 이신 하나님 자신이 다양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똑 같은 것들을 찍어 내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는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같은 나무의 나뭇잎도 모두 다릅니다. 창조 기사에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다양하게(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기뻐하십니다. 또한 바울 서신에 계속 드러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은사의 다양함은 긍정적인 것이고, 주님은 성도의 하나 됨이 그 다양성을 희생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고양되는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문화를 획일화 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방인을 우리로 치환한 후에, 즉 우리라는 범주 안에 집어넣고 난 후에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려는 태도가 잘 못되었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첫 번째 성령강림절 날 바벨탑의 저주가 풀렸습니다. 바벨탑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날 어떻게 바벨탑의 저주가 풀렸습니까? 모든 사람이 같은 언어를 쓰게 되는 방식으로 풀린 것이 아닙니다. 각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말로 듣는 것으로 풀렸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이방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이방 나라의 말로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7:9 굉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 문화든 다른 문화든 모든 악한 것은 정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적인 다양성, 언어의 다양성, 그리고 문화의 다양성은 여전히 남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방인을 볼 때, 그들의 문화를 볼 때, 요한계시록의 이 장면을 기억하고, 그들을 우리의 선생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문화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정체성을 뭔가 남과는 다른 것으로만, 정체되어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혈을 강조하고, 유일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과의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끊임없이 형성해 갈 수 밖에 없고, 타인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경험과 이야기로 나의 정체성이 부유하게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을 나의 선생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선생으로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은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배워 우리의 정체성을 풍성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또 다른 우리’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다름을 무시하고 그들을 우리로 치환하기 위해 “이방인이 우리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선생으로 모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해지기 때문에 “이방인은 우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이방인과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이웃되는 것을 통해 우리라는 정체성이 없어지지도 이방인의 다름이 무시되지도 않으면서도, 이방인이라는 선생으로 부터 배우워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해 집니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라는 신학자는 이것은 마치 포용(포옹)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용(포옹)을 할 때 나는 팔을 벌려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내 안에 만듭니다. 팔을 벌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인 동시에 내가 단지 자족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포용(포옹)을 할 때 나는 팔을 접어 타인을 감쌉니다. 팔을 감쌌다는 것은 내가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는 말임과 동시에  타인이 내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는 표시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일부가 됨으로 나를 풍성하게 합니다. 이렇게 서로 포용(포옹)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충실하게 남아있으면서 동시에 아무도 예전과 똑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부유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7.
저는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나오는 서기관은 아주 배타적인 이웃 리스트를 가지고 있으면서 뭐가 잘 못 된지 모른 채 그것을 정당화 하려고 예수님에게 말을 붙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서기관의 이웃 리스트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웃 리스트에 대한 영점 조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미워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관심했기 때문에, 우리가 나쁜 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배제 했던 그 이웃 리스트에 그 사람들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특히 인종차별이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 중에 하나인 이방인들을 이웃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을 이웃 삼는다는 것은 그들을 우리라는 범주에 꾸겨 넣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나 반쯤 죽은 사람을 보고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반쯤 죽은 사람이 강도당한 것을 가장한 강도 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을 만지면 부정이 탈까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반쯤 죽은 사람을 돌보는 일은 자신들에게는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개나 이방인 취급을 당했던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 줍니다. 누가는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그 사람을 대했는지 아주 자세하게 묘사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모든 위험과 불편함을 감수합니다. 마치 자신이 종이된 것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나귀에 태우고 자신을 나귀를 끌고 걸어갑니다. 우리가 이방인의 제대로 된 이웃이 되려면 우리가 이방인이다, 렘브란트의 해석대로 우리가 똥개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달란트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라고 선물로 주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치고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의 ‘사’자도 입에 담기 싫어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라고 묻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던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를 선생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방인의 진정한 이웃이 되려면 그들을 우리의 선생으로 모셔야 합니다. 이방인을 선생으로 삼아 그 동안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잘못 된 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나의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동안 내가 가진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채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했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또 일반은총의 관점에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善)과 진리를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방인을 선생으로 가장 잘 모시는 길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체성이 더 풍성해 집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방인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그들을 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그 공간에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로부터 가지고 온 경험과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도록 하여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체성이 풍성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이방인이라는 심정을 가지고 이방인을 나의 선생으로 모셔서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삼는 일은 세계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절실한 과제는 이러한 시대 가운데 기독교라는 거대 이야기가 다양성을 얼마나 존중하고 얼마나 착한 이야기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만으로는 안 되고 그 착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이야기를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이야기를 사는 방법 중에 하나로 저는 이방인을 이웃 삼는 일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을 여러분에게도 권합니다.
 
*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2, 2014년 2월, 김종철, 공익법센터 APIL, 상근변호사) 

 
   
 

Otium Sanctum

월간 베스트 게시물

공지사항
  • 1 아포리아 북리뷰(Aporia Review of Books)
  • 2 궁금하신 사항은 언제든지 문의하여 주시기 바…
이용약관| 개인정보 취급방침| 사이트맵

Copyright (c) 2013 APORIA All rights reserved - www.apor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