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4-17 10:08
[이승범 서평] 앎의 나무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6,707  


도서정보
저자명 움베르또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저서명 앎의 나무 : 인간 인지능력의 생물학
출판사 갈무리
연도(ISBN) 2007(9788986114973)

[이승범 서평] 앎의 나무

이승범 (의사)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이유이다. -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중에서

0. 들어가며

한때 ‘통섭’이라는 말이 유행한적이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20년 전쯤 에드워드 윌슨에 의해 <통섭>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1998년)되었고, 수년 후에 국내에도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씨 등에 의해 번역(2005년)되어 소개가 되었다. 나름 국내에서도 이러저런 상당한 지적 파장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책의 취지는 이렇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놓인 망각의 강에 다리를 놓자는 것이다. 지식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분과화된 학문들 간의 벽을 허물고 제대로 통합된 학문을 하자는 것이다.

취지는 이처럼 참으로 좋은 것이었고, 이에 호응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이에 반감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윌슨이 말한 학문 간의 통섭은, 그럴듯한 캐치 프레이즈였으나 실재 내용은 (생물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인문학의 얼마 없는 지분마저 차지해버리겠다는 생물학 패권주의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런 지적이 오해만은 아니었다. (윌슨 입장에서는) 인문학이 수천 년간 발전 없이 유사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였고, 생물학 패러다임을 이용해 인문학적 주장의 옥석을 가려주겠다는 것이 통섭의 주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섭’의 주장이,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 간에 벽을 허물며 시너지가 넘치는 큰 잔치가 되기보다는, 일방적인 재개발 철거작업 비슷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통섭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현실에서 그 주장은 반쪽짜리 잔칫상이었다는 인상이다.

여기 그렇지 않은, 그러니까 인문학의 밥그릇의 빼앗으려 들지 않고, 오히려 식탁을 화사하게 해줄만한 지적 영감을 주는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며 철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와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공저한 <앎의 나무>이다. 1987년 처음 출간되었고, 이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국내에선 1995년에 출간되었다가. 2007년도에 재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식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생물학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미묘한 대안적 관점을 잘 따라가면, 수년천간 이어온 철학사의 해묵은 문제를 돌파하는 즐거운 지적 통찰을 맛 볼 수 있다. 기존의 인식론 상의 대립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실재론에 해당하는 표상주의와 (유아론적) 관념론의 오랜 대결을 넘어설 대안을 주장한다.

이런 인식의 뿌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은, 지능을 가진 생물체뿐만 아니라 다세포와 단세포 생물까지 적용되는 보편성 특성임을 저자는 제시한다. 지구상의 다종다양한 생명체들을 분류하기에도 급급한 것임에도, 이 책의 저자들은 전 생물체를 관통하는 일의적인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핵심을 관통하는 큰 그림을 그리는 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글에서는 불가피하게 저자의 가장 주요한 줄기만을 따라가겠지만, 이 글에서 전달하지 않는 여러 잔가지들에서 보이는 놀라운 통찰들은 마치 자크 모노의 우아한 책 <우연과 필연>을 연상케 한다. 반드시 완독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우선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1. 앎을 알기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뿌리를 찾는 작업에서, 저자는 우선 우리에게 ‘앎을 알기’를 촉구한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의심 없이 즉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앎이라는 행위’에 대한 성찰을 통해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앎이라는 행위’를 성찰할 것인가? 고도의 신경계를 갖고 있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발전시킨 인지과학의 방식으로? 아니다. 마뚜라나는 더 근본적이다. 신경계를 가진 다세포 생물체만이 아니라 단세포 생물체까지 포괄하는 생물체의 일반적이고 보편적 행동 양태를 통해서 ‘앎의 알기’에 대한 통찰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생물체의 보편적 행동 양태를 말하기 전에, 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하면서 지양하고자 하는 인식론적 입장을 짚고 넘어가자. 기존 인식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표어처럼 요약해 표현하자면, ‘확실성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이다.

확실성의 근거는 우리 문화에 암묵적인 형이상학적 전제 속에서 유지된다고 한다. 이런 견해에서는 존재란 내가 그것을 경험하기 이전에 자명하게 있는 것이며, 인간이 하는 행동과 독립적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소위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인식론적 입장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표상주의’라는 말로 더 자주 표현한다. 이런 인식론적 전제를 갖는 것을 저자는 ‘초월적 실재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며 비판한다. 경험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상정하는 것을, 과학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은 일견 위험해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이것이 아닌 다른 방식의 기초공사를 요청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실성의 유혹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앎이 자명하지 않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현상들에 주목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여기서 잠깐! 세심한 독자라면, 인지적 한계 때문에 실재론을 부인하는 논리가 비약이 아닌지 의심을 품을 것이다. 인식의 한계는 인식자의 잠정적 한계일 뿐이지 어떻게 실재론에 대한 부정을 가능하게 한단 말인가.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있다. 저자가 비판하는 실재론은 본질주의를 포함하는 ‘고전적 실재론’이다. 버클리의 ‘유명론’과 대결하면서 세련되기 전의 고지식한 실재론 말이다. 세계에는 현상 이면에 본질로서의 실재가 있으며, 그 본질을 나의 이성의 힘으로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식의 고전적(전근대적)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인지적 한계’를 순순히 인정하는 현대 과학에서의 ‘소박한 실재론’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저자의 실재론 공격은 철학사적으로 볼 때 허수아비에 대한 공격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따라가 보자.)

눈을 한쪽만 뜨고 앞을 주시하게 하면, 그 외측에 있는 특정한 국소부위에 뚜렷하던 점이 보이지 않게 되는 실험이 있다. 안구 내 망막의 특정 지점에 시신경이 빠져나가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빛에 무감각한 부위라 하여 맹점이라 부른다. 사람은 자기시야에서 맹점에 위치한 사물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연속적인 공간의 존재를 사실상 지각하지 못한다. 맹점 실험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색채지각도 객관적 빛의 속성에 따라서만 결정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난다. (청록색을 보는 일과 같은) 똑같은 신경흥분상태가 상이한 구성의 빛을 통해 유발될 수 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똑같은 회색빛이 주변의 색에 의해 달리 인지되기도 한다. 경험한 색채에서 어떠한 신경 흥분이 유발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개인의 (생물학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색체지각과 맹점실험의 예시가 말하는 바는, 우리는 현실적 경험 속에서 실재에 해당하는 확실한 객관성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앎의 제한성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시각경험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지각양태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보통 무엇(공간이나 색채)을 받아들여 지각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개인의 구조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개인의 ‘구조’란 우리가 생물체로서 자기보존 본능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것을 지향하게 되는 경향성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가령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속담을 생각해보자, 거기에는 생물학적 요청이 깔려있다)

바로 여기서 ‘인식활동’ 자체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 출발점으로서 생물체 행동의 보편적 원리가 적용되는데, 생물의 활동이란 자신의 존재영역에서 자기 보존을 위해 벌이는 효과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개체의 보존과 지속을 위한 행동 양태는 당연히 모든 생물체의 보편적인 성질이다. 이런 점에서 인식이란 것도 개체에게 특정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하는데 득이 되는 효과적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인식활동에 대한 이러한 생물학적 관점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는 이 관점을 이용해, 단세포세물인 아메바부터, 여러 다세포생물의 행태, 신경계의 발생과 유연성, 인간의 인지능력과 언어능력, 타고난 능력과 문화, 그리고 자아 개념까지 일관되게 설명을 해낸다.

이 관점의 연장선에서, 인식현상을 마치 ‘사실’이나 물체가 저기 바깥에 있어서 그것을 그냥 머리에 넣으면 되는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그래서 가능하다. 인식의 바탕에 인식자의 (생물학적) 구조가 깔려있기 때문이고, 개체가 무엇인가를 구분해 내는 식별행위나 능력도 바로 개체의 생존을 위한 요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앎을 알기’란, 인식 행위가 생명체의 구조와 따로 떨어진 행위(표상주의에서 말하는 인식)가 아니라, 생명체의 자기 보존 본능의 요청 속에서 ‘앎’이 위치 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존재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사이에는 불가분한 뒤얽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2. 신경계의 의미 : 행동이 아니라 유연한 다양성을 위한 것

단세포생물이든 다세포생물이든 간에, 개체의 생존을 위한 식별활동이 인식의 뿌리라면, 영류장류나 인간 등의 다세포동물에서 특이하게 나타나는 신경계는 무슨 추가적인 기능적 역할이 있는 것일까?

흔히들 감각자극에 대해 운동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신경계의 역할이라고 한다. 한곳에 머무는 식물은 신경계가 전혀 없지만 움직이는 동물은 신경계가 있으니까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러나 행동은 신경계의 발명품이 아니다. 생물의 행동은 신경계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연을 둘러보면 신경계가 있든 없든 개체의 행동을 관찰 할 수 있다.

아메바는 위족을 내밀어 작은 원생동물을 잡아먹는다. 편모를 이용해 헤엄치는 원생동물도 있으며, 스크루 추진기처럼 작동하는 편모를 가진 세균도 있다. 이 세균의 막에는 설탕과 특정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분자들이 있어서 설탕 농도차가 있는 곳이면 내부변화가 일어나서 편모의 회전방향을 전환해 특정 물질 농도가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단세포생물이 자리를 옮기는 행동은 감각과 운동부위 사이의 세포 안 물질대사의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그럼 신경계를 가진 다세포 유기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히드라라는 강장동물은 병 모양을 이루는 두 세포층으로 되어 있다. 히드라는 말단에 달린 촉수들로 물을 움직여 다른 동물을 가까이 오게 해서, 속으로 끌어 들인 뒤 소화액을 내보내 소화시킨다. 촉수에 있는 근세포들과 안쪽에 있는 분비세포들의 활동이 서로 조절되려면 이것들이 어떻게든 서로 접속되어 있어야 한다. 이 두 세포층 사이에는 신경세포가 있어서 해부학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세포요소들을 서로 이어준다. 신경세포 덕분에 멀리 떨어져 있는 감각요소들과 운동요소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다.

다세포 유기체에서도 단세포생물의 행동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상황이 일어난다. 감각부위와 운동부위 그리고 둘을 잇는 경로가 있다. 단지 히드라의 모든 행동은 이 두 부위가 중간뉴런망을 통해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연결된 결과다.

신경계 핵심기제는 감각부위와 운동부위가 다양한 흥분복합을 띨 수 있는 뉴런망을 통해 연결되어 유기체의 상호작용 영역을 확장한다. 이 기제가 확립되자, 다세포동물들은 계통발생을 통해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실제로 여러 종들의 신경계는 본질적으로 오직 중간뉴런망의 구성형태에 따라서만 서로 구별된다.

인간의 경우 근육을 활성화하는 약 백만 개의 운동뉴런이 몇 천억 개의 중간뉴런에 연결되어 있고, 몇 천만 개의 감각세포가 수용부위를 이루고 있다. 운동뉴런들과 감각뉴런들 사이에는 중간뉴런이 커다랗게 모여 있는 것이 두뇌이다. 인간의 운동뉴런 : 중간뉴런 : 감각뉴런은 대체로 1:100,000:10의 비율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신경계의 존재야말로 인식활동의 폭이 좁은 유기체와 원칙적으로 무한한 다양한 인식활동 능력이 있는 사람과 같은 유기체를 가르는 핵심이다.

이처럼 신경계는 자극에 대한 운동반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극에 대해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는 구조적 신축성라는 특성이 바로 신경계의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창조적 자유를 경험하며 고등 동물의 행동은 우리의 관점에서 마치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3. 신경계의 인식구조도 표상주의가 아니다

그럼 이처럼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으며 창조적 자유의 능력을 보이는 신경계의 인식구조는 단세포 생명체의 구조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을까? 답은 이미 전술한 바대로, 유연성 말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감각-운동 활동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신경계도 그런 활동 맥락 안에 있을 뿐이다.

내가 눈으로 밝은 조명아래에 있는 저 그림을 카메라 렌즈처럼 투명하게 보는 것 같아도, 우리의 신경계는 꽤나 복잡해서 그렇게 단선적인 표상주의적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시각 체계를 예를 든 김에 말해보자. 안구에 있는 망막뉴런이 하나씩 시상의 외측슬상체를 거쳐 시각피질에 투사된다. 여기에 덧붙여 신경계의 다른 부분(대뇌피질 등)에서 온 수백 개의 뉴런들이 외측슬상체에 투사된다. 요컨대 외측슬상체란 망막이 뇌피질에 투사되는 것을 그저 중계하는 곳이 아니다. 여기로 모여드는 다른 많은 신경섬유들에 의해 뇌피질로 전달될 내용에 여러 가지 간섭작용이 일어난다.

다세포생물의 신경계란 그물처럼 서로 얽힌 여러 순환관계들로 되어 있으며 유기체의 보존과 지속을 위해 내부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해 준다. 이렇게 볼 때 신경계는 단세포생물의 구조처럼 작업적 폐쇄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신경계는 (개체 보존을 우선시하는) 작업적 폐쇄성을 지니므로 신경계의 작업방식은 표상주의적이지도 유아론적이지도 않다. 유아론적이지 않다는 이유는 신경계가 유기체와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유발하는 유기체의 구조변화에 따라 유기체의 상태들이 변조된다.

신경계의 작업방식은 표상주의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어떤 자극에 대해 신경계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상호작용의 매순간 신경계가 띠는 구조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신경계는 단순한 입력-출력 모델이 아니다. 개체들이 살아오면서 그동안 역동성으로 겪어온 계통발생적 개체발생적 변화의 결과가 신경계인 것이다.

4. 공동개체발생적인 언어와 인간의 의식

저자는 사람이 사회적 삶 속에서 언어적 영역을 산출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지만 사람만이 언어적 행동조정을 통해 언어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본다. 사회적 체계의 구성원들이 함께 살면서 겪는 공동개체발생적인 구조적 경험이야말로 언어적 영역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의 정신과 의식도 사회적 삶과 강력한 언어적 접속을 통해 산출된 현상으로 본다. 뇌과학에서 임상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언어적 기능이 없으면 자기의식도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자의식, 의식, 정신 등은 언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된다. 따라서 그것들은 오직 사회적 영역에서만 일어난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고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근본방식에서 언어가 필수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언어와 (그것이 나타나는) 사회적 맥락이 형성되어 인간에게 정신과 자의식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그것에 걸맞는 상호작용의 역사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이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정신이란 내 머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 언어적 접속의 그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이처럼 언어와 의식도 인간의 고유하고 탁월한 표상능력이나 계산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앎의 뿌리’에서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뒤얽힘이 사회적 접속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5. 변화의 계기

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인지적 ‘맹점’을 산출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우리의 존재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체는 자기와 뒤얽혀 당연하고 받아들이던 것을 달리 볼 수 있는 기회인 변화의 계기를 언제쯤 맞을까?

그것은 오직 일정한 상호작용 속에서의 정상상태가 깨질 때이다. 존재의 어느 한 차원에서 구조접속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허물어질 때를 우리는 일상 속에서 간헐적으로 경험한다. 주로 큰 실패의 경험들이거나, 전혀 다른 문화적 환경에 놓이거나, 영업을 처음 해보거나 등등. 그리고 그것에 관해 성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형태들의 관계를 산출한다. 이것은 끝없는 역사적 변천과정 속에서 우리의 개체 발생적인 구조적 표류가 방향을 바꾸게 되는 계기들이다.

6. 앎의 뿌리

관찰자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세계가 있고, 신경계의 인식활동을 통해 이 세계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신경계가 구조적 역동성을 가지고 어떻게 작업하며 또 독립된 세계의 표상을 어떻게 산출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표상주의(객관주의)와 유아론(관념론)이라는 두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함을 강조한다. 우리와 별개로 독립된 초월적이고 확실한 인지적 가정에 기대지 않고, 우리는 세계의 규칙성을 이해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초월적 가정을 피하면서, 저자는 과학적 전통 안에서 새로운 근본적 개념들을 제시한다. 곧 인식(활동)이란 객체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인식활동은 단지 개체에게 효과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앎을 알기’에 대한 지혜로부터 피할 수 없는 윤리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 윤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적 구조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세계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임을 알게 되면, 타인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공존하고자 한다면 확실한 것을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 없이, 남을 받아들임 없이 사회적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7. 나오며, 비판점

1) 과학자들의 실재론과 마뚜라나가 비판하는 실재론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소박한 실재론은, 마뚜라나가 생각하듯 완전하고 투명한 앎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과학자는 그들이 전제하는 철학적 바탕이 되는 논의의 엄밀성과 정확성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과학적 사고의 무난한 전제조건으로서 (기능적 유용성 차원에서) 소박한 실재론에 기댈 뿐이다. 또한 과학사적으로 보면 과학자 집단이 어느 집단보다 앎의 한계에 대체로 유연하게 수긍하고 개방적 태도를 강조한다. 하여 마뚜라나가 주장하는 ‘앎의 알기’라는 패러다임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자연과학자 집단에게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가 비판하는, 직접적인 진리인식의 가능성을 오만하게 표방하는 실재론(표상주의)의 전형은, 철학사적으로 봐도 이미 근대 철학이 인식론에서 칸트 등의 작업을 통해 지양된 바 있다. 그래서 저자의 실재론에 대한 비판은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된 개념을 다시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2) 자명한 공리체계의 취약성

어떤 주장이나 체계적인 논리를 펼치기 전에 기본전제나 가정이 되는 것을 공리라고 한다. 철학자들도 그런 공리에 해당하는 가장 근본적이며 의심할 수 없는 탄탄한 토대를 구축하고자 한다.

마뚜라나도 비슷한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문적 토대를 성찰하면서, 관찰자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초월적 실재의 형이상학’이 매우 취약해 보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초월적 형이상학의 전제에 기반 하지 않고, 경험적 세계의 규칙성을 이해하고자, 관찰자와 효과적인 행위로서의 인식활동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공리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아마도 그런 노력은 취약성을 갖기 쉬운 거 같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대한 니체의 비평을 소환해 보자.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이용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 자체라고 깨닫고 자기 철학을 기초로 삼았다. 얼핏 보면 상당히 자명한 설득력 있는 주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니체는 이런 비판을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의심할 수 없는 사고의 근본적 시작점이 되기 위해서는 문제가 많다. 데카르트의 주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미 ‘나’란 무엇인지, ‘생각함’이란 그리고 ‘존재함’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선험적 앎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수 없는 가장 단단한 기초를 만들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선험적 전제와 개념을 갖고 와 버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명한(자명한 듯한) 공리에 기반 한 기초 작업은 많은 경우에서 근본적인 취약성을 내재한다. 당연하다고 주장되는 전제를 믿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런 설득력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는 자신의 생래적 원체험에 근거한 (적어도 자신에게는) 자명한 전제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냉소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마뚜라나의 주장에도 해당한다. 그는 ‘표상주의’같은 특정한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전제를 두지 않고, 연구 작업의 기초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그는 일상세계에서 흔히 경험하는 관찰자와 그와 상호작용하는 환경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거기에는 이미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실재론적 관점이 소박한 형태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3) 앎의 나무가 아닌 뿌리에 연연하기

이 <앎의 나무>라는 책의 부제는 ‘인간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뿌리’이다. 제목처럼 생물학적 접근으로 인식을 탐구해서 ‘앎의 뿌리’를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뿌리가 보여준 앎의 패턴(개체 생존을 지속시켜주는 유용한 것을 식별하는 능력)에 집중하다가 보니, 뿌리의 패턴을 넘어서는 앎의 나무 위쪽에 열린 열매들에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뿌리적 패턴을 넘어서는 인지와 지식이 있지 않은가. 수학과 물리학의 성취를 보라.

이것은 마치 깡길렘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서 질병의 기원에 대한 계보적 탐구를 하면서 드러낸 모습과 유사한다. 깡길렘은 인간에게 기능장애나 통증 등을 일으키는 증상과 관련하여, 병의 사회적 규범적 성격을 강조한다. 병은 병 그자체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측면이 강하고 그것을 느끼고 병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현대의학에서 강조하는 예방과 조기진단 및 치료라는 무증상 질환의 영역, 병을 병 그 자체로 까지 확대한 부분을 다소 경시한다. 깡길렘과 마뚜라나는 기원의 뿌리적 패턴에 대한 연연함 속에서 유사한 주장을 한다.

8. 그럼에도 매력과 미덕

이 책의 지적 작업에서 가장 통쾌한 점은, 인식론과 관련해 기존의 팽행선처럼 보이던 실재론과 관념론의 이슈와 관련해 독특한 관점을 보인다는 것이다. 기존의 확립된 관념들에 대해 미세한 개념적 손질을 보거나 추가적인 주석달기 식의 개념적 세공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생물학이 철학에게 제대로 말 걸기를 하는 통섭적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앎의 뿌리’에 대한 저자들의 성찰은 ‘초월적 형이상학’의 배제를 지향하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인식하기의 제반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근대적인 미덕을 제공한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경우에 ‘나’ 혹은 ‘우리’를 특권화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습속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특별성이나 특권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 우리의 자명한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저들의 사고와 행태를 비아냥거리는 부족적 태도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밖에 있는 초월자의 입장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세계-내-존재로서, 허우적거리며 세속을 경험한다. 유해한 것을 간신히 식별해 멀리하고, 유익한 것을 가까이 하려고 애쓸 뿐이다. 이런 현실적인 삶의 교훈을 이 책은 생물학적으로 입증해 준다. 나를 포함해 아무도 특권적이고 초월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문제를 다룬 조지 오웰의 <1984>같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세뇌와 교육의 식별 가능성 여부이다. 얘기를 나눠보면, 다수의 사람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세뇌와 교육의 선악구분은 자명하게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된 미군 일부가, 세뇌프로그램에 의해 전쟁이후에도 (놀랍고 어리석게도) 공산국가에 대한 호감을 보인다든지 하는 예들이 있다. 친구의 꼬임에 끌려간 다단계 회사에서 진행하는 것도 세뇌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예시를 들기도 한다. 밖에서 봤을 때, 세뇌당한 저들을 지적하기란 쉽고 분명해 보인다.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마녀를 공격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만약 내가 그 안에서 제한된 정보와 경험 속에서 있으면서(하지만 누가 무한한 정보를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제한된 정보 속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주어진 상황을 식별해야 할 때 과연 그것이 세뇌인지 교육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세뇌와 교육이 식별되는 순간은 내가 그것을 계속 밀고나가 사회 속에서 실패과 성공을 경험하면서 판단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분명하던 유해함과 유익함의 기준은 거시적으로 보면 변화하고 유동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세뇌인지 교육인지의 확실한 구분도 세상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이며 결정도 뒤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세뇌와 교육이 그 자체로서 약간 다른 패턴을 보이기도 하지만(개인이 접근 가능한 정보의 차단이라든지 질문과 자유로운 토론의 가능성 여부 등으로), 그 경계선에 흐릿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앎의 뿌리’에 대한 성찰과 개체의 ‘변화의 계기’에 대한 생물학적 고찰은 세뇌와 교육의 구분이 제공된 정보자체의 내용에서는 식별 불가능함을 알려 준다. 제공된 정보 내용의 유해성 무해성은 개체와 어떤 관계로 엮이는가에 달려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앎의 뿌리에 대한 성찰은 저 전근대적인 특권성과 지적 오만에서 비롯되는 의기양양함에 대한 해독제 역할의 미덕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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