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오면 수천명의 구름 청중을 몰고 다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제크는 그야말로 대중스타 부럽지 않은 판타지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왜 자신이 한국에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대뜸 한국의 지식인들이 유럽의 문화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이 농담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가 그의 글을 읽을 때 꼭 귀 기울여 경청하는 태도만이 능사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제크의 최근 저서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원제:Islam and Modernity)에 대한 장정일-이택광의 논쟁을 보면 지제크의 텍스트에서 읽고 싶은 부분만 읽은 뒤, 읽어들인 내용을 토대로 자신들이 좀더 지제크를 제대로 읽었다는 식으로 논쟁이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물론, 논쟁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지제크가 논의한 내용 자체에 대한 토론과 해석은 없었다.
짧은 소책자인 지제크의 텍스트는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이슬람 근본주의의 이념은 사실은 서구 자유주의와 모종의 협력 관계에 있다. 2) 그러나 두 이념 사이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남녀 사이의 성적인 평등이라는 개념의 유무에 따라 갈린다. 3) 서구 자유주의의 세속법이 규정하는 인간 개념은 보편적인데 비해 이슬람주의 이념에 기초한 종교법은 인간을 문화적 특수성에 예속되는 객체로 정의한다. 따라서 법의 계통 분류로 보자면 특수성에 기초한 이슬람주의는 보편성에 기초한 자유주의의 하위에 놓인다. 이슬람주의는 보편적 자유주의에 비해, 말하자면, 문명의 발달 단계에서 진화가 덜 된 이념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제크의 책 전반부의 내용이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이슬람주의를 계통 분류 상 자유주의의 하위에 위치시키게 만드는 결정적 빌미가 되는 남녀 간의 성적불평등의 기저에 깔려있는 어떤 허구성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밝히는 데에 할애된다. 지제크는 서방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처럼 이슬람--그렇다, 지제크는 처음부터 ‘이슬람주의’와 ‘이슬람’을 끊임없이 혼동해서 사용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이슬람 종교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에 명백히 이슬람 종교 그 자체를 가리킨다--이 단순히 여성을 억압하기 때문에 극복되어야 할 종교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의 기원을 살펴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여성들 때문에 이슬람은 생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가령, 이슬람의 시조, 이스마엘의 생모인 하갈, 무함마드의 아내인 하디자, 무함마드의 생부인 압둘라에게서 압둘라 자신도 깨닫지 못한 초자연적인 빛을 발견하여 압둘라로 하여금 영성적 자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어느 여인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은 여자의 힘, 생기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자들의 몸을 가림으로써 베일 너머에 있는 것이, 남성들의 관음적 상상력이 그리는 것처럼, 단순히 여성다운 어떤 것인 것인지 아니면 이슬람 자체의 종교적 진리인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을 가리고 있는 히잡이나 부르카 같은 베일의 기능은 베일 너머에 있을 실재(종교적 진리)에 도달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게 하는 장치이다. 나아가 이슬람의 계율이나 관습이 지켜지는 한, 베일 너머에 있을 수 있는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결국 세상 모든 것의 빛이자 생명의 원천인 절대 유일의 신인 알라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일 뿐이라는 해체주의적 관점이 이슬람 근본주의가 저지르고 있는 불의와 폭력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지제크의 ‘(문화)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획’인 것이다.
책 내용의 큰 윤곽을 그려봤으니 이제 그 내용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해봐야 한다. 먼저 서구 자유주의 이념과 이슬람 근본주의가 어떻게 서로 협력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을 살펴보자. 지제크는 유럽의 이념적 지형 안에서도 꽤 왼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 급진적인 좌파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급진좌파로서의 지제크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파키스탄 탈레반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파키스탄의 토지없는 빈농들은 서구의 자유주의 세력이 파키스탄의 토호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무산계급에 속하는 파키스탄 농민들은 더욱 생존의 위협을 느꼈고 자신들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탈레반 진영으로 손쉽게 포섭되었다. 여기서 지제크는 서구 자유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어떻게 서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는가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 자유주의 정치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막아내는데 무력하다. 자유주의가 이슬람 근본주의를 막아낼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21쪽)고 이토록 취약한 이유는 자유주의의 내부적 결함 때문이라는 것이 지제크의 진단이다. 자유주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지제크의 처방은 자유주의 진영과 급진 좌파의 연대다. 이러한 연대가 있어야 비로소 서구의 유구한 자유주의의 가치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제크가 자유주의와 급진 좌파의 연대를 호소하는 것은 자유주의 이념적 가치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훼손시키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급진좌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지켜야 하는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지제크는 다음과 같이 수사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자유주의의 핵심인 자유, 평등 등의 핵심적인 가치는 어떤가?(So what about the core values of liberalism: freedom, equality, etc.?”) “자유와 평등 등”으로 제시된 서구 자유주의의 주요 가치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프랑스 혁명의 가치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유, 평등이라는 분명한 발음 뒤에는 지제크의 불명확한 우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여기서 생략된 프랑스 혁명의 또 하나의 가치인 우애는 지제크의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이 글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될 것이다.
자유주의와 급진좌파가 연대해야 이슬람 근본주의와의 대결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유주의의 본연의 가치를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의당 급진좌파의 어떤 면이 어떻게 자유주의의 내부적 결함을 보충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진행될 것을 기대했지만 지제크는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과 공모라는 기왕의 논의를 반복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지제크의 텍스트에 대한 이택광과 장정일의 논쟁에서 논의가 진행되면서 이택광이 급격히 수세에 몰리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제크의 최종 타겟은 이슬람 종교, 그에 기초한 문화와 정치다. 이택광이 지제크에게 환호한 것은 그가 급진좌파의 입장을 강조했다는 점에 대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급진좌파의 연대 전술에 대한 강조는 다해서 책 전체에서 1쪽 정도의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전혀 다른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한 간이역 정도의 역할 밖에 되지 않는 내용일 뿐이다.
지제크에 따르면 이슬람과 서구 자유주의를 갈라놓은 차이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이 남녀 간의 성적 평등에 대한 개념이다.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성적 유혹에 대한 문화적 인식의 차이, 그리고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문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지제크의 논의에서 중요 관심사이다. 가령, 남녀 간의 성적 평등과 유혹이라는 문제에서 중요한 문화적 차이를 보이는 관습 중 하나가 여성의 베일(히잡이나 부르카)의 착용 유무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프랑스에서 부르카가 관용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지제크는 말한다. 베일을 착용하는 이슬람 여성이 문화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부르카를 “자유로이 선택하는 주체”로서 착용할 경우, 그녀는 프랑스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여기서 관용된다는 것은 어느 한 사회의 기존 질서 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지배적 질서는 이른바 갑이고 받아들여지는 주체는 을이다. 이러한 의미의 관용에 의한 공존을 진정한 의미에서 공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제크는 관용의 논리 아래에 깔려있는 배제의 원리에 주목하는 대신, 개별 공동체의 사회적 관습이나 속성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은 그 자체가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방된 개인의 보편성을 보장해주는 게 서구 자유주의의 보루인 세속법인데 비해 특정한 공동체의 별난 믿음 체계를 배타적으로 보존해주는 것이 종교법인 만큼, 종교적 믿음 체계의 상위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세속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지제크의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새삼스런 논리가 아니다. 태생에 의한 신분상의 사슬을 끊어버린, 정치적으로 해방된 주권자로 구성된 국가는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프랑스 혁명 이후 서구 자유주의의 이념적 모토다.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 등, 인간의 정신과 몸을 둘러싼 제반 요소들로부터 탈구(disembedness)되어 “보편적인 시민”으로 재탄생된 인간의 모습이 자본과 권력 앞에 얼마나 왜소하고 비루해졌는지, 그런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닫혀가고 있는지는 이제 더 이상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지제크는 아직도 선형적인 역사발전의 환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시대착오적 진보주의자이자 유럽중심주의자일 뿐이다. 기업 중심의 지구화가 선전되고 그런 식의 지구화 체제를 제도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진지 한 세대가 흘렀지만 전지구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단일한 자유시장은 실패로 돌아갔음이 이미 자명하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적 국면에서 생각해보면, 지구화는 이론적인 담론이나 경제적 제도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구화는 문화와 인종이 교류하면서 이러한 교류가 정당하게 이루질 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정치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지제크처럼 급진좌파를 표방하는 철학자라면 이런 현실적인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한다. 이러한 현실 인식이 결여된 철학자의 논리가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도 이런 현실의 힘이 뒷받침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아미쉬에 대한 지제크의 논의를 살펴보자. 지제크는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내 아미쉬 자치구에 대해 언급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내심 서구에 열등의식을 갖는데 비해서 아미쉬들은 서구 자유주의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근본주의자들이라는 점이 지제크가 아미쉬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미쉬 근본주의를 지제크가 이토록 높이 평가하는 진정한 이유는 아미쉬가 추구하는 종교적 이념의 내용이나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비종교적이고 소비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분노하지도 않으며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무심히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18쪽)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봐야될 점이 한 가지 있다. 아미쉬 고유의 종교나 문화적 전통과 구성원들의 삶이 완전히 일체를 이루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지제크에게 이슬람 근본주의를 논할 때와는 달리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미쉬 공동체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현대식 미국식 생활 사이에서 한 가지를 택할 때 마치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 실험실에서의 선택처럼 자유로운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제크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아미쉬의 아이들이 부모의 전통적인 삶과 보통 미국인들의 현대적인 삶 중 어느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유일한 방법은 이들을 아미쉬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빼내서 미국식 아이로 만드는 것일 것이다.”(14쪽, 이 글의 논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원문에 더 가깝게 직역하였음)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미쉬의 아이들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이 소속된 공동체의 문화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이미 문화적으로 교육되고 학습된 상태에서 아미쉬의 아이들의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지제크의 불만이겠지만 그러한 불완전한 선택을 통해서 형성되는 아미쉬 근본주의 자체에 대해서 지제크는 어떤 불만이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를 대하는 지제크의 태도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 착용이 가족이나 남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감행된 선택이라면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영성적 태도의 표현이며 심지어는 서방세계에 만연한 성의 상품화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미쉬와 이슬람을 대하는 지제크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양자는 모두 종교적 근본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유독 이슬람의 경우에는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개인이 떨어져 나와야만 비로소 이슬람 문화는 보편적 성격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아미쉬 전통은 그 근본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넓게 보아 유럽적 전통에 속하는 데 비해서 이슬람 전통은 유럽의 관점에서 볼 때 문명의 타자에 지니지 않다는 유럽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니면 이런 지제크의 차별적인 태도를 설명하기 어렵다.
“선택은 항상 선택에 대한 선택이다. 다시 말해, 선택은 어떻게 선택할지 선택하는 것이다.”(43쪽) 지제크에 따르면, 이슬람에 대한 선택은 그 선택 방식이 종교적 신념이나 문화적 뿌리로부터 자신을 떼어낸 상태에서 개인적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방식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이어야 이슬람에 대한 선택이 보편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선택 양식이 과연 종교적, 문화적 다원주의 시대를 맞아 진정으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올바른 방식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지제크의 생각대로 이슬람과 서구 자유주의가 동일한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이슬람의 상징체계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키고 문화적 뿌리를 상실한 개인의 자유주의로의 투항 이외에는 없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장정일은 이슬람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슬람과 서방 세력 중 누가 더 약자고 누가 더 강자인지를 가려내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공존이다. 공존의 가치는 지제크나 장정일처럼 종교의 원리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작업을 통해서 구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신념체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양식이 훼손되지 않는 가운데 더불어 같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일찍이 청년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근대 국민국가에서 자유는 결국 사유재산에 대한 자유이고 평등은 그러한 자유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는, 지제크가 우려하는 것처럼, “충분히 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 즉 자본 축적의 지나친 자유로 인해 지나치게 강해진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자유주의든, 이슬람주의든, 아니면 사회주의든 강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지금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 중 거의 잊혀진 항목, 우애의 가치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실현시킬 것인가를 성찰해야 될 때이다.
우애는 데리다 생각처럼 각자의 영역에 울타리를 아예 없애버리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울타리를 없앤다는 것은 모두를 균질화시켜버리는 어떤 형태의 전체주의 체제를 상정하는 일임으로 그것은 온당한 우정 사업이라고 할 수 없다. 우애는 각자의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의 높이를 낮추고 겸허한 마음으로 서로의 다른 생각을 나누는 일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이자 문필가인 존 그레이는 이런 식으로 우정을 나누는 일을 서로 다른 삶의 양식(차이)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라고 이름 붙인 바 있다.
모두스 비벤디라는 개념은 상이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한다는 뜻이지만 단순히 다른 것들의 공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존의 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모두스 비벤디는 잠정협약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위에서 지제크는 근대문화와 가치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미국 내 아미쉬 부족의 삶을 근본주의의 전형으로 내세웠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아미쉬 부족의 삶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고립된 섬처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아미쉬 인들과 주류 아메리카 사회구성원들은 해마다 정치·사회적 교섭을 통해 둘의 문화와 가치를, 예컨대, 학교나 직장과 같은 공영역에서 서로 어떻게 어느 정도 서로의 것을 인정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아미쉬 부족의 문화와 가치를 둘러싼 이와 같은 예에서, 일찍이 토크빌이 관찰한 것처럼, 미국 민주주의 전통 내에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타운 미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밑으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의 흔적이야말로 다원주의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공멸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시급히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적 덕목일 것이다.
이러한 우애의 원리와 모두스 비벤디의 원칙을 실현시키려는 실험은 실제로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정치적으로 충돌하는 분규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 빛을 발한다. 그와 같은 정치 실험이, 예를 들자면, 다름 아닌 현재 이슬람권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쿠르드 족의 로자바 혁명이다. 여기서 로자바 혁명에 대해 길게 논의 할 여력은 없지만 간략하게 소개해보겠다. 시리아 북부 터키와의 국경 부근 로자바 지역에 거주하는 쿠르드 족은 2014년 초 수십개의 자치 단위인 칸톤으로 구성된 tev-dem(민주화를 위한 운동)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중앙 정부와는 다른 것으로 철저하게 밑으로부터의 상향식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느슨한 연대체와 같은 것이다. 자치 조직 구성원의 40%는 여성이 맡고 있으며,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수자들인 기독교인, 예지디, 투르크멘, 체첸, 아르메니아인 등이 다민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지난 1년간 IS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올해 초 완전한 승리를 이루어냈다. 쿠르드 족의 로자바 혁명은 남녀평등, 생태주의, 협동조합에 기초한 사회적 경제를 일구어 내고 있는 중이다.
이슬람에 대한 원리적 부정과 불관용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지제크나 장정일 같은 이들은 쿠르드 족의 위와 같은 우정과 공존의 자치체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맞이하여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로 서구 자유주의 체제의 최종적 승리를 선언한다. 그런데 그 자유주의 승리의 선언문에는 자유주의 체제의 온전한 작동 조건도 아울러 제시되어 있는데, 선언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조건이란 근대 국가 체제는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미완의 틈바구니에서 근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관습, 종교적 신념, 문화적 흔적 등이 잘 보존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비근대적 가치들의 존재가 미국의 자유와 평등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비동시적인 이질적 가치들의 공존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성공의 조건이라는 것이 후쿠야마의 진단이다. “자유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원리 원칙을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역사의 종말』, 334쪽) 지제크와 장정일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7, 2015년 7월, 이승렬, 영남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