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1-16 15:36
[짧은 서평] 투키디데스의 함정 속에 배제된 교훈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8,890  


도서정보
저자명 Graham Allison
저서명 Destined For War
출판사 Houghton Mifflin
연도(ISBN) 2017(978-0544935273)
[짧은 서평] 투키디데스의 함정 속에 배제된 교훈

곽준혁(중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1.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한국인들만큼 뼈저리게 경험한 경우도 드물다. 역사 속에 수없이 기록된 외세의 침략을 제처두더라도, 근대 한국인들이 경험한 식민지의 고통과 전쟁의 상처는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우리의 뇌리 깊이 각인시켰다. 그래서일까, 국제관계에서 힘이 갖는 의미를 투키디데스의 현실주의를 통해 조명하고 있는 그래햄 앨리슨(Graham Allison) 교수의 책이 우리나라 신문지상에서는 마치 혼돈 속의 동북아시아를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는 것 처럼 언급된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는 저자의 타이틀, 중국의 부상이 갖고 온 우려, 그리고 미국의 몰지각한 패권주의적 행보가 합쳐져서, 앨리슨의 책을 마치 계시록처럼 떠받드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2.
앨리슨의 상상력은 매우 간단하다. 투키디데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언급한 한 마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적용한다. 앨리슨식으로 풀어쓰면,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은 이전 패권국을 의심과 공포로 몰아넣고, 이러한 환경에서 두 강대국은 불필요하거나 예기치않은 전쟁상태로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Thucydides 1.23.4-6). 즉 아테네가 페르시아전쟁이후 강대국으로 등장하자,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부상이 가져올 상황에 대한 우려와 공포심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잘못된 판단들이 전쟁의 파국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앨리슨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과 미국의 대립을 비롯한 여러 상이한 경우들을 이와 같은 전제를 통해 동일시하고, 이후 최근 중국의 부상이 가져온 상황 속에서 미국이 정치문화적으로 다른 경로를 걷고 있는 중국에 대한 그릇된 이해들이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물론 앨리슨이 전제한 강대국들의 대립은 투키디데스의 역사가 전달하고 있는 주요한 교훈들 중 하나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단순히 이 전제를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앨리슨이 '안보'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때 사용하는 멜로스 회담(Melian Dialogue)이 대화체로 쓰여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일방적인 '힘'의 우위에 대한 역설만큼이나 멜로스의 도덕적 호소에도 동일한 비중을 두고 있다. 동시에 앨리슨이 제시한 거의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재단되거나 선택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말 자체가 어떻게 현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입장'을 전달하듯, 앨리슨의 이야기는 국제정치의 냉혹함이나 숙명만큼이나 스스로의 견해를 피력하기위한 선택적 오류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3. 
'순환론적 오류'(fallacy of circular reasoning)라는 말이 있다. 정치적 현실주의를 앞세운 역사서나 역사해설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논리적 오류들 중 하나다. 즉 논증되어야 할 명제를 논증의 근거로 삼는 오류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성경에 쓰여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이러한 순환론적 오류는 고전이나 역사서를 읽을 때에도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첫째는 고전을 읽으면서 자기가 믿거나 자기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바를 찾아내는 습관 속에서 나타난다. 니체(Nietzsche)가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에서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투키디데스와 마키아벨리로부터 영혼의 치료를 받았다고 묘사할 때, 그가 이 사상가들로부터 발견한 '진리' 또는 '현실'은 곧 그가 바라보는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니체는 이 사상가들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만났기보다 자기가 믿는 바를 확인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가 현실을 바라보는 바를 역사서에 투영하는 방식이다. 투키디데스는 헤겔이 말한 근원적 역사관도, 철학적 목적이 투영된 역사(Geschichte)도 관심이 없다. 그는 때로는 서술로, 때로는 대화체로, 때로는 연설로, 자기의 역사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스스로가 말하고자 한 바를 설득하고자하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대화체 속에 기술된 역사들은 그의 창작물이다. 여기에서는 일방적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과 정치가 충돌하고, 도덕적 요구와 현실적 생존이 모순되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된다. 멜로스 회담에서 도덕을 통해 아테네를 설득하고자 했던 멜로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힘을 통한 안보만을 앞세웠던 아테네도 결국 비극적 결말을 피할 수 없었다.  

4.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근대가 상실한 고대의 교훈을 여전히 담고 있다. 인간의 한계, 그리고 이러한 한계에 대한 성찰이 이끌어 내는 또 하나의 덕목인 '절제'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앨리슨의 책에는 이러한 '절제'는 없다. 힘에 대한 공포, 생존과 안전에 대한 본능적 호소가 가져올 균형만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잘못된 판단'이 기초할 인간적 오류에 대한 성찰, 그리고 이러한 성찰이 가져올 보다 근원적인 질문들은 외면당한다. '옳은 판단'은 정확한 현실감각에 기초한다는 또 다른 추상적인 요구만이 가득하다. 이런 요구를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순환론적 사고가 신념으로 등장할 때를 경계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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