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3-28 00:45
[이승범 서평] 사랑을 위한 과학 [revision]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40,577  
   http://사랑을 위한 과학 [15510]
   http://변연계 [15343]


도서정보
저자명 토머스 루이스, 패리 애미니, 리처
저서명 사랑을 위한 과학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연도(ISBN) 9788983710802

 

  

   <사랑을 위한 과학> 

               -  토머스 루이스, 패리 애미니, 리처드 래넌 (사이언스북스, 2001)



1. 들어가며

최근에 ‘사랑한다’는 언제 해봤는지 기억해 보자. 그때 어떤 말투를 사용했는가? “사랑해”라는 언어표현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첫사랑의 설렘을 전달할 수 있고, 일상적인 애정의 표현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귀찮음이나 빈정거림의 표현일 수도 있다. 특히 후자일수록 그 표명되는 말뜻과 말투의 간극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의 자명해 보이는 표현도 뉘앙스의 차이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닌다. 다행히 우리들 대부분은 그 뉘앙스를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뉘앙스 전달이 잘 안 되는 공간이 있다. 텍스트로만 주고받게 되는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채팅방에서다. 그곳에서는 감정의 색채가 결핍된 문장들로 인해 오해가 일어나기 쉽다. 혹자는 인터넷이나 네트워크 세계에서 다양한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것을, 경박한 행위의 일종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견해이다. 우리의 뇌는 텍스트 문자만으로는 뉘앙스와 섬세한 의미가 전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처하면 불편하고 불안해한다. 이모티콘의 유행은 그러한 텍스트 자체의 모호함이 주는 뇌의 불안에 응답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분히 생물학적인 요구가 밑바탕에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사랑해”라는 표현의 다의성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언어 중에 뉘앙스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감동을 주는 예술 작품에 대해, 과학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것을 그냥 단순한 허구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허구인 시시한 낙서와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 모종의 생물학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감동’이라고 칭해진다.

미학이라는 학문은 우리가 느낀 짜릿한 감동을 다시 논리에 기댄 명시적 언어로서 표현한다. 때때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언어로서 펼쳐주는 미학적 통찰은 우리에게 작품의 이해에 새로운 경지를 맛보게 해준다. 하지만, 작품이 이론적 언어로서 표현되어 규정이 되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이게 다가 아닌데...’라는 느낌이 피어난다. 그래서 미학의 곤경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뇌생리학의 곤경과 일치한다.

이론을 이해하는 논리적 뇌(신피질)와 감정의 뇌(변연계) 사이에는 해부학적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이어주는 일종의 신경학적 ‘다리’ 역할을 미학이 나서서 해주긴 하지만, 신피질의 방식인 논리적 언어로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속 시원히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학의 언어가 끝나는 마침표 뒤에는 다시 커다란 잔여가 남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만”하는가? 그런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자족적인 감상자에 만족하지 않고, 뭔가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들의 공통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다른 이름은 잘 알려진 바대로 ‘학문’이라고 부른다.

학문의 언어는 논리성과 일관성을 기본적으로 요청하고, 산만한 경험 속에서 공통된 어떤 것을 추상하여 그것으로 탑을 쌓는 과정이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보여지 듯 추상적 사유는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 또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잃어버린 무엇은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어떤 철학자에게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로, 어떤 심리학자에게는 ‘무의식’으로, 때로는 인간성이라든가 전체성이라든가 순수라든가 뭐 대략 그런 이름들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근대이후의 이성중심주의가 이루어놓은 성취에서 소외된 것들을 통칭한다.

이번 글에서 소개하려는 <사랑을 위한 과학>에서도, 잃어버린 그 무엇에 해당하는 것을 되찾고자 한다. 여기서의 그 무엇에 대한 명칭은 감정의 결정체인 ‘사랑’이다. 게다가 그것을 이성중심주의의 대표적 산물인 과학을 통해서 말하려고 한다. 만약에 정말 책 제목처럼 ‘사랑을 위한 과학’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닌가. 지성의 언어, 인과성의 언어로 포착할 수 없었던 인간성의 핵심을 말해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기껏해야 비유를 통해 묘사되거나, 철학적으로는 비-전체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었던 인간성의 신비를 객관성의 갈고리로 포획해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야심적인 시도이다.

이 책은 미국의 정신과 의사 3명의 공저로서, 그들 자신의 수십 년간의 임상경험과 더불어 7년간의 다방면에 걸친 추가적인 연구 작업을 통해 만든 책이다. 뇌과학 연구자들의 책은 많이 있지만, 독특한 접근법과 방법론을 쓰고 있다는 점과 섬세하고 구체적인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미덕이 있다고 하겠다. 물론 저자들이 생물학 계열 전공자이니 뇌과학적 접근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문학 선호자들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저자들은 인간을 뇌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생물학적 접근법과, 의미론적 층위에서만 접근하려는 심리학적 접근법 사이에서, 이 두 간극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실과 의미 사이에 흐르는 레테의 강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래서 과학자든 인문학자이든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상당히 흥미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2. 인간 심리에 대한 통섭적 태도

먼저 저자들의 독특한 접근법과 입장을 들여다보자.

인간심리에 대한 통상적인 주류적 이론에 의하면, 열정은 야만 시대의 찌꺼기이므로 지성이 감성을 지배하는 것이 문명의 승리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성숙은 감정의 억제와 동일한 것이 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수학이나 역사를 가르치듯이, 감정을 억제하는 기술을 가르친다.

그러나 진화의 역사에서 보면, 감정은 신경계의 새롭고 중요한 창조물이었지 거추장스러운 동물적 잔재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감정은 인간 경험의 중심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생명력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과학을 통한 인간 이해에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과학적 열정들은 비인간성과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오히려 통합적인 이해에 걸림돌이 되었다. 마음에 관한 모델이 사실에 기초하려 할수록 소외는 더욱 심해졌다. 행동주의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객관적 경험을 내세웠지만, 생각과 욕망을 삶의 주요 요소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핵심을 놓치고 말았다. 인지심리학은 지각과 행동을 연결시키기 위해 온갖 종류의 논리를 동원했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자아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진화심리학은 다윈주의의 연장선에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려 했지만, 우정, 친절, 종교, 예술, 음악, 시 등과 같이 외적으로 생존에 도움이 안 되는 삶의 특징들을 심리적 착각으로 비하했다(세련미를 더해가는 진화심리학 때문에, 여기서 요즘 독자들의 반론도 있겠으나 일단 그렇다고 치자, 이 책은 쓰여진지 20년이 넘은 책이다). 현대의 신경과학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구체적이며 풍성한 무엇인가를 빠뜨린 채 메마른 환원주의를 유포시켰다.

거대한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뇌과학은 여전히 애매한 암시적 지식들만 제시하고 있으며, 연구자들이 원하는 체계적인 객관적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서 경험주의적 주장은 척박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인상주의적 가설은 자유분방한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감정을 연구할 때는 과학적인 증거와 직관을 신중하게 조화시켜야만 가장 적절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공허한 환원주의와 허황된 미신이라는 두 개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증거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입증되지 않은 것들과 입증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우호적인 자세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입장이 저자들의 독특한 접근법을 형성하고 있다. 다소 과학적 엄밀성이 부족한 근거들, 하지만 개연성과 울림이 있는 근거들의 활용을 통해 공허한 기존의 경험주의적 주장을 보강하면서, (상대적으로) 풍성하게 인간 감정의 신비에 접근하고 있다.

방법적으로는 신경발달 이론, 진화 이론, 정신약리학, 신생아학, 실험심리학, 컴퓨터과학 등의 과학적 기초 원리들과 더불어 풍부한 임상사례와 예술적 통찰까지 이끌어 와서, 이질적 분야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사랑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뇌생리학(이론)과 구체적인 인간 경험(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을 포착하여 저자들 특유의 물감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통섭적 태도에도 저자들의 자리하고 있는 과학자적 특성이 묻어나고 있다. 감정이 복잡한 현상이긴 하지만 고유의 질서가 있으며, 분명 신경계의 구체적이고 유형화된 생리적 규칙에 따른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자식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 연애의 생물학적 실체, 진실한 상호 결합이 가지는 치유력 등을 규명하고자 한다.

3. 질적 특성이 다른 3개의 하부뇌

저자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기대고 있는 폴 맥클린 박사의 신경진화론적 견해를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는 우리의 뇌가 질적 특성이 다른 3개의 하부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하부뇌는 진화의 역사에서 각기 다른 시대의 산물이며 그 기능과 성질, 심지어는 각 신경세포의 화학작용까지 다르다고 한다.

파충류의 뇌: 최초의 뇌인 파충류의 뇌는 정교한 구근 모양으로 척수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생명 조절 중추들이 있는데, 호흡, 삼킴, 심박 작용을 자극하는 센터들과, 먹이

감을 낚아챌 때 이용하는 시각 추적 장치가 포함된다. 이곳에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나 소리에 대해 신속한 반응을 유도하는 놀람중추가 있다. 이러한 생리기능을 전담하는 파충류의 뇌가 죽으면 신체의 나머지 부분도 모두 죽는다. 다른 2개의 뇌는 생명유지를 위한 신경 활동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파충류의 뇌는 살아 있는 동안 심장박동을 유지하고, 호흡운동을 조절하며, 혈액 속의 수분과 전해질의 균형을 조절한다. 하지만 파충류의 뇌는 감정 활동 체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파충류에게는 감정이 없다. 파충류의 뇌는 공격과 구애, 짝짓기와 영토 방어 등의 기초적인 상호작용만을 허락한다.

변연계: 폴 브로카가 발견하고 이름 붙인 것으로서, 모든 포유동물의 뇌는 ‘변연계’라는 공통의 구조를 가진다. 뇌회(대뇌 표면의 주름)와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인류의 두 번째 뇌인 변연계는 첫 번째 뇌를 편안하게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고등학교 생물시간에는 신체구조를 기준으로 포유류와 파충류의 차이를 설명한다. 포유류에게는 비늘이 아닌 털이 자라고,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는 항온성이 있으며, 알이 아니라 새끼를 낳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폴 맥클린은 이러한 구분법이 뇌의 구조라는 중요한 기준을 간과한다고 지적했다. 포유동물이 파충류의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을 때에 그들의 두개골에는 변연계라는 새로운 신경구조가 최초로 개화했다. 이 신제품은 번식 방법 뿐 아니라 자식에 대한 양육 태도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알을 낳은 후에 분리와 무관심은 전형적인 파충류 부모의 태도로 남았고, 포유동물은 자식들과 복잡하고 섬세한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양육과 돌보기는 인간에게 너무 친숙해서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만, 이 능력은 진화의 역사에서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신피질 : 신피질은 마지막 뇌이고, 인간이 가진 3개의 뇌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오래전에 진화한 포유동물들은 하부뇌(파충류의 뇌와 변연계)를 덮고 있는 신피질이 매우 얇다. 신피질의 크기는 최근에 진화한 포유동물일수록 더 크다. 인간에 이르러 신피질은 엄청난 비율로 급상승했다. 말하기, 쓰기, 계획, 추론 등의 능력이 모두 신피질에서 이루어진다. 대개 인식이라고 알려진 감각적 경험과, 의지라고 알려진 운동 근육의 의식적 조절도 여기서 비롯된다.

인간 고유의 사고 능력은 신피질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다른 정신 활동들이 쉽게 망각된다. 실제로 인식은 대단히 분명한 현상이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내 존재는 생각이다’처럼 마치 신피질의 지성적 사고가 전부라는 오류를 낳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뇌가 수행하는 언어적 이성적 역할을 가장 많이 의식하기 때문에, 정신 활동의 모든 측면이 논증과 의지의 압력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게다가 우리사회는 버튼 하나로 반응하는 기계적 장치들에 너무 익숙해져서, 의지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있으면, 그것을 이상하거나 고장 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생각과 의지는 3개의 뇌중에 적어도 2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정신활동이 의지의 명령을 받지 않고 수행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원하도록, 어떤 사람을 사랑하도록, 실망스러운 일에도 만족하도록, 자신의 의지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은 교육이나 훈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의 관할구역이 신피질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이성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명령을 받을 수는 없다.

물론 사랑의 시작도 생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포크로 죽을 떠먹을 수 없듯이 지성의 발톱으로 사랑을 움켜잡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성의 질주에 항상 걸림돌이 되었던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의 해부학적으로 주된 장소는 변연계이며, 그것의 작동하는 양태를 살핌으로서 사랑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4. 감정 : 행동의 안내자이자 심리적 신호의 운반 도구

감정은, 표면적으로는 유쾌함, 갈망, 슬픔, 분노, 사랑 등 삶에 활기와 의미를 입혀준다. 즉 감정은 모든 행동의 뿌리이자 기원인 것이다. 우리는 매혹과 열정에 이끌려 필요한 사람이나 상황에 접근하는 반면, 두려움이나 수치, 혐오 등에 의해 멀어진다. 감정은 언제나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감정은 동기 제공과 더불어 더욱 근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바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에게 심리적 내용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감정은 심리적 신호를 운반하는 도구이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이라는 논문에서, 감정을 생물체가 진화하면서 환경에 적응한 결과 발생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발톱, 아가미, 날개 등과 같은 수많은 신체적 변형 기관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자연이 감정을 선택한 것은 다른 특징들을 선택한 것과 같은 이유, 즉 생존을 위해서였다. 다윈에 의하면 감정은 그 고유한 생물학적 유용성이 있는 것이다.

감정의 진화 체계는 파충류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전구물질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의 풍부한 뉘앙스 장치까지 이어진다. 두려움은 변연계에서 발생한 최초의 감정으로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파충류가 고안해 낸 장치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혐오감도 가지각색의 위험을 경고하는 기능을 한다.

진화의 나무에서 다음으로 출현한, 포유류의 변연계에서 비롯되는 감정들은 간단한 상호 작용을 교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분노 감정은 전투심을 고취시키고 상대방에게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질투는 번식의 기회를 빼앗기지 않도록 경계심을 불어놓는다. 경멸, 자존심, 수치, 모욕 등의 감정은 사회적 동물의 집단 내에서 서로의 지위에 관한 정보를 보다 정확히 교환하는 역할을 한다. 양육과 돌보기, 친밀감도 여기에 포함된다.

가장 늦게 형성된 인간 고유의 감정들은 신피질의 추상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수학 법칙이나 뉴턴의 중력 법칙 속에서 간결함의 미학을 인식하는 감정은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감정들은 신피질의 추상적 사고가 필요 없다. 임상에서 그동안 환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혼미한 상태에 쓰러져 있을 때 애완동물이 곁으로 다가와서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우리의 의학교육은 그러한 주장을 회의적으로 보도록 가르쳤다. 그렇게 조그마한 뇌를 가진 개나 고양이가 어떻게 인간의 감정의 이해하고 위로해 준단 말인가? 그러나 개와 고양이의 신피질은 원시적일지 몰라도 변연계는 상당히 성숙한 포유동물이다. 그들의 변연계는 인간과 같은 계통에 있기 때문에, 주인의 감정 상태를 읽고 반응할 줄 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일진이 좋지 않을 때 개가 슬픔을 감지하고 다가와 위로해 준다고 말할 때, 그것을 극단적인 의인화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간 어머니는 감정을 나타내는 신호들을 사용해서 아이에게 세계를 가르친다. 감정의 표현법은 선천적이기 때문에, 문화와 인종의 차이를 건너뛸 뿐 아니라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간극도 극복한다. 아기가 신피질의 언어를 습득하기까지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감정이라는 변연계 공통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비디오카메라 2개를 설치해서 어머니와 아기가 서로의 모습을 각자의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본다. 어머니와 아기는 실시간 화면으로 서로를 보면서 미소를 짓고 웃는다. 이때 두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아이에게 어머니의 얼굴을 실시간 화면이 아니라 녹화된 테이프를 보여주면 아이는 즉시 혼란을 일으킨다.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밝은 안색뿐 아니라 실시간의 동시성, 즉 서로 반응하면서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유아는 정서적 반응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변할 때에도 이를 감지한다. 유아가 걸음마를 시작하기 6개월 전에도 이러한 수준의 정교한 감지능력을 보인다. 박쥐에게는 음파탐지 시스템이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작은 벌레를 정확히 추적할 수 있듯이, 변연계도 물리적 세계의 한 부분을 감지하고 분석하기 위한 전문화된 신체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다른 포유동물의 내면 상태이다. 변연계는 포유동물의 사회적 감각 기관으로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포유동물의 내적 상태와 진의를 감지한다.


5. 내재 기억과 감정

결혼식장에 누가 왔었는지, 첫 애인의 쌍꺼풀이 있었는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외적 기억(explicit memory) 구조 덕분이다. 외적 기억은 뇌의 저장기관 중 더 공개적인 것으로서, 자서전적 기억들과 분리된 사실들, 외적인 사건 기억들을 부호화한다. 외적 기억은 신속하고 용량이 크지만 정확성은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외적 기억의 하드웨어는 뇌 측두부에 위치한 해마이다. 그래서 해마가 손상이 되면 외적 기억은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외적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도 학습능력이 잔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마가 손상된 후에도 특정한 기술을 배우는 학습이 가능한 것이다. 이를 통해 뇌에 숨겨진 두 번째 기억구조를 찾는 일이 진행되었다. 외적 기억은 자신의 의식에 반영되는 반면 내재 기억(implicit memory)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내재 기억은 우리의 인식에 포착되지 않는다.

키보드 자판을 안보고 타이핑하는 학습을 한 사람이라면 내재 기억이 무엇인지를 경험해 볼 수 있다. 당신이 영타를 칠 줄 안다고 할 때, 키보드 상에 ‘k’가 어디였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려 보자. 몇 번째 줄 어디쯤일까? 당신의 인식은 주저할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을 들어 가상의 타자를 친다고 생각해보고, ‘ask’라는 단어를 타이핑해보자. 왼쪽 손가락의 5번째, 4번째가 순서대로 움직인 뒤에, ‘k’자를 타이핑하기 위해 오른손의 3번째 손가락이 움직일 것이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체계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적인 경험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그 기초에 놓인 규칙들을 추출한다. 그러한 직관적 능력은 대단히 쉽게 발전하지만, 어떤 말로든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내재 기억은 보이지 않는 학습능력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퍼져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예를 들어 구어의 기초에는 음운론적 규칙과 문법적 규칙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데, 언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내재적 지식 덕분에 우리는 문장 구조들을 의식하지 않고 사용한다.

의식이라는 친숙하고 분명한 분석 장치의 이면에는 조용하고 어두우며 강력한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행동, 비합리적 확신, 육감 등이 우리의 삶을 복잡하고 눈부시게 만든다. 사랑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도 바로 이 어둠의 체계이다.

어떤 심리적 외상들은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만, 진정한 정서적 학습은 완만하고 은밀한 내재적 구조 속에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의식의 그물에는 걸리지 않는 사랑에 관한 직관적인 지식이 성립된다. 우리가 흔히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기억이 불분명해서라거나 어떤 억압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외적 기억과 내재 기억으로 되어있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이중적 구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제해결을 위해 지성에 의존한다. 따라서 타당한 이해를 획득한 후에도 그것이 감정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낭패를 겪는다. 추상화의 능력을 풍부하게 갖춘 신피질에게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해능력이 발생하기 이전에 진화한 신경계에게 그것은 그리 큰 중요성이 없다. 생각과 개념은 변연계와 파충류의 뇌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정서적 지식은 완강하게 내재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논리 속에서 구원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6. 심리치유의 방식

아이는 고통과 놀라움과 실망을 느끼지만, 그 감정들을 평가하지는 못한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 평범한 그 중간의 모든 경우에 대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전문가(어머니)의 해석에 맡긴다. 어머니의 두려움을 감지할 때 아이의 불안은 어머니의 불안과 비례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자신의 느낌과 어머니의 표현을 비교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세계에 대한 아이의 정서적 해독 능력은 어머니의 능력과 근접해 간다. 아이와의 공명에 서툰 어머니는 명쾌함을 전해주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의 부정확함은 정서적 세계를 정확히 해독하는 아이의 능력을 저하시킨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성인으로 성장한다.

방치된 아이나 학대받는 아동에게 건강한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 아동의 성년기는 과거를 답습하여 그에게 익숙해진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할까? 아니면 새로운 현실을 주조하여 정서적 마음의 자유를 얻을까?

마음의 주형과 유인자(특정 패턴의 정서)가 형성되는 시기가 지나도 정서적 학습은 계속되지만 그 속도는 떨어진다. 그 이후의 경험은 개성 발달에 미약한 영향을 끼친다. 뇌의 가소성이 사춘기 이후에 감소하기 때문이다. 또한 늦은 시기의 학습은 신경계 내에서 대단히 불리하다. 새로운 가르침들은 이미 각인된 행동양식들에 쉽게 압도당해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확립된 유인자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사실과 뉴런의 유연성이 갈수록 약해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서는 성년기에도 변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딱딱해진 성년기 신경계에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진정한 심리치유가 가능할까?

이러한 심리치유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아쉽게도 조급한 논쟁과 분파적인 반목으로 역사를 장식해 왔다. 20세기가 흐르는 동안 2개의 분파 중 하나인 ‘생물학적’ 그룹은 정신적 사건들이 뇌라는 물질적 세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신병리학은 그 물질성의 비정상성, 즉 잘못된 수용체나 유전자, 뇌 손상 등에서 출발한다. 이 학파는 약물치료, 전기 충격 요법 등을 선호한다. 다른 분파인 ‘심리학적’ 그룹에서는 정서적 혼란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행동양식에 영향을 끼치는 무형의 영토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진영에서 주장하는 치료법은 지나치게 다양하긴 하지만, 때때로 효과가 있다.

양측은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들을 쏟아 부으면서 저울추가 자기 쪽으로 기울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생물학적인 것과 심리학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빛을 입자와 파동으로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인간의 정서는 그러한 간편한 이원론을 초월한 곳에 존재한다. 생물학적 신체는 이 세계에 대한 개인의 경험을 생산하고, 경험은 다시 뉴런을 변경시켜 새로운 의식을 창조한다. 한 쌍의 맞물려 돌아가는 가닥 중에서 어느 한쪽에 지배권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그동안 두 접근법의 충돌이 발생했던 것은, 심리요법이 생리학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심리요법은 ‘인간관계와 관련된 신체의 상태’를 탐구하는 것이다. 포유동물은 변연계를 통해 서로의 신경계를 안정시키고 조절하는 기능을 얻었다. 심리요법의 치료효과는 이러한 포유류의 생리학적 기능을 끌어들임으로서 가능해 진다. 심리요법은 변연계의 작용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분야인 것이다.

1단계 변연계 공명: 한 개인의 정서적 유인자들은 변연계적 기질에서 방출되며 드러난다. 만약 치료자가 자신의 신피질의 수다를 잠재우고 변연계가 자유롭게 감지하도록 허락한다면, 상대의 여러 가지 멜로디들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치료자의 공명이 증가하면, 그는 환자가 자기의 세계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고, 그 속에서 사는 느낌이 어떤지를 감지하게 된다.

2단계 변연계 조절: 상처를 입고 균형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된 집단이나 모임, 애완동물, 배우자, 친구, 인터넷 등의 다양한 결연체를 통해 변연계를 조절한다. 그들 모두에게는 적어도 정서적 결합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뉴런 구조는 타인과의 관계를 삶의 핵심에 놓으며, 그 곳에서 관계는 우리의 삶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환자와 의사간의 변연계 연결을 통한 조절은 감정이 제어되지 않는 사람들을 안정시킨다. 사람들이 정서적 조절 방법을 배우는 방식은 숙달된 외부 조절자와 함께 교류하면서 그 기술을 습득하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학습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처럼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전달될 수 없다. 단지 학습자는 그것(정서조절 방법인 내재적 지식)을 자전거 타기처럼 자발적 능력으로만 습득할 수 있을 뿐이다.

심리요법에서 환자가 의사에게 의존하는 것을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보는 전통이 있다. 많은 의사들은 이런 경우 환자에게 해로운 의존성이 조성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의존하려는 환자에게 의사는 솔직하게, 의존욕구는 병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의사는 기본적인 치료방법의 중요성을 훼손한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주장한다(이는 매우 독특한 입장이다!). 환자에게 ‘스스로 치료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필요한 모든 것이 환자 본인에게 있으며 부족한 것은 지혜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변화는 신피질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연계의 유대와 애착을 통해서 조절이 되고 변화한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때로는 애착의 힘으로 조절이 불가능한 상태들도 있다. 심한 우울증 같은 기질을 치료하는 데에는 변연계 연결이 효과가 거의 없는 편이다. 애착으로서 치유가 불가능할 때에는 약물치료가 감정의 방향을 인도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시행된다면 그 연금술은 잃어버린 삶을 구원할 수 있다.

3단계 변연계 교정: 환자를 아는 것이 심리요법의 첫 번째 목표이다. 관계를 통한 심리요법에서든 정신약리학적 치료에서든 정서성을 조절하는 것은 두 번째이다. 심리요법의 마지막이자 가장 야심에 찬 목표는 정서적 삶을 지배하는 뉴런의 부호를 교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 속에는 정서적 지각을 좌우하고 사랑의 행동을 이끄는 강력한 유인자들이 있다. 심리요법 의사가 환자를 돕는다는 것은, 유인자의 변화 즉 뇌를 미시해부적 차원에서 변경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서적 영역에서는 사실과 증거에 근거한 설득이 소용이 없다. 심리요법은 우둔한 열정을 단정한 이성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변연계 연결의 통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다른 사람의 유인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변연계 결속으로부터 생성되는 교체와 수선의 장기적이고 반복적이며 성가신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심리요법의 핵심을 이해할 때, 수많은 심리치료 요법 분파들의 차이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프로이트 학파, 융 학파, 클라인 학파, 대인 관계 요법, 초월 요법, 인지심리학적 치료, 행동주의적 치료, 인지-행동주의적 치료, 신경언어 프로그램 등등. 갈수록 다양해지는 이 분파들의 원리들은 종종 적절한 심리치료의 방법에 대해 배타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이며, 심리요법의 다양한 규칙들이 변연계 소통을 가로막지 않는 한 크게 상관이 없다. 여러 분파들의 세부 규칙은 하찮은 신피질의 오락에 불과한 것이다.


7. 변연계 혼란의 시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포유류 뇌의 특성인 변연계야 말로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성중심적 접근법으로는 기껏해야 마음의 껍질이나 만지작거릴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변연계의 강력하고 압도적인 생리학적 특성을 이해해야, 포유류의 일종인 인간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강력한 변연계 원리에 대한 몰이해의 문화적 태도는 마약과의 전쟁에서 벌어지는 대책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약물중독의 유해성을 알리는 강연으로 (미국의) 십대들의 마약중독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을까? 그 목적은 가치가 있겠지만, 그러한 강연은 변연계가 아니라 대뇌 신피질을 겨냥한 것이므로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마약에 빠지는 10대들이 겪는 고통은, 논리적 설득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동기이다. 그것은 교육으로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 원인은 변연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고통과 충만감의 결여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주로 이슈가 되는 문제점에서, 저자들의 주장은 마치 ‘변연계 중심주의’라고 할 만한 대안들을 주장하고 있다. 가족이나 집단에 소속되어 무언가의 목표를 향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식의, 변연계 연대의 충동이 인간다움의 본질적 측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 온도변화에 의해 공룡이 멸종되었듯이, 인간 포유류를 둘러 싼 정서적 환경의 급변에 의해 인류가 몰락할 것이라고 염려한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정서적 공백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자들은 아이를 지나치게 조기에 독립적으로 키우려는 현대적 문화에 염려를 표한다. 아기 때부터 따로 재우기, 확장되는 보육시설, 높은 이혼율과 가족해체를 통해서 아이들이 변연계에 손상을 입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비단 아이들뿐만 아니라, 정서적 연대가 점차로 사라져가는 현대 사회는 변연계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이것은 불안과 우울증을 만연시키고 강력범죄 증가의 원인이 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이 상실한 공동체와의 깊고 지속적인 유대관계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변연계적 관점에서 꼭 필요한 생물학적 요소이며, 그것이 없으면 우리 모두는 혼돈의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들의 주장이 이쯤 되면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길 것 같다. 하지만 저자들은 정신과의사로서 기본적인 유대의 결여로 인해 병리적 상황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주로 경험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특유의 경험에서 비롯된 대안적 해법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저자들은 ‘모성과 가족주의’라는 손가락으로 변연계의 ‘정서적 충만감’이라는 달을 가리켰을 뿐이다. 목표하는 저 달을 가르키는 것이 진정 중요하다면, 그것이 꼭 손가락일 피요는 없다. 인간의 정서적 충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때로는 이웃의 할아버지일 수도 있고, 좋은 친구일 수도 있으며, LGBT 속에서의 누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변연계 중심적 관점은, 과학적 엄밀성을 다소 희생하긴 하지만 상당한 개연성을 통해 새로운 과학적 탐구의 장을 열어주는 것 같다. 우리가 현실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 ‘알고는 있지만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을 해내기 때문이다.

인간(포유류)의 감정이 마치 새의 날개나 박쥐의 초음파 탐지기처럼 특수하게 분화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과 (포유류) 애완동물간의 감정교환은 인간의 자의적인 생각의 투사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애완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그리고 화려한 고해상도 TV보다, 왜 사람들이 채팅이나 트위터 같은 쌍방향적 요소가 있는 매체에 더 몰입하게 되는지도 변연계적 관점에서는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이 리뷰에서 자세히 소개는 못했지만, 저자들은 변연계적 관점을 이용해 플라시보(위약)의 효과에 대한 전복적 해석을 한다. 더불어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대체의학이 여전히 횡행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의료인들의 마음을 뜨끔하게 할 정도로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인간의 욕망에 의한 일탈과 관련해서는 왜 이성적 교육이 효과가 없는지에 대한 근사한 설명력을 제시한 점도 훌륭하다.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다양한 심리치료 분파들의 이전투구에 대한 일갈도 심리치료 종사자들이 되새겨 들을만하다.


8. 맺으며

변연계 메커니즘을 억제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삶의 일반적 증상으로 굳어버린 여러 가지 고통들이 만연하고 있다는 저자들의 주장을 다시 검토해보자. 세칭 ‘아스팔트 위의 고독’이라고 말해지는 입자화된 현대인의 모습은, 유기적 공동체에서 이탈된 인간의 심리적 위기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굳이 게오르그 짐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이 현대인의 고독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다 알고 정서적 교류마저 빈번한 마을에 살다가 대도시로 이주한 개인들의 경험담에서, 대도시의 익명성이 주는 짜릿한 해방감의 발언들을 빈번하게 들을 수 있다. 어쩌면 ‘아스팔트 위의 고독’은, 현대인이 중요한 뭔가를 상실했다는 징표가 아니라 끈끈한 연대로 묶인 유기적 공동체의 숨 막힘 속에서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현대인은 자기만의 고유성, 주체가 숨 쉴 공간에서, 그 속에서의 뭔가를 바란다. 개성적인 나만의 성취를 원하는 것이다. 품위 있게 혼자살기의 요령을 설파하는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는 그것을 ‘흰 고독’(어둡지 않은 밝은 고독)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 상황 속에서도 사회적 관계를 통해 기본적인 변연계(감정)의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라고 말한다.

단지 타인과의 유대관계에만 매달리지 말고, 고유의 개인적 성취를 권한다. 개발된 나라 중에 혼자 사는 가구가 느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세계적 현상임을 보게 된다면, ‘고독의 증가’는 단순히 변연계의 황폐화를 통해 사회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5억년의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변연계는 생물학적 유연성으로 변화된 사회 속에서도 정서적 충만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섭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흰 고독을 통해 자유를 누리는 것이 변연계적 관점과 정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p.s.)

다시 백 보 양보해서, 저자들은 주장이 옳다고 치자. 우리 현대인은 공동체의 유대를 상실하면서 충만감의 결여 속에서 때로는 고독하고 때로는 우울하다. 자유주의적 68혁명의 후유증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는,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 떠난 엄마에 의해 방치된 자식들이 커나가는 과정의 병리적 상황을 날카롭게 묘사했다. 마지막 남은 방어막인 (핵)가족마저 파괴되어, 말 그대로 ‘소립자’화된 자식들의 황폐함과 불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자유주의적 경향성이 문제이고 그것이 인간을 곤경에 처하게 한 것이라면, 이전의 공동체적 연대의 회복으로서 우리는 희망찬 미래를 보증할 수 있을까?

삶의 모든 속성에는 그에 미덕에 뒤따르는 약점이 있다. 우엘벡은 자유주의 그늘을 날카롭게 잘 묘사했지만, 그 이전의 공동체적 유대가 개인성의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발생하는 자유와 개성이 말살되는 문제에는 무심했다.

하나의 빛나는 속성에는 그 그늘이 있기 마련이며, 또한 억압된 것은 끝내는 귀환하기 마련이다.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가 68의 ‘자유주의 혁명’이 억압했던 것의 회귀라면, 바로 그 68혁명은 유기적 공동체가 질식사 시켰던 것(자유와 개성)의 회귀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우리는 장점만 있는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이러한 곤경이냐 아니면 저러한 곤경이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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