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소속감은 더 이상 정치를 움직이지 못한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90년대 이후 20여년 간 학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해체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속감의 의미와 위상이다. 

민족주의, 애국심 등 한 때는 너무나 자명하고 윤리적이기까지 했던 소속집단에 대한 신념과 애정이 이제는 폭력적인 집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 여겨진다. 심지어는 애향심이나 애교심마저도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세상이다. 이는 무엇보다 개인의 욕망 추구가 그 어떤 가치에 우선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집단이라는 것이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정당한) 의심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는, 사랑이나 애착과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감정들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통제와 규율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보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주장에 우리가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정체성을 거부하고 소속감 없이 그 어느 집단에도 휘둘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아베의 역사 왜곡에 대한 뉴스나 힘없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을 대할 때, 장기를 팔기 위해 인신매매를 한다는 조선족에 대한 과장된 루머를 들을 때, 민족, 여성, 인종 등 집단 정체성에 대한 소속감 혹은 맹목적 애착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라는 집단정체성은 구성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 ‘우리’를 다시 상상하고 재정비하여 쓸모 있게 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사유와 실천을 해야 하는가?  

드니스 라일리의 “내가 그 이름인가?”는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세련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세련되었다”고 표현한 것은 부족하다거나 약하다는 것에 대한 유피미즘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우리인가?’ ‘내 이름은 나인가?’ 라는 낡았다면 낡은 질문에 대해 사변적이지도 않고 감상적이지도 않은 답을 하고 있다. 그녀의 책은 짧지만 논지가 분명하고 과격해보이지만 현실적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쿨한 답은 질문 자체를 새롭게 정비하는 효과도 일으키고 있다. 

라일리가 정체성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는 책의 제목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내가 그 이름인가?’ 라는 수사적 질문은 나와 나에게 주어진 이름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게다가 이 물음이 주는 여운은, 나와 내 이름이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둘이 화해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불안감이 담겨있다. 나는 분명 내 이름이 있기에 나로 존재할 수 있지만 내 이름이 항상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나에게 적대적일 수도 있다. 라일리가 보기에 이렇듯 나와 내 이름 간의 관계가 미묘하고도 불안한 이유는 정체성, 즉 이름이란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름은 역사 그 자체이다. 따라서 내 이름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나와 내 이름의 불편한 동거를 어떻게 살아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인 탐색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라일리만의 시각이라 할 수는 없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주의를 ‘상상된 공동체’라고 명명한 이후 정체성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구성주의적인 시각을 택해왔다. 푸코의 영향을 깊이 받은 연구자들은 ‘인종’이나 ‘지역’, ‘가족’ 등 다양한 정체성을 계보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체성을 바라보는 본질주의적, 기원 중심적 시각을 탈피하고자 하였으며 근대 이후 이들이 ‘상상되어 온’ 과정과 양상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흐름 중에서 라일리가 갖는 의미는 그녀가 작업하기로 선택한 정체성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민족, 인종, 지역 등 여타의 정체성과 달리 ‘여성’은 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여성성이라는 것 자체가 생물학적이고 신체적 고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어느 정도는 본질적이다는 생각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페미니즘부터가 이러한 여성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다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다름의 정치’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으로부터도 명백히 드러난다. 민족 혹은 인종의 순혈성, 고유성, 동질성이 ‘상상’되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성’이 상상되었다는 것은 분명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출산이라던가 수유 등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여성성’이란 분명히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에 라일리는 철저하게 구성주의적인 입장에서 ‘여성이란 없다’라고 단언한다. ‘여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구성체일 뿐이며 여성을 진정한 ‘여성’으로 만드는 고유하고 본질적인 여성성이란 허구라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여성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특성을 완벽히 체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일이다. 라일리는, 그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은 반드시 폐쇄공포증을 유발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보기에 ‘여성성’이란 말랑말랑한 것으로 주위의 환경에 따라 그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사회’, ‘신체’ 혹은 ‘시민권’ 등의 주요 개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역사적으로 구성되어왔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여성’이라는 현상은, 여성이라는 정체성 범주의 변화로 인한 역사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성성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여성의 몸조차 본질적이고 변치 않는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개념”이고 “효과”이며 “결과”일 뿐이다. 그 자체로 자명해보는 여성의 몸은 실제로 그것 자체로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획득하지 못하며 항상 주위에 존재하는 다른 개념들과 함께 읽을 때만 비로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무엇인가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이 자신의 몸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은 극히 때때로일 뿐이며 그 몸이 ‘여성의 몸’으로 인지되는 것은 특별한 종류의 시선 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성성의 ‘성’이 위치하는 장소는 역사적으로 늘 변해왔고, 그런 의미에서 ‘몸’이란 역사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여성’은 불안정한 범주이고 그것은 ‘여성’이 역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불안정한 범주로서의 ‘여성’이 과연 정치적 실천을 할 수 있는가이다. 라일리의 대답은 “할 수 있다”이다. 여성운동은 바로 이 ‘여성’의 불안정성 위에서, 발을 어디다 디뎌야 할지 몰라 늘 종종거리면서 정치적 사투를 벌여왔고, 그것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이다. 라일리에 따르면 오히려 여성운동의 역동성은 바로 이 불안정성에 있다. ‘여성’은 분명 여성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범주지만 동시에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을 방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성’과 여성운동의 관계는 이런 불화합과 삐걱거림, ‘내가 과연 저 이름인가?’라는 의구심에 기반해 있다. 

라일리가 여성운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은, 여성운동이 이런 삐걱거림을 못 견디고 자꾸 ‘여성’을 안정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라일리가 보기에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성’이 범주 경계 안에서 고정되고 동일한 실체로 재생산될수록 여성운동은 사회운동으로서의 힘을 오히려 잃는다.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가 ‘여성’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는 사투의 역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에 대한 고착화는 결국 ‘인간’에 대한 고착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여성’과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운동의 어젠다를 결코 폄하할 수는 없지만, ‘여성’, 혹은 ‘인간’이라는 범주(화)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없이 이 둘의 등치를 전제하는 순간, ‘여성’은 ‘인간’이라는 범주가 함의하는 (문제적) 보편성 안에 손쉽게 포섭되어 버린다. 즉, ‘인간’이 서구 근대의 계몽주의적 이상, 즉 ‘유럽-남성-부르주아-시민’이라는 특정 범주를 모델로 하여 구성된 지엽적이고 특수한 개념임을 적시하면서 이 지엽적인 개념의 보편화 과정을 역사화하려는 과정을 생략한 채 ‘여성’이 ‘인간’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당위만을 강조한다면, 여성운동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범주가 갖는 보편성, 당위성을 강화, 유포하고 그것을 스스로 내면화하게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으로서 담보해야 하는 저항적 지향점과 에너지는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운동이 ‘여성’을 강조하고 그에 과도한 무게를 싣다 보면 궁극적으로 그 정치적 예리함을 상실할 뿐 아니라 가장 반동적인 덫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라일리는 따라서 여성운동이 ‘여성’과의 삐걱거리는 동거를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라일리의 작업과 문제제기는 오늘날 여성운동의 글로벌화와 그에 수반하는 보수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운동은 여타의 사회운동 중 가장 적극적으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지구적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있으며 ‘여성’이라는 지점에서 다양한 문화와 계급, 인종들 간의 만남과 교류가 성사되어왔고 정치적 행동들이 실제로 실천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런 교류와 정치적 행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국민국가, 근대, 그리고 글로벌 자본의 규범적 질서와 위계를 가장 안정적으로 내면화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운동의 글로벌화는, 위계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이라기보다는 아주 순화된 형태의 ‘사회봉사(social service)’에 더 가깝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면도 있다. 

최근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여성’이라는 고착화된 범주에 대해 점점 불만이 많아지고 있다. 많은 이론가와 활동가들이 ‘여성’ 범주의 정치적 효용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여성운동의 정치성 자체를 재고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여성’이라는 것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며 본질적이거나 자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중산층’, ‘섭얼턴’, ‘아시안’, ‘하바드 졸업생’ 등의 여러 가지 다양한 정체성들처럼 상황에 따라 한동안 걸쳤다가 다시 또 벗을 수 있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정체성과 함께 겹쳐서 입곤 하기도 한다. 때때로 ‘여성’과 ‘섭얼턴’은 전혀 겹쳐지지 않기도 하는데, 이 둘의 불일치, 어긋남은 여성운동의 정체성 정치에 균열을 내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여성’과 ‘섭얼턴’ 사이의 이런 어긋남이야말로 때로는 여성운동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많은 활동가들이 실제로 엘리트 계층으로, 엘리트로서의 특권, 즉 고급교육과 기술, 언어 능력 등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여성운동을 지구적 차원에서 조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운동과 사회적 저항, 정체성 정치 간의 관계는 존 스캇의 저서 제목처럼 “역설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운동이 진정으로 저항적이고 민주적인 프로젝트로 거듭 나기 위해서는, 즉 특정집단에 대한 충성도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정말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회운동으로 재정립되기 위해서는, 라일리의 주장대로 이런 ‘역설’을 수용하고 정치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균열되어야 하며 적어도 ‘여성’을 최소한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라일리의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정체성의 고착화가 권력체제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권력에 대한 저항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수행되고 있다면, 사회운동은 보편적인 주체나 정체성 범주에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새롭게 상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6, 2015년 6월, 박선주, 인하대 영어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