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여러 사람들과, 까다로운 철학책을 같이 읽고 그것을 평하게 되면, 그 중 몇몇은 그 난해한 철학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터트린다. 왜 철학자들은 자기들만의 외계어를 구사하는가? 왜 철학이 이토록 어려워야 하는가? 이따위 방식으로 대체 무슨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쉽게 전달하려고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는가? 등등. 마치 매너 없이 구는 친구를 힐난 하듯이 맘 편히 비난한다.
하지만 그렇게 불평하던 사람들도 비슷하게 난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과학책, 특히 물리학이나 수학 등을 소개하는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게 되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정합적인 논리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 과학과 철학이 비슷하지만, 고도의 과학 이론 앞에서 불평꾼들은 자취를 감춘다. 적어도 그 이론의 어려움에 대한 불평은 하지 않으며, 분노를 표명하는 경우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무지한 자신을 속으로 탓하는 경우는 있어도 말이다. 아마 과학이 요즘시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권위와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포스트모던 어쩌구의 상대주의적 담론의 횡행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최후의 담지자로서 기능하는 것 같다. 최종 심판자로서 신의 자리를 대행하는 것인 냥 말이다. 그러나 권위를 인정받고 대다수에게 칭송받는 과학의 전형적 모습에 대한 반론 또한 여전히 그치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과학의 높다란 성취만큼이나 기다랗고 어두운 그림자처럼 과학의 옆에 이질적으로 따라 붙어 다닌다.
이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은 이러하다. 서구 세계는 17, 18세기에 근대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다. 이 과학은 뉴턴 역학을 근간으로 하며, 이는 이전의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전통적인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과학에 기초를 둔 세계관을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과학적 유물론’의 세계관은, 실체화된 ‘물질’을 세계의 궁극적 요소로 전제하고, 세계의 존재 방식은 그러한 물질이 공간과 시간 속에 배치되어 운동하는 있는 것이라고 보는 사고의 습관을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세계의 상태를 정의하고, 탐구의 목표를 물질과 그 구조와 그들 간의 상호 관계를 지배하는 운동 법칙에만 국한시키며, 그 밖의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근대과학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으로는 물질의 차원에서 세계의 부분적인 구조나 그 세부를 기술할 수는 있어도, ‘세계와 경험의 전모’를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과학적 유물론에 대한 극적인 반대의 이미지는 낭만주의 시인인 워즈워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특징적 사상은 “우리는 분석하기 위해 죽인다”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과학이 추상 관념에 몰두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으며, 그의 일관된 논지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자연의 중요한 사실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워즈워스의 주제는 전체상에서 바라본 자연이다. 그는 제한된 좁은 영역에만 적용되는 과학적 분석으로 왜곡되고 마는 것들, 즉 상실된 ‘전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이러한 낭만주의가 제기하는 ‘전체성의 파악’이라는 문제의식은 이후 ‘인문학’의 이름으로 때로는 (좁은 의미의) ‘철학’의 이름으로 표현될 것이다. 낭만주의, 인문학, 철학 등의 단어들은, 유사어로 섞어 쓰기엔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쓰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표현 하려는가’이다)
이런 낭만주의적 시도들의 철학적 버전은 앙리 베르그송에서 더 세련된 형태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시간을 도외시하고 공간에 치중하는 전통 형이상학의 실재론을 공격하면서 시간을 철학의 중심 과제로 올려놓았다. 그에게 시간은 동질적이고 무기적인 지속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반복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이질적이고 유기적인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베르그송은 ‘순수 지속’이라고 칭한다. 그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체적 실재인 것이며, 이것을 파악하는 것은 분석적 사유가 아니라 직관이라는 것이다. 무시간적이며 변화하지 않는 정적인 것(공간적인 것)이 실재가 아니라, 순수 지속 속에서의 변화와 약동이야 말로 진정한 실재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철학과 과학을 결합시켰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그 논지의 결론적 핵심이 딛고 있는 땅은 어디까지나 과학과 대조되는 차원에서의 (좁은 의미의) ‘철학’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반철학적이며 낭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베르그송의 노력이 과학과 철학을 제대로 결합시켰는지는 의문이며, 단지 과학과 철학 간의 간극을 시적으로 봉합한 시도라고 말하고 싶다.
과학과 낭만주의(혹은 전체성의 인식을 지향하는 ‘인문학’)의 대결과 얽힘은 뿌리가 깊다. 마치 철저하게 의식적이고 이성적이기 위해 노력할수록 짙게 삼투하는 무의식처럼, 그 둘은 인간의 생래적이며 근원적인 욕구로서 서로 깊게 엉켜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베르그송은 그 둘 간의 관계를 시인의 방식으로 봉합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나타나는 화이트헤드의 과학철학은 베르그송의 해법보다 더 나은 통찰과 지적 성취를 보이고 있을까? 영국의 문예 비평가 허버트 리드는 이 책을 가리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래 과학과 철학을 결합시킨 부분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책이다”라고 평했다고 하며, 듀이는 “철학에 대한 혁명적 공헌”이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허나 찬사는 수사일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통찰이 과연 해묵은 과학과 인문학 진영 간의 오래된 갈등을 가로지르는 훌륭한 다리가 될지 여부를 고찰하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라고 하겠다.
화이트헤드는 인생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수학자로 살았다. 그리고 말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을 가르치면서, 최초의 철학적 저작인 <과학과 근대세계>를 63세가 되는 1925년에 저술했다. 그는 수학자였지만 고전에도 정통하였고, 새로운 현대 물리학의 의미를 잘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철학을 오랫동안 깊이 연구해 왔다고 한다. 과학적 성취의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다, 철학적 깊이가 더해져 그의 책은 곳곳에선 깊이 있는 통찰이 보석처럼 박혀있다고 하겠다. 또한 책의 여기저기서 묻어나는 이 따스한 대가의 아름다운 지적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다. 우선이 저자의 이 텍스트 속에서 그의 인상적인 주장들을 몇 가지 요약해보고, 이어서 핵심 주장을 고찰하면서 그것의 타당성을 따져 보기로 하자.
1) 과학의 가능조건 : 스콜라적 전통과 비합리주의
화이트헤드는 (주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과학사와 사상사를 그려내면서, 근대 과학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탐색한다. 그 탐색 속에서, 근대 과학이 담지하고 있는 사상의 계보학적 특성을 밝혀내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근대 과학의 기본적인 정신이 일반 원리로 환원시킬 수 없는 엄연한 사실들과 그 관계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이라고 말한다. 근대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경험주의적인 정신적 태도가 강력한 힘을 내뿜고 있었고, 그리하여 광범위하게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의 기본적인 정신도, 사물의 질서나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 확신이 없었다면 과학은 존립이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본능적 신념은 어디서 어떻게 기원하게 된 것일까?
화이트헤드의 그에 대한 답변은, 수세기 동안의 스콜라의 전통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콜라의 논리와 신학에 의해서 명확하고 엄밀하게 사고하는 습관이 유럽인의 정신에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찾고 그것을 발견했을 때 끈질기게 그것에 주목하는 습관은 스콜라철학이 역사적으로 배척된 후에도 존속되었다. 중세기를 지나 근대에 이르러서, 그러한 습관은 ‘자연의 질서가 있다’는 본능적 신념의 밑바탕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가 자신에 앞서 있는 사건들과 일정한 방식으로 명확하게 연관되어 일반원리를 드러낸다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신념. 이러한 중세적 유산이 없었다면 과학자들의 노력과 성취가 존재할 수 있는 토대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본능적인 확신이야말로 과학적 탐구의 원동력인 것이며, 암흑기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중세기가 남긴 (과학을 위한) 고마운 유산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언뜻 우리의 통상적 상식과 잘 맞지는 않는다. 중세의 신학적 전통과 근대적 과학의 관계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암흑에서 계몽으로, 무지에서 지혜로’라는 정반대인 상극의 이미지인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사상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고찰을 통해 단순한 이분법적 관계가 아닌, 그 둘 간의 미묘한 계보를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의 시작이 반합리주의였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반합리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보편성과의 연관이나 형이상학과의 연관을 포기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철학을 거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콜라적 유산으로서 자연의 질서에 대한 본능적인 신념에다가, 과학 특유의 반합리주의가 더해져 근대과학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반합리주의는 ‘원리에로 환원시킬 수 없는 엄연한 사실과 그 관계’에만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말한다.
과학을 반합리주의라고 칭한다면,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합리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분적이며 국소적 경험법칙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우주의 전체성과 관련된 보편원리와의 연관성을 가진 것을 뜻한다. 이 텍스트의 맥락에서는 ‘신학적 이성에 의한 합리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처럼 합리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보면 한 가지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중세기의 스콜라적 합리성과 자연과학적 합리성은 구분이 되는 개념이며, 현재 우리가 통상적으로 ‘합리성’이라는 어휘를 쓸 때의 의미는 물론 후자인 자연과학적 합리성을 지칭한다.
‘합리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독특한 어법이 역사적으로 타당한 단어 사용법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다음과 같은 표현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조건은 바로 중세기의 스콜라적 전통과 비합리주의의 결합이라고. 물론 여기에 수학적 전통을 저자는 추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주의의 일종인 스콜라적 합리성은, 왜 자연과학적 합리성만큼 성공적이지 못했을까? 이에 대해 어떤 식의 이해가 가능할까? 화이트헤드는 중세기 합리주의의 이상이 실패한 이유는, 이성적 추론의 방법이 추상적인 것에 포함된 ‘제한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정한 합리주의란 영감에서 시작되어도 구체적인 것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중세기는 자족하는 합리주의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반 개념이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의 한계가 설정되어야 하고, ‘직접적 계기’(immediate occasion)라는 최소한의 구체적인 개인의 판단 작용을 요청한다는 주장과 공명한다. (‘직접적 계기’에 대한 보다 상세한 언급은 뒤에 나온다)
2) 경험론 속의 형이상학
주어진 표본들로부터 공통성이나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귀납법이며, 이는 경험론의 전형적인 방법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데이터에서 일반적 이론을 이끌어 내는 현실적 과정은 잘 살펴보면, 이 과정이 베이컨의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이컨은 사례들을 수집할 때 충분히 주의만 기울인다면 일반 법칙은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과학적 이론이 성립되는 절차에 대한 설명으로는 상당히 불충분한 것이다.
인간이 인지를 하는 과정 중에, 표본에서 일반적 특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직접적 계기’를 매개로하는 이성(형이상학)적 작업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귀납법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된다. 무수한 표본들의 나열만으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아낼 수 없다. 제공되는 데이터 덩어리 속에 ‘무언가 법칙이 있다’고 느끼는 개인적 가치적 판단(결단)의 매개가 있어야 어떤 이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 계기를 물리적 대상의 배치 구조가 변화하는 중에 있는 단순한 추상적 계기로만 이해한다면, 이것은 불충분한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표본을 경험하는 가운데서 직접적 계기가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게 되면, 그 계기의 본질 속에는 단순한 추상적 계기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직접적 계기란 형이상학적 가치설정의 도약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귀납법은 형이상학의 전제를 요청하고, 이것이 바로 귀납법 속의 형이상학인 것이다.
3) 전문가주의에 필요한 예술
과학 및 여러 학문이 발전하고 세분화되면서, 전공 영역 내의 지식인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시스템이 새로운 현상으로서 나타났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이 19세기에 일어난 독특한 현상임을 지적하고 있다. 지식의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이 나타났다고 한다.
전문가에게 지식이란 전문적 지식이며, 이것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정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현시대에서 지식의 전문화는 지적 영역에 관해서는 역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공분야라는 틀은 폭넓은 정신적 산책에 저해 요소로 작용하여, 틀 안에서 주의를 끌지 않는 것을 상실해 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충분한 틀이라는 것은 없다. 전문가주의의 문제는 진지한 사색이 오직 고정된 틀 속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화에 의해 사회의 여러 분야는 훌륭하게 기능하고 진보해 가지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은 그렇지 못하게 된다. 19세기에 여러 발전이 전문가주의를 촉진시킴에 따라 지식은 늘어났지만 균형 잡힌 지혜는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까운 장래에 가장 요청되는 것은 지적 전문화의 손상 없이 균형 잡힌 지혜를 갖추도록 하는 일이 된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사실들을, 가치들의 상호 작용 가운데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습관을 강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요청되는 교육의 무게중심은, 총체적 환경에서의 직관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의 일반적인 목표는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는 일이다. 예술적 감성의 계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예술은 포괄적인 의미의 것이며 통상적인 의미의 장르 예술과는 구분된다.
예술이란 생생한 가치를 향유하는 습관이며 세계를 전체상에서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은, 생생한 가치들을 영혼에 제공해 준다. 인간은 마음을 빼앗는 그 무엇, 일상적인 틀 밖에 있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에 의한 추상적인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삶을 세분할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위대한 예술은 일시적인 기분 전환 이상의 것이 된다.
4) 과학적 유물론과 ‘단순 정위’ 개념
이제 이 저서의 핵심 주제로 들어가 보자. 바로 화이트헤드의 근대 과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그는 근대 과학의 밑바탕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암묵적인 철학적 전제(단순 정위 개념)를 추려낸다. 그 철학적 전제는 근대 과학의 탁월한 성취를 가능하게 했지만, 현재(20세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수많은 한계와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한계와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더 포괄적인 새로운 시대의 철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철학의 이름은 유기체론이다.
먼저 화이트헤드가 제시하는 지난 3세기(17~19세기) 동안의 과학의 세계관에 대해 알아보자. 지난 3세기 동안은 하나의 과학적 우주론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우주론은,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단순한 물질 또는 물질적 요소를 궁극적인 존재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한 물질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목적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외적인 관계에 의해서 부과된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가정에 기초를 둔 사상을 ‘과학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이 도식은 한정된 범위에서 위력적인 힘을 발휘했던 까닭에 방법론으로서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관념들이 성공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그러한 관념들의 합리성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것에 반기를 들게 되었고, 이러한 반항은 결국 과학에서 철학의 역할을 추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근대 과학의 탄생 조건은 비합리주의다’라는 테제를 상기하자).
과학적 유물론은, 물질의 구체적 존재 형식을 표현하는 개념 속에 구현되고 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단순 정위(simple location, 단순히 위치를 점거함)를 말한다. 단순 정위란, 물질이 다른 여러 존재에 상관없이 단순히 그러한 위치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 존재에 대해서나 다른 여러 영역에 관련시켜서 설명될 필요가 없다고 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런 개념에서 물질적 존재란 그 자체로 독립적이며, 개체적이고, 비연관적이며, 불변하는 비시간적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단순 정위’ 개념에서 17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기계론적 자연관’의 특성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학적 유물론의 문제점은 현재(20세기)의 우리가 분석해야 할 구체적인 여러 사실들을 처리하기에 너무 협소한 개념이라고 화이트헤드는 판단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에 대해서도 그러하지만, 생물학에서 특히 더 절박한 문제가 된다. 아마도 이런 지적이 가능한 것은 단순 정위 개념으로는, 생명체의 진화와 약동이나 인간의 지능 등을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하는 것 같다.
5) 유기체론의 의미와 문제점
20세기에 이르러 근대적인 ‘과학적 유물론’의 한계와 위기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우주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텍스트에서는 우주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존재론을 정초하는 있다). 바로 유기체론이다.
이 관점에서는, 공간의 부분 체적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전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그 주변 환경에서 떼어 낼 경우, 그것들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모든 체적들 하나하나는 공간 내의 다른 모든 체적들을 자신 속에 반영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시간에서도 이와 유사한 고찰이 가능하다. 시간의 각 지속 역시 다른 모든 지속들을 자신 속에 반영하고 있다. ‘단순 정위’ 개념에서의 사물의 존재방식과는 다르게, 이 관점에서는 사물을 각각 따로 생각할 수 없고, 전체의 관계성과 맥락 속에서 그 사실의 근원적 특성들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유기체론에서는, 자연은 발전하는 여러 과정의 조직체가 되며, 실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은 논리적인 식별이 가능한 것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존속하는 존재는 유기체이다. (논리적 식별 너머에 있는) ‘전체성’은 유기체들의 특성에 스며있다. 그래서 그의 유기체론은 과학적 유물론이 놓치는 전체성까지 포괄하는 것이 된다.
전체성까지 담아내려고 하는 그의 유기체론의 철학적 의도는 수긍할 만하다. 그리고 그 시도는 현실에서 과학적 유물론의 테두리 밖에 있는 미지의 진리에 대한 열린 태도로서 유의미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기체론을 정초하고 나서, 그 이론이 생물학이나 진화론에서 과학적 유물론보다 더 타당한 철학이라는 논리를 구사할 때, 화이트헤드는 반복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엉터리 예시로서, 그의 논거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분자 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당시의 지적 한계라고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진화론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서도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유기체론의 설득력을 강화시키고자 예증을 하면서, 당시 생물학에 대한 (지적으로 불분명한) 통념을 근거로 제시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생명체 내부에 들어 있는 전자는 신체가 갖는 계획 때문에 생명체 외부에 있는 전자와 다르다. 전자는 신체의 내외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린다. 그러나 신체 속에서는 그 속에서 그것이 갖게 되는 특성에 따라 달린다. 즉 신체의 일반적 계획에 따라 달리는 것이다.’ ‘유물론 철학의 출발점인 원초적 소재 즉 물질은 곧 진화할 수 없다. 이 물질은 본질적으로 궁극적인 실체인 것이다. 유물론에 따를 때, 진화란 물질의 각 부분 사이의 외적 관계의 변화를 기술하기 위한 또 하나의 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외적 관계들의 한 집합은 외적 관계들의 다른 모든 집합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진화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목적도 진보도 없는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 진화론의 주안점은 복잡한 유기체가 그에 선행하는 보다 덜 복잡한 유기체의 상태로부터 진화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진화론은, 유기체를 자연 성립의 기초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한다.’
‘생물체 내의 분자가, 무기물 속에 놓여 있을 때에는 관찰되지 않는 어떤 성질을 띠는지 묻는 것이다. 생물체의 민활한 자기 보존 작용이나 우리 신체의 물리적 작용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전체 패턴의 영향으로 신체 내의 분자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암암리에 보여준다.’
아마 위와 같은 실수들은 그와 철학적 색채가 유사했던 베르그송이 생기론을 주장하면서 가졌던 태도와 일치한다. 생명체의 진화와 약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태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론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철학처럼 보이다.
그렇다면 왜 화이트헤드는 다소 무리하게 유기체 철학을 주장했을까? 추상적인 철학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직접적 계기’에 해당하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다행히 그의 저서에서, 그가 유기체론을 통해 추구하고 싶었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과학적 유물론이 전제하는 철학이 고정된 환경에서의 생존 경쟁이라는 측면에만 주목하도록 하여서, 사물들 간이나 사물과 환경과의 상호 관련성을 무시하여 인류의 양심에 유감스런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있다. 지난 세기를 통해서 사물의 그러한 측면에만 주의를 집중시켰던 결과 19세기의 표어는 생존 경쟁, 우승열패, 계급투쟁, 국가 간의 무역 경쟁, 전쟁 등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이고 인류사적 문제의식에 의해, 존재의 상호관련성을 전제로 하는 유기체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유물론에서 유기체론으로의 세계관의 전환은, 화이트헤드에게는 적대와 증오의 시대에서 상부상조하는 협력적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윤리적 요구와 일치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과연 지난 세기의 철학적 관점이 폭력을 유발시키거나 조장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대개 폭력의 필연적 이유가 이미 있고, 단지 ‘철학’은 그런 세계사의 역동 속에서 명분으로서의 수사적 역할에 그치기 마련인 것이다)
맺으며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론’이라는 형이상학 체계는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을까? 특히나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특수 과학이 눈부시고 전문화된 성취를 보이는 요즈음 세상에서, 철학자가 개별 분야의 과학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그러한 특수 과학 분야를 자신의 체계 속에 포괄하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떠안게 된다.
어떤 평자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론이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등의 새로운 물리학적 개념이나 생물학의 새로운 식견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동의하게 어려운 주장이다. 화이트헤드의 의도는 그러했겠으나 그 결과까지 그러한지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에서 화이트헤드는 철학자로서,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개념의 건축물을 구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제시하는 개념은,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거나, 기발한 절단들을 행하면서 우리들 위를 비상하는 어떤 사건적인 통찰을 가져다주는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유기체론이 과학의 내재적 균열에 대한 지적으로는 타당할 것이지만, 그 균열을 메우는 총체적 방식으로서의 철학은 과학을 방해할 위험성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이 임시적 가설들의 잡다한 집합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철학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기초들을 철저히 비판해 나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잡다함이 허용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합리적인 철학을 부재 시켰기 때문에,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적 검열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과학하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과학적 탐구를 대상으로, 그것을 포괄하면서 철학적 작업을 하는 것은 까다롭고, 실패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잡다한 채로 이루어지는 과학 탐구의 현상을 놔두는 것이, 과학이 지속적으로 밝혀내려고 하는 이 이질적 세계의 실재성에 더 적합한 방법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끝으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작업을 비유적으로나마 비교해보자. 화이트헤드는 동시대인인 베르그송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베르그송이 시간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이유로 ‘단순 정위’ 개념을 비판할 때에, 화이트헤드는 그 비판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성을 배제하는 공간화가 지성 자체의 한계와 해악이라고 베르그송이 주장할 때, 화이트헤드는 그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화이트헤드는 지성 자체에 근원적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며, 예술적 감수성의 보완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생기론에 대해서는, 그 생기론이 본질적인 이원론을 내포하는듯한 가정이라고 하여, 화이트헤드는 거부감을 보인다. 생기론이 전제하는 생물체와 비생물체의 경계가 그리 명백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에 비해, 지성에 대한 신뢰와 (불분명한 근거를 갖는) 생기론의 이원론적 전제에 대해 배척하는 등의 차이점을 보인다. 마치 시인보다는 과학자적인 태도에 가까운 모습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의 정도는 딱 반 발자국만큼 옆으로 이동한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과학과 인문학의 간극에 대해, 베르그송이 시인적 태도로 봉합하고 있다고 서두에서 말하였지만, 화이트헤드는 별반 다르지 않는 내용(‘유기체론’)을 과학자의 사투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7, 2015년 7월, 이승범, 가정의학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