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9-07 02:23
[이승범 서평] 면역에 관하여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34,436  


도서정보
저자명 율라 비스
저서명 면역에 관하여
출판사 열린책들
연도(ISBN) 2016(9788932918105)

[이승범 서평] 면역에 관하여


1. 들어가며

예방접종을 둘러 싼 사회적 찬반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왜 아직도 이러고들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한심하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보이는 것이다. 예방접종의 손익에 대한 너무나도 명백한 논문들이 산처럼 쌓여있지 않은가. 과거 역사를 보면, 그 무섭고 치명적이었던 전염성 질환들을 예방접종으로 통제한 것은 지난 세기 의학의 대단한 업적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과거의 성과를 까맣게 잊고, 예방접종의 위험성에 침소봉대 하는가 말이다 등등.

이런 식의 개탄은 대다수의 의료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성보다는 그럴듯한 직관에 호소하는 일련의 백신 회의론자들이 왜 21세기에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는 것일까? 왜 당연한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하고 자기 고집을 유지할까?

하지만 세상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이런 일은 너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자기가 갖고 있던 생각을 반박하는 증거 앞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증거를 의심하지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한심한 현상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하기 힘들지 않을까. 이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믿게 되는 것’과 관련된 메커니즘의 특성을 우리가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믿게 되고 또 드물지만 때때로 믿음이 변화되는 경험도 한다. 그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는 아마도 심원한 인지과학의 숙제일 것이다.

기존 경제학의 기본 전제였던 (목표 극대화를 지향하는) ‘합리적 인간’이라는 가정을 공격하면서, 이제 거의 주류의 자리에 편입된 행동경제학의 패러다임을 상기해 보자. 인간이 수많은 인지적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라는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예방접종과 면역에 대해 특정한 신념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게 만드는 인지적 성향이 있으리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면 갖는 그러한 기질적 특성을 무시한 채, 객관적 근거에 기반 한 주장에 설득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의 몽매성을 한탄해 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좋은 의미의) 계몽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계몽을 시도하는 사람의 접근법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

이번 글에서 소개하는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는 그런 면에서, 그러니까 개탄하지 않으면서 상당한 수준의 메시지 전달력과 설득력을 보여준다. 면역이나 예방접종 이슈에 대한 정보의 디테일과 깊이도 괜찮지만, 탁월한 설득력 있는 문체가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로서 세련된 감각을 소유한 저자는 본인이 아기 엄마로서 육아의 구체적인 체험담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벌어졌던 ‘예방접종’을 둘러 싼 여러 논쟁들을 소개하고 성찰한다. 우선 저자가 알려주는 백신 위험성 담론이 널리 퍼지게 된 주요 사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2. 위험한 백신 : 자폐증과 수은 중독

자폐증 소문 퍼트린 영국 의사

1998년, 영국 의사 앤드루 웨이크필드는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유력한 의학잡지 <랜싯>을 통해 제기했다. 자신이 근무하던 왕립자유병원에 입원한 자폐아 12명 중 8명이 MMR 백신을 맞은 뒤 2주 안에 자폐 증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후속연구를 통해 안정성이 확보되기까지 MMR 예방접종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그의 가설은 언론을 통해 널리 퍼졌다. 그의 가설은 백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믿고 있던 부모들의 의혹은 커지게 했고, 질병 원인을 찾던 자폐증 환자를 둔 부모들에게 수용되었다. 논문이 널리 보도되자 백신 접종률이 뚝 떨어졌지만, 사실 논문의 결론은 ‘MMR 백신과 자폐증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였으며 논문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수많은 연구가 MMR 백신과 자폐증 관계를 밝히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2004년에 어느 탐사 저널리스트는 ‘백신 제조업체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던 변호사가 웨이크필드에게 연구 대가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2007년, 영국 국가 의료 심의회는 웨이크필드의 의료 윤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그의 처신이 ‘무책임하고 부정직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0년 <랜싯>은 웨이크필드의 논문을 철회했고, 같은 해 그의 의사면허가 취소됐다. 하지만 웨이크필드의 사기와 기만에 대한 고발에도 그의 주장이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백신의 수은 중독

1999년,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티메로살(에틸수은이 함유된 백신부패방지 보존제)의 안정성이 확인될 때까지 일시 사용을 중단할 것을 권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티메로살은 1930년대부터 백신에 사용된 보존제인데, 위험하다는 증거는 딱히 없었다. 또한 티메로살이 안전하다는 증거도 거의 없었다.

당시 수은 노출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었고, FDA가 표준 백신접종 일정표대로 다 맞게 되면 노출되는 에틸수은 총량이 메틸수은(미나마타병을 일으키는 종류의 수은)에 대한 연방기준을 넘어설지도 모른다고 확인한 직후였다. 이후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만약을 위해 백신에 티메로살을 사용하는 경우가 점차 줄었다. 이로 인해 상승한 백신의 비용은 선진국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게 감당할 수준이었지만, 저개발국가에게는 상당히 감당하기 힘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후속 연구에서 에틸수은과 메틸수은의 큰 차이가 확인되었는데, 제일 중요한 점은 에틸 수은에는 메틸수은이 일으키는 신경독소 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2012년 <소아과학>에 실린 기사에는 AAP의 1999년 티메로살 성명 이후 13년 동안 수행된 연구를 돌아보며, ‘백신 속 티메로살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신뢰할만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2013년 수은사용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이 있었을 때, 금지에서 면제된 품목 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티메로살이었다. WHO는 국제 보건을 위해서 티메로살을 금지에서 제외할 것을 권고했고, 미국 소아과학회는 권고를 지지했다.

이 상황은, 1999년에 미국 소아과학회가 미국에서 사용되는 아동 백신에서 티메로살을 제거할 것을 요청했다가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미국은 자국민들의 백신에 수은이 든 것은 용납하지 않지만 딴 나라 사람들의 백신에 든 것은 괜찮다고 여긴다는 비난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백신과 자폐증이나 수은중독 사이의 연관성은 과학적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백신 반대론자들에 의해 계속 선전되는 바람에 사람들의 인상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과학적으로 연관성을 강력하게 부정해도, 역설적으로 그 부정 자체가 백신과 자폐증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3. 백신에 대한 두려움

2011년 미국 의학한림원 의뢰로, 18명의 의료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12,000건의 백신 연구를 검토해서, 백신 부작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위원회는 MMR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기각할 것을 선호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여론 조사에서 응답한 부모의 1/4은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믿는다고 답했다.

백신에 대한 두려움은 전문가들이 위험-편익 분석을 통해, 백신의 이득이 피해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주변 환경의 위험요소에 대해 내리는 직관적 판단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증거에 완강하게 저항하곤 한다.

위험 판단에 대한 심리학 연구에서 보면, 실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사망 원인을 비교해 보라고 시켰을 때, 피험자들은 사고가 질병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낳고 살인이 자살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낳는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인데도 말이다. 다른 실험에서도 참가자들은 암, 토네이도처럼 보도가 많이 되거나 극적인 위험의 사망률을 과대평가했다. 이 결과는 단순히 대다수가 위험을 잘못 판단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위험인식은 계량의 문제이기보다는 측정 불가능한 두려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통계학자이자 의사인 한스 로슬링도 <팩트풀니스>에서 사람들의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세상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낡은 지식에 연연해서거나 언론의 선전 선동 탓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은 우리 뇌의 작동방식에 나오는 탓에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속단하는 뇌나 극적인 것에 열광하는 성향인 본능 탓에 세상을 오해하고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형성한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려면 여전히 그런 극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를 매번 차분히 분석하고 모든 결정을 합리적으로 하고자 한다면 평범한 삶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수만 년 동안 유용했던 본능이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매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바탕에서 비롯되는 백신 반대론자의 주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4. 백신 반대론자의 주장과 반론

예방접종 반대진영의 구호 중 하나는 거대 제약사가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익에만 이끌려 예방접종을 지지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제약사들이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공공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익에 대한 동기가 제약 산업의 현실과 정책을 모두 뒤틀리게 하지는 않는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제약사를 비난하게 되면 그동안의 신약 개발과 연구가 일구어낸 진보를 볼 수 없다. 제약 연구는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간염, 암과 같은 질병에 효과적인 치료법을 만들어냈다.

또한 제약 산업계는 미국 백신 산업에서 얻는 이윤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초등학생 예방접종 의무화에 별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예방접종률이 떨어져 전염병이 더 많아지는 쪽이 질병 치료제 생산하는 회사에 더 큰 이익을 줄 것이다.

반대진영의 또 하나의 주장은 의무적 예방접종이 자녀를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키우고 예방접종의 숨겨진 위험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부모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개인이 가진 의료 선택의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결과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위험한 생각이라고 논박 당한다. 전염병이 주는 고통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 위험과 혜택을 따져봤을 때 자녀에게 예방접종을 맞히기 싫을 수도 있다. 찬성진영은 그런 계산이 사회적으로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예방접종을 받지 않는 사람은 집단면역에 협력하지 않으면서 이득만 챙기는 무임승차자다.

아마도 반대진형의 가장 강력한 호소력는 ‘예방접종 피해 어린이’ 사례일 것이다. 이는 대중에게 감정적 측면에서 힘을 발휘한다. 통계수치는 그것이 사실이라도 추상적이고 모호해 보인다. 구체적이고 극적인 사례야 말로 대규모 공포를 조장하는 선전전에서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이것을 상대할 때 과학적 근거가 항상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반대진영의 일화적 증거에 대해서는 통계수치로 반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선전전에서는) 찬성진영은 예방접종을 받지 못해 크게 질병 후유증을 앓은 또 다른 일화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사람들은 안심시켜주는 추상적 통계보다 인상 깊은 이야기에 더 크게 반응한다.


5. 집단면역과 무임승차

해마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맞게 되는 독감 백신은 10명중 1-2명에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항체 생성이 충분히 안 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가끔 독감예방접종 맞았는데도 독감에 걸려 고생했노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떤 백신이라도 특정 개인에게서는 면역을 형성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효과가 완전하지 않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사람간의 이동이 어려워져 전파가 차단된다. 이 덕분에 비접종자나 접종했지만 면역 형성이 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집단면역의 원리이다.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 면역은 무임승차의 문제에 취약하다. 백신접종을 받지 않은 면역성이 없는 소수의 개인들이 면역성을 지닌 이들에 의해 형성된 집단 면역에 의해 보호받음으로서 무임 승차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 내에서 무임승차자들이 증가한다면, 질병 발생이 점차 많아지면서 집단 면역이 붕괴되어 질병이 급증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다. 집단면역의 효과가 사라지는 문턱값은 질병의 종류, 백신, 인구에 따라 차이가 있다. 많은 경우 그 문턱값을 넘어선 뒤에야 사후적으로 값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신 반대론자는 늘 전염병에 기여할 잠재력을 품은 위험한 처지에 있다. 백신 반대론자들이 집단면역의 효과를 의심하는 것은 우리 몸이 남들과 본질적으로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가능하다.


6. 은유의 문제

저자는 제임스 기어리의 <나는 타자다>에 나오는 은유의 문제를 인용한다. ‘우리의 은유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신접종의 찬반을 둘러싼 진영에서도 은유를 통해서도 대리전을 치른다. 백신 반대진영은 백신에 함유된 물질들이 인공적인 독성물질이어서 순수하고 자연적인 우리 몸을 해친다는 표현을 즐긴다.

그런 표현에는 앞서 한스 로슬링이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만드는 주요 본능이라고 지적한 ‘간극 본능’(세상을 서로 상충하는 두 집단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경향)이 집약되어 있다. 독물과 약물, 인공과 자연, 오염과 순수의 극단적 이분법 말이다. 그런 은유에서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백신 접종은 외부의 물질이 살 속에 직접 주입되는 것으로 침해와 타락과 오염을 암시하게 된다. 그것들은 우리가 건강을 해치는 원인으로 비난하는 화학 물질과 환경을 위협하는 오염 물질을 상기시킨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여러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며 우리는 이미 환경 속에서 오염되어 있으며, 개인은 타인들과 분리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서 면역이라는 공동 정원에서 공생하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백신 회의론자의 공포는 선진국 중산층의 (저개발국가에서 감당하기 힘든 비용을 지불하는) 호사스런 불안감이라 지적하면서, 반대론자들의 은유를 해체한다.

독성학자들은 어떤 물질이 독인지 아닌지는 용량 의존적이라고 본다. 어떤 물질이든 과잉으로 쓰이면 독이 된다. 물도 아주 많은 용량을 마시면 인체에 치명적이다. 200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주자가 수분 과잉으로 죽은 사건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을 용량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것 아니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인공 화학 물질보다 천연 화학 물질이 본질적으로 덜 해롭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는 온갖 증거가 있음에도, 우리는 자연이 전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듯하다. 아마 우리의 인지적 메커니즘에 내재된 이분법적 사고 경향 때문일 것이다.


7.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자연은 선하다는 통념의 위험성

‘자연은 선하다’는 이분법적 통념을 확장시키며 큰 성공을 이룬 책 <침묵의 봄>에 대해 저자는 그 공과를 분석한다. 1962년에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침묵의 봄>은 인간의 건강이 전체 생태계의 건강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대중화했으며, 사회적으로는 미국 환경보호국의 창설과 미국 내 DDT 생산 금지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레이첼 카슨은 DDT가 널리 암을 유발하는 발암 물질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침묵의 봄> 출간 후 수 십 년에 걸친 연구는 그 가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DDT에 심하게 노출된 공장과 농장의 노동자들 대상으로 한 여러 연구에서, DDT와 암의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특정 암을 살펴본 연구에서도 DDT가 유방암, 폐암, 고환암, 간암, 전립선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2006년 세계보건기구는 과학적 검토 후에 DDT를 인간에게 ‘미약하게 해로운 물질’로 분류하며, 많은 상황에서 건강에 해로운 점보다 이로운 점이 많다고 보고했다.

어느 저널리스트는 ‘이 책보다 더 크게 세상을 바꾼 책은 별로 없다’고 인정했지만, <침묵의 봄>에서 DDT의 위험성이 지나치게 과장됨으로서 오늘날 아프리카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라리아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과 예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DDT가 모기 퇴치제로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침묵의 봄>의 지나친 성공으로 인한 각인효과로 인해, 이제는 DDT를 생산하는 화학 회사가 거의 없고, 그것을 살 돈을 후원하려는 기부자가 없으며, 많은 나라는 딴 나라에서는 금지된 화학물질을 쓰기를 꺼린다고 한다. 요즘도 아프리카 아동 20명 중 1명이 말라리아로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아이가 후유증으로 뇌 손상을 입는다.

<침묵의 봄>은 선과 악, 인간과 비인간, 고대와 현대라는 대립에 의존한다. 그러한 편리한 이분법은 복잡한 현대사회에게 큰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8. 개선책이 있다면

저자인 율라 비스는 백신 찬성론자다. <면역에 관하여>의 훌륭한 미덕은 자기 확신에 찬 백신 찬성론자 특유의 상대에 대한 냉소적 말투가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자신이 그 모든 불안과 의심의 과정을 다 겪어본 뒤에 이 에세이를 썼기에, 강요하는 말 한마디 없이 누구보다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리뷰를 쓰면서 불가피하게 압축하고 요약을 하게 되니, 저자 특유의 산문의 향기가 다 말라버리고 앙상한 뼈대만 전달하는 게 아닌지 우려가 된다. 역시 영화처럼 책의 맛도 요약본이 아니라 본편을 봐야 그 진가를 느낀다, 라는 식으로 변명을 해야겠다.

우리가 어떤 지식을 믿거나 믿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일까? 이미 여러 뇌과학 연구에서 이 문제는 파헤쳐지고 있다. 우리는 빠르게 어림짐작 하여 판단하는 직관과 분석적으로 탐구하여 판단하는 이성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과학혁명을 통하여 이성이 이룬 성취가 현대 문명 속에서는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래서 공동체의 문제에 방향을 결정할 때는 이에 크게 의존한다. 하지만 공포 본능이나 부정 본능 혹은 간극 본능(이분법 본능) 등은 인간의 (집착에 가까운) 이야기 선호와 더불어 우리의 유한한 인지기능에서 여전히 많은 경우에 우선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직관과 이성으로 구분되는 인지의 특성은 윤리 문제에도 복잡한 숙제를 제시한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과 조슈아 그린의 <옳고 그름>이 바로 그 문제의식을 대표하는 저작일 것이다. 전자는 우리를 휘두르는 직관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된다는 것에 방점을, 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의 가능성에 희망을 건다. 우리가 믿음의 메커니즘에 대한 뭔가를 좀 더 알더라도, 손쉽게 특정방향으로 합의될 정답을 제시하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책들에 대한 본격적 소개는 다음 기회에...)

하지만 믿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특정한 부분에서는 약간의 요령은 있는 것 같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추상적인 통계는 이야기에 비해 설득력이 약하다. 효과적으로 타인에게 메시지가 전달이 안 되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계몽은 어쩌면 메시지의 효과적인 전달과 관련성 높다. 이것은 어쩌면 선전이나 마케팅의 문제와도 맥이 닿는다. 전달하려는 것을 상대방의 인지에 선명하게 각인시키기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어떻게 성공적이고 효과적으로 상대하게 전달하는가를 알려 준 유명한 저서는 바로 <스틱!>(댄 히스, 칩 히스 공저)이다. <면역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든 인상은, 히스 형제가 쓴 책이 제시하는 모법답안을 율라 비스가 아주 성공적으로 현실화해서 보여준다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이었다. 박수칠만한 모법답안이라고 하겠다. 히스 형제가 소개하는 전달력의 형식적 요구 사항은 대충 이렇다. 심플해야하고 의외성도 있으면서 구체적이며 신뢰성이 있고 우리의 정서를 건드리는 이야기식 전개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무언가를 믿게 되는 것’과 관련된 인지적 메커니즘에서 상대에게 말하려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라면, 더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상대의 몽매성을 깨는 요령에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이 다소 도움이 된다면, 나는 나의 몽매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비판적 사고’는 어떻게 가능한가의 질문인 것이다.

타당한 증거를 제시해도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신념에 맞는 증거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증거는 무의식적으로 깎아내리며 우리의 신념을 지키려 한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실수를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 스스로는 증거를 근거로 믿음을 형성한다고 착각한다. 아마도 나 또한 그것에 예외는 아닐 것이다.

마이클 셔머는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나쁜 생각을 합리화하는 데 더 능하다.”고 말했다. 고등교육을 받는다고 자동적으로 ‘비판적 사고’가 가능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 같다. 똑똑한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의 믿음을 실제 옳은지와 상관없이 추론과 데이터를 잘 끌어와 능수능란하게 그 믿음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특정한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잠정적 답변으로, 철학자 피터 보고시안이 <생각을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글에서 제안한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증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라고 말하는 대신, 어떤 믿음에 대한 확신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비판적 사고가 가능해진다. 철학자들은 이 과정을 취소가능성(defeasibility)이라 부른다. 취소가능성은 기본적으로 믿음이 뒤집힐 수 있는가의 여부다. 모든 주장을 그런 식으로 검토한다면 사람들은 확신을 떨어뜨리는 증거를 찾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

더불어 보고시안은, 질문에 그 답을 모를 때 솔직히 “몰라요.”라고 하기를 그리고 실수를 저질렀을 때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라고 인정하는 훈련을 하기를 권한다. 비판적 사고는 우리의 믿음이 틀렸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그에 맞춰 바로 잡을 의지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는 지적 겸손을 강조하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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