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케이블TV 음악방송에서 한국의 대중음악사를 리뷰하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들을 소개하는 프로를 잠시 보았다. 김민기, 들국화, 신중현, 송창식, 듀스, 김완선, 김현식, 유재하 등등. 장르를 불문하고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며 새로운 시대를 연 음악인들에 대한의 간략한 소개와 후배 음악인들이 풍미했던 당시를 추억하는 코멘트만으로도 상당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한국의 시인들 황지우, 최승자, 장정일, 기형도, 박노해, 김수영, 신동엽, 백석 등등으로도 비슷하게 감각적 감동을 일으킬 수 있는 근사한 리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예술에서의 천재들이 벌이는 향연, 그들의 엑기스만 모아도 대하서사시 같은 감동들의 연속된 행복한 퍼레이드가 펼쳐질 것이다. 부럽고도 멋진 탁월함. 예술에는 다른 가치와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돌파하는 매력이 있다. 그렇다면 니체의 말처럼 구원은 (사랑과 더불어) 예술밖에 없는 것인가.
이전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어렵사리 읽은 적이 있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어느 정도 소화만 한다면 그 기묘한 위인이 왜 수학적 증명의 형식을 따라 자기 책을 서술했을까도 알게 되고, 그런 형식이 주장하고자하는 내용과 잘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의 찬란함과는 대조되는 단아한 쓰나미적 압도의 감동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안토니오 다마지오라는 신경과학자의 <스피노자의 뇌>라는 책이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다. 기묘한 매혹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뇌라니! 독자를 끌어들이는 한국어판 제목인거 같다. 원제는 <스피노자를 찾아서 (Looking for Spinoza)>이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근래의 뇌과학 성과를 인간 의식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간명히 요약하면서, 그러한 뇌과학적 성과와 통찰에 해당하는 것을 삼사백년 전에 이미 스피노자가 유사한 철학적 선취를 했음을 보여주며, 그 영험한 철학에 대한 경애를 보이는 책이다. 그래서 책의 전반부에는 여러 뇌과학적 성과들이 소개되다가, 갑자기 다소 생뚱맞게도 후반부인 6장에서는 스피노자의 과거사와 그의 기구한 생애를 들려준다. 아마 저자에게 인생과 학문에서의 영감을 준 철학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었나보다.
2.
이제 그만 우회하고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스피노자의 뇌>라는 책에서는 '정서emotion'와 '느낌feeling'에 대해 나름대로 고유한 정의를 내리면서 현대 신경생물학의 성과들을 그 개념어 속에 수렴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 '정서'의 의미는 우리 일상어에서 개인의 감성이라는 뜻과는 다르게, 저자 나름대로 일관되고 엄밀하게 정의해서 사용하고 있다.
일단은 그 사용법을 따라가 보자. 그는 ‘정서’를 생명체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행하는 감각적 자극에 대한 반응의 외적 표출(얼굴표정, 목소리 등)이라고 정의한다. 달리 말하면, 환경의 자극에 대해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복잡한 반사반응의 총체이다. 자극에 대한 외적 표출이기에 그것은 관찰을 통해 포착가능하고 어느 정도 계량화를 통한 과학화가 가능한 영역이 된다.
그리고 저자는 '느낌'에 대해서 말한다. 정서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행위나 움직임이라면 느낌은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적인 현상으로서 마음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느낌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상상, 추론 등의 풍요로운 조합 덕택에 통찰과 창의력을 만들어 낼 가능성에 도달하게 해준다. 그래서 느낌이란 소위 뇌의 ‘고등기능’에 대한 이름이다.
환원 가능한 영역만이 과학의 영역이라는 차원에서라면, 어쩌면 '느낌'의 영역은 아직은 과학화 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에 대한 명칭이다. 물론 그것의 토대는 생물학적 반사반응들인 '정서'에 의존한다. 그래서 신경계를 갖는 모든 생명체가 항상성 유지를 위해 반사반응으로서의 정서가 있지만, 그중 극히 일부(인간이 포함되는)만이 느낌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느낌은 전적으로 정서에 의존하며 정서가 없이는 느낌이 없다.
우리의 통상적인 언어 습관으로 '정서와 느낌'이란 표현 속에서, 마치 '개나리와 진달래'처럼 등가의 유사 속성을 나열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서'와 '느낌'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의존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측면에서 봤을 때 속성이 매우 다른 것이다.
복잡한 반사반응의 총체라는 '정서'의 모습은 신경계의 구체적인 기능적 영역으로 대략적인 분할이 가능하다. 언어중추, 운동중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영역들의 나열만으로 설명 안 되는, 소위 인간의 고등 기능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느낌'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 '느낌'은 정확히 과학적으로 정의 내리기 힘든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한 명칭인 것이다.
그래서 정서와 느낌을 인식론적 용어로 번역하자면 정서는 과학적으로 관찰가능하고 환원 가능한 외적 행태에 대한 이름이라면, 느낌은 그런 외적 행태로 포착되는 않은 내적 체험이라는 미명하에 심오하며 포괄적인 어떤 것이며 아직 과학적 언어로 파악되지 않은 영역에 대한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정서와 느낌’은 ‘지와 (아직은) 무지’라는 명칭과 상동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느낌'이라는 명칭을 붙였는가. 그것은 인간의 뇌의 기능 중에는 포착가능한 정서로서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특이한 기능이 분명히 있으며 뇌에 대해 더 연구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객관적 표징으로서, ‘느낌’이라는 개념어의 기능은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3.
다마지오는 고등기능인 ‘느낌’이 고의로 자신의 ‘정서’를 조절하고자 노력할 수 있으며, 자기보존을 위해 의도적인 노력과 새로운 선택을 이끌어 나간다고 본다. 그리고 이따금씩 정서적 기구의 전제적 자동성을 억누르고 뛰어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책 전체의 일관된 구도를 국소적으로 흐트러뜨리고 있으나, 학문적 언어의 일관성과 우리의 통상적 사고의 뒤섞임에 때문인 듯한 이런 일들은 드물지 않게 여러 진화생물학자들의 주장에서도 관찰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억누르기 힘든 비일관됨’에 해당하는 것이, 뇌과학이 포착하고자하는 인간 의식의 기이한 면을 여지없이 임상적으로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더글러스 호프스테터가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인간 의식이 자기지시를 통해 역설적 특성을 보인다는 주장을 상기해보자는 정도로만 얘기해 두자.)
저자는 ‘느낌’을 ‘정서’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느낌은 특이한 ‘자유의지’가 가끔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느낌의 능력이 ‘자유로운’ 면이 있을지라도, 과연 정서의 기능적 양상과 복잡도의 정도차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심오한 간극이 있는가, 라는 문제는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사한 ‘자유의지’는 어쩌면 진화의 무방향적 요동의 한 형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여러 수백 수천의 방향 중에서 간신히 성공한 하나의 방향이 사후적으로 마치 사전에 깔끔하게 기획된 의도인 것처럼 포장되어 과거로 투사되는 형태로서 말이다. (이런 미묘한 국소적 혼란에 일단 괄호를 치고, 간명한 이해를 위해서 대략적 논의를 지속해보자.)
4.
그렇다면 뇌과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이 과연 어떤 차원에서 근친적이기에 다마지오는 이 둘을 연결시키려고 했을까?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논할 때, 마치 인간이 고유의 특별성에 의해 인과법칙을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는 통념적인 고전적 주장과 결별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세계가 원인과 결과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대다수 사람들마저 그래도 인간은 예외적 존재여서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뇌과학을 비롯한 진화심리학 등의 생물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이 제시하는 존재론과 인간관은 ‘그렇지 않다(다른 선택은 불가능하다, 인과를 넘어서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인과적 필연성을 넘어서는 ‘자유’는, 그것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앎의 결여’에 의해서만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시적 차원에서 개인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최소한 집단의 차원에서는 전형적인 수렴점들을 갖는다는 것이다. 살인범죄의 예를 보자. 여러 이유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과연 그의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의 시카고의 살인사건의 빈도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보다 30배 차이가 났다. 모든 사회에서 살인사건의 비율은 크게 다르지만 유형은 똑같았다. 젊은 남자가 다른 젊은 남자를 죽인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살인을 시작하는 나이와 끝내는 나이도 똑같았다. 살인사건을 저지른 범인들의 연령과 성별을 나타내는 시카고의 그래프를 축소시키면 잉글랜드/웨일스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젊은 남성들의 생물학적인 경쟁적 성향과 극단적 환경의 영향으로 사건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굳이 과학 담론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학문적 담론들은 세계에 대한 인과적 파악을 통한 예측을 지향한다.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담론은 학문화의 담론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과학적 혹은 스피노자적 방식의 해결책의 미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렇게 있어 주었으면 하는 것(당위)’에서 ‘있는 그대로의 것(사실)’을 구분해 내고, 후자에 대한 인과적 필연성의 탐구를 통해, 현실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성공적으로 예측하고 객관적으로 유효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에서 수백만의 끔찍한 인종 학살이 이루어진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자이르 내전을 분석하면서 민족 갈등의 난폭화를 개탄하지도 않았고, 윤리의식, 이타적 감정의 부족 등의 단어는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 농업중심국가에서 경작 가능한 국토면적과 그 면적이 감당 가능한 인구밀도를 넘어서는 인구 폭발과 수자원 고갈이라는 생태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렇다면 그런 식의 내전의 재발억제를 위해, 경작지가 감당 가능한 인구압을 조절할 필요성이라는 상황에서 문제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제한 캠페인? 아니다. 인류애 함양을 위한 의식개혁과 윤리의식 고취? 물론 아니다. 그동안의 여러 국가의 사회변화에 따른 인구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들의 교육수준과 직업적인 사회참여율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제3세계에 대한 개발원조 시에 교육사업의 지원 등에서 여아를 최소한 소외시키지 않거나 우선하는 식의 새로운 정책적 접근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에는 세계인을 감동시키며 국민적 성원을 일으키고 마음을 울리는 어떤 뜨끈한 것은 없다. 무심한 관찰에 의해 성공 가능한 정책의 예시만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떤 윤리적 당위도 제시하지 않는 이런 무심함, 오히려 섬찟할 정도의 성자적 무심함으로 그의 철학은 일관된다. 인과적 사실의 세계 속에서 개인의 가치적 기대나 바람을 세계 속에 투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주관성을 넘은 냉철한 객관적 앎에서만이 인간의 (스피노자적)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 그런 모습은 스피노자가 급진적 민주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정치론>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런 무심한 급진성에 대해 감동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가, 스피노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지의 여부를 결정지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음악이 주는 감동, 그리고 시와 소설들, 미술, 그리고 현대무용이 주는 아름다운 예술들은 인간에게 특유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아마도 그것이 개인들을 심리적 위기 속에서 이따금 위로와 구원의 역할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나와 더불어 공동체의 문제와 미래를 사고하고자 한다면, 저 스피노자적인 무정의 통찰이 주는 아름다움에 동감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5, 201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