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데니스 루헤인의 대중소설 <미스틱 리버>를 보다가 기억에 남은 흥미로운 구절이 있었다. 마을에 발생한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인 주인공에게 살인계의 고참 형사가 해주는 말이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유무죄를 객관적인 근거에 따라 판단해야 되는 사람이 가져야할 소양으로 감정을 삼가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만 반응을 하라는 것이다. 격한 감정의 표출은 세상에 주관적 느낌을 투영하게 되고 그에 따라 세상을 보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되니, 그것을 삼가라는 얘기일 터이다. 그것은 철저히 객관적이어야 할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복잡하고 위험한 세상을 살면서 이와 유사한 많은 주관적 감정과 격한 감정의 투영에 시달린다. 어쩌면 시달리기 보다는 아마 그 감정 표출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야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직관적 설명을 하고 불안을 줄이고 심리적 인지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 해당하는 사례는 수천수만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체액교환을 통해 전염되는 성매개 질환중 하나인 AIDS에 대해, 일부 보수종교인들이 하늘이 동성애자에 내린 천벌이라고 한다든지, 몸의 온전성에 대한 확신으로 면역반응 등의 예로 들면서 인간은 모든 병을 스스로 이겨낼 능력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으니 각종 화학약품을 굳이 복용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라든지 등등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AIDS나 몸의 온전성에 대한 생각은 자기의 개인적 생각을 세상에 투영한 것이지 객관적 사실이 못된다. 하지만 허다한 경우에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고 습속에 갇혀 있다.

자크 모노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저서인 <우연과 필연>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주관적 생각을 세상에 투영하고 그것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생각하는 생기론, 물활론을 비판하고 종교와 헤겔 철학에서 마르크시즘까지 그 관점을 확장한다. 물론 인용한 고참 형사 보다는 더 풍부한 과학적 근거로서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의 내적 맥락을 따라가기 보다는, 그 주장이 무엇에 반대하는지를 먼저 말하는 것이 그 의도와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구구절절한 분자생물학적 논거를 통한 모노의 주장을 따라가기 보다는 그가 무엇에 반대하며, 왜 반대하는지를 먼저 이해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선 책 제목인 <우연과 필연>에서 시작해보자. 여러 맥락으로 쓰이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무슨 뜻이며, 어떤 대조적 맥락으로 쓰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모노는 '필연'에 반대하고 '우연'에 찬성한다. 여기서 찬반은 단순한 가치 판단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판단이다. ‘우연’이 생물계의 탄생과 인간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일한 사실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보편적 물리법칙을 통해 몇 개의 초기 조건을 정식화시킬 수 있다면, 우주의 일반적 진화를 예상하는 우주론을 펼칠 수 있지만, 이런 예상들은 단지 통계적인 것밖에는 될 수 없다. 보편원리에서 금성이든 에베레스트 산이든 어떤 특수 현상이 존재하는 필연성을 연역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물리법칙과 생명체의 출현은 양립할 수는 있어도 그 법칙에서 생명발생이 연역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예견할 수 없다. 이런 세계에서 생물체는 존재할 의무(필연성)는 없고 존재할 가능성만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명계 속에서 자의식을 가진 인류의 출현도 필연적이지 않다. 그저 우연일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모노는 필연에 반대하고 우연에 찬성한다. 

여기서 잠깐. 필연에 대한 반대라는 모노의 주장이 직관적으로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과학은 인과적 필연성(!)을 탐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여 필연적 원리를 따지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모노 또한 그런 과학의 ‘필연성’을 탐구하는 사람이며 우주의 물리법칙의 필연성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모노가 이 책에서 부정하고자 하는 ‘필연’이 무엇인지를 잘 음미해야 한다. 

모노는 초월적인 존재자의 의도가 이 세계에 목적론적으로 관철된 것을 ‘필연’이라고 명명한다. 하여 객관적 자연법칙과 동떨어진 초월적 의도(필연) – 가령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인간의 의식이 우주 진화의 최종 목적이라는지 - 에 의한 것은 없다는 차원에서 (목적론적) ‘필연’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일수도 있고, 모노가 주로 논파한 생기론이나 물활론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노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 기대의 투영이자 몽매주의의 함정을 가진 (목적론적) ‘필연’을 거부할 뿐이지, 물리법칙의 인과적 필연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책의 곳곳에서 일상어의 특성상 ‘필연’이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와 뉘앙스로 혼재되어 쓰이기도 하지만, 이 저서에서 모노가 비판하고자 하는 ‘필연’을 논할 때에는 거의 일관성 있게 쓰이고 있다. 

(그래도 하필이면 ‘필연’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씀으로써, 일반적인 우리의 이해에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 자크 모노는 물리학자가 아니다. 아마도 물리학자가 ‘필연’을 이런 식으로 부정적으로 정의하고 글을 써나간다면, 금방 상당한 곤경에 빠져들었으리라. 하지만 모노는 생물학자이며 다윈주의의 테제를 분자생물학적으로 보완 완성하려는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질서 정연해 보이는 생물계내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무의미와 무방향성 그리고 낯 뜨거운 인간 중심주의의를 해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 존재의 우연성에 대한 강조라는 수사적 필요성에서, 모노는 우연을 강조하고 필연을 배제하려 했다는 점을 이해하자.)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모노가 비판하는 (목적론적) ‘필연’의 예들을 살펴보자. 그 비판의 첫 대상은 생기론과 물활론이다. 모노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면서 생명을 가진 물질 속에서만 합목적성의 원리가 작용한다는 일련의 이론들을 생기론이라고 정의한다. 형이상학적 생기론자인 베르그송과 과학적 생기론자인 엘자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중 엘자서의 태도를 요약하면, 생명체의 불변성과 합목적이라는 특성이 물리학을 침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생물계의 연구로 표시된 물리적 힘이나 상호작용만으로는 이러한 특성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체가 물리법칙을 위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특별하고 미스터리한 것이 생명현상에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는 주장이다. 그들의 태도는 관찰이나 지식이 아니라 단지 현재의 무지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모노는, 보편적 합목적적 원리에 따라 생물뿐 아니라 우주의 진화가 지배되고 있으며 방향이 정해져 있는 진화에서 완벽한 진화의 도달점이 인간과 인류이며, 그렇게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물활론이라 부른다. 모노는 물활론의 본질적인 사고법은, 인간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강렬한 합목적적 작용에 대해 품고 있는 의식을 무생물인 자연 속에 투영하는 일이라고 본다. 자연현상은 인간의 의식적 목적을 가진 활동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가설이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생물철학은 이런 사고법의 노력과 성공을 보여주는데, 그는 진화의 힘이 소립자에서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우주 전체에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인간에 이르는 생물권의 진화는 단절됨이 없이 연속되고 있는 우주적 진화 자체의 일부라는 이론으로서 이는 19세기 과학적 진보주의 중심 관념이다. 그것은 스펜서의 실증주의나 마르크스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독하며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자연이 어떤 목적을 가지도록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작위적인 주관적 목적을 자연 속에 삽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도달하는 곳은 객관성의 원리의 포기일 뿐이다. 

이러한 여러 이론들은 생명체의 불변성과 합목적성 사이에 상정하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예외 없이 모든 생각이 합목적성이라는 ‘필연’을 제1원리로서 진화의 추진력으로 만들고 있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생각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다윈주의 입장에서는 생명체의 불변성이 1차적 원리이고, 합목적성은 사후적인 것이다). 이러한 오류의 원천에는 뿌리 깊은 인간 중심주의의 환상이 있다. 

이제 이런 (목적론적) 필연의 이면에 인류의 자기도취가 있다는 것을 보았으니, 생물계의 우연의 근거들에 대해 살펴보자. 

 

생물은 화학적 기계이며, 모든 생물의 성장과 증식을 위해서 수천의 화학반응이 수행된다. 이 방대하고 미시적인 화학적 활동은 단백질과 효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복잡하고 자율적인 화학기계가 수미일관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화학적 활동을 관리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며 조절 단백질이 그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합목적적 성능은 모두 단백질이 지니는 '입체적 특이성'에 기인하는데, 그것은 단백질이 다른 분자를 각각의 형태로 구분하고 상호작용하는 능력이다. 

생물의 시스템은 그 복잡함에서나 능률적인 점에서 놀라울 만큼 잘되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어떤 '인식력을 가지고 있는' (맥스웰의) 도깨비의 작용으로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세우고 싶어진다. 하지만 단백질이 도깨비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분자와 비공유 결합에 의해서 입체적 특이성을 갖는 복합체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입체적 특이성으로 인해 골라내어 식별하는 선택적 현상으로 생물은 마치 열역학의 제 2법칙에서 예상되는 운명을 피하는 능률 좋은 도깨비처럼 보일 수 있다.

 

생물의 합목적적 구조에 대한 최종적 논의는 단백질 속의 아미노산 잔기의 배열순서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지 이 배열 순서를 기술할 뿐 만 아니라, 다시 그것이 ‘어떤 법칙(!)에 따라 배열되는지’를 밝혀 낼 수 있다면, 이때에 비로소 생명체의 비밀을 밝혀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우주에 존재하는 상호작용하는 힘에 대한 법칙들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하려는 통일장이론에 필적할, 생물학의 이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백질 중 처음으로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순서가 1952년에 완전히 기술되었을 때, 신의 계시와도 같은 엄청난 기대를 하였으나 그만큼의 환멸이 뒤따랐다고 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특징이나 패턴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더 쌓여 가면 단백질의 조립에 관한 법칙과 기능적 상관관계가 밝혀지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수백 종의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를 알게 되어, 이 배열 순서에 대해 현대적 분석과 계산 수단의 도움으로 얻어진 일반 법칙은, 우연이라는 법칙뿐이었다. 어떤 규칙성도 찾아낼 수 없었으며 그 의미에서 단백질의 구조들은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앞에서 예로 들었던 면역반응과 자기치유기능을 절대시하는 몸의 온전성주의자의 주장을 항원-항체 반응에 대한 고찰로서 검토해보자.

항체에 의한 생물의 방위 시스템을 보면, 생물은 천연물, 인공합성물 상관없이 거의 모든 입체적 패턴에 적합한 항체를 형성할 수가 있다. 오랫동안 항체에 특이적인 결합 부위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정보원은 항원 자체라고 상상되어 왔으나 오늘날에는 항체의 구조 결정에는 항원이 관계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고 한다. 즉 생물체 내에서 수많은 특수화된 면역세포가 생겨나고 그것들이 항체 구조를 결정하는 유전정보의 단편으로 일종의 '룰렛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면역반응은 외부의 적에 대한 개체의 지성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의 적이든 내부의 장기든 상관없이 공격하는 경향성을 가졌다. 면역반응은 방향성이 없다. 신체에 이로울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야 루푸스, 류마치스 관절염 등의 수많은 자가면역 질환들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진화론적 해명이 비로소 가능해 진다. 물론 오랜 기간의 필터를 통해 개체에 유리해지는 경향성을 지니긴 했겠지만 말이다. 

개체를 위협하는 이물질이나 병원균인 항원을 제거하는 면역반응이라는 정밀한 분자 적응현상의 기초에도 우연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은 참으로 인상적인 일이다

이처럼 필연이 아닌 우연 속에서 생물계는 탄생했고 인간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연속해서 로또에 당첨된 것과 비슷하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지만 발생한 것이다. 자연의 수십억 년의 시간은 아마도 매우 낮을 확률을 충분히 상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단지 지구의 운이 좋아서 일수도 있다. 이런 연속된 자연의 기적 속에서 인간은 집시처럼 자기가 살아가야할 우주의 변두리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가슴을 죄는 듯 불안감을 느끼고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물활론이나 각종 종교나 철학이 그에 응답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는 객관적 진실에 바탕을 둔 과학을 기반으로 해서 모든 가치가 재정비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에서 모노는 지식의 윤리인 객관성에 바탕을 둔 참다운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주관적 신념을 세상에 투영시키는 물활론의 요소를 제거한 새로운 사회주의는 그럼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불투명한 정념을 최대한 배제하고 선명한 객관적인 이성을 통한 진보에 대한 기대는 근대적인 계몽주의적 이성의 지나간 꿈이 아니었던가. 이성의 이름으로 행한 폭력과 그 이성 내부에 존재하는 광기에 대한 성찰은 20세기 후반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 과제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성과 광기(정념의 즉자적 추구라는 경향성)의 구분은 그리 자명하지 않음을 뇌과학의 최근 성과들도 보여주지 않는가. 

모노는 가치들의 기반에 사실을 두려고 한다. 탄탄한 사실(진리)에 기반한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들의 기저에 가치평가의 지평이 이미 관여되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비교를 해서 보다 나은 것을 정하는 것은 사실들의 몫이 될 수 있지만 어떤 주장에 대해 ‘충분하다’, ‘적절하다’ 혹은 ‘바람직하다’라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평가의 문제이며 그 심연에는 적절함/부적절함을 구분하는 결단이라는 주관적 선택이 자리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나 가치들의 충돌 문제에서 그 합의의 지점을 찾아가는 문제에서 사실의 몫은 생각보다 좁다.

하지만 모노의 주장을 지나치게 인색하게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런 탁상공론식의 염려와 상관없이, 모노식의 ‘과학적 윤리학’도 발전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쪽 진영의 진척된 성과를 요약한 <다윈주의 좌파>라는 책을 보면 모노가 원론적으로 주장한 바를 밑그림을 그리며 다소 구체화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