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대표 저서 중 하나라면,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을 꼽는다. 그의 학문적 이력에서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가 훨씬 중요하겠지만, 그는 자기 시대와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도쿠카와 시대의 일본 사상을 통해서 항상 현대 사상을 말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맨 첫 장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는 패전 다음해인 1946년 잡지 『世界』에 발표된 들이고, 이외에도 일본 파시즘, 일본 내셔널리즘 연구에서 마루야마는 탁월한 통찰과 비판을 보여준다. 나도 그의 해석을 듣고서 비로소 이 사진의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군사대연습에서 약 2,600명 정도의 장교가 함께 찍었다는 이 사진은, 천황으로부터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장들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먼 소위까지, 그 거리와 위치가, 단지 권력이나 권위 뿐 아니라 진선미(眞善美)라는 가치의 실체성까지 담보하게 된다는 일본 파시즘 특유의 논리와 사유구조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진이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 실린 글들은 학술 논문이라기 보다는 종합잡지에 실린 글이 대부분이고, 그 중에는 편지글, 대화체, 연설문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또한 시기도 1946년부터 1961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쓴 글이라, 일반적인 연구서에 비하면, 통일성과 연속성이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이끌어간 지식인의 사고의 민낯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오랜 시간을 기울여서 꼼꼼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외에도 『전중과 전후사이: 1936-1957』, 『충성과 반역』,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後衛の位置から--追補「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만 번역이 되면, 그의 사상을 우리말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지는 셈이다. 이렇게 많이 읽힐 정도로 우리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학자이고, 그에 관한 연구서도 적잖이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가끔은 지금까지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혹은 그가 불러일으킨 관심이 어쩌면 그가 일본정치학에서 시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의도로 읽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한국에서의 마루야마 마사오 열풍은 그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를 통해 보여준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루야마가 소라이학에서 읽어낸 근대성의 단초 혹은 단서는 일본사상에서 근대성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를 통해서 발달하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마루야마는 육군에 소집되어 평양으로 떠나기 직전에 이 원고들을 작성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런 접근이 의미 있는 것은 천황제와 신토오(神道)를 중심으로 서구의 퇴폐적 사상과 풍조에 물든 일본을 개혁하자고 하는 일본 내셔널리즘이 신토오(神道)에서 일본의 특이성, 일본의 독특성을 보았던 노리나가에게서 사상적 근거를 찾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정신주의에 입각하여 ‘근대 초극’을 외쳤던 일본 우익은 군국주의, 파시즘 그리고 패전으로 이어진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마루야마의 시도는 군국주의자들의 손에서 ‘에도국학’과 모토오리 노리나가라는 사상적 무기를 빼내거나 적어도 중립화하려는 시도이다. 반면, 식민지를 벗어나서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제기된 의문, ‘왜 자생적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했는가’ 또는 ‘근대화의 맹아는 없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실학에서 ‘근대성’의 단초를 찾으려는 노력은 마루야마 마사오에게서 선례를 보게 된다. 실학자들의 문헌을 뒤지면서, 근대성의 단초를 찾아, 결국 한국 특수론 및 근대 맹아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학문적 흐름은 실상 한국에서는 내셔널리즘적 사회 기조에 편승한 것인데, 이는 정확하게 마루야마가 전통학문 즉, 에도국학에서 근대성의 단초를 찾아, 역시 국학자인 노리나가를 근거로 ‘근대 초극’을 주장하는 파시즘, 군국주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한 일본정치사상 연구와 정반대의 해석 방법이다.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 대한 보다 상세한 비평은 멀지 않은 장래로 미루면서, 이 점만은 먼저 지적해 두고자 한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은 다소 정연하지 않게 여러 가지 주장을 담고 있지만, 내게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첫째,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해하는 ‘근대성’이란 정치에서의 형식(제도, 인공)과 내용(실체)을 분리하는 것이다. 둘째, 마루야마는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로서의 일본특이론(일국특수론) 등 일본 문화의 우월성 내지는 예외성을 주장하는 모든 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 일본의 발전 과정이 구미의 발전과정과 다른 점이 있고, 다소 전통 혹은 전근대가 뒤섞여 있다고 하나, 일본만 특별하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일관된다. 단, 일본의 어떤 특수성이 일본을 모순이나 전근대로 끌고 내려갈 때, 이점을 아주 분명하게 지적한다. 셋째, 안티테제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일종의 희망적 기대를 품고 있다. 소련의 스탈린 비판에 대해서도 유럽식 자유주의 비판에 대해서도 무차별적 비난에 동조하기 보다는 이해에 기반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넷째, 1950년대 냉전을 주도하던 미국의 매카시즘에 대한 분명한 우려를 표명한다. 1950년대의 미국과 군국주의의 광풍이 일던 1930년대의 일본을 비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섯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적 이해가 없다. 일본 내셔널리즘이나 파시즘에 대해 분명하게 비판적이면서도, 내셔널리즘이 제국주의로 전화되어 주변 국가와 다른 네이션에 미친 피해에 대해서는 딱 한 마디 외에는 언급이 없다. 오직 일본의 문제에만 주목한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2.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해하는 ‘근대성’ 혹은 정치에서의 ‘근대’. 이 책을 읽어가는 데 열쇠가 되는 글은,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평가이지만, 제3부 제3장 ‘육체문학에서 육체정치까지’라는 대담형태의 글이다. 패전 후 일본에서는 퇴폐적인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존 다우어는 그런 퇴폐적인 문화에서 주체의 재발견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당시 이들이 먹던 ‘가스토리(かすとり, 粕取り, 술지게미) 소주 (술지게미에 알코올을 섞어서 만든 막소주)’와 ‘바쿠단(ばくだん, 爆弾, 항공유용 알코올에 조미료를 와 여러가지를 섞어 만든 막소주)’을 따라 이런 문화를 '가스토리 문화'라고 하고, 이런 지식인을 '가스트리겐차'라 칭했다. 여하튼 그러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 특히, 문학에서의 과감한 성애 묘사와 퇴폐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시작해서(429), 일본 특유의 문학 양식인 ‘사소설(私小說)’ 비판(431)로 이어진다. 마루야마의 비판의 요지는 이것이 ‘작품(fiction)’이 아니라는 주장, 사소설 같은 것은 창작방법일 수 있으나 “인간정신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서, 현실이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매개된 현실(mediated reality)로서 나타날 때 비로소 그것을 ‘작품(作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433) 근대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는 매우 독특한 도입이다. 마루야마는 자신이 정신적 독립이나 자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은 단지 “기능적인 독립성”일 뿐이라고 하면서 “이 나라에서는 정신이나 가치라고 하면, 곧 실체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라고 덧붙인다.(433) 아래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정신이나 가치의 ‘실체성’을, 개인의 인격에 부착되는 것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마루야마의 파시즘과 군국주의 비판의 핵심 논거이다.
마루야마는 ‘픽션’의 중요성에 대한 사상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비근대적 사회의식은 ‘픽션’ 위에서 불안을 느끼고, 근대정신은 ‘픽션’의 가치와 효용을 믿고 재생산하는 정신이다. 픽션은 라틴어의 fictio에서 나와, 원래 형태를 만든다(to fashion)든가, 발명해낸다(to invent)라는 의미인데, 그것이 바뀌어 사상한다(to imagine)든가 겉을 꾸민다(to pretend)든가 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본래는 인간이 어떤 목적이나 아이디어 위에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인간의 지성적인 제작 활동에, 따라서 그 결과로서의 제작물에 대해 자연적 실재보다 높은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다.(435) 따라서 순관념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가장 픽션다운 픽션이며,(435) 픽션을 허위라고도 하는데, 허위와 현실이 자연적 · 직접적 소여로부터 거리의 정도를 의미한다고 할 때, 근대 정신은 허위를 현실보다 더 존중하는 정신이라고 말한다.(436)
좀 더 설명을 끌고 나가면, 중세적 질서가 붕괴된 폐허 속에서 새로운 시민사회를 건설할 때, 새로운 사상적 전제이자, 사회의 질서, 제도, 관습 등 모든 사회적 환경은 인간의 산물이고, 인간의 지성의 힘으로 바꾸어가는 것인 반면, 중세에는 인간이 출생이나 신분에 의해 위계적으로 위치지어져, 사회관계가 고정되어 있고, 사회적 환경은 산, 해, 별, 달과 같은 자연적 실재성을 띠고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436) 그러므로 후기 스콜라철학의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나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cam)의 유명론, 즉 보편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실재하는 것은 모두 개체라는 주장은, 근대 정치사상의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개인을 유일한 자연적 실재로 보고, 사회관계를 모두 개인의 목적의식적인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다.(436-437)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사회계약론은 고도의 ‘픽션’이며, 제도의 자연적 소여성(所與性)을 부정하고 만드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한 것이 근대정신이다.(438) 나아가 천황제 등이 자리잡을 수 있는 전근대적 인격주의에서 인간이란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 도덕이나 사회규범 같은 것이 이미 알고 있는 관계에서만 통용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두 의례와 관습에 얽매인 인간인 반면, 근대사회의 ‘인간의 발견’이란 객관적 조직이나 규칙이 ‘얼굴’을 대신하고, 인간 상호간의 직접적 · 감성적 관계가 점점 더 매개되는 관계로 바뀌는, 인격관계의 비인격화인 동시에 비인격관계의 인격화 과정이다.(439-440) 픽션의 본질은 편의를 위해 무언가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든 상대적 존재다.(440) 동시에 이런 제도나 효용이 실체화하고, 목적과 수단 사이의 끊임없는 매개를 행하지 않으면, 수단은 자기목적화하게 된다. 그것이 존재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터부시되던 천황제이다.(440-441) 한발 더 나아가 일본에서는 의회제 같은 근대적 제도마저, 일본에서 옥신각신하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위로부터 이식되었기 때문에 국민에게는 픽션으로서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실체화되는 경향이 있다.(441) 의회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나 그룹 내부의 기능적인 분업도, 실체화되기 쉽다. 그러면 분업은 할거가 되고, 전문은 자기구역이 되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기술적 관료화가 실질적 관료화로 변용된다. 이 경우 근대국가는 내부에서 아무리해도 움직이지 않는 무정부상태가 뿌리내린다.(442)
여기서 근대적 픽션을 거부하는 괴물로 파시즘을 지목한다. 근대사회의 조직 분화로 생긴 병리현상을 문화 이전의 자연성으로 복귀(피와 흙)하여 극복하려 하고, 히틀러는 참된 독일 국민의사의 표현자이며, 대중과 절대적 권위가 유기적이고 정서적으로 결합하는, 형식 일반에 반하는 무매개적 표출이라고 파시즘을 설명한다.(443) 나치는 자발적인 조직이나 그룹을 해체하고 방대한 공적인 지도자조직 하에 대중을 재편성한 것인데, 그 모습을 신화(Mythos)를 통해 은폐하고 있다. 일본은 아직 전근대적인 사회관계가 뿌리 깊게 남아있다.(444)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근대’란, ‘픽션’ 즉, 만들어진 사회다. 이런 해석은 마루야마가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자연’과 ‘작위(作爲)’를 근대적이라고 한 설명의 연장선에 있다. 이 만들어진 것은 이름뿐인 것으로 실체로부터 분리되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는 ‘형식’으로 ‘매개’된다. 마루야마가 말하는 근대성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근대가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은 ‘형식’과 ‘내용’이다. 보통 근대성 혹은 근대에 대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 중 하나 혹은 여럿을 가리킨다. 국민국가, 국민,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공업화, 상품경제, 개인의 인원에 대한 중시, 자유와 자유주의, 합리성, 민주주의. 계몽과 계몽주의 그밖에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 요는 대부분의 근대에 대한 논의는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근대란 이러이러하다는 식의 설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근대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한다. 여기에는 근대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은 이러한 내용을 담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내용성을 전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점은 비록 근대적인 것, 개념, 요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들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고 주어지면(所與性), 형식성과 매개성을 잃고, 실체성을 가지게 되어 전근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근대란 만들어진 것인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형식성과 함께 내용성을 갖추어야 한다. 당연히 마루야마의 근대에 대한 수많은 논란, 일본문학연구자의 입장 등에서 수많은 반론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이 1949년 지금은 폐간된 잡지 『展望』에 실린 글이라는 점만 기록해 두자. 이것이 마루야마 마사오가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이제 파시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를 갖춘 셈이다.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파벌의 형성에 대해서만큼은 시사점이 꽤나 많다. 학교로 구성되는 파벌, 혹은 정부의 부처에서 형성되는 파벌 등은 해당 기관이나 조직이 가지고 있는 기능과 무관하게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대나 □□부 혹은 △△국이나 ▽▽과에 어떤 실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학의 학번 구조나 고시 기수 같은 것이 이런 실체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 혹은 조직에 담당해야 하는 기능이 아닌 ‘자기목적성’을 부여하는 것이 전근대적 학벌, 파벌의 기초라는 지적은 통렬하다.
3.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제1부 제1장), 「일본파시즘의 사상과 운동」 (제1부 제2장), 「군국주의자의 정신형태」 (제1부 제3장),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 (제1부 제5장), 「'현실'주의의 함정」 (제1부 제6장), 「전전(戰戰)에 있어서 일본의 우익운동」 (제1부 제7장), 「 파시즘의 제문제」 (제2부 제3장), 「내셔널리즘 · 군국주의 · 파시즘」 (제2부 제4장). 제목에서 보이듯, 파시즘, 군국주의, 초국가주의, 일본 내셔널리즘에 대한 해부와 비판의 글들이다. 일관되게 전근대적이거나 퇴행적인 것으로 비판되는 이들 논리의 특성들을 살펴보다 보면, 기묘한 지점이 발견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근대성 비판에 있어서는 일본적인 특이성을 비판하는 데, 매우 적극적인 반면, 근대적 혹은 근대사회로의 경로나 특이성을 말할 때는 철저하게 보편적인 설명 내지 서구적인 것에 의존한다. 그는 매우 일관되게 일본 특이론, 일본 특수론을 비판한다. 이점은 1920-30년대의 일본 지식인의 일본 이해나 패전 이후 일본 지식인의 일본 이해에서도 독특한 형태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자신은 영어판 서문에서 자신이 헤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대학 입학 후 난바라 시게루(南原繁)의 세미나를 통해 만난), ‘역사는 자유의 의식을 향한 진보’라는 헤겔의 주장을 받아들임을 인정하며,(666-668) 근대적 주체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임을 시종일관 고수한다.
왜 일본인들은 ‘초국가주의’, ‘극단국가주의’의 희생양이 되었을까? 마루야마는 나치스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중성(中性)국가’에서 시작한다. 유럽의 근대국가는 국가 주권의 기초를 내용적 가치를 사상시킨 순수하게 형식적인 법 기구 위에 두고 있어서 절대군주도 내용적 정당성을 독점하기 어려웠다. 반면 메이지 근대국가는 내용적 가치의 실체에 지배근거를 두려고 했다. 정신적 군주인 미카도(천황)와 정치적 실권자인 바쿠후의 쇼오군을 일원화하는 ‘정령(政令)의 귀일(歸一)’ 과정에서 권위와 권력은 일치하게 되었다.(47-48) 일본 근대국가는 국가권력의 형식적 타당성을 의식하지 못했다. 「교육칙어」는 국가가 윤리적 실체로 가치의 독점적 결정자가 되었다. 「교육칙어」를 두고 기독교계와 일어났던 논쟁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흥분 속에서 사라졌고, 기독교계는 논쟁을 회피했으며, 신앙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다.(49-50) 또 국체는 진선미(眞善美)의 내용적 가치도 점유했다. 무엇이 국가를 위한 것인가 하는 내용은 천황과 천황의 정부에 충성하는 관리가 결정했다. 일본에는 사적인 것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50) 일본 국체론의 핵심은 주권자가 ‘무’(無)로부터의 결단자가 아니라, 주권자 자신 안에 절대적 가치(진선미의 극치)가 체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도의는 국체의 정화가 중심적 실체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데에서만 성립된다.(52) 여기서 ‘이긴 쪽이 좋다’가 ‘정의는 이긴다’와 미묘하게 교착되는 일본의 국가주의 특질이 드러난다. 진선미의 극치인 일본제국은 본질적으로 악을 행할 수 없다. 윤리와 권력은 상호이입되며, 국가주권이 윤리성과 실력성의 궁극적 원천이며, 양자는 궁극적으로 통일이며,(53) 정치적 권력은 그 기초를 윤리적 실체에 의존한다.(54) 모든 국가질서는 절대적 가치체인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연쇄적으로 구성되고, 위로부터 아래로의 지배의 근거가 천황으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는 봉건적 체제로 여기서는 오히려 주체적인 독재 관념은 생겨나기 어렵다.(59) 이런 사회에서 자유로운 주체의식은 없다. 각자가 행동의 제약을 양심이 아닌 상급자(궁극의 가치에 가까운 사람)의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 억압의 이양에 의한 정신적 균형의 유지가 일어난다.(61) 국내에서는 ‘비루한’ 인민이며 영내에서는 이등병이지만, 바깥에 나가면 황군으로서 궁극적 가치와 이어지면서 무한한 우월적 위치에 서게 된다.(62) 그렇다면, 천황은, 근세 초기 유럽의 절대군주는 스스로 질서의 옹호자로부터 그것의 작위자(Creator Pacis)로 높아졌으나, 메이지유신에서는 ‘진무(神武) 천황이 창업했던 옛날’로 되돌아간 것으로, 천황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을 이어받고, 황조(皇祖) · 황종(皇宗)의 유훈에 따라 통치하며, 헌법은 천황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통치의 홍범(洪範)을 소술(紹述)’한 것이다. 선조의 전통을 이은 것에 불과하다. 세계의 모든 국가는 종주국인 일본에 의해서 각 국가들이 신분적 질서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 세계평화이다.(63)
패전 이전 일본의 정치는 권력과 권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고, 그것은 천황이었다. 천황은 그 자신이 내용적 가지와 윤리의 실체이다. 천황의 권위와 권력은 천황의 조상으로부터 나오고, 천황이 실체이기 때문에 천황과의 거리에 따라 권위와 신분이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천황은 천황이기 때문에 천황이다. 동어반복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논리체계는 볼수록 신기하다. 일본인 사상가들에 의해, 마루야마 마사오와 같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설명되지 않았더라면, 그런 것이 근대 국민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음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나라 신학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나 있다.’ 즉, 편재성 딱 한 가지만 빼고, 거의 동일한 논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논의구조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은 잔인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한참인 지금 여당에서 벌어지는 진박, 친박, 비박, 멀박 등의 논쟁이 왜, 무엇 때문인지 조금 알게 되었다. 한국의 현 정부에 있어서 대통령이 대통령인 이유는 대통령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선거로 권력을 쟁취했지만, 대통령의 딸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 정부의 권력의 핵심가치는 대통령에게서 나오고, 그는 다른 어떤 권위도 정부 내에 인정하지 않으며, 권력 집단 내부의 이견이나 반대도 용납하지 않고, 권력과 권한을 나누지도 않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적 법과 제도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권력집단 내부의 권력 투쟁은 모두 대통령으로부터의 거리, 때로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거리로부터 말미암는다. 대통령은 의회를 통한 간접적 매개적 소통을 시도하지 않고, 전통시장으로 직접 나서서 지지자들과 직접적이고, 정서적, 체감적 소통을 추구한다. 거기에는 합리적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최근에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에서 여당을 탈당한 후보자들이 벌인 소위 '존영(尊影)' 논쟁은 그냥 혀를 찰 일만은 아니다. 그들이 관동대지진 때, 불타는 학교에서 천황의 '어진영' 부터 꺼내려다 희생된 사람들의 심리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모호성을 이용하여 지지자들을 호명하는 전략이다. 선거 국면에서 이런 말들은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대통령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이름에 '씨'자를 붙여도 막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지지자들에게 충성경쟁을 하며, 지지자들의 막연한 정서적 결합상태를 강화하고 재결속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근대적이고 교양 있게 행한다고 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4.
파시즘이라는 말의 원어는 이탈리아어로 고대 로마의 의식용 막대기의 명칭에서 왔으며, 그것이 바뀌어 '결속'을 의미하는 파쇼(fascio)라는 말이 되었다.(342) 파시즘은 극우 정당 내지 군부 · 관료 중의 반동분자에 의한 정치적 독재이며 입헌주의와 의회제의 부인, 일당제의 수립을 그 필연적인 귀결로 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유주의 · 공산주의 · 국제주의의 배격과 전체주의 · 국가 내지 민족지상주의 · 군국주의의 주창을 특징으로 하며, 독재자의 신격화와 지도자원리에 근거한 사회의 권위주의적 편성을 수반한다. 자본주의 발전정도가 낮은 곳과 근대국가 형성이 늦어 자본주의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져 사회구조가 중층적이며, 농업 부문에 봉건적 제 관계가 잔존하는 국가들에서 발생한다.(342) 근대사회의 위기가 파시즘의 온상이다.(343) 파시즘의 제1목표는 혁명의 전위조직의 파괴이며, 직접적인 테러나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이루어진다. 파시즘은 혁명세력의 억압에 머물지 않고, 혁명세력이 성장하는 모든 사회적 노선이나 채널 자체를 폐쇄시키려 한다. 파쇼화 과정이란 이데올로기에서 생활양식까지 대중을 획일화하는 것으로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통한 강제적 시멘트화(나치의 획일화(Gleichschaltung))의 과정이다.(346) 파시즘은 공포의 독재로 때때로 속죄양에게 불만을 집중시키고,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며, 합의에 의한 지배를 획일성에 의한 지배로 바꾼다.(348-349) 파시즘의 이즘이나 슬로건은 체계성이 없고, 엄청난 다양성으로 관념적인 분장을 하고 있으며, 허무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능동적 니힐리즘, 영원히 움직이는 숙명을 지닌 허무주의이다.(249-251)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일본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파시즘의 완성 단계에서 위로부터의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준비기와 성숙기를 지나 완성기로 넘어가는 변곡점에 2 · 26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이때 일본은 아래로부터의 급진 파시즘 운동에 마침표가 찍히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파시즘 혁명 내지는 쿠데타라는 형태가 아니라 기존의 정치체제의 재편성 과정을 통해 위로부터의 국가적 통제가 일방적으로 강화된다.(75) 일본 파시즘 이데올로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가족주의적 경향,(78) 둘째, 농본주의적 경향,(80) 셋째, 대아시아주의에 의한 아시아 각국의 해방(95)을 들 수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농본주의이다. 반도시적, 반공업적, 반중앙집권적 경향(83)이 그것인데,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공통되게 가진 강력한 권력의 집중과 국가통제의 강화를 향한 지향이 농본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된다.(87) 농본주의가 파시즘에서 중요해진 것은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공황이 일본에서는 농업공황으로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다.(87) 파시즘의 핵심이었던 육군 청년장교들 중 중소지주, 자작농 출신이 많았고, 군대의 정예는 농민, 그중에서도 동북의 농민들이었다.(88) 그러나 실제 군수생산력의 확충과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경제의 재편성이 파시즘의 과제인 이상, 농본이데올로기는 환상에 불과했다.(89) 그럼에도 독일 나치스와 비교해서, 일본 파시즘은 노동자를 경시했다.(92) 일본의 ‘산보(産報)운동’과 나치스의 ‘즐거움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94) 이런 일본 파시즘은 군부 및 관료라는 기존 국가기구 내부의 정치세력을 주요한 추진력으로 하여 진행되었다.(96) 동시의 파시즘 운동가는 ‘지사(志士)’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소수에 의한 관념적 이상 운동으로, 일본 파시즘 운동의 공상성 · 관념성 · 비계획성이라는 특징이 나타나며, 지사가 앞장서서 파괴행동을 하면 그 후에는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신화적인 낙관주의가 급진 파시즘 운동을 지배하고 있었다.(98) 프레다 어틀리에 따르면 “봉건시대의 낭인과 시카고 갱의 잡종”이다.(124) 일본 파시즘의 사회적 담당자들은 도시 샐러리맨, 저널리스트 등 인텔리라기 보다, 소공장주, 마을공장 공장장, 토건청부업자, 소매상점, 대목수, 소지주, 자작농 상층, 학교교원, 동사무소 관리, 하급관리, 승려, 신관 등의 사회계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103) 이 계층은 사실상 지방적 소집단에서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105) 이들의 역할은 군대에서 하사관 같은 것이었다.(107) 일본 파시즘의 역사적 발전에서 가장 큰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을 위로부터의 파쇼화가 압도했다는 점이다.(117) 일본 파시즘 최후의 단계에 의회에서 가장 반정부적 입장을 표현하고 비판한 것은 일본 파쇼화의 선구적 역할을 한 민간 우익그룹으로 훗날 반토오죠오였다는 이유로 민주주의자로 등장하기도 한다.(121) 파시즘의 아래로부터의 강도는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강도의 영향을 받으며, 일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거치지 않았음도 지적한다.(123) 메이지 이래의 절대적주의 · 과두적 지배체제가 파시즘체제로 이행한 것이다.(123)
일본 파시즘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점에 대해서 만큼은 어떤 언급도 없다. 나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여러 특징들이 연상되었다. 잘 알다시피,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노동부분의 조직화나 힘은 생각한 것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조직화는 1987년 이후에야 폭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1970년대의 공단에서의 노조조직운동, 활동가들의 노력 등을 결코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이 사회세력화되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의 주력군은 학생이었다. 그리고 이 학생 대부분은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피폐해지고 몰락해가는 농촌 출신이었다. 1980년대 시위현장에서 특히 80년대 말로 갈수록, “농촌”과 “농업” 관련 구호는 끊이지 않았다. 전농은 강력한 운동단체였다.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투쟁, 쌀 시장 개방 문제, 한미 FTA에 이르기까지 농업관련 쟁점은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핵심이었다. 농활은 신입생들의 확실한 의식화의 장이었다. 그에 버금가는 것은 5월 광주 뿐이었다. 물론 이 농본 이데올로기는 운동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어느새 유기농과 우리농산물을 앞세운 '신토불이' 광고가 광풍처럼 몰아닥치고, 식료품 가격은 오르기만 했다. 어제 광나루 근처에서 독일식 빵가게를 하나 발견했다. Brotgasse(빵골목)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한 이 빵가게에는 우리밀과 유기농산물을 쓴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나는 이런 광고를 볼 때마다 의구심이 생긴다. 도대체 왜 우리밀을 쓰는 걸까. 우리밀은 품질이 좋지도 않고, 우리밀 만으로는 좋은 독일빵을 못 만들텐데. 밀은 원산지도 아니고, 소량이 재배될 뿐 아니라 가격도 비싼데, 그래서 빵값이 비싼가. 우리 농산물은 사실상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 물결 속에 농촌 출신들이 군대에 들어갔다. 우리는 전쟁 후에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왔으며, 대학생의 상당수는 농촌 출신이었다. 한쪽은 파시즘 운동을 했고, 다른 한쪽은 민주화 운동을 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형식적인 민주화가 성립된 후, 운동권 세력은 급격하게 제도 정치권으로 편입되었다. 일부는 여당으로, 다수는 야당으로, 일부는 독자정당 운동을 하다가 여당으로 또 야당으로 들어갔다. 이들 중 상당수는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예를 들면, 지난 정부의 주역 중 몇 사람은 옛 민중당 출신이었다. 재야 출신이나 운동권 출신은 야당만 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자리를 옮기는 과정은 너무나 순조로왔다. 반면, 야당은 권력을 잡았던 지난 10년간 급격하게 기득권 세력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 모두는 이제 ‘꼰대’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 즉 민주화 운동 성공의 경험이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민주화운동의 어떤 성향에 대해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한국에 어떤 숙고해야 할 지점들을 내던진다. 2016년에 역사상 가장 어지러운 선거 공천과 선거판을 바라보면서, 이 어지러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는 오늘도 혼란스럽다. 원인은 여럿일 텐데, 그중 한두 가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5.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왜소했다. 패전 이후 재판에서 밝혀진 것처럼, 조직과 계획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독일의 위력과 필승을 맹신한 것 이외에는.(132) 지도세력의 조직성은 약하고, 상호간 분열과 정정의 불안정함은 두드러졌다.(133) 독일도 동경재판의 검사와 판사들도 일본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실제 그들은 실패의 두려움에 떨면서 돌격했고, 전쟁을 원하면서도 피하려고 했으며, 비계획적이고, 비조직적이었다.(136) 나치스 지도자는 자기 행동의 의미와 결과를 자각하면서 수행한 반면, 일본의 군국지도자는 자신의 현실의 행동이 주관적 의도를 배반해갔다.(143) 달리 말해 수단으로서의 무력행사가 무심결에 확대되어 자기목적화해 갔다.(143) 개인의 감정을 이유로 눈앞에 일어나는 명백한 사태를 표현하기도 꺼렸다.(146) 마루야마 마사오가 전범 재판의 피고들의 자기변호를 가려보니, 두 가지 논리에 다다랐다. 첫째, 기정사실에 대한 굴복, 둘째, 권한으로부터의 도피.(150) 이미 현실이 되면,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말이다.(152) 전범자들이 공통적으로 무책임을 주장하는 논거는 소추된 사항이 관제상의 형식적 권한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0) 모두들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그런 일은 해당부서나 직위의 업무가 아니라는 주장만 했다. 천황 역시도 왜소화와 병행하여 신격화되어 갔다.(172) 여기서 활약한 정치적 인간상은 '신을 모시는 가마', '관리', 무법자'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173)
마루야마 마사오가 1956년 『전중과 전후 사이』에 실린 「전쟁 책임론의 맹점」이라는 글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제3자가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는 반응들의 배경에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미국 국무부와 GHQ/SCAP에게 있다. 물론 수사적으로는 천황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지, 전쟁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어떤 일도 없는 상황에서 이들 전범들의 부인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위에서 말한 대로, 천황에게 실체성과 윤리와 도덕이 있고, 모든 다른 사람은 천황에게 가까운 거리에 있음으로써 권위와 권력이 나온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에게서 주체성을 발견하고, 권한 행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논리적 모순 아닐까.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래서인지, 지식인들의 전쟁 책임도 묻지 않고, 일본인 전체의 전쟁 책임도 일종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만 언급한다. 전 일본인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은 끝내 하지 않는다. 천황의 실체성 논의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천황도 왜소해지고, 전범들과 같은 고위 장성과 관료들도 왜소해졌는데, 그 끝에 달린 일반 국민들이나 인텔리들은 어떤 실체적 결정도, 실체적으로 책임질 행동도 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다거나, 무책임하다는 사고방식인 것인가. 이 점만은 동의가 어려웠다.
이 문제에 덧붙여서 일본인 특유의 '현실'주의 라는 사고방식을 조금 더 상세하게 지적한다. 일본인들은 현실을 소여성(所與性)으로 파악한다. 이 주어진 것은 과거의 것이 되므로 현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하게 된다.(218-219) 또 일본인의 현실은 일차원적이다.(219) 국민은 눈이 가려진 채로 수레를 끄는 말처럼 한 길의 '현실'밖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220) 또 그때그때의 지배권력이 선택하는 방향이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며, 반대파가 선택하는 방향은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221) 이런 식의 현실 이해는 언젠가 현실의 복수를 가져올 것이다.(223) 이런 식으로 현실적인 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새로운 문제의 해답에 정신을 빼앗겨서 기본적인 입장이 조금씩 이동하게 된다.(224) 중요한 것은 이전의 쟁점을 잊어버린다거나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 속에서 끊임없이 구체화하는 것이다.(225) 지식인들은 어설픈 이론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현실'의 진전에 대해서 어느 틈엔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는 이치를 만들어내서 양심을 만족시켜 버린다.(226)
험한 일이 끝나고 모든 일이 정리된 후, 그땐 현실이 그랬다는 변명은 모두가 듣고 있으며, 모두가 하는 말이다. 특히 지식인들의 입에서 끊이지 않는 말이다. 현실적인 선택이 반복되는 가운데, 기본적인 입장이 조금씩 바뀌고, 지식인은 합리화, 정당화를 시도한다.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생각을 바꾸어 버린다. 문제는 조금씩, 조금씩 생각을 바꾸어가다 보니, 원래의 출발점에서 크게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각이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25년간 광란하면서 폭주하는 한국정치를 보면서 나는 늘 내 생각을 바꾸어 온 것 같다. 그것은 아마 나만이 아닐 것이다. 정치를 외면하지 않으려면, 정치를 보는 관점을 조금씩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의 관점 변화가 큰 움직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분명 내면의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새로운 국면 속에서 쟁점을 끊임없이 구체화하면서, 자기 입장을 확인하면서,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면하지 않고, 또 현실을 수용하면서 조금씩 움직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6.
일본 내셔널리즘은 바쿠후 말기 양이(攘夷) 사상에서 시작되는데, 이 사상은 지배계급에 의한 신분적 특권유지 욕구와 관련되어 있고, 국제관계에 대한 대등의식이 없었다.(202) 물질문명과 사상을 분리하여 서양의 것을 얻고, 원리의 침윤을 막으려 했다.(203) 일본 근대화의 눈부신 성공은 근대화가 '부국강병'의 지상목적에 종속된 결과로 일본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뒤틀림 혹은 불균형이 생겨났다. 즉 국민적 해방을 국가적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렀다.(205) 요약하면, 내셔널리즘은 신분제 극복을 통한 국민(nation)의 형성으로 국민통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주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총동원 전쟁과 패전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212) 패전 이후 아시아 각국에서 내셔널리즘이 부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사회적 분해, 분산, 저변으로의 환류현상의 결과 정치의 표면에서 모습을 감추었다.(212-213) 그러나 그대로는 민주혁명과 결합된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지주가 될 수 없고, 낡은 제국적 상징을 목표로 다시 동원될 가능성도 있다.(215)
마루야마는 내셔널리즘에서 아주 일관성있게 국민형성이라는 관점을 고수한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nation)의 형성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다. 즉, 일본으로부터의 민주화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일본에서 국민형성과 내셔널리즘의 과제는 성취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어그러진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국가주의에 끌려가고, 부국강병 다시 말하면 경제성장의 논리에 압도당하며, 내부의 모순 또는 억압을 아래로 이양하는 구조는 지속된다는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다소 억지스럽지만, 그것이 국민이라는 정치적 통합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국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통합의 논리를 앞세웠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국민'이란 한국에서는 억압의 논리였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주조된 것이었다. '국민'은 한국에서는 강요되었고, 재촉받았다. 폭력과 전쟁과 이데올로기 대결의 광풍 속에서, 가난과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정치공동체는 언제나 배제의 공동체였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배제, 지역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배제, 세대와 나이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배제, 경제를 위한 양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배제, 국민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규율과 강제 그리고 배제로 다가왔다. 그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때문에 국민의 이름으로 통합을 시도할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배제의 메시지가 되었다. 식민지와 독재를 거치면서, '국민'이란 이름과 호명은 오염되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장악한 사회에서 세대 간 깊은 균열에 덧붙여 수많은 균열의 복합에 뒤덮인 2016년의 이 시점에서 통합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까? 어떤 이름으로 무엇을 부르면서 통합을 시도해야 할까?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적 기대가 도처에서 나타난다. 아마도 1950년대에 주로 글이 작성된 것이 이유일 것이다. 「서구 문화와 공산주의의 대결」 (제2부 제1장)과 「래스키의 러시아혁명관과 그 추이」 (제2부 제2장)는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노동당 이론가였던, 해롤드 래스키(Harold Laski)에 대한 서평인데, 모두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적 견해를 보여준다. 「‘스탈린 비판’에서의 정치의 논리」 (제2부 제5장)는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래스키는 『신앙, 이성, 그리고 문명』에서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가치체계로서의 볼셰비즘을 말하며 새로운 신앙으로 러시아 혁명의 의의를 역설한다. 래스키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러시아혁명의 에토스가 그 국민에게 부여한 정신적 갱생이다.(260) 마루야마도 래스키가 러시아 혁명을 신앙이자 에토스로 본데 주목하고 있다. 첫 번째 서평은 1946년이고, 『현대의 혁명에 대한 고찰』에 대한 서평은 1947년이다. 래스키는 러시아 혁명의 막대한 수확과 막대한 희생을 언급하지만, 희생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호한다.(275) 특히 볼셰비즘을 청교도주의와 비교한다.(284) 래스키는 스탈린에 대해서 다소 의구심을 가지고 있으나, 러시아 혁명을 예찬하거나 비난하기에 앞서 이해하자고 결론짓는다.(293) 스탈린 비판에 관한 글은 1957년에 쓰여졌다. 마루야마는 스탈린 비판을 이데올로기 경직성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받아들이지만,(363) 스탈린의 성격이나 무자비한 숙청에 대한 책임을 모두 스탈린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365-366) 게다가 코뮤니스트의 정통병의 원인을 러시아 정교회에서 찾기도 한다.(368) 스탈린 시대의 족적을 음미할 때, 위대한 것과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 거대한 것과 작고 비천한 것, 옮음과 오류가 공존하며, 더구나 그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인식하라고 한다.(386)
책에는 보다 많은 내용과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지만, 대략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흐루시쵸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은 평생 자유주의자로 일관했던, 좌와 우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마루야마 마사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마루야마는 대학 시절부터 영국의 정치학자 래스키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의 책을 읽고 서평을 발표하곤 했다. 래스키는 영국에서 다원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향한 인물로 영국 노동당의 이론가였다. 그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보지 못하고, 1950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사회주의에 대한 유럽과 세계의 지식인들의 생각은 격변을 겪는다. 1956년에 시도된 스탈린 격하 운동은 헝가리 사태, 중소 분쟁 등 여러 사건의 원동력이 되었다. 스탈린 격하운동은 소련 외부의 좌파 인텔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마루야마의 이 글도 그런 사태에 대한 반응인 셈이다. 마루야마의 글이 보여주는 특징이 일관성인데, 이 글에서도 그 점만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루야마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도 급변하지 않고, 다른 정황에 대한 평가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탈린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만은 시대의 판단착오이자 시대의 한계였다. 그는 소련에 대한 우호적 입장에서 중립적 입장으로 매우 천천히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일색인 사회, 미국에 의한 실질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에서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일종의 연민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동정이 아니었을까?
7.
반면, 미국의 변화에 대한 의구심 역시 두드러진다. 1950년대에 쓰여진 글들에서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마루야마는 다른 어느 나라의 파시즘 보다 미국의 파시즘을 경계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일본이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고, 미국의 변화가 곧 일본에 감염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독재자」에 대한 짤막한 논평과 일방적 핵폐기 운동에 참여했던 버트란드 러셀의 트라팔카 광장에서의 연좌농성을 언급하며 시작하는(522-524)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가 꽤나 인상적이다. 우선 그는 과연 나치 치하의 독일인들이 나치의 만행을 몰랐을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525) 괴벨스나 히믈러가 아무리 잘 막았다고 해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계가 나치로 되어 버렸다. 그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끝없이 순응했다.(526) 2014년 말에야 번역된 밀턴 마이어의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를 인용해서 안쪽에 사는 사람들은 의외로 눈에 띄지 않는, 점진적인 광경의 변화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526) “하나하나의 행위, 하나하나의 사건은 확실히 그 앞의 행위나 사건보다도 더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아주 조금 더 나빠졌을 뿐입니다”(527)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이나 트러블 메이커로 지목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도 침묵했다.(528) “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나의 국가와 나의 국민들은―일찍이 내가 태어난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그런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완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은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신을 형식과 같은 것으로 보는 잘못을 일생 동안 저질러오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증오와 공포의 세계였습니다. 게다가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국민은, 자신이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변해가는 경우에는 그 누구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529) 마루야마는 카를 슈미트의 글도 인용하는데, 서유럽의 합리주의의 오랜 전통에다가 독일인의 '뿌리뽑기 어려운' 개인주의는 십 몇 년의 탄압으로 없어질 수 있는 손쉬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독일 지식층의 매일매일의 정신생활이 표면의 미친듯이 날뛰는 파도 밑에서, 정밀한 자유를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은 현대에서 그런 '사적인 내면성'이 살고 있는 세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함을 보여준다.(531) 밀턴 마이어는 마틴 니묄러도 언급한다. 다음의 유명한 문장은 그에 의해서 알려졌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습격했을 때, 나는 다소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나치는 사회주의를 공격했다. 나의 불안은 조금 더 커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학교가, 신문이, 유태인이, 이런 식으로 잇달아 공격대상이 늘어났으며, 그때마다 나의 불안은 커졌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 나치는 교회를 공격했다. 그런데 나는 그야말로 교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533)
니묄러는 '처음에 저항하라' (Principiis obsta)와 '결말을 생각하라' (Finem respice)라는 두 개의 원칙을 내놓게 된다. 니묄러 조차 직접 자신의 발에 불이 붙기까지 역시 '그 안에 사는 사람'이었다.(533) 나치가 추구한 동질화(Gleichschaltung)이란 정통의 집중임과 동시에 이단의 강제적 집중을 의미한다.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집중캠프)라는 명칭은 상징적이다. 이 과정에서 경계지역의 사람들에게 높고 두터운 벽을 구축하도록 요구한다.(536) "나치가 행복이었다는 진실과 반나치가 불행이었다는 진실, 이 두 진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대한 사회가 품고 있는 불신과 의혹 외에는, 어떤 불신이나 시의(猜疑)를 주위에서 보지 못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 혹은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권리를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불신과 시의 외에 아무것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539)
채플린은 미국을 떠났고, 나치의 세계에서 도망쳐 온 토마스 만(Thomas Mann)도 전쟁 후 스위스로 옮아갔다. 만은 78세에 생활의 근거지를 옮기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1950년대의 미국의 1933년의 독일과 너무 닮아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결단에는 정치적인 것이 있었다. 불행한 세계 정세로 인해 그렇게 혜택받은 나라, 거대한 강대국으로 떠오른 국가의 분위기에도 마음을 조여대고, 우려를 하게 만드는 그런 변화가 닥쳐왔다. 충성이라 칭하는 순응주의(conformism)에 대한 강제, 양심에 대한 스파이 · 불신 · 심한 매도로의 교육, 훌륭하지만 (자신들의) 맘에 들지 않는 학자에 대한 여권 교부의 거부..... 이단자를 냉혹하고 무참하게 경제적 파탄으로 몰아넣는 방식―유감스럽게도 이 모든 것들이 일상적인 다반사로 되고 말았다. 자유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고 고뇌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유의 멸망을 두려워하고 있다.(540)
마루야마 마사오는 리버럴이다. "리버럴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기 바깥의 세계로부터 다양한 다른 통신(널리 바깥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의 감각에 도달하는 프로세스)을 수용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관용'(tolerant)적이라 한다면 그것은 그런 경계 영역에 사는 대다수 주민들의 자연적 심리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그런 영역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자각하고, 이미지의 교환을 저지하는 장벽의 구축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그런 '리버럴'은 오히려 처음부터 이단보다는 더 위험한 존재로 간주된다." (546-547) 리버럴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리버럴일 수밖에 없어서 리버럴이다. 한 사람의 리버럴로서 그의 삶은 정말 위안이 된다.
8.
안타깝게도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몇몇 실망감은 지울 수 없었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마루야마 마사오는 헤겔리안이고, 역사 발전을 믿으며, 일본을 구미, 그중에서서도 서유럽에서 형성된 근대성의 형성과정으로 보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패전 이전의 일본의 전근대적인 모습, 전근대가 패전 이후 일본 정치에 이어지는 데 대해 가차없이 비판한다. 문제는 전근대를 미성숙하다고 보는 지점이다. 영어판 서문에서 말하듯 자신은 계몽주의자이다.(667) 그런 입장에서 전근대, 특히 패전 이전의 전근대에 대해서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것이다. 미성숙한 주체성을 갖지 못한 그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본인의 책임 문제에서 미묘한 입장이 반복된다. 반면, 독일 나치스는 자기 책임 하에 세계대전과 대량학살을 일으켰으니, 이에 대해 채임을 져야 하고, 주체로 형성되었던 보통의 생활인으로서의 독일인과 지식인들도 순응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일본에서 특수하게 나타났던, 군국주의와 파시즘 현상,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벌인 전쟁은 전근대의 미성숙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으나, 그것이 일본인의 책임이 되는 일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며, 천황책임론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 모호한 부분이 있다. 천황 마저도 정치적 미성숙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에 협력한 일본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는 파시즘 연구에서 그들의 왜소함과 허약함을 지적하면서 간혹 언급될 뿐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파시즘은 위로부터의 파쇼화, 군부와 관료에 의해 억압적으로 자행된 파쇼화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체로서의 일본 국민이 설 자리는 없다. 아니면 마루야마 마사오의 해석처럼 일본은 패전 이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경험하지 못해 국민이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개개인의 주체로서의 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의 파시즘 형성기와 전쟁 기간 동안의 군국주의, 파시즘 지도부에 대해서만 꾸준히 언급할 뿐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에 '국민'이 형성되었지만, 근대적인 정치적 개념에 적합한 '국민' 즉, 네이션은 없었다는 것이 요지다. 흔히 말하던 역사의 발전법칙 같은 것에 의하면, 1960년 초까지 일본인의 국민통합이 이루어지지도, 국민형성도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느 때쯤 가능하며,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마루야마 자신은 늘 자기 정치학은 마루야마이즘이며, 현상 분석에서 시작된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만들어진' 국민과 '형성되어야' 하는 국민 사이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전쟁책임 문제에 대해서 일본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에 대한 인식도 없다. 이점은 마루야마 비판에서 항상 지적되는 부분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1914년 생으로 당시 식민지였던 평양의 신병훈련소에 1944년에 입대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 알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600쪽이 넘는 그의 글 어느 곳에서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 및 만주국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정한론과 대만 정벌이 딱 한 번씩 언급될 뿐이다. 아시아 신흥 내셔널리즘을 말할 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언급되기도 한다. 전쟁과 식민지 문제에서는 연합군 포로 학대(55)와 중국이나 필리핀에서의 일본군의 포악한 행동거지(직접적인 하수인은 일반 사병이라는 점이 뼈아프다고 언급, 62) 황군이 점령지에서 한 짓거리(525) 등이 한 번씩 언급되고 있을 뿐이며, "같은 학대라 하더라도 독일의 경우처럼 많은 포로의 생명을 온갖 종류의 의학적 실험재료로 삼는 것과 같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학대는 적어도 일본의 학대의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56) 한 구절을 빼고는 모두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은 1946년에 쓰여졌으므로, 백번 양보해서 일본군과 일본인의 잔학행위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치자, 그가 평양 병영에 있을 때도, 신병교육을 받느라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치자 그럼에도 그가 그 후 10여년 혹은 그 이후 일체 언급이 없는 것은 역시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과 일본인의 전쟁 시 만행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 이 모든 일은 '위로부터의 파쇼화'로 제도와 조직의 잘못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이해하는 마루야마 마사오 식 해석의 논리적 귀결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로 서지 못했고, 주체적으로 학대한 것이 아니기에, 주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해석으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전쟁책임에서 천황의 전쟁책임까지 모두 소멸해 버린다. 스가모에서 죽은 몇 명의 전범을 제외하면.
하지만 식민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이기도 하다. “내셔널리즘은 제국주의―제국주의는 내셔널리즘의 발전임과 동시에 그것의 부정이기도 하다―및 모든 형태에서 권력정치의 추진력 또는 대항력으로서 여전히 생명을 지속해갈 것으로 생각” 하고 있다.(327) 내셔널리즘이 성숙되어서, 국민국가가 강력해지면, 제국주의로 전환된다. 제국주의가 영향력을 넓혀나가고, 식민지 제국국가를 확대해 나가면, 거꾸로 다민족국자 체제 하에서 내셔널리즘이 부정된다. 내셔널리즘이 부정될 때, 식민지 다민족을 포괄하여 다양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통합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지 못하면, 제국주의가 무너진다. 고마고메 다케시는 이런 해석을 하면서 실제 교육정책으로 입증하려 한다.(『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귀결이면서, 제국주의 팽창 정책이 세계대전에서의 패배한, 혹은 원래 승리할 수 없었던 현실에서 제국이 붕괴한 일본은 전근대 내셔널리즘으로 재빨리 돌아가고 만다. ‘식민지 제국’ 일본의 과거는 마치 없었던 것인양 내어버린채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해석을 따르면, 이 전근대적 내셔널리즘은 국가우월사상이 승리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일본은 다시 내셔널리즘의 주체적 국민국가 형성과제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너무나 편리한 해석방법이지 않은가. 이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 경험이 일본 내셔널리즘에 미친, 일본 근대국가에 미친 영향들은 모두 전근대적인 특성에 흡수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수십 년간 벌어진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와 폐허 위에서 새롭게 근대를 추진해 볼 생각이었겠지만, 그것이 나름의 어떤 근대의 폐허 위였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급속하게 구미를 따라잡은 후발 근대 국민국가 일본이 아시아에서 형성한 거대한 식민지제국의 붕괴와 폐허는 패전 이후 일본 근대 재건의 기초이자 재료가 된 것이다. 패전 이후 독일과 일본에서 흔히 있었던, 부서진 집,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낡은 벽돌과 목재 중에서 쓸만한 것을 골라내어, 다시 짓는 집의 재료로 삼았던 일 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의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물음으로부터 이 문제들을 해명하고 있는 이상, 그가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일본의 근대는 '식민지'를 포함한 근대로서, '제국'으로서의 근대였으며, 식민지에 영향을 주고, 식민지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그가 주목하는 파시즘, 군국주의, 내셔널리즘은 모두 식민지배와도 관련이 있다. 식민지에서 구현된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본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지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섬들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통치했던 제국 일본에서 발생한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일본 열도의 섬들만을 대상으로 연구해서는 충분한 대답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패전국의 지식인으로써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기에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지, 다소 가혹한 느낌이 들지만, 그가 경계 밖에 있는 리버럴을 자처한 이상,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책흔들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4, No.4, 2016년 4월, 이원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