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로 미셸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 중 맨 처음 접했다. 동문선에서 박정자 역으로 나오자마자 보았으니 꽤 오래 전이다. 신선하고, 충격적이긴 했으나 오래가진 못했는데, 돌이켜 보면 사화와 국가에 대한 나의 인식이 너무 얕았기 때문인 듯하다. 《안전, 영토, 인구》에 이어,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읽고 나니, 솔직히 정치학을 전공해서 오래 공부한 나 자신이 무색하다. 난 도대체 그 시절에 무엇을 배우고 공부한 걸까. 참담한 기분도 든다. 나름 정치사상 전공인데.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한 마디로 자유주의 정치사상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복지국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아쉽게도. 푸코가 이해하는 자유주의는 폭이 넓다. 로크와 밀로 시작되는 자유주의 정치이론, 벤담 등의 경험론적 계몽론,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 켈젠이나 슈미트 같은 독일의 자유주의 법학자들, 오이켄, 폰 미제스 등 전후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 경제이론, 폰 하이예크나 프리드만 등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이론. 이들 모두를 하나로 엮어내면서 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들 모두는 18세기에 시작하여 20세기까지 이어지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커다란 논쟁 속에서 움직인다.
책을 읽는 내내 내 지식의 저장고를 더듬는다. 아, 난 지금까지 무엇을 자유주의라 생각했었지? 존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 그리고 데이비드 흄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가지는 법적 제도적 상대적 진보성.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굳이 자유주의라 생각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내용도 잘 몰랐고. 벤담이 자유주의란 인식은 부족했다. 그리고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파괴력. 이건 사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덕택에 알게 된 거지. 아, 그리고 좌파 또는 마르크스주의가 하는 자유주의 비판. 자유주의가 실제 한계와 문제가 참 많다. 그런데 비판도 좀 허당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영 막막하고, 답답하고. 아, 근데 미셸 푸코는 이걸 모두 하나로 연결하는 구나. 다른 것도 포함해서. 아, 정말 대단하다. 도대체 지난 삼백년간 자유주의가 아닌 건 뭐지. 자유주의를 벗어나거나 비판할 순 있다는 건가. 자유주의 안에서 자유주의자로 그냥 살아야 하나.
이 모두를 연결하는 열쇠말이 바로 '통치성'이다. 푸코의 이 강의를 관통하는 말 '통치성'이란, 다른 말로 '통치가능성' 또는 '통치가능화성'이다.(403) 알기 쉽게 말해서 '다스려짐', '다스려질 수 있음', '다스려지게 만들 수 있음'이다. 피통치자들은 어떻게 하면 다스려질 수 있는가? 강권이나 억압을 통해서 가능한가. 어떻게 하면 각자가 노력하게 하고, 각자가 목숨을 바치도록 충성하게 하고, 부당한 억압이나 수탈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게 할까? 어떻게 하면 각자가 스스로 억제하게 만들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모든 시대의 모든 '통치'가 고민해 온 숙제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이후, 형식상의 정치적 자유가 확보된 이후에는 더욱 큰 문제가 된다.
푸코는 이 해의 강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자유주의 해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통치받는 자들의 합리성에 기초해 규칙화하는 것"이다. "피통치자의 합리성이 곧 통치합리성에서 규칙화의 원리로 작동해야 한다."(432) 쉬운 우리말로 풀면 이렇다. 다스림 받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다스림 받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고, 그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다스림의 원칙에 따라 다스린다. 다스림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자신들을 위해 최선의 것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알고 있으며, 그 최선의 것을 다할 수 있게 해주고, 다스림 받는 각자가 그 최선의 것을 다하면 다스림 받는 자들의 총체인 시민사회, 사회체, 국민 전체가 최선을 추구하게 되고, 그 최선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다스림. 이 다스림을 '통치성'이라고 한다. 어쩐지, 정치는 물 흐르듯 한다고 하는 듯하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順天者)은 잘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逆天者)은 망한다는 말처럼도 들린다. 어쩐지 유교 사상 같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통치원칙으로 푸코는 이해관계를 제시한다. 모두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모든 이가 자신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니 거기에 불만이 있을지라도, 이를 거스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면 각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파국적 결과가 오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통제되지 않는 욕망의 충돌 그래서 우리는 도덕이 필요하고 또 개입이 필요하다.
푸코는 여기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끌어들인다. 그는 먼저 손의 섭리적 성격을 비판한 후, '보이지 않음'에 주목한다. 최종적 결과와 결말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며,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모든 이는 스스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행동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푸코는 중농주의자를, 구체적으로 케네의 경제표를 비판하며, 이들은 비록 자유방임을 주장했으나, 모든 것을 알고 간다고 착각했다고 말한다. 실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로 각자 단기적 전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며, 이점이 프랑스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향한 거대한 계획은 실패하고, 영국인들의 단기 전망이 번영을 가져온 것이라 설명한다.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할 때, 총합이 증가한다는 주장에서는 지나친 낙관주의가 보인다고 비판하기는 하지만 이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신념은 어느 의미에선 종교적이기도 하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곧 경제적 인간이 주치로 떠오른다. 법권리적인간homo judicius homo regulis가 자유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이들은 진정한 자유주의의 주체일 수 없다. 이들은 주권을 형성하기 위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권리를 일부 포기하거나, 일부 양도해야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어떤 권리도 양도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의 사회체 곧 총체가 시민사회이다. 시민사회라는 형태를 띠는 것은 법권리의 주체와 이해관계의 주체가 이중적으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자연상태에서 권리를 양도하여 형성되었다는 계약론자들을 비판하고, 자연과 사람과 사회는 처음부터 있었다고 주장할 때, 뒤르케임의 느낌도 난다. 시민사회는 국가와 대립하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모습들 중 하나가 국가이다. 푸코는 강의 곳곳에서 국가와 권력에 대한 인상적인 언급을 반복한다. 국가도 권력도 실체는 없다. 사회관계의 상호성 위에서 표출되는 것일 뿐.
이런 자유주의에 대한 정의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과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의 텍스트를 독해한 결과이다. 독일과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독해가 이 해의 강의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이 둘을 연결 짓는 고리가 폰 미제스의 제자, 폰 하이예크이다. 독일, 미국, 독일의 여정을 감행하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는 나치즘에 대한 반성 나치즘에 대한 대안이다. 나치즘이 지향하던 완전고용과 사회보장의 결합, 물론 이런 일들은 침략의 결과로 착취한 잉여로 가능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유주의, 가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를 구상했다. 2차 대전 패전 후 미군 점령지역의 독일인 경제학자들이 가격 폭등을 무릎쓰고, 가격자유화를 실시한 것이 그 예다. 물론 빠른 경제 안정을 가져오기는 했으나 그 와중에 기아선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면서 죽어 갔을런지. 그러나 이들이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히틀러가 만들어낸 사회보장을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과 케인즈주의 그리고 케네디와 존슨이 만들어놓은 사회보장과 소수자보호를 비판한다. 독일의 신자유주의가 나치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정책적 대안 이라면, 미국의 자유주의의 근간은 미국인의 신념이다. 총을 들고 다니겠다는 요즘도.
자유롭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자유롭게 만들면 계속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나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시장, 그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경쟁하는 시장을 목표로 한다. 모든 개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도록 개입한다. 곧 보조금이나 사회보장 같은 식으로 경쟁을 왜곡하는 개입을 버리고, 보조금이나 사회보험을 폐지하여, 각자가 무한 경쟁하도록 개입한다. 최저생계비 지원 정도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지원에 그쳐야한다. 신자유주의는 게임의 규칙에 개입한다. 가능한 한 최대로 무한히 경쟁하게 만든다. 경쟁은 계속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독일식 신자유주의, 곧 질서자유주의는 개인을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 최종목표이다. 모든 개인이 기업적 사고를 하고, 살아간다. 이를 위해 다양성이 필요하고, 모든 사람이 소상공업자가 되어야 하며, 국가 단위로 연금이나 보험을 사지 말고, 개인이 구매하게 해야 한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자본으로 취급한다. 노동은 시간을 팔아 임금을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다, 노동력도 하나의 자본이며, 임금은 인적자본의 소득이다. 교육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인 셈이다. 지난 정권의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 중산층일수록 자녀교육에 투자하는 이유가 보인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세대갈등은 자유주의의 갈등이 아닐까 문득 생각한다. 식민지와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다시 세워야 하는 시대는 있는 그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고전적 자유주의 동물적으로 수행되는 야만적 사회였다. 모두 죽자고 노력하고, 거기에 동의했다. 그래서 생존했다. 산업화로 부의 축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 다시 절차적 민주주의를 손에 넣고, 약간의 사회보장 위에서, 다시 자원이 희소해져 모두가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파괴 위에서 재건하던 시대와 달리 많은 사람에게 즉각적인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경쟁해야 하는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다. 무론 아직은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회의가 늘어간다. 이 시대의 지배자들에게 이보다 두려운 건 없으리라. 사탕도 흔들어보고, 힐링도 시켜보고, 자기계발도 시켜봤지만 고개를 흔들고 주저앉기 시작했다. 주저앉아 멍때리다 다른 생각을 하면 곤란하니, 컨베이어 벨트를 계속 돌린다. 때론 위협으로, 때론 보상으로. 사회보장의 확대도 크게 보면 달리는 힘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의 한계 속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성공과 그 보상을 누린 꼰대들이 새로운 세대에게 제시한 자유주의가 더 이상 보상을 제공하지 못하자. 신자유주의의 회초리를 들고 휘두르고 있다. 경쟁하라고, 경쟁하라고, 그래야 돌아간다고. 징검다리가 너무 촘촘해 보이니 돌을 빼가면서. 너무 적은가 싶으면 다시 채우고. 웅덩이를 발견하면 그런 건 메우는 식이다.
그러면 혹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까? 미셸 푸코는 사회주의에는 통치성이 없다고 말한다. 중요하니 직접 인용한다. "사회주의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국가이론이라기보다는 통치이성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통치 합리성, 즉 통치행위의 양식과 목표의 폭을 이성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측정하기 위한 척도가 사회주의에서는 정의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회주의는 역사적 합리성을 설정하거나 제기합니다. ...... 사회주의의 독자적인 통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의 통치합리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회주의는 다양한 종류의 통치성에 접속된 상태에서만 작동할 수 있습니다. ...... 사회주의는 자유주의 통치성 내에서, 자유주의 통치성과 접속되어서 존재했고, 또 실제적으로 작동했습니다."(143-144)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사회주의의 독자적 통치성, 소위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하듯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몰며, 밤에는 비평하되, 사냥꾼도, 낚시꾼도, 목동도 비평가도 되지 않는 통치성은 실현되지 않았다. 때로 자유주의를 때론 집단주의를 수용하면서 갈팡질팡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곧 신학 문제로 이어진다. 하나님나라의 통치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다스려지는가? 현실 교회에서는 하나님나라 통치성이 관철되는가? 아니다. 거기서는 원시적이고 투쟁적인 자유주의 통치성이 강단에서 설교의 이름으로 전파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설교되고 있다. "노력해라, 위로받아라. 더 노력해라. 순응해라." 교회조직을 통해 통치성이 전파되고, 강화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정교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개신교회에 급속하게 전파된 두 가지 신앙훈련괴 교회성장 방법이 있다. 하나는 QT(경건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일대일 혹은 소그룹 나눔 활동이다. 그리고 이 두 과정의 핵심은 "적용"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실제 내 삶에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여기까지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제는 적용의 내용이다. 하나님이 너(나)를 사랑하신다, 너(나)는 사랑받는 사람이다. 너(나)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너(나)의 죄를 자백해야 한다. 너(나)의 게으름, 나태, 불순종을 고백해야 한다. 너(나)는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 속에서 더욱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복과 성공이, 비록 세속적이지는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성공과 자기 만족이 주어질 것이다. 아무 문제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가? 이 모든 적용의 내용은 자기self에 대한 해석, 자기에 대한 평가, 자기에 대한 관리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의 개인을 자유주의적 주체로 정립하는, 그것을 날마다 연습하는 과정이다. 한국에 개인을 자유주의적 주체로 세워나가는 공간은 가정인가 학교인가 군대인가 아니면 사회인가? 이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연습하고,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적용 가능하게 해온 공간으로 종교기관, 그 중에서도 교회를 꼽을 수 있디. 소그룹과 QT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열풍을 불러와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휩쓴 것은 QT월간지 같은 환경의 구비 때문이라기보다, 사회의 거대한 변화에 따른 수요에 대한 응답 혹은 반응이었다. 계속되는 호황, 경제적 성장, 자본과 물적 토대의 축적, 잉여의 공유 같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더 자유주의를 내면화한 주체가 자유주의 사회에서의 생존과 성공에 더 가까웠다. 또는 반대로 별반 노력하지 않아도, 신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즉,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의 폭발과정에서 QT와 소그룹이 유행했다. 그리고 그 유행은 이제 시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데다, 더 이상 정신승리로 넘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흥했던 것들이 사회 변화에 따라 망해간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바라야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일까?
몇 주 전부터 경상북도 성주에서 사드 반대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엊그제 이대에서 평단(평생교육단과대학) 반대 시위가 자발적으로 있었다. 이 두 시위의 주체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외부 세력과 이데올로기 배제" 성주 하나 만으로는 분명치 않던 것이 이대 상황과 함께 명료해 진다. "외부 세력 배제"라는 구호는 외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구호가 아니라, 외연을 간결하게 하고 내포를 최대화하기 위한, 즉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이끌어내어 더 많은 사람이 뭉치게 하려는 전략이다. 87년 6월 항쟁에서 사용되었던 '직선제 개헌 쟁취'라는 바로 그 전략이다. 평소 시위에 거리낌이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마저도 끌어들이는 전략. 그 핵심에 '이해관계'에 대한 호소가 자리 잡았다. 다른 어떤 목소리보다 더 큰 울림을 가지는. 몇 년간 강남에 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 강남에 그 어느 지역 보다 현수막에 주장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개발과 반대. 더 많이, 더더욱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과 공공성에 대한 반대, 이 두 가지로 집약되는 강남의 일상적 현수막들은 서울과 수도권의 가난한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권리와 권익에 민감하다. 이번 소위 '이화의 난'에서 총장이 신속하게 한발 물러선 이유가 바로 이해관계의 근원적 충돌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 졸업생, 학부모의 주장은 실상 매우 타당한 것이다. 매우 많은 것을 투자해서 얻으려던 '학벌', 즉 학력자본이 희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학력자본의 소유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생존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번 싸움에서 어쩌면 학생들이 이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 없이 나선 싸움에서 누가 이길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화의 난은 성주와 비견할 수 있는 절박한 과제다. 성주군민 그 누구에게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싸드를 이고 지고 살게 아니라면. 그리고 이런 이해관계들의 연대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데올로기에게 퇴장을 요구하고 있다. 아니 자유주의는 각자가 이해관계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장과 번영을 누리는 것이니, 애초에 연대가 필요없거나, 각자가 극한까지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연대이리라. 이 이상 더 자유주의적일 수 있을까?
자유주의가 극성기에 들어서서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 속에서 내면화된 후에 우리는 아직도 자유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이라고 언급되는 것들이 실상은 변형된 자유주의 일수도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충분한 걸까.
칸트의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달의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4, No.8, 2016년 8월, 이원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