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서평]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일본, 영상, 미국: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 日本/映像/米国―共感の共同体と帝国的国民主義 』, 최정옥 역, 2008(2007) 그린비(青土社).
(사진은 기억의 터 홈페이지에서)
1.
경술국치. 더 정확히는 망해버린 구 조선의 왕실(황실)과 귀족들이 나라를 일본에 가져다 바친 날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 대대로 잘 먹고 잘 살았던 그런 날이다. 그런 날을 들어서 국치國恥라니 너무 고상한 느낌이 든다. 당시만 해도, 국왕, 자칭 황제가 주권을 가진 전제국가였지, 사람들이 주인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을 일컬어서 국치라고 할 때, 왠지 지배귀족과 지배자들의 실패 혹은 패배를 그 땅에 살고 있던 모든 구성원들에게 뒤집어씌우는 느낌이 든다. 그 땅의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놓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뒤집어 씌운 채, 가난과 헐벗음을 강요했던 주제에. 쓰는 말과 사고 방식이 다른 땅의 사람들에게 일방적 지배와 착취를 당한 식민지를 찬양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식민지 이전의 그들만의 나라를 왠지 추앙하는 듯한 말투도 영 석연치 않다.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전쟁이라는 역사의 큰 불행과 고통이 한국 사회에 남긴 자그마한 선물이 있다면, 그건 왕실을 뿌리뽑아 버린 일이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던 양반 가문들이 맥을 못추게 된 일. 물론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배집단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그 날 통감관저 터에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제막식이 있었다고 한다. 초대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으니 정말 기념할 만한 장소다. 그가 통감으로 왔던 1905년부터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었으니.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소위 ‘화해 치유 재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돈 10억엔에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기억과 과거를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완용을 비롯한 조선(구한국) 왕실과 귀족은 은사금이란 것을 받았지. 당시 돈 600만원 정도로 지금으로 따지면, 약 900억이라고 하던데. 연리 5%의 이자로 받았다지. 그것도 총독부가 지급하고, 조선 사람들의 세금으로. 100년 전이나 참 꼼꼼한 일본인들의 계산법이다. 논지가 자꾸 곁길로 나가는데. 통감관저 자리에 위안부를 위한 기억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형식과 내용의 상징성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은 왜 사죄하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가에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시원하게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전혀 사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들어보지 않으면 사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게 피해자들이 인정하지 못하는 그런 방법으로 어디까지나, 우회적인 사과와 에두른 보상을 하면서 물러나려고 한다. 그러고는 그것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나간 역사의 여러 사례와 협정을 들먹인다.
어쩌면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사죄하라. 일본은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요구를 거두어들이자는 것이 아니다.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일본은 ‘왜’ 사과하지 않는가? 아니면, 사과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인과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가? 다시 바꾸어 물으면 이렇게 된다. 일본은 ‘왜’ 한국인과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과할 수 없는가?
사카이 나오키는 이 점에 대해 꽤 충격적이면서 의미심장한 대답을 던진다. 사카이 나오키의 저술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그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도쿄대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서 일하기를 원해서, 어렵사리 영국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대처가 등장하면서, 그 일자리를 잃고 일본으로 돌아와 외국을 상대하는 일을 한다. 그 동안에 푸코와 데리다를 탐독했다. 대학 졸업 후 약 10년 후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지만, 도쿄대 대학원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학부 졸업 후 바로 진학하지 않아서 한 마디로 기수가 헷갈린다는 것. 할 수 없이 미국의 대학원을 둘러보지만, 일본에서 오는 연구자금에 의존하는 대학들에서 실망한다.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후 지금 코넬대학에 있다.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그를 꽤 유명하게 만들었다. Voices of the Past: The Status of Language in Eighteenth-Century Japanese Discourse라는 푸코 냄새가 심하게 나는 그의 학위 논문은 일본의 고학파 유학자로 고의학古義学의 창시자이며, 다산의 『논어고금주』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이토 진사이伊藤仁斎를 다루고 있다. 이후 『사산되는 일본어 일본인』, 『번역과 주체』, 『세계사의 해체』 등으로 한국에도 꽤 알려져 있다. 그는 천황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몇 안되는 일본인 학자다.
2.
『일본, 영상, 미국: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는 실상 위안부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의식구조에서 위안부 문제가 보다 큰 틀, 식민지 지배와 패전이라는 틀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설명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식민주의는 사람들 간에 계급·인종 혹은 문명 위에 차별을 만들었다. 식민주의는 식민지의 지배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에서 유리된 자신감과 우월감을 갖게 했고, 이에 반해서 식민지의 피지배층 사람들에게 과도한 불안과 열등의식을 이식했다……. 근대가 되어 신분에 의한 상하관계에서 해방되어 있었던 인간을, 우월감과 열등감을 이식함으로써 다시 민족이나 인종에 의한 상하관계의 멍에로 묶는 작업에서, 다름 아닌 ‘식민지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6) “굳이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종주국 인간에게 식민지를 잃어버린 일은 그때까지 자신의 것이었다고 생각한 남근phallus을 잃은 것이고, 이른바 거세의 충격으로 살아가는 것이다.”(7) “과거 10년 동안, 단숨에 다시 타오른 감이 있는 ‘야스쿠니문제’는 아직도 건재한 일본의 제국적 국민주의의 소재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제국의 붕괴로 인해 일본에서는 소멸했을 제국적 국민주의는, 실은 그 민족적 우월감이라는 한 단면만을 전후에도 존속시킬 수 있었다.”(8) “지구화의 물결 속에서 미국의 이른바 백인 학자 가운데 자신의 서양인성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자. 이런 사태는 중산계급의 몰락과 나란히 일어나고 있다. 즉 점차로 자신들의 서양인성을 보증하는 계급적·문명적, 나아가서 정치적인 조건을 상실해 간다고 느끼는 백인이 방대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계급격차는 점차 확대되고 있고,”(10-11) “‘서양’이나 ‘백인’의 동일성이 불확실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서양이나 백인성에 회귀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난다. 이렇게 유동하는 상황에서, 이른바 ‘서양인’이나 ‘백인’은 ‘서양으로의 회귀’를 구했고, 인종주의에서 보증된 인종의 아이덴티티의 확실함을 구했다. …… 2000년대의 일본에서 보자면, 이전에는 식민지관계로 구성되었지만 지금은 환상에 불과한, 야스쿠니 신사가 상징하는 제국 일본으로의 회귀가 현저해졌다. …… 재일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이러한 회귀와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식민지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던 사회적인 입장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 ‘식민지 지배자’라고 자인하고 있었던 자들이 일으킨 것은 바로 회귀운동이었던 것이다.”(12-13) “일본 국민은 일찍이 일본제국 하에서 식민지로 지배했던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을 선진국이라고 규정하며 [이전까지 가졌던] 식민지에 대한 존재방식을 여전히 고수했다. …… 전후 태평양 횡단적인 헤게모니 아래에서 제작된 국민적 주체성의 존재방식을 묻지 않고는, 한국이나 중국을 깔보는 그들의 고압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식민지 권력관계를 상실했을 때, 이전 식민지 지배자가 오래된 자기의 이미지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 운동이다.”(14)
요약하면, 식민지성은 차별 그 자체다. 제국을 상실하면, 우월감을 상실하는데, 이 상실감은 ‘남근거세’와 유사하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은 미국과 일본의 헤게모니 연합을 바탕으로 경제성장 속에서, 선진국이라는 국민적 우월감을, 즉 지배자 측의 식민지성을 온존시키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모두에서 중간계급이 몰락하자, 다시 제국 일본으로의 회귀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열풍과 일본의 보수화, 그리고 전쟁과 식민지 지배 책임의 부인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비밀리에 합사된 후,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 현직에서 참배한 것은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처음이다. 그는 그해 가을 한국과 중국의 항의를 받아 참배를 중지했지만, 2001년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연속된 참배로 이 문제가 아주 뜨거워졌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끝나가고, 불황으로 넘어가던 시점과 궤를 같이한다.
‘위안부’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것도 이때쯤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냉대와 사회적 비난 속에서 고난으로 가득한 삶을 살다가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한 사건이고, 기록도 많은데다, 관계자도 적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즉각 시인하지 않고, 사죄도 하지 않은 데는, 일본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가면서, 점점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점점 더 사실을 부인하면서, 계속해서 사실을 흐리고 있다. 일본의 입장은 점점 더 강경해 지고 있다. 그것이 과연 일본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사과를 반복해 왔기 때문에, 사죄에 지쳤기 때문일까.
사카이 나오키는 ‘제국적 국민주의’라는 일본의 국민적 동일성identity이 설명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그 시발점은 패전 이후 일본의 국민적 동일성identity이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패배를 다루는 법에서 서론을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으로 작동되는 사회이고, 자발적인 경쟁을 구조화하거나 유도한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 이런 경쟁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은 학력이다. 경쟁은 당연히 패배자를 낳는다. 그리고 이 패배를 어떻게 다루는 지가 바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핵심 동력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힐링이 바로 패배를 다루는 방법이고, 지금 한국 자본주의 사회는 패배를 다루는 데, 실패한 상황이다. 패배로 인해 포기하지 않기 위해, “이야기로 만든다거나, 영화화한다거나, 혹은 정치적인 집단화의 계기로 삼아야”(28) 한다. 자기계발서에는 심지어 실패를 다루는 이른바 ‘실패학’ 같은 것도 있다. “‘희망의 위기’가 사람들의 문제의식으로 부상하기 이전에도, ‘패배’는 처리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상문제”(28)라고 사카이 나오키는 지적한다. 이런 식으로 개인의 패배 문제가 중요하다면, 집단으로서의 패배, 국민으로서의 패배를 다루는 문제도 중요하다. 더욱이 그 “국민의 패배가 단순한 패전이 아니라 ‘제국의 상실’ 일 때, 사람들은 이러한 집단적인 패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29)에 흥미를 가진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패배와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연결하여, 이에 대한 설명을 모색한다.
“패전의 굴욕과 비참함을 담고 있는 다양한 경험은 일본인으로서의 동일성을 강화하기 위한 집단적 자기연민을 살찌우고 말았다.”(33)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가 집단적인 패배와 개인적 패배의 접합을 가져옴을 발견한다. 마사오 미요시(미국에서 활동한 일본학자이며, 비판적 지식인, 해리 하루투니안과 함께 활동)와 저자의 대화 중에서 실베스타 스탤론이 주연한 영화의 제목 ‘람보’는 일본어 ‘乱暴’의 음역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극 중 북베트남군의 군복은 일본제국 육군의 군복임이 지적된다.(33)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에 일본에서는 다민족주의적 보편주의 윤리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34) 물론 이것은 하나의 ‘픽션’이다. 패전 이후 일본은 단일민족의 균질성에 입각한 국민국가를 형성한다. 이것 역시 ‘픽션’이다. 이런 국가는 존재한 적이 없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 ‘공상의 조작’이 일어난다. “망각과 국민공동체를 새롭게 고쳐 만든 상상력”이 발동한다.(35) 이는 감상感傷 미학적 정서 차원에서 새로운 공상의 실천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36) 집단의 패배와 개인의 패배는 감상感傷을 통해 개인이 타인으로 집단으로 융합한다.(36) 이 공상은 우선 패전을 함께 괴로워하는 집단적 자기 연민의 공상을 준비한다. ‘공감의 공동체’는 개인과 집단(주로 국민 또는 민족)의 융합·합일 이라는 공상이 일어난다.(37)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제국적 국민주의는 “‘우리 피해자’ 공동체”로 만들어진다.(38) 패전 이후 일본에서, 베트남 전쟁 이후 그리고 9·11 이후 미국에서.
사카이 나오키는 국제연애를 다룬 영화들을 언급하면서, 이런 연애의 내러티브가 “식민지 지배자 측 남성이 현재적으로 그려진 이상화된 남성성과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지배자 측 남성이 암시하는 탈남성성임을 지적한다.”(42) “지배자=여성 대 피지배자=남성이라는 구도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43) 이런 설명이 가능한 것은 ‘국민으로서의 우리’라는 인종화된 공동성의 감정이 생겨나는 과정에서이다. J. S. 밀이 말하는 ‘국민성의 감정’의 지지를 받는다. ‘국민’, ‘민족’은 인종화된다.(44)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외국인 남성과 데이트를 하거나 함께 다니는 한국인 여성에 대해서 불특정의 한국인 남성들이 혐오발언이나 비난을 일삼는 것은 그 자체로 ‘식민성’의 반영이다. 그런 모습에서 식민주의의 경험, 강한 서양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 개인화된다. 이런 불안이나 굴욕은 ‘남근 거세’의 공포로 개인에게 현실화된다. 그리고 해당 여성에게 비난이 가해진다. 일본이나 서양의 힘이 비할 수 없이 강했던 1980년 이전에는 뒤에서 하다가, 이제 면전에서 하는 것 뿐이다.
식민지관계와 성관계의 이중적 심급에서 “여성은 행위 주체성을 박탈당해 증여과 교환에서 교환항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쉽도록 제시”된다. “여성은 인격적인 능동성을 잃고, 소유물이 되어 소유되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 속에 기입된다.” “이와 동시에 식민주의의 지배관계는 연애관계의 이면에 해당하는 강간의 비유로 귀착할 가능성이 있다.” 연애가 아니면 강간이고, 연애라면 강간이 아니다.(47) 강간이라면 그것은 어떤 남성의 소유권을 침해한 것이고, 여성에 대한 침해는 국민이나 가족에 대한 침해가 된다. “식민주의자가 강간[이라는 주제]을 기피하게 된 이유는 강간이 피지배자와의 사이에서 지배자가 권력관계, 즉 피지배자가 스스로 종속하고 있는 현실을 승인하는 관계성을 수립하는 데에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연애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어떤 종류의 동의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48) 더욱이 식민지 피지배자 “여성의 종속은 그녀 의지의 결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자의 입장을 상징하는 남성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는 자신의 자유나 독립을 희생할 것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된다.(50) “피정복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배의 관계를 승인할 수 있도록 피정복자를 유혹함으로써만, 정복자는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수립하고, 그 권력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연애의 영상은 식민지 지배자의 주권의 정통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55) ‘난징대학살’을 영어로는 ‘the Rape of Nanjing’ 즉, ‘난징의 강간’이라고 부른다.(57)
이런 해석이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기한다. “‘종군위안부문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이 만든 ‘종군위안소’를 이용한 예전의 일본 군인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 일반이 과거를 상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종군위안부문제’는 국민(민족적인 남성성)에 기반해서 동일성의 공상의 실천계를 훌륭하게 침식시킬 수 있었다. 현재 신자유주의적인 사회로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남성성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일본인일수록 ‘종군위안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국민-민족적인 남성성을 둘러싼 동일성의 공상을 침식하는 듯한 반反-공상의 비유로서 ‘종군위안부’는, 국민-민족적인 국민주의자를 깊이 모욕하는 듯한 공상을 낳는 힘을 갖고 있다.”(61) ‘종군위안부’는 그 존재 자체가 ‘일본인’의 동일성identity에 위협이 된다.
그는 미셸 푸코의 생정치(생명관리정치)를 따라 종군위안부의 존재와 위안을 설명한다. “군사적인 지배의 실천계에서 보자면, 식민지 군대의 군인과 식민지 주민의 접촉은 가장 먼저 생식기의 점막과 점막의 접촉이 전범으로 이해되어 왔다. 일본 육군이 도입한 종군위안부제도는 이러한 합리성을 극단까지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구를 관리하는 생정치가 이 경우에는 해외에 주둔하는 군대의 통제로까지 연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지배체제에서 근대적인 군사제도는 원주민과 ‘접촉한’ 군인의 점막을 관리하기 위한 방대한 위생관리조직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의 접촉이 가능한 조건이나 그 접촉의 장면 및 그 결말이 국가의 인구에 대한 관리와 보호의 합리성으로 통제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식민지 종주국의 군사제도는 생정치의 논리에 의해서 점차 통괄되어 가고, 그런 범위 내에서 자유주의가 관철되어 갔다.”(71) 특히 사카이 나오키라는 ‘위안’이라는 명칭을 파헤치면서, 점령군의 강간이 가져오는 폭력적인 저항이나 지배의 정통성에 대한 장해를 막고, “끊임없는 식민지 주민의 적의에 노출되어 있는 군인들에게 ‘위안’이란 점령지의 위험에서 해제되는 것을 의미했고, 불안에서 잠깐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고 설명한다.(74) 이런 차원에서 위안부와 위안소는 전쟁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한국, 필리핀, 일본의 성 노동자가 이를 반복해왔다. 이들 성노동자는 식민지관계를 상징하고 대표하며, 강간을 부정한다.(74-75) 여성은 미국 군인들을 향해서 선의의 징표로서 건네지는 일종의 선물이었다.(77) 그리고 이는 한국-일본-미국의 공범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관계가 성노동자 여성과 미국 군인 및 현지에 나와 있는 미국인들을 통해서 연기되었던 것이다.(81) 최근 ‘아시아 백인으로서의 일본인’의 자신감이 붕괴하는데, 이는 한국이나 동남아의 성 노동자가 기꺼이 고객에게 종속되어 있는 듯 보이게 하는 연출로 보호받았던 백인·미국인과 같은 인종·국민적인 긍지가 붕괴되는 과정과 상응하는 것이 아닐까.(84)
사카이 나오키를 통해서 비로소 위안부에 대해 일본이 그토록 격분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는 그 존재 자체가 일본인의 동일성identity의 숨통을 겨누고 있다.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그 위안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전쟁에 나선 병사의 불안. 원주민의 적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원주민의 경멸. 강간으로서만 확인할 수 있는 지배의 현실. 그 위험. 이런 국민성 내지는 국민으로서의 동일성identity가 일본을 형성하고 있다면, ‘위안부’ 문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제국의 위안부』에 등장하는 ‘강제동원’은 없었다거나, ‘위안부’와 일본 군인의 로맨스나 사랑 등의 수사rhetoric에 일본인들이 환호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자발적인 위안부는 ‘동화’의 증거이고, 식민 지배 성공의 증거다.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가 효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충실하게 정서적으로 충족시킬 방법은 없다. 반면 소녀상은 순결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동의’에 대한 부정이며, 일본군 위안소가 어떤 경우에도 강간이었음을 상징한다. 강간하는 군대는, 제국의 실패이자, 지배의 실패이다.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음도 분명하지만, 결코 철거할 수 없는 문제임도 분명해 진다. 소녀상의 철거는 일본인의 조선 지배는 그땐 그 나름대로 정당했다는 원주민 피지배층의 추인에 해당한다.
3.
사카이 나오키는 영화 『디어 헌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국민공동체 형성 능력을 간파한다. 흔히 반전영화 혹은 전쟁혐오를 그리는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에서 ‘미국인’은 훌륭하게 피해자로 전환된다. 베트남에서 포로가 되어, 러시안 룰렛 고문을 당하고, 북베트남 군인들이 학살하는 장면을 제시함으로, 영화는 “적=고문자=베트남인=아시아인=동양인=비인간”의 연쇄(122)를 만들어 베트남에서 미군은 피해자가 된다. 동시에 귀환한 미국에서도 ‘피해자’가 된다. 변화한 미국에서도 그들은 설자리가 없다. 이들은 한 바에서 미국 국가를 합창하면서 공감의 공동체, 피해자의 연민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들은 모두 잊혀진다.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부름으로써 자기연민의 정서를 공유하고, 이를 국민·민족공동체의 공함으로 투삼함으로 ‘고향’으로서의 국민·민족공동체로 회귀할 수 있다. 이렇게 노래를 불러서 개인은 국민공동체 수준에서 주체로 구성되고, 이 공동체는 자기 공동체의 외부인에 대해 피해망상적 반감을 통해 일차적으로 자기동일화를 꾀하며, 스스로를 ‘피해자’의 공동체로 간주하고, 이는 자기연민의 상호적 승인을 야기한 공감에 바탕을 둔다. “이 공동체는 자신을 외부의 비판으로부터 눈물로 절연하고 울음소리로 노래함으로써, 과거를 망각한 공동체라는 모습을 가질 수 있다.”(134-5) 미국에 대한 해석은 패전 이후 일본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일본 소설을 영화화한 「버마의 하프」는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고 피해자만 있는 상황에서 진혼을 시도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비를 없애고, 전쟁에 대한 죄책감의 원천 자체를 치환해, 보편적 인류 일반의 원죄와 그 원죄로부터의(제도적인 개혁을 포함하지 않고 끝나는)정신적 참회를 통한 종교적 구원의 서사로 전쟁을 환원”하려한다.(137-138) 이 작품에서 포로인 일본군을 찾아와 여전히 일본을 동경하는 통역으로서 원주민 노파가 등장한다. 게다가 영국군 유해를 일본식으로 납골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영국인을 아버지의 위치에 놓고, 스스로가 짝사랑하는 원주민을 연기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버마의 임팔 작전에 한반도, 타이완 등지에서 동원된 병사와 군속을 은폐한다. 반면, 영국에서 이를 해석한 「콰이강의 다리」는 자기관리와 합리적 계획성을 가진 영국인을 그린다. 또, 다리를 폭파하려는 영국인 특수부대에게 뜨거운 동경의 시선을 보내던 원주민 여자들에게 일본군이 닥쳐와 강간의 위험이 있을 때, 이를 구해내는 영국군을 그린다. 백인은 가만히 있어도 원주민이 다가와 유혹하지만, 일본인은 강간으로만 원주민 여자를 얻을 수 있다는 영미제국주의적 설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164) 이들 영화가 만들어진 1960년대에 버마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도 일본도 패배한 제국주의 였으나,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이 자화자찬하고 싶으면, 반드시 원주민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165) 원주민의 인정. 사카이 나오키는 이를 쌍형상화의 도식으로 설명한다. 원주민의 동경하는 태도, 지배자의 초연한 태도.(173) 원주민은 지배자의 나르시시스틱한 요청을 경유하며 원주민은 본래성을 획득하고, 진정한 원주민으로 인지된다.(174) 원주민은 지배자의 인지가 필요하고, 지배자는 원주민의 존경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식민지성이 존속할 수 없다. 이때 원주민과 선교사 사이에는 절대적인 낙차, 즉, 진리가 존재하며, 선교사는 따라다니는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것이 지배자의 선교사적 입장이다. 반면, 원주민은 동경과 구애를 바쳐야 한다.(178) 일본의 패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자신이 가해자였음을 망각하면서, 원주민을 잃어버린 영미 제국에게 짝사랑하는 원주민 여성의 대역을 시도한 것이라 사카이 나오키는 비판한다.(181)
미국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 악당이 찾아왔을 때, 끝까지 평화적인 태도와 견지를 유지하다가, 피해를 입은 후, 가족, 마을, 국가를 지키기 위해 비로소 막대한 폭력을 작동시키는 원리.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모든 원리는 자신의 피해자성을 분명히 하는데서 출발한다. 피해자임이 확인된 이상, 그 이전에 상대방을 괴롭혔든, 학대했든, 혹은 죽였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단절이 이루어지고, 과거의 가해에 대한 집단적 망각이 일어나며, 피해자들끼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피해자성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미국도 일본도 피해자임을 확인함으로부터 과거의 가해자임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런데 오늘날 스스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이 과거의 가해자들은 실상은 자기 스스로 존속하지 못하는 지배자들이었다. 이들은 피지배자의 동경이 필요했다. 피지배자의 짝사랑이 없이는 지배자는 폭력적이면서, 실패한 지배자가 된다. 지배의 폭력성에 대한 폭로는 지배 전체의 부당성을 입증하게 된다. 그것은 영화나 소설에서 강간으로 묘사되지만, 위안부들에게는 이것이 역할극이 아니라 삶이었다.
사카이 나오키는 영화 「박하사탕」에 대한 분석에서 주인공 김영호의 자살은 자신이 동포를 죽였다는 내전에 대한 자각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한국-일본-미국 삼국동맹의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위대’는 ‘타위대'(226) 미국을 지키기 위한 군대이다. 그렇다면 한국군은 후지이 다케시에 따르면 한국군은 일본을 지키기 위한 군대이다. 동아시아 삼각동맹 체제 하에서 한국-일본-미국의 군대는 각기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시 유사법제를 통해 자위대의 해외활동 합법화에 대해서 사카이 나오키는 “일본 식민지화의 화룡점정”(227)이라 평한다. 일본 자위대는 일본의 의지로 움직이는 군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모든 문제는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은데서 시작 되었다. 이는 처음부터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이었고, 만주국의 푸이 황제나 마찬가지 였다. 미국과 일본은 천황제와 평화헌법 조항을 통해 일본에 대한 원격지배를 달성하고, 동시에 일본에 국민주의 적극적으로 양성해, 극동을 관리하는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한다.(250-251) 이때 일본인으로 태어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일본인으로 죽을 운명이라는 자연화된 일본인이라는 범주는 국민으로서의 일본은, 민족으로서의 일본, 인종으로서의 일본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된다.(255) “‘동포’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가까운 사람들’이다. ‘동포’란 함께 취해 줄 뿐만 아니라, 취해 있는 것을 논란거리로 삼는 차갑고 각성된 시선을 갖지 않는 따뜻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즉 사이 좋은 동료인 것이다. 동포로서의 일본인.” 이런 일본인 중에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은폐한 것에 분노하는 자도 없고,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으려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본인도 없다.(258) 히로히토 천황에게 유일하게 전쟁 책임을 물은 “여성국제전범법정”을 많은 일본인은 분리된 것으로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쳤는데. 이는 국민적 공감에 기반한 것이다.(262) 부끄러움을 물리치는 분리. 응답의 책임에 대한 거부. 애초의 일본인을 유죄라고 보는 국민과 민족 집단에 대해 일본인의 무죄를 믿는 국민과 민족 집단이 있어, 여기에는 토론과 설득이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천황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인민에 대하여, 미국과 일본은 응답책무에서 면제되어 있다고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였다.”(295-296)
출발점은 히로히토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은 묻지 않는데서 출발했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에게 이는 정의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와 체제 유지의 문제였다. 동경하는 원주민을 잃어버린 미국과 일본은 일본이 원주민 역할을 자임하면서,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과거 책임을 망각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묻지 않는 ‘일본인’이라는 공감의 공동체, 제국적 국민주의가 다시금 형성되었다. 그리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학살과 피해자들은 묻혀갔다.
이들이 슬슬 자신감을 잃어가고, 보수로 다시금 인종주의로 회귀하고 있을 즈음, 위안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반응하는 일은 ‘일본인’이라는 정체성 전체를 흔드는 일로 다가왔다. 강제동원과 강간은 역할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식민주의와 지배의 실패를 의미한다. ‘일본인’이라는 공동체는 부끄러움을 받아들여야 하고, 특히 일본인 전체로서의 책임을 넘어서서, 개별적인 가해자들을 지적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학살과 전쟁범죄에 있어서 명령을 내린 시스템과 최고 권력의 책임도 중요하지만, 이를 실행한, 즉 손에 피를 묻힌 이들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 가운데서 이런 가해자들을 발견하고, 지적하고, 처벌하고, 기록하고,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히로히토 천황을 유지하고, 일본제국의 주권자였던 천황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데서 출발한 그 국민적 동일성identity는 이를 무시하고, 분리하고 덮어버리는 길밖에 없다. 정 안되면, 10억엔을 제공해서라도.
자신들을 동경하던 원주민 조선인 소녀의 시선 속에서 의미를 가졌던 제국주의 지배자의 자긍심은 그들의 손가락 앞에서 무너져 버린다.
4.
작년 12월 28일에 있었던 이른바 위안부 합의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아직 정부는 인식하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는 드러난 제국주의 지배자의 민낯에 지배자를 동경하는 원주민 통역사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자신들이 돈을 받아 스스로 집행하겠다고, 떠맡음으로.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며 폭력을 행사하기 꺼려한다고 사카이 나오키는 말한다. 조선에서는 조선인 헌병보조원들을 모집해서. 점령지 일본에서는 일본 경찰과 자위대를 통해서. 필리핀과 베트남에서도 처음에는 현지인을 동원했다. 베트남에서 남베트남인들을 통한 통치에 실패하자, 미군을 투입했다가 격렬한 저항에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말하자면 이 협의에서 정부는 일본의 잘못을 뒤치닥거리하는 일을 맡은 헌병보조원이나 마름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한일국교정상화 때, 청구권 협상에서처럼.
더욱이 일본군 위안부는 한국전쟁기 주로 좌익혐의자를 강제 동원했던 한국군 위안부, 미군 주둔지의 기지촌을 거쳐, 월남전의 성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긴 연속성을 가진다. 일본에서 패전 후 미군을 위한 ‘팡팡’이라는 이름의 성노동자가 이어진 것처럼. 그리고 동남아시아 각지의 한국인들은 현지 성매매 업소의 여전히 큰 고객이다. 식민주의의 굴욕을 또 다른 원주민을 찾아 얄팍하게 재현하려 한다. 그들의 동경을 돈으로 사기 위해.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미국에서든 회복해야 하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각자는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고, 다른 이의 부끄러움을 지적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해야, 또 다른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죄의식에 기반한 부끄러움이야 말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달의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4, No.9, 2016년 9월, 이원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