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답을 기대하며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한국에 미국이란 무엇인가? 물론, 복잡하고 깊으며 어려운 질문이다. 연상되는 것들을 떠올려 본다. 미군정, 혈맹, 동반자, 제국주의, 주한미군, 헐리우드, 아이폰, 마이크로소프트, 경제적 종속, 이민, 초대 대통령 이승만, 역사에 취미가 있다면 제네럴 셔먼 호나 신미양요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처럼 미국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오래되고 깊다. 1906년 한국 최초로 워싱턴 DC를 배경으로 삼은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가 나온 이래, 한국어로 된 미국에 관련된 문헌은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사람들은 미국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려 줄을 서고 있고, 미국 유학과 이민을 시도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오늘도 새로운 꿈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중국의 부상, 동아시아와 동유럽 문제에서 미국의 영향력 감소, 미국경제의 부진 등 많은 위험요소가 있지만, 세계적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위상을 무시하는 것은 아직까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미국을 본격적으로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한국을 논하려 하는데, 시각만 바꾸려고 한다. 질문을 달리 던져 보자. “미국에 한국이란 무엇인가?” 일단 한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으니, 이 질문은 다시 “미국에 남한이란 무엇이며, 북한이란 무엇인가?”로 분리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래 하나였던 전통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데는, 2차대전 이후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미국의 책임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1945년 이전부터, 미국이 한반도의 상황을 비교적 엄중하게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정황 증거를 알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광대한 식민지 영토를 지배하는 것이 묵인되던 2차대전 이전의 국제정세 분위기 속에서 먼저 파악될 필요가 있다.

1910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가, 국제 열강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카츠라-태프트 밀약(1905)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영유하고,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미국에게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화는 예상되기는 했지만 아직 먼 후일의 일이었고, 미국은 국내 문제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통상이었는데,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에서 불타버린 사건은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의 산물이었다. 1866년의 이 불행한 사건은 한국인과 미국인이 (적대적이나마) 대면 교류를 벌인 첫 번째 사례일 것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조상이 이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일병합을 전후한 시기의 미국의 대한(對韓) 여론이 부정적이었다는 것 역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은 외교력이 강했으며, 대미 로비를 철저하게 했고,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와 같은 사람을 고용해 “한일병합은 필연이며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떠들고 다니도록 했다. 물론 스티븐스는 일본의 로비가 아니었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사실로 믿은 확신범이었을 것이다. 친일적 분위기는 소수의 로비스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당시 미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철저하게 일본 편을 들었고, “조선인들은 자기네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고 하며 공공연히 한국인들을 능멸했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을 당혹케 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정치적 상황을 되돌릴 힘은 없었다. 1차대전 직전의 제국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한국 병합이라는 행동을 제어할 세력은 없었던 것이다.

 

20세기 초반 내내 미국인들에게 한국 문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고, 국제법상으로 일본의 영토로 인정되었을 것이다. (한일병합조약의 근본적 불법성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하지 않는다) 약간의 지하자원, 개신교 선교를 위한 호조건(好條件)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한국이 미국인들을 이끌 만한 유인(誘因)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이 현실화되면서부터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에게, 한반도는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였음이 분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내내 일본과 미국은 정상적 외교관계를 유지했고, 심지어 중국 내륙에 있던 선교사와 상인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기 시작하는, 1937년의 중일전쟁 개시 이후에도 그랬다. 미국-일본 양 세력은, 서로를 무시하거나 전면공격하기에는 너무나도 커져버린, 상호간에 두려운 상대였던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국제 정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진 것은, 1948년의 북한 공산정권, 1949년의 중국 대륙 공산정권 수립 이후이다. 1945년 해방 직후에 연합군의 밀약으로 이루어진 남북의 분단은, 남한을 유라시아 대륙에서 “섬 아닌 섬”으로 고립시켰다. 이후 남한을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묶어놓는 것은, 자존심 면에서나 극동 영향력이라는 면에서나, 미국에게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미국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때부터였고, 1948년 “자발적 친미파”이자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오랜 인생을 살았던 이승만이 한국(남한)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으로 증가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절대적인 군사원조를 감행했고, 오늘날까지 수만 명의 주한미군은 남한 땅에 주둔하며 매년 한국군과 합동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로마는 제국(帝國)이다”라는 정도의 의미에서라면, 제국주의 국가임에 분명하다. 예컨대 제국기의 로마는 오늘날의 이란에 해당하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다. 마찬가지로 2차대전을 전후로 미국은,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일본,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을 군사 공격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제국 수준의 국제문제 개입국가로 변모했다. 한국전쟁도 그러한 개입 중의 하나였다. 그 필연적인 결과의 하나로, 미국의 세계 각 지역에 대한 학문은 놀라운 수준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예컨대 미국은 일본학, 중동학 등 아시아학 연구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과거에 혹은 현재까지, 미국에 군사적 위협을 가한 세력이나,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관심의 결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미국인의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대한 계기가 한국전쟁이며, 지금도 미국 내 한국학의 가장 활성화된 분야 중 하나가, 핵 문제와 관련된 북한학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한국학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이후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 특히 순수 학문으로서 한국학 연구의 시작은, 일본학이나 중동학 등에 비해 극히 초라했으며, 어떠한 장기 계획이나 재정적 지원을 통해 연구자가 양성된 것도 아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1975)의 저자이기도 하며, 미국인 한국학 연구자의 대표자라 할, 제임스 팔레(1934~2006) 전(前) 워싱턴대학 교수가 학자로 성장한 사례를 살펴보면, 그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유대계 미국인으로 본래 하버드에서 화학을 전공했다가 적성이 맞지 않아 미국사로 학사학위를 받고, 미국 군사영어학교에서 1년간 한국어를 배운 뒤 주한미군(1957~58)으로 근무했다. 이후 동아시아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1959년 예일대학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한국사로 학위논문을 지도할 수 있는 학자가 없었다. 부득이 그는 일본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1959년 일본에 머물던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 교수가 하버드로 돌아와 한국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1960년 하버드로 옮겼다.

제임스 팔레의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되는 에드워드 와그너는, 1941년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가 미군에 입대해, 1946년부터 2년간 한국의 미군정 문관으로 외교업무에 종사했으며, 이후 귀국하여 하버드에서 동아시아학으로 195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깊어, 1953년부터 2년간 일본 텐리대학(天理大学)으로 건너가 경성제대 교수를 지냈던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享)에게 한국사를 지도받기까지 했다. 이런 에드워드 와그너가 1959년에 하버드로 돌아가 처음으로 맞이한 제자가, “미국 최초의 본격적 한국사 전문 연구자”가 되는 제임스 팔레인 셈이다. 팔레가 예일에서 일본사로 석사를 받은 뒤, 하버드로 가서 한국사를 전공하겠다고 하자, 예일의 일본인 교수가 “한국학은 미래가 없다”며 말렸다고 하는데, 1960년 당시의 한국 사정을 감안하면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다. 만일 팔레가 일본인 교수의 말을 듣고 예일에 남아 일본사로 박사를 했다면, 미국의 한국사 연구는 그만큼 더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팔레가 한때 일본사를 전공했다는 사실이 한국사 연구자로서 결함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애당초 미국의 대학들은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 연구를 지역학의 관점에서 수행해 왔으며, 기본적으로 외국사(外國史)라는 관점에서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를 별다른 경계의식 없이 다룬다. 미국 내 중국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존 페어뱅크(1907~1997)나, 일본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에드윈 라이샤워(1910~1990) 같은 이들은, 개별 국가사의 관점에 한정하여 중국사나 일본사를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시각에서 동아시아 전반을 살피며, 개별 국가의 역사적 현상을 다룰 때에도 자연스럽게 비교론적 시각을 도입한다. 근대사의 경우 한, 중, 일 3국의 관련성은 특히 20세기 초반에는 거의 습합에 가까울 정도로 “적대적이지만 밀접한 교류”를 했기 때문에, 이러한 미국인들의 연구 방법론은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며, 동아시아 각국의 연구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기도 하다. 제임스 팔레의 대표작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도 마찬가지다. 비교사적 시각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조선 왕조의 권력구조가 지니는 특징을 자연스럽게 중국,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결론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에 한정하여, 제임스 팔레의 한국사 연구가 지니는 특성과 강점을 소개하고, 그러한 학문적 성과가 탄생하게 된 계기를 밝혀보려 한다. 팔레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과정을 수료한 뒤, 한국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1962년에는 포드재단의 도움을 얻어 일본에서 조사를 했고, 이때 본격적으로 근대 초기의 한일관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해방 이후 상당 기간에 걸쳐, 아니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경성제국대학에서 이루어진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 성과(혹은 왜곡 결과)는, 완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 의한 고대사의 왜곡, 조선시대의 정체(停滯) 이론, 뒤떨어진 민족성론 등은 분명히 경계해야 하겠지만, 실증을 앞세운 그들의 치밀한 기초 자료조사나, {조선사} 등 사료정리 작업은, 한국사학계의 근대화(近代化)에 최소한 “부정적으로라도” 기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임스 팔레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래서 중요하다.

팔레가 1년에 걸쳐 보았다는 타보하시 키요시의 저술이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경성: 조선총독부 중추원, 1940)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최근 일조각에서 일부 번역이 되었음). 타보하시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를 지냈으며, 1933년부터 조선총독부가 한국사를 총정리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어 {조선사}의 근대편을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이 방대한 저술에서 조선, 중국, 일본의 일차 사료를 철저하게 섭렵하고, 한국이 일본과 국제정세의 압박을 받아 개항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학자는 본래 자기 학문의 실존적 동기를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팔레가 한국사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일본을 거쳤다는 점, 그 자신 일본과 총력전을 치렀던 미국의 시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의 한 축으로 일본이 설정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며 한국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더 피부로 체감하면서, 팔레는 아마도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항”이라는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운명에 치명적으로 된) 사건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을 법하다.

그후 팔레는 한국사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민간인의 신분으로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 1963~65년간 한국의 규장각에서 자료를 모은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한우근(1915~1999,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로부터 한문 자료에 관한 자문을 받았고, (2015년 현재 한국 국사편찬위원장인) 유영익 등과도 교류했던 듯하다. 특히 그는 한우근으로부터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국외자로서의 거리감과 객관성을 장점으로 잘 살려보라”는 격려를 받았으며, 한국사 연구라는 미지의 길로 나아가는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그는 한문과 일본어, 한국어로 된 관련 한국사 사료와 저술들을 수집, 독파, 해석, 정리하여, 조선시대 한국의 정치권력 구조와 정책 결정과정을 이른바 “대원군 집권기(1864~1873)”를 중심으로 연구한,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내놓았다. 한국사 연구를 위해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한 지 15년만의 일이다.

나는 제임스 팔레의 한국사 연구를 특징짓는 조건으로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싶다. (1) 간접적 이해 당사자, 즉 조상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2) 한국인들이 대체로 공유하게 마련인 일본에 대한 편견과 피해의식이 없다. (3) 정치사․행정사를 다루면서도 역사에 미친 경제의 역할, 즉 경제사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4) 역사를 정치사, 경제사, 제도사 등 개별적 분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총체(總體)로 본다. (1)은 외국인 학자로서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나, 그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는 대담에서 “유태 문화 속에서 자란 나는 그에 대해 알게 모르게 하나의 선입견을 갖게 되었을 것인데, 이런 배경이 전혀 없는 생소한 분야를 택해 편견 없이 연구해 보고 싶었다(한홍구, 위의 글, 221면)”고 고백한다. 물론 “그 생소한 분야가 왜 하필 한국이었나?”에 대한 물음 앞에서는, 다소 우연적이고 운명적인 해답밖에 주어질 수 없겠지만, 젊은 팔레의 학문적 열정과 소질을 실현하는 데에 “한국사(韓國史)”라는 대상은 충분히 미지의 것이자, 연구할 만한 깊이와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이 점은 팔레 개인에게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2)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조금 더 미묘한 문제이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방금 나는 팔레의 연구가 정치사를 중심에 놓고서도 경제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통계를 활용하고 수치 자료와 객관적 증거를 엄밀하게 따지는 미국적 실용주의 학문 풍토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이 점은 한국인의 한국사 연구와 팔레의 연구를 결정적으로 변별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학자를 포함한 상당수 한국인들은, 한국사가 자기 역사이고 자기 것이니,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들이며,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도 자기 생각이 옳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특히 외국인이 다른 견해를 제출하면, “외국 사람이 뭘 안다고”라며 발끈하기까지 한다. 팔레를 포함해 그의 선배인 와그너, 후배이자 동료뻘이 되는 브루스 커밍스(1943~) 등의 연구(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가 한국에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선별적으로 추출되어 물의를 일으켜 왔던” 현상은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에 대한 지식은 대체로 왜곡되거나 축소된 것들이 많다. 식민사관의 영향도 있고, 고대사에 대한 연구 성과의 부족, 일본에 의한 주체적 역사의 왜곡, 조선시대 성리학적 역사관이 미친 영향 등 매우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 때문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객관적이고 밋밋한 제도의 역사로 한정되고, 이념 문제까지 불거지게 되면, 역사 연구의 문제의식은 더욱 퇴행하게 된다. 근대화가 늦어져 불행한 식민 지배의 트라우마를 겪은 한국인들은, 해방 이후 자본주의 맹아론을 확대 해석하면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고, 그러한 논의의 근거를 정밀하게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실증에 무너지기 쉬운 관념적인 역사관”이 지배했던 셈이다. 예를 들자. 일부 한국사학계에서는 17세기 이후 신분의 구별이 약화됐고, 그 원인은 상업과 시장제도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팔레는 이러한 결론이 앞서는 서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동을 건다: “이 시기에 노동력 부족문제, 노동수요, 도시와 농촌 사이의 임금격차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는 아직 제출돼 있지 않다(p.90).” 

팔레는 자신의 저술에서 위와 같은 언급을 자주 하는데, 이것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태도에 대한 일종의 간접적 비판으로 작심하고 하는 말들일 것이다. 어떤 주장을 펴려면 분명한 근거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팔레가 조선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한국인 학자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담담하다. 그는 “한 사회의 총인구에서 노예(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30%를 넘으면 노예제 사회로 볼 수 있고,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 역시 노예제 사회였다”고 받아친다. 마르크스주의식의 “고대 노예제”와 같은 개념, 혹은 한국 사회의 발달이 지체되었음을 주장하기 위한 개념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 연구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사회의 성격을 이념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움직이는 세력의 실상을 드러내고, 권력의 작동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권력은 궁극적으로 원초적인 힘이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문명 속에서 어떤 이념의 탈을 쓰고 있게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팔레가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이라는 책에서 성취해 낸 가장 중요한 성과는,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힘과 그것의 붕괴과정을, 성리학적 명분이라는 외피를 뚫고 생생하게 포착해낸 데 있다.

그의 책은 대원군 시대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1864~1873)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그의 학문적 야심은 매우 컸다. 애당초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이라는 책의 제목부터가 “여간 큰 것”이 아니다. 다소 과감하게 추정해 본다면, 500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된 조선왕조의 불과 10년을 다루면서, 이렇게 거창한 제목을 붙인 저자의 의도는, 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한 절대적 확신이 아니고서는 설명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팔레의 이러한 확신에는 근거가 있다. 나는 앞에서 그가 한국사를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했다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언급했지만, 연구대상의 선정 문제에서까지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제3세계의 한 나라로서 한국이 지닌 특수한 운명, 즉 비교적 오래 안정적으로 지속된 신분제 농업국가가, 외세의 일격에 주체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신흥열강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 원인을 궁금하게 여겼던 것 같다. 다음 언급은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그의 연구가 지니는 궁극적 문제의식으로 보인다.

조선이 일본에 궁극적으로 병합된 데 대한 주요한 책임은 외세 즉 제국주의 세력에게 돌려져야 하겠지만, 19세기 후반 근대세계의 요구에 적응해야 할 조선의 역량이 조선왕조(1392~1910)의 각별한 안정성에 기인하는 몇 가지 요인들에 의해 방해받았던 것도 분명하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안정성은, 대체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부구조와, 귀족적이고 위계적인 사회 시스템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산출된 “평형 상태”의 산물이었다. (p.4)

그는 조선왕조 뿐만 아니라, 왕권이 전반적으로 약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로 한국사 전체의 특성이라고 보는데, 이러한 관점은 동아시아 인근국의 역사와 비교를 통해 얻어진 시각이다.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역대 어떤 왕조보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이룩하긴 했지만, 그 체제의 권위가 전국 단위의 경제 및 지방행정 전체에 이르기까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는 못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정부(조정)는 양반 귀족들에게 징세권을 철저히 집행하지 못했고, 엄청난 면세(免稅)를 허용했다. 그 결과는 재정부족으로 이어졌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문제는 심각해졌다. 양반 귀족의 면세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부 수입의 증대도 농민의 곤궁 해소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17세기 이후 일부 급진적 중농주의 실학 사상가들은 토지의 전면적인 국유화와 재분배를 주장했으나, 이는 기득권의 저항 앞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대원군의 집권기는 조선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실제로 대원군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재수립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처음에는 (1) 특권 양반층의 토지 사유의 면세로 인해 농민들이 세부담을 떠안는 “사회적 부정의”를 교정하는 것과, (2) 양반 귀족들의 세력에 억눌린 왕실의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노렸다. 그러나 팔레에 따르면 대원군 체제 역시 양반 특권층과 전면전을 벌일 행정적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했는데, 그 증거가 철저한 양전(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양반층의 사유지를 조사하여 공정하게 과세한다는 재정목표는 끝내 달성되지 못했고, 대원군은 서원 및 부속토지 몰수, 호포세 징수 등 부분적인 조치만을 취했다. 그래도 필요한 만큼의 세입이 증대되지 않자, 당백전 주조와 같은 변칙적인 통화정책으로 수입의 직접적 증대를 노렸다. 물론 이런 정책은 통제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패했고, 상업에 적대적인 대다수 양반 귀족들의 반발을 샀으며, 그 대표자인 최익현의 상소 등 반발이 빗발쳤다. 마침내 대원군의 아들 고종마저 그들에게 공감하면서 대원군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마침내 1873년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났다.

 

대원군 집권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이 시기에 서양과 일본 세력의 직접적인 개항 위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잇따른 침입(병인․신미양요, 1866; 1871)은 조선사회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심각한 위협과 공포로 다가왔으며, 동시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7)을 거치며 “천황제를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재조직되고 있었다. 팔레는 조선왕조가 일본처럼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로 변모하는 데 성공했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믿은 것 같지만, 대원군의 권위조차도 기존의 중앙 정부로 하여금 전면적이고 전국적인 징세․징병을 위한 행정력을 발휘하게 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처럼 허약한 조선의 왕권은, 역설적으로, 조선왕조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토지소유 양반 귀족들이 체제에 불만을 갖지 않는 원인이 되었고, 조선왕조의 장기지속(500년 이상)에 기여했다고 본다. 팔레는 이러한 조선왕조의 행정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묘사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심혈을 기울여 분석하는 핵심 내용의 하나는, “비효율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조선의 징세구조”였다. 그가 보기에 중앙정부가 약체화한 가장 큰 이유는, 사유지에 대한 효과적인 과세 실패에 있었다. 특히 국내적으로 위기가 고조되고 국외적으로 거대한 도전이 있었을 때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러한 비효율적 체제의 원흉은, 공고하게 사적 토지 소유를 고수하던 양반 귀족들이며, 이들은 중앙정부의 재정적 개입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봉건 귀족”에 가까웠다. “사유지는 직접 과세의 대상”이라는 법조문은 유명무실했고, 중앙 관료구조는 토지 세수(稅收)를 중앙이 통제하는 데 어떤 보장책도 제공하지 못했다(p.58) 앞서 지적했듯이, 대원군조차 이러한 양반 토지 소유자들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꺼렸고, 기부 강요(원납전), 통행세 신설(문세), 명목가치만 높은 통화 발행(당백전) 등, “지엽적이고 부작용이 심하며 당장 실행하기 쉬운 정책수단”에만 의존하고 말았다.

앞에서 나는 “정의롭지 못한 징세구조”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은 어떤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팔레 자신의 확신임에 틀림없다. 저자가 보기에, 조선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였고, 그 증거는 징세구조에 있었다. 저자의 어조는 일관되게 학자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곳곳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과도한 세부담과 상층의 광범한 면세 실태에 대한 의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부정의(不正義)의 원인을 행정의 무능에서 찾고 있다. 조선 정부의 세입이 적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과세할 수 있는 토지의 등록율이 낮았고, 등록된 토지의 세율 역시 지나치게 낮고 역진적(regressive)이라는 데 있었다. 역진적이란 말은, “부유한 사람에게 세율이 낮고, 가난한 사람에게 세율이 높다”는 뜻이다. 왜 그랬는가? 조선 초기에 토질에 따라 세율을 달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했지만, 임병양란을 겪으며 황무지가 증가하고 양전(토지조사)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세율은 결당 4두로 고정되었다. 1결의 곡식 수확량은 질 낮은 토지의 경우 150두부터, 비옥한 토지의 경우 900두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었는데, 양반 귀족들이 비옥한 토지를 거의 독점했던 현실에 비춰보면, 이러한 세제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이 뜯어가는” 역진적 구조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징세구조의 또다른 왜곡 현상은 군역에 있었다. 조선사회는 기본적으로 상비군을 인정하지 않는 병농일치의 이상을 국방의 기본방침으로 했으며, 군역은 점차 평민들이 실제로 복무하는 군사의 비용을 지원하기 위한 군포(軍布) 납부로 대체되었다. 군역은 기본적으로 양반이 면제되고 평민만이 부담했는데, 양반들이 내세운 논거는 “사회적 신분구별과 직능의 차별을 없애는 것은 사회와 도덕적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며, 위계야말로 오륜(五倫)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위선적이고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주장이었다(p.95).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신분제도가 동요해 군역의 대상이 되는 평민들의 절대 인구수가 줄었다. 평민들의 인구비율이 줄면서, 평민들에게만 부과되는 군포 자체가 또 하나의 “역진적인 세금”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흔히 1750년의 균역법(均役法)은 군포의 양을 2필에서 1필로 줄인 획기적인 제도처럼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 제도는 양반들의 군포 면제 특권은 손도 대지 못했다. 평민들 역시 자기들 나름대로 관전(官田)이나 서원전(書院田) 등에 자발적으로 편입되는 등, 군포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했다. 설상가상으로, 군포 납부자 등록과 징수에 책임을 지고 있는 하급 관리들은 부패했고, 군적(軍籍)은 실제 가용 병력의 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상태로 되고 말았다(p.91).

물론 1750년의 군포 개혁에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포의 양을 줄임과 함께 군포를 마을 단위로 납부하는 이른바 동포(洞布)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이로써 부분적으로나마 양반들도 어느 정도 군포의 부담을 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저자는, 1870년 대원군 정부가 신분에 관계없이 호별로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戶布)를 도입한 것(이는 사실상 양반들에게 군포를 물리는 것을 의미했음)이, 그다지 혁명적 조치가 아니라고 본다. 대원군은 양반계급을 파괴하거나 신분체를 철폐하는 근본적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정책수단으로서만 호포를 이용했다. 양반들이 군포를 내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긴다면, 소속된 노비의 이름으로 내는 것도 허용했다. 근본적으로 양반의 특권을 위해 “평등주의적 이상주의나 중앙정부의 재정확충이라는 목표”를 희생한 기본 구도는, 1750년의 균역법이나 1870년의 호포 도입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왕조의 징세구조 왜곡으로 인한 부작용이 정점을 찍고, 국가 전체를 거대한 위선의 체제로 만든 수치스러운 제도는 환곡제도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 팔레가 조선의 환곡사업 문제를 제기하고 분석, 문제점을 폭로하는 서술을 읽으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국외자에게 자기의 치부를 철저하게 노출당한 수치심에 비유할 수 있을까? 저자 역시, 본책에서는 온건하게 서술했지만, 비교적 개인 감정을 노출할 수 있었던 정년 기념 인터뷰에서는, 환곡 제도를 “마피아의 짓”이라는 극렬한 어구로 비판했다(한홍구, 위의 글, 214면). 도대체 어떤 점이 문제였고, 왜 문제가 일어난 것인가? 환곡은 본래 흉년에 가난한 농민을 구휼하기 위한 대출 제도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기본 특징으로 자리잡은 (양반 귀족들의 특권 유지를 위한) 역진적 세율구조는 국가 재정수입의 위축을 가져왔고, 대원군 시기 이전부터 정부 재정은 한계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대원군 시기 이전부터 중앙정부는 (양반의 특권을 건드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세입원을 필사적으로 추구했으며, 유교적 가치와 감수성에 저촉됨에도 불구하고 환곡 제도의 이자(利子)로 부족한 세입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민들을 구휼하는 복지사업으로 시작된 환곡 제도가, 농민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일갈은, 내가 어떤 한국사 관련 논문을 읽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정책에 내재한 도덕적 모순을 감추기 위해, 정부는 사실상 일종의 새로운 세금을 창출해놓고도, “구휼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허구를 창조했다. 중앙정부의 관료들 역시 환곡제도의 해악은 부패 탓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를 속였다. (p.132)

조선왕조 초기 의창제도는 농민들에게 곡식을 이자없이 빌려주었다. 1423년 새로운 규정에서는 창고 관리 및 비축시 손실(모곡)을 메울 목적으로 2%의 이율에 해당하는 경비 납부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농민들은 과도한 수탈 탓에 원금도 이자도 갚을 수가 없었다(p.135). 정부당국도 차차 낮은 이자로는 비축곡 유지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 15세기 후반에는 환곡의 이율을 10%로 현실화(인상)했다. 17세기 초반에는 모곡의 10%, 즉 원곡의 1%를 기록수수료(회록) 명목으로 호조(戶曹,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할당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부가 환곡이 순수한 구휼수단이 아닌 세입의 원천이라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16~17세기 전환기에 전란을 겪으면서 세입은 더욱 줄었고, 정부의 각 기관이나 군부대는 운용자금을 자체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비축미를 강제로 대출하고 이자를 받는 대부사업에 다투어 뛰어들게 되었다. 환곡의 이자가 세입의 원천으로 너무나 중요해진 탓에 정부는 환곡제도를 포기할 수 없었으며, 환곡의 양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1807년에 이르면 국가 전체의 환곡량은 기록상으로 999만 석에 달하게 되었다(p.138)

물론, 이 수치는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허구이다. 정부는 환곡을 위한 비축곡을 대출하고 연간 10%를 이자로 상환받는 데 만족했으며, 비축곡의 양은 서류상으로만 유지됐던 것이다. 구휼을 위한 비축 제도는 허물어졌으나, 정부는 매년 10%의 이자를 징수할 수만 있다면 현실은 눈감았다. 당연하게도, 1800년 이후 전국이 빈번한 기근으로 고통받을 때 정부는 빈민들의 구휼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다(p.140). 상업과 화폐경제를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하는 유교적 감성으로 세워진 조선 왕조에서, 정부가 앞장서 돈놀이를 해야 했던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왜 일어난 것일까? 이유는 이미 말했다. 환곡 제도를 없애면 국가 재정이 파탄나기 때문이었다. 대부제도로 변질된 환곡을 없애고 재정을 건전화하려면 권력을 가진 양반층의 토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정부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다. 양반 귀족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강고하고 역진적인 조세구조”로 말미암아, 유교적 가르침에서 사악한 것으로 매도당한 돈놀이라는 극단적이고 수치스러운 재정 수단을 활용하도록, 정부가 내몰린 것이다(p.141).

대원군 정부는 1864년 모든 환곡을 회수한 뒤, 향후 환곡의 원금과 이자 회수에 지체하는 관료들은 처벌을 받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었으며, 해결책도 될 수 없었다. 1866년 정부는 마침내 대부 곡식을 회수하여 환곡자금을 재적립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기존의 부채를 탕감하며, 6월 22일에는 고종이 직접 나서 왕실경비 30만 냥을 환곡자금으로 쓰도록 쾌척하는 쇼를 연출하기까지 했다. 물론 언발에 오줌누기였지만, 토지 직접세와 같은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전시성 조치조차 불가피했던 것이다(p.153) 같은 해 10월, 병인양요라는 전대미문의 서양세력 침입과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중앙정부의 재정확충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위기 타개를 위해 대원군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양반의 특권 회수가 아닌, 명목보다 100배 절상된 화폐 “당백전(當百錢)”의 도입이었다. 물론 엄청난 물가 상승이 뒤따랐고, 재정확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구조개혁을 하지 않고 금융조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실패의 교훈은, 경기부양을 위해 손쉬운 중앙은행 금리인하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경제정책을 연상케 하여,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다.

대원군이 재정확충을 위해 행했던 거의 모든 정책은 근본적인 것이 못되었음에도, 그조차 양반계급에는 특권의 침해로 여겨졌다. 마침내 최익현 등 유생들은 대원군의 정책에 극렬하게 반발하는 상소를 올렸고, 1873년 대원군은 정계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에 따라 나라의 운명은, 불과 21세의 “우유부단하고 소심하며, 아는 것이라곤 유교 경전밖에 없는” 고종(高宗)의 취약한 리더십에 맡겨지게 되었다. 사태는 당시 양반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위협은 일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현실적인 위협이 일본 측에서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보내온 국서(國書)의 수령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국서에서 일본 국왕을 “천황”이라고 호칭한 것이 무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의 태도를 건방지다고 여겨, 일본의 구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한국을 무력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비등하고 있었다. 

1875년 9월 강화도 일대를 무단 정찰하던 일본군함 운양호가 조선 포대에게 발견되어 포격을 받자 응사하고(운양호 사건), 이를 빌미로 일본인들이 조선의 개항 요구를 하는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됐다. 1876년 2월 초에는 쿠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무력시위를 했으며, 친선조약(국서 접수)과 통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협박을 가하였다. 소심했던 고종은 현상유지와 더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았고, 마침내 온건파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에 조인한다(강화도 조약).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국서 접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10년간의 논란이, 대원군의 퇴진과 리더십 약화를 틈타 일방적인 일본의 요구 관철로 끝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 “조선의 양반귀족 지배 체제”의 운명은, 일시적인 시간상의 완급은 있었으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과 일본에 의한 강요된 개혁으로 붕괴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나는 국문학 연구자, 특히 고전문학 연구자로서, 한때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왜 조선에는, 서구적인 의미의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나오지 않았는가? 이러한 질문을, 서구적 시선으로 동양을 판단하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식 문제제기”라고 비판해도 좋다. 그런 반응에 대해서는, ‘리얼리즘’ 같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말을 빼고, 담백하게 “왜 조선시대에는 당대 사회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묘사, 분석하는 소설 작품이 나오지 않았는가?”라고 다시 질문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의 의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충실한 대답인 것이다. 왜인가? 지금까지 제임스 팔레의 논의를 따라가며 살펴보았듯이, 조선 사회는 특히 후기로 갈수록 큰 문제에 봉착해 있었고, 그로 인한 갈등은 심각하며 결과는 엄청났다. 때마침 조선 후기는 국문소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왕정복고 시대를 생생하게 알기 위해서는, 역사책이 아니라 발자크의 소설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이에 상응하여, 제임스 팔레가 묘파한 것과 같은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가 권할 수 있는 조선 후기의 고전소설이 있는가? 단언컨대, 없다. <구운몽>은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과 아무 상관없는 연애소설이며,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등의 가문소설은 좁디좁은 남녀관계와 그 공식화인 혼인의 문제만을 무한 확장하며 재생산된다. 송사(訟事) 등을 다룬 한문소설에서 일부 사회문제가 언급되기도 하나, 사회 전체의 전형(典型)을 창조한다는 의식 같은 것은 없었고, 철저히 사례 제시로 일관한다.

 

왜일까? 나는 엉뚱하게도, 제임스 팔레의 이 딱딱한 연구서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정독하며, 그 이유를 조금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도 이훈상 교수의 한국어 번역으로 책을 통독한 적이 있으나, 최근 느낀 바 있어 영어 원본을 찾아 정독했다. 우리 조상의 이야기를 남의 언어로 읽는 낯설음에, 부족한 영어 실력에, 모르는 사항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읽은 탓에, 한달 이상의 시간을 꼬박 소모해야 했다. 정말 희생이 컸다. 그러나 물론, 소중한 깨달음도 있었다. 하버드 동아시아 총서로 나온 제임스 팔레의 이 무미건조한 듯 보이는 학술서가, 나에게는 대원군 시기의 10년간에 벌어진 온갖 사회현상을 보여주는, 마치 활동사진이나 활극(活劇)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레 교수는 정말 글을 잘 쓴다. 이 말은 단순한 글재주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적 현실을 움직이는 주요한 힘들을 포착하고, 그 힘이 입고 있는 외피를 묘사하고, 각 힘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영미권의 저술을 많이 접한 편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으나, 팔레 교수가 특별히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영미권의 역사 연구서가 이런 정도의 수준을 갖추고 있는 거라면, 이는 “영어라는 학술어의 힘”이라고 확대해석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

팔레 교수의 글 솜씨는, 단순한 수필 쓰기의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학술적 글쓰기라는 엄격한 형식으로 뒷받침된다.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의 참고문헌은, 한문, 영어, 한국어, 일본어로 된 문헌들로 빼곡이 차 있다. 거기에는 한국인 학자로서 직면하기 부끄러운 사실도 있다. 단언컨대, 팔레 교수의 한문 실력은 나보다 훨씬 우수할 것이다. 사학자와 국문학자의 차이만은 아니다. 연륜의 차이만도 아니다. 학문적 엄밀성과 연구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부끄럽다고 말하려는 것은, “미국인보다 못한 나의 형편없는 한문 실력” 같은 게 아니다. 앞에서 나는 환곡 제도의 부패상을 분석하는 팔레 교수의 탁월한 서술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러한 분석의 근거가 되는 사료(史料)가 무엇인지 아는가? 아마 독자들이 알면 놀랄 것이다. 전통적인 인문학 중심의 한국 사학계가 경제사에 약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통계 자료 등을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사학자들은 대부분, 사학과 출신의 전통적 인문학자들이 아니라, 경제학과 출신의 사회과학도들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국인들은 1975년까지 조선시대의 재정 문제, 환곡 문제를 수량적․실증적으로 종합 검토한 성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팔레 교수는 그러한 성과물을 이용해서 자기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가 직접 재정문제를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팔레가 참조한 자료를 만든 자는 누구인가?

정답은 조선총독부이다. 팔레 교수는 환곡 문제를 포함한 조선시대의 재정문제를 분석할 때, {이조시대의 재정(李朝時代の財政)}(경성: 조선총독부, 1936)을 포함한 몇몇 일본인들의 손을 거친 자료들에 의존한다. 현재 나로서는 이 자료들의 객관적 가치나 조사방식의 신뢰성 등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다만 팔레 교수도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이 자료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사태의 전체적 흐름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합리성을 띤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팔레 교수는 정년 대담에서 미국 내 한국학 연구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묘사한 바 있다. 한문은 물론 한국어와 일본어까지 공부해야 하고, 미래도 불투명하여, 한국학 연구자의 이혼율이 높다는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는다. 애당초 한국학자로서 팔레 교수의 삶 자체도, 어떤 계획이나 필연에 의해서 꾸려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개인적 삶은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누구보다 성실했으며, 1997년에는 미국 아시아학회로부터 저술상을 받는 등, 수고에 대한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모든 길은 거의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참조한 많은 원전 사료들은, 불가피하게 일본인들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전 경성제대 교수 타보하시 키요시(田保橋潔)의 연구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사정을 알게 된 우리로서는, 이제 한국학이 어떤 “한국인들만의 리그”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한국학이 국제적으로 유망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한국학은 옛날에도 척박했고, 지금도 척박하긴 마찬가지다. 자료 정리는 충분히 되어 있지 않고, 실증적인 자료를 보강하고자 해도 조선총독부 등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들부터가 눈에 띈다. 오직 연구 인력의 수만 조금 늘었을 따름이다. 팔레 교수는 1986년 전신마비를 겪은 뒤에도 유형원 등 실학자 연구를 계속했고, 마지막까지 케임브리지 한국사 총서를 집필하는 등, 글쓰기에 매달렸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한국 바깥에서 한국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은, 영어로 된 한국학 관계 논저를 한 편이라도 더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비참한 이야기다. 비교하기 부끄럽고 슬프지만, 영어로 된 일본학 저술의 양을, 한국학의 그것과 비교해 보라. 팔레 교수의 옛 예일 석사 시절 일본인 지도교수가 “한국학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의 의미가 금방 이해될 것이다.

한국은 전통 사회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발자크가 조선 후기에 살았더라면 엄청나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발자크가 한국어로 된 사회소설을 쓸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한국어는 당시에 설화나 이야기책, 노래가사 정도를 기록하고, 한문의 토(吐)를 달고, 부녀자들을 수신자나 발신자로 하는 언문편지 기록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사회적 갈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글로 옮기는 일은, 고급 지식이 대중에게 보급되는 정치적 시민혁명, 혹은 그에 준하는 정신혁명(종교개혁으로 인한 성서 자국어화 등) 이후에야 가능하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사회적 갈등들, 양반귀족들의 탐욕으로 인한 재정의 붕괴, 역진적인 세금구조로 인한 농민들의 고통, 이자놀이가 되어버린 환곡제도 등은 그 자체로 근대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으나, 전통 한국에는 그러한 사태를 기록할 물적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시민혁명은 고사하고, 자국어 글쓰기 교육이 필요하다는 자각조차, 조선시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인프라를 갖춘 영어는, 자기 문화권과 아무 관계도 없는 지역의 사회현상일지라도, 그것이 사회현상인 이상, 정밀하게 기록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최초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미국에게 한국이란 무엇일까? 그저 작은, 제국의 한 관할권으로, 꽤 말썽 많은 공간일 뿐일지 모른다. 그 이상의 의미를 기대할 필요도 없다. 제임스 팔레가 증언하는 한국학의 여건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는가. 그는 정년 대담에서 자기 제자 두 명을 미 중앙정보국(CIA)에 빼앗겼다고 투덜댔다. 겉보기에는 투덜댐이지만, 약간의 자랑스러움도 엿보인다. 그게 미국에서 한국학의 역할이고 위상이다. 그럼 반대로, 한국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어떤 보편적인 척도, 그러니까 어떤 “스탠다드”일 것이다. 내가 한국사에 관한 어떤 저술보다도 제임스 팔레의 책에서 가장 깊고 생생한 배움을 얻었던 까닭은, 그것이 가장 잘 학술어로 잘 다듬어진 근대어, 미국의 언어인 영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영어를 잘해서도 아니고, 영어가 본래부터 우수한 언어라서도 아니다. 영어는 근대사회의 언어로 오랫동안 실험을 거쳤고, 그래서 잘 다듬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거시적인 세계 역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역시 하나의 우연일 뿐이다. 한국의 한국학자들이, 제임스 팔레와 같은 훌륭한 학자의 업적을, 외국어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몰라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4, 2015년 4월,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