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 리우의 Translingual Practice(1994)는 2005년에 한국어로 번역(『언어횡단적 실천』)되었고, 그의The Clash of Empires(2004)는 2016년에 한국어로 번역(『충돌하는 제국』)1)되었다. 『언어횡단적 실천』에서 저자는 ‘번역의 등가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중심으로 20세기 중국의 현대문학을 재조명한다. 그는 등가어의 존재에 대한 기존의 논쟁들에서 벗어나 “‘번역의 정황’에 대한 연구 그리고 최초 언어간 접촉에 뒤따르는 담론적 실천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는 이론적 문제”2)에 주목한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나온 『충돌하는 제국』은 마찬가지로 번역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보다 앞선 19세기 대영 제국과 청 제국의 충돌에 대해 논의한다. 저자는 서론에서 “19세기 ‘주권 상상sovereign thinking’에 있어서 ‘이질문화 간의 유산hetero-cultural legacy’에 대한 연구”가 이 책의 주제이며, 따라서 “도덕과 정감이 근대 주권 사상에 개입하는 순간과 방법”에 주목한다고 말한다.(p. 17) 저자는 이를 위해 19세기의 다양한 역사적 순간을 가로질러 유의미한 번역어의 등장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추적하고, 그 속에서 주체성과 주권의 문제를 사유한다.
서론(1장)에서 저자는 제국과 그 주권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검토하고, 기호학에 기초한 제국 읽기의 방법론적 토대를 논술한다. 그리고 2장과 3장에서는 톈진조약에서 사용을 금지한 한자 夷에 주목한다. 18세기 말에 매카트니를 비롯한 영국의 사절단에게 고두를 요구한 사건이나,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톈진조약의 제51조에서 외국인에 대해 한자 夷의 사용을 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중화중심주의의 발현과 이에 대한 서구의 심리적 반발로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번역어로서 夷/Barbarian의 문제는 보다 복잡한 역사적·인식론적 사건이며, 국제정치의 차원에서 기호학적 전환을 보여준다. 4장에서는 헨리 휘턴의 『국제법 원리』를 번역한 『만국공법』을 통해 근대의 주권 이념과 국제법 번역에 대해 분석하고, 5장에서는 1894년 영미 여성 선교사들이 자희태후에게 신약성서를 헌정한 사건을 통해 젠더 정치의 시각에서 19세기의 주권 사유 방식을 관찰한다. 다음으로 6장에서는 『마씨문통』에서 중국어의 주권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욕망을 읽어낸다. 그는 역사 자료에 대한 일종의 기호학적 분석을 통해 중국과 영국이라는 두 제국의 충돌을 그려내며, 이를 통해 기존의 역사서술에서 은폐된 제국 주체의 욕망과 갈등을 보여준다..
2. 초기호와 직시어의 주체
19세기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국가와 제국 열강이 회합하여 해상 신호, 도로 신호, 전신 부호, 그리고 기타 기호체계를 조정하기 위한 구속력 있는 조약을 체결”(p. 35)했다. 따라서 근대 제국의 조우는 서로 다른 기호 체계가 만나는 기호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기호학적 연구는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론이다. 리디아 리우는 제국에 대한 기호학적 독해를 위해 퍼스의 기호학 개념―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바탕으로 ‘초기호’의 개념을 제안한다. 퍼스에 따르면 상징은 “약정된 관습 혹은 용법을 통해 그 의미와 연계”되고, “자연언어는 가장 완벽한 상징 기호체계”(p. 37)이다. 퍼스는 이 개념의 그리스어 어원을 근거로 그것의 의미를 “더불어 함께 던지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보았다. 리디아 리우는 퍼스가 그리스어 어원을 ‘계약’ 혹은 ‘협약’에 해당하는 영어와 대등한 관계 속에 “함께 던져넣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상징’으로부터 “언어기호”가 아닌 ‘초기호(super-sign, 衍指符號)’의 개념을 끌어낸다. ‘초기호’는 “개별 낱말이 아니라 이질문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문화적인 의미사슬”(p. 39)이며, “특정한 언어 현상의 의미화과정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 이상의 언어체계를 필요로 한다.”(p. 40) 그것은 “한 언어 단위를 운용할 때 동시에 그 단어의 의미를 다른 한 외국어 혹은 여러 외국어를 향해 던짐으로써―이러한 과정을 은폐된 ‘함께 던져짐’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언어횡단적 언설과 글쓰기에서 기호가 운용되는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pp. 40∼41) 즉 “夷/barbarian”과 같은 초기호를 통해 대영 제국과 청 제국의 충돌은 하나의 기호 사건이 되고, 번역의 등가성이 아닌 번역 행위에 내포된 주체의 실천적 양상에 대한 물음이 가능해진다.
퍼스의 ‘상징’에서 ‘초기호’의 개념이 도출된다면, ‘지표’는 상호 주체적 소통의 공포를 해명하는 인식론적 기초가 된다. 하지만 리디아 리우가 말하는 ‘지표’는 퍼스가 말한 ‘지표’의 개념적 의미보다, 그러한 기호에 내포된 직시성과 폭력적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프라이데이에게 총은 두려운 존재인데, 리디아 리우는 이 이야기로부터 “총의 힘이 다른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물질적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포와 인간 의도에 대한 기호로서의 지표성에 있었다”(p. 45)고 말한다. 이 때 ‘나’와 ‘너’로 구분되는 직시적 호칭의 상호성은 상호 주체성과 함께 지배-피지배의 통치구조도 만들어낸다. 즉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영국인 로빈슨 크루소가 일인칭 ‘나’의 지위를 점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 타자의 지위를 제멋대로 규정하고 명명하며 자신에 복속시킴으로써 스스로 주권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p. 47) 저자는 주권에 대한 푸코의 사유에 근대 주체성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주권은 결코 지나가버린 구시대의 것이 아니라, 권력 무의식의 폭력적 구조화 속에서 일정한 지위를 점하고 있으며 근대 주체성의 작동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있다”(p. 55)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초기호’를 매개로 19세기 국제정치에서 제국의 주권 주체와 그 기저에 놓인 식민주의적 폭력성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3. 초기호 ‘夷/barbarian’과 제국 주체의 불안
1858년에 체결되 중영의 톈진 조약에서는 영문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제51조 (1), 이후 ‘I/夷/barbarian’은 수도에서든 지방에서든 중국 당국에 의해 발행되는 공식적인 문서에서 영국 관리 혹은 신민에 대한 지칭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p. 72) 그리고 제50조에서는 “영문본과 중문본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가 발생할 경우, 영국 정부는 영문본의 의미를 정확한 의미로 간주한다”(p. 74)고 규정한다. 리디아 리우는 “초기호 ‘夷/barbarian’의 참신성은 소쉬르가 말한 기의와 기표 관계의 이질언어의 간언어적 변화를 통해 夷 자에 대한 이전의 만주어 해석을 와해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어 가운데 夷 자 어원의 생명을 종결시켜 제51조의 사용 금지 하에 그 모습을 사라지게 한다는 점에 있다”(p. 81)고 말한다.
리디아 리우는 중국과 영국의 역사적 기록물에서 “夷/barbarian”을 둘러싼 논쟁의 기원과 그 전형을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로버트 모리슨의 『화영자전』에서 ‘夷人’은 ‘foreigner’로 번역되었고, 1831년 청 제국의 칙령에 대한 번역에서 ‘夷商’은 ‘foreign merchant’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1832년에 상하이에 도착한 린지의 로드 애머스트 호에서 통역관 선교사였던 귀츨라프는 자신의 일기에서 夷 자의 사용에 대해 문제 삼는다.3) 그리고 린지가 夷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자, 오기태는 『맹자』를 인용―순은 동이 사람이고, 문왕은 서융 사람이다―하여 그것이 지리적 방위 개념이자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린지는 이에 대해 다시 소식의 「王者不治夷狄論」을 인용을 근거로, “누군가를 夷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 만蠻이나 맥貊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夷를 영국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체면體面’을 훼손하는 일이자, 우리 국민을 화나게 하는 것이며, 결국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p. 92)이라고 반박한다. 이 뿐만 아니라 네이피어의 통역사가 ‘夷目’을 “야만인의 눈barbarian eye”로 번역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네이피어의 후임인 엘리엇이 “稟/petitions”의 형식으로 청 정부에 서류를 보낸 것에 대해 파머스턴이 비판을 하기도 했다.
리디아 리우는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의 담론 유형을 구성하며, 그 속에서 “서구는 타자의 언어에서 자신이 ‘야만인’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그동안 유럽이 식민지 타자를 호칭하던 ‘야만인’ 담론에 위기를 초래”(p. 94)했다고 말한다. “夷 자는 바로 식민지적인 호칭 논리의 아포리아적인 붕괴와 역의 적용방식을 보여준다.”(p. 123) 유럽의 야만인 담론은 “유럽이 식민지의 타자를 명명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권 주체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지시태의 기능”(p. 122)을 하고 있었으며, ‘야만인’의 개념은 자연권 정신에 기초한 잠재적 상처 의식을 내포한다. 즉 제국의 주체는 자유로운 여행, 무역, 선교의 권리를 가지며, 이에 대한 원주민의 반대는 주체에 대한 상처이자, 폭력적 충돌의 근거가 된다. “夷/barbarian”이라는 초기호는 그러한 제국의 주권 주체에 대한 인식이 역으로 전도될 위협을 초래한 것이다.4)
비록 톈진조약을 통해 ‘夷’의 공식적인 사용은 금지되었으나, 일반 대중들의 대화에서는 夷 라는 표현의 사용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특히 민간에서는 외국인을 ‘판구이(番鬼)’나 ‘구이쯔(鬼子)’로 불렀는데, 이러한 모욕적 호칭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1840년대 이후부터 보이며, 저자는 아편전쟁이 그러한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는 분수령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p. 176) 이러한 호칭을 둘러싼 일화들이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데, 이에 대한 영국인들의 불안과 반발은 그것이 “친숙한 식민지 담론에 대한 모종의 왜곡 혹은 전도”이며, “타자의 언어 속에 있는 그들의 불안한 자아상과 맞서 싸워야”(p. 186) 했기 때문이다. 리디아 리우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에 빗대어 주권 주체는 “자신이 타자에게 투사하는 바로 그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공포를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론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p. 188)고 말한다.
4. 국제법 번역과 국제 정치의 변화
초기호 “夷/barbarian”를 통해 “대영 제국의 주권 주체가 어떻게 자신 안의 타자의 유령과 싸우면서 자신의 완전성, 긍정성, 그리고 실제성을 불러내려 했는지”(p. 191) 살펴보았다면, 4장에서는 국제법의 번역에서 주권 주체가 실제성을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1836년에 출판된 헨리 휘턴의 『국제법 원리』는 19세기에 가장 인기 있던 국제법 텍스트 가운데 하나였으며,(p. 191)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중국어(『만국공법』, 1864), 영어로 번역되었다. 리디아 리우는 국제법의 중국어 번역이 텍스트 차원, 외교적 차원과 함께 인식론적 사건으로서 삼중적인 사건을 구성한다고 말한다.(p. 194) 이는 번역자, 외교관 그리고 선교사라는 삼중 역할을 수행한 번역자 마틴의 정체성과도 상응한다. 또한 저자는 이에 대한 연구가 “19세기 중국의 국제법 참여”와 “구미에서 수정본이 발간·유통되는 과정”(p. 200)이라는 의미의 순환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만국공법』의 번역과 관련된 역사적 서신과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논쟁과 번역과정을 재구성한다. 특히 강조되는 것은 마틴이 번역과정에서 사용한 어려운 신조어들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권리權利, right’이다. ‘權利’는 신조어로서 모호한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리디아 리우는 “‘권’과 ‘리’의 ‘과잉’적인 의미들은 바로 원어인 영어 ‘right’ 자체의 모호성을 완전히 반사시켜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조합 양식을 통해 그 의미를 정련해낼 수 있었다”고 파악한다. 즉 ‘right’의 번역어로 조어된 ‘權利’가 반대로 원어인 ‘right’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다시 말해 “특권”, “권력”, “권세”와 관계된 ‘權’의 의미, 그리고 “이해관계”, “이익”, “계산”을 연상시키는 ‘利’의 의미는 ‘right’의 번역어로서 던져질 때에 제거되지만, 그것들은 “영어의 원의를 교란시킴으로써 초기호를 계속 괴롭히기 위해 되돌아올 가능성이 있고, 자기도 모르게 ‘권리’ 혹은 ‘인권’이라는 단어를 ‘특권’과 ‘특혜’ 등 그것이 억압하는 ‘다른’ 의미로 이끌 수도 있다.”(p. 224)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권리’의 ‘과잉’된 의미가 국제법의 실천 속에서 ‘권리’ 담론의 역사적 메시지를 더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한편 마틴은 번역 과정에서 “‘자연법’을 ‘성법性法’으로 번역했으며, 때로는 ‘자연지법自然之法’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정법’은 이와 대조적으로 ‘공법公法’(이 단어는 또 ‘국제법’과 ‘국제공법’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고도 했다)으로 번역되고, 가끔 ‘율법律法’으로 번역되기도 했다.”(pp. 225∼226) 송명이학의 핵심적인 관념은 국제법과 중국의 지적 전통 사이에 철학적 공약성을 마련하였으며, 이것은 “국제법의 보편주의적 목표에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5. 젠더 정치: 빅토리아 여왕과 자희태후
제5장에서는 젠더 정치의 시각에서 19세기의 주권 사유 방식을 고찰한다. 1894년 2월 상하이선교사회의에서 여성 선교사들은 자희태후의 생일을 맞이하여 성경을 선물하고자 한다. 각종 귀금속으로 치장된 성경이 헌정되고, 자희태후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남경의 비단, 큰 새틴, 바느질 도구, 손수건(p. 262) 등을 하사한다. 저자는 19세기 말 미국의 여성참정권운동과 관련지어 이 사건을 해석하는데, 대표적인 여성참정권운동의 지도자인 엘리자베스 스탠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주체성과 자주성에 대한 초기 페미니스트의 상상이 식민주의적 주체성 관념에 상당히 빚지고 있음”(p. 268)을 밝힌다. 스탠턴이 강연에서 언급한 “여성 프라이데이와 함께 있는 상상적인 여성 로빈슨 크루소”는 그 식민주의적 주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리디아 리우는 여성 선교사들이 선물 헌정이 “보편적인 여성성을 군주의 신체와 상징적으로 일치시키는 수사적 행위”이자,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확실한 주권 주체로서 상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희태후는 “여성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본래 위치인 젠더화된 공간으로 돌아가게 함과 동시에 여성의 의무를 환기시키는 의미에서 그 ‘사소한 여성 용품들’을 하사했던 것”(p. 281)이다.
구훙밍은 청 제국의 주권 상상을 젠더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또 하나의 단서다. 그는 1857년 남양의 화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13세 때 대부인 스코틀랜드인 포브스 브라운을 따라 에든버러로 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유럽 인문학에 몰두했으며, 히브리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외국어를 배웠다. 1881년 마건충이 싱가포르와 페낭을 지날 때 구훙밍과 만나 3일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그 이후 중국으로 이주하여 1885년에는 총독 장지동의 통역 비서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싱가포르 식민지 정부의 관료로부터 청조로 전향했으며, 그것은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리디아 리우는 그의 이동이 “식민지를 떠나는 방법으로 식민지민의 굴욕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고, “청 왕조에 대한 구훙밍의 감정적 애착은 민족주의로 가장한, 식민지적인 처지에 대한 부정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p. 293)고 평가한다. 이러한 구훙밍의 모습은 빅토리아 여왕과 자희태후가 지니는 의미의 내적 연계를 드러내며, “굴욕적인 식민지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훙밍은 존엄한 주권의 전형이 되고자 중국으로 이주했으며, 아울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국모 및 스스로 선택한 모국을 지키기 위해 바쳤다”고 볼 수 있다.
6. 주권 콤플렉스와 19세기 언어학적 전환
구훙밍을 통해 식민지 거주민의 주권 콤플렉스가 표출되는 특수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6장에서는 이러한 주권 상상과 주권 콤플렉스가 어떻게 “근대 학술과 학과의 성립에 개입하게 되는지” 검토한다. 마건충은 라틴어 문법을 바탕으로 고대 한어의 문법적 체계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것은 “국제 언어에서 인도유럽어의 문법과 동등한 중국어의 주권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서”(p. 335)였다.
19세기의 언어학은 인도유럽어족의 공통 기원이라는 가설에 기초하여 “모든 원시적인 언어가 단음절어이며, 그중 오직 일부만이 어형 변화와 격 변화를 통해 복잡한 형식으로 전개되어갔다고 추론했다.”(p. 312) 신학 이론에서의 원시 언어는 “기원적이고 정통적이며, 권위적인 언어”였으니, 이제는 “종족의 열등성에 따른 후진적인 언어”로 격하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어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전도되었다. 리디아 리우는 인도유럽어의 우수성을 강조한 휘트니의 글에서 “언어를 문법과 동일시하는 그의 언어관”(p. 314)을 읽어낸다. 휘트니를 비롯한 많은 서구 학자들이 실제 중국 고전 텍스트의 번역 과정에서 중국어 문장의 문법적 표지들을 부정함으로써 서구어의 원시적인 타자를 표상하게 된다. 그리고 휘트니는 자연주의 언어관에 반대하여 언어공동체의 승인을 바탕으로 한 기호의 관념을 제안하였는데, 이러한 “사물들 사이의 자연적 연계성의 부정은 세계의 언어 영토에 제국적인 욕망과 전망을 투사하고자 했던 언어 이론과 연관이 있다.”(p. 324)
리디아 리우는 마건충의 『마씨문통』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중국 고대 한어에 관해 중국어로 쓰인 최초의 종합 문법서일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의 비참한 상황, 19세기의 군사적 정복과 언어학의 공모 관계, 그리고 그 비참한 상황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강력하게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마건충은 “고대 한어도 굴절어와 어형(격) 변화에 손색이 없는 언어 구조와 문법 구조, 그리고 형식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p. 335)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서구어의 문법적 틀을 중국어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알랭 페이로브에 따르면 “『포르루아얄 문법학』(『일반이성문법』)은 『마씨문통』에서의 개념화를 위해 근본적인 철학의 틀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p. 334) 보다 구체적으로 리디아 리우는 『마씨문통』이 초기호 “字/word”를 확립함으로써 중국어의 문법 체계를 정리했다고 본다. 하지만 ‘자字’와 ‘word’ 사이에는 의미의 편차가 존재하며, “字/word”라는 초기호는 ‘문자’와 ‘언어’ 사이의 긴장을 심화시켰고, ‘字’라는 개념이 외국어의 타자로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7. 문제제기: 개념의 창조와 한계
『충돌하는 제국』은 방대한 자료와,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해 기호학적 사건 속에서 두 제국의 충돌을 고찰한다. 각 장이 다루는 내용은 별개의 사건들이지만, 그것은 번역어의 생성과 주권 상상 그리고 주체와의 관련성을 비추는 복수의 이야기들이다. 역자가 지적하듯이 “이 책에서 포괄하는 주제와 내용은 매우 폭넓고, 시사점도 아주 다양해서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p. 383)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폭넓은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서론이 제기한 문제의식이 제대로 관철되고 있는지, 서론에서 수립한 방법론적 개념이 구체적 논술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5)
첫째로 저자가 제시한 ‘초기호(super-sign, 衍指符號)’라는 방법론적 개념의 실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초기호’는 퍼스의 ‘상징’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퍼스는 “기호가 기본적으로 그것의 관습적이거나 자연적이거나 법칙 같은 표상적 특성을 통해서 대상과의 상관관계를 구축한다면, 그 기호는 상징”6)이라고 말한다. 리디아 리우가 말하는 ‘초기호’는 이러한 ‘상징’의 개념 자체보다 퍼스가 ‘상징’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어 어원을 탐색하고 그 의미를 당시의 영어로 규정한 방식에 주목한다. 즉 ‘초기호’는 서로 다른 언어 체계에 속한 어휘가 최초로 마주 세워지면서,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유한 간언어적 의미 작용과 상호주체적 충돌을 보여주는 특수한 기호를 말한다. 이러한 논리 전개 자체는 내적인 정합성을 갖추고 있으며, 퍼스의 개념 규정 자체에 대한 오독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퍼스의 기호학적 사유는 ‘초기호’의 개념을 규명하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착안점을 제시하기 위한 일화로 활용되고 있다. 즉 굳이 퍼스가 아니더라도 두 개의 언어 체계를 마주 세운 다른 학술적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초기호’의 개념을 정초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기에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뒤이어 ‘직시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지표’를 언급하지만, 그것은 퍼스의 기호학적 개념과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퍼스의 기호학은 전체 글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필수적이거나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퍼스의 기호학에 착안했던 데리다와 비교하여 보아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퍼스의 기호학에서 말하는 기호의 연쇄로부터 초월적 기의의 해체를 읽어낸 데리다의 경우, 적어도 그 논지가 퍼스의 기호학 자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7) 그리고 저자가 조어한 ‘초기호’라는 말에서 ‘초(超, super)’는 직관적으로 ‘초월적’이거나, 적어도 기호 그 자체의 일반적 관념을 넘어서는 의미를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초기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복수의 언어 체계가 충돌하면서 나타나는 의미작용이다. 정리하면 퍼스의 기호학이나 ‘초기호’라는 표현이 전체 논의를 전달하기 위한 최적의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둘째로 저자가 전제하는 제국 주권의 식민성 혹은 그것이 내포하는 폭력성은 ‘나’와 ‘너’의 직시적 기표가 만들어내는 지배-피지배 구도를 통해 표출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체와 객체의 이원대립구도 위에서 나타나며, 탈근대주의자들이 비판한 서구 근대 이성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夷/barbarian’이라는 초기호가 그러한 제국 주권의 식민성과 그것이 역으로 투사된 제국 주체의 공포를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원 대립구도의 인식론적 투사가 단순히 역으로 전도된다고 해서 그것이 공포를 유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단순한 거울이미지는 주체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보기에 불충분하다. 쉽게 말해 길에서 마주친 광인이 나에게 ‘너는 미쳤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내 주체를 뒤흔들 만큼 공포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질적인 ‘객관성’에 대해 말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술을 참조할 만하다. 그는 『트랜스크리틱』에서 “거울에 의한 반성에서는 아무리 ‘타인의 시점’에 서고자 해도 공범성이 존재”하며, 불쾌함이나 역겨움을 유발하는 것은 사진이나 녹음기를 통해 환기되는 “이질적인 ‘객관성’”이다. 리디아 리우가 『충돌하는 제국』에서 탐색하고자 하는 주권과 정감, 주체의 욕망은 그가 전제한 인식론적 기초만으로는 온전히 밝혀지지 않으며, 근대 주체의 권력의 무의식은 식민적 직시성의 투사와 전도만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셋째로 자료의 분석과정에서 도입하는 개념이나, 자료들 사이의 연관성이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3장의 말미에서 저자가 ‘夷/barbarian’과 ‘番鬼/foreign devil’을 데리다가 말한 ‘유령’과 등치하는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여기에는 데리다의 원래 개념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유령’을 대입한다면, 그것은 주권 주체의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이며, ‘공산주의’와 등치되는 메시아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내뱉은 ‘番鬼’라는 말에는 그 어디에도 서구의 주권 주체의 인식론적 틀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저자는 설명적 의의가 없는 철학적 개념을 ‘던져 넣음’으로써 이질적인 ‘鬼’와 ‘유령’을 등치시키고 있다.
제5장의 자희태후에 대한 논의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난다. 저자는 서구 여성 선교사의 성경 헌정과 빅토리아 여왕이 아프리카 추장에게 성경을 하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토마스 존스 바커의 「영국의 위대함의 비밀」(1863)―을 관련짓는다. 그러나 그 사이의 실제적 연관성은 일련의 가설 제시에 머물고 있을 뿐이며, 양자 사이의 대비를 통한 새로운 독해의 가능성도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저자는 “메리 리처드와 그녀의 남편은 스코틀랜드연합 장로선교회에 의해 중국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렇다면 그 인기 있던 바커의 그림이 스코틀랜드에 순회 전시되었을 당시에 젊었던 그녀도 그 그림을 보지 않았을까? 그녀가 상하이에서 신약성서를 선물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그녀는 의식적으로 빅토리아 여왕을 모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지며, 비록 실제적인 전기적 관련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후 맥락을 통해서 선물 교환의 식민주의적 관계와 젠더의 표현을 증명할 수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성경 선물’이라는 유사성 외에 그 어떤 의미도 공유되지 않는 두 사건 사이에서 식민지적 상징성의 순회를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기존의 견해에 반박하는 과정에서, 성급하게 자신의 분석을 가장 절대적인 위치에 가져다두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아편전쟁의 원인이 무역이 아니라 “중국 양광 총독의 오만한 태도에 의해 깊이 상처 입은 영국 황실의 체면과 존엄을 옹호하고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네이피어의 판단 때문”이라고 단언하거나, 반대로 “도광제에게 중영 간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바로 영국으로의 영토 할양과 배상금 지불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째서 영국의 본질적 관심은 체면과 존엄이고, 중국의 관심은 실질적인 것인지에 대해 논거가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기존의 관념―중화주의의 심리적 반발과 영국의 상업적 관심―을 단지 뒤집어 놓았을 뿐인데, 다른 모든 요소들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볼만한 합당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한발 더 나아가서 살펴본다면, 이 책은 기존의 전통/근대, 중화중심주의/서구제국주의의 단순한 대립구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구체적이고 복잡한 역사의 정경들을 19세기의 기호학적 전환이라는 또 다른 거대서사로 수렴시킨다. 이것은 기존의 인식에 대한 적극적인 수정이라기보다 단순히 하나의 축에서 다른 하나의 축으로 이동하는 것에 가깝다.
<주>
1) 리디아 리우 저, 차태근 역, 『충돌하는 제국』, 파주: 글항아리, 2016.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의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2) 리디아 리우 저, 민정기 역, 『언어횡단적 실천: 문학, 민족문화 그리고 번역된 근대성-중국, 1900~1937』, (서울: 소명출판, 2005), p. 60. “언어횡단적 실천에 관한 연구는 손님언어(guest language)와의 접촉/충돌에 의해, 혹은 그것에도 불구하고 주인언어(host language) 내부에서 새로운 단어, 의미, 담론, 재현 양식이 생성되고 유포되며 합법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조사하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 손님언어에서 주인언어로 옮아갈 때 그 의미는 '변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주인언어의 현지 환경 속에서 창안/발명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번역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 p. 61 의 경쟁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 사건일 수 없다. 번역은 바로 그러한 투쟁이 진행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손님언어는 주인언어와 조우하도록 강제되며, 이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 사이에 대결이 이루어지고, 권위가 불러들여지거나 도전받으며, 애매성이 해소되기도 하고 생성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주인언어 자체에 새로운 단어와 의미가 부상한다.……나의 목표는 유럽 식민모국의 언어를 출발점으로 삼는 오늘날 언어 이론의 익숙한 전제에 의해 공표되지 않은 새로운 관계의 범주를 통해 '언어' 문제를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3) 리디아 리우 저, 차태근 역, 『충돌하는 제국』, (파주: 글항아리, 2016), p. 87. “우리는 우리 친구들이 모든 이방인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붙이는 호칭인 夷, 즉 ”barbarian“을 사용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중국인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항상 교활과 기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4) ‘야만인barbarian’이 서구의 식민주의적 폭력성을 내포한다면, 저자는 중국에서 ‘夷’가 “주권 통치의 경계를 명명하는 기능을 해왔으며, 유가 경전 중 특히 『춘추』를 둘러싸고 1000여 년 동안 진행된 경정 해석을 통해 고전적인 주권 이론으로 자리잡았다”고 밝힌다. 옹정제는 여유량과 증정의 ‘華夷之辨’에 대해 『대의각미록』을 통해 반박하고, “중국 통치에 대한 만주족 황제의 권리를 주장”(p. 153)했다. 이 때 夷라는 글자의 사용은 결코 금지되지 않았으며, 만주어에서는 ‘夷狄’을 ‘tulergi aiman/외국 부족’으로 번역한다.
5) 그 외에도 한국어 번역과 관련해서 4장의 일부 내용에 대한 오역(p. 226), 보좌의 이동시기에 대한 오역(p. 362), 모두 ‘주권’으로 번역된 여러 가지 개념들(sovereign power, sovereign right, sovereign body, sovereignty)과 같은 문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6) James Jakób Liszka 저, 이윤희 역, 『퍼스 기호학의 이해』,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3), p. 98.
7)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trans. Gayatri Chakravorty Spivak,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p. 49.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5, No.4, 2017년 4월, 이수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과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