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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01 06:12

사랑, 결혼이 품은 트로이 목마인가?

글쓴이 : 아포리아

도서정보

저자명	올리비아 가잘레(김주경 역)
저서명	철학적으로 널 사랑해
출판사	레디셋고
연도(ISBN)	2013(9788997729098)

올리비아 가잘레, 『철학적으로 널 사랑해』(김주경 옮김, 2013)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한다. 이들은 의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아끼고 사랑할 것을 약속하며 “백년가약”을 맺는다. 전통사회에서 인간이 백세를 사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으니, 결혼을 백년가약이라 부르는 것은,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함께 살겠다는 아름다운 악속이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렇게 서약하고 결혼한 부부 네 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왜? 무엇이 문제일까? 이혼은 젊은이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년부부의 이혼도 증가추세에 있고, 심지어 황혼이혼이라는 조어가 생길 정도로 노년층의 이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어려서 읽던 동화에서, 하이틴 로맨스에서, 드라마와 영화, 광고와 인터넷 게임까지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 같은 담론 속에서 자라난 우리들은 자연스레 사랑의 목표는 결혼이고, 결혼한 커플은 사랑에 성공한 사람들이고, 결혼에 이르지 못하는 사랑은 실패한 사랑이라 믿게 되었다. 이렇게 사랑과 결혼은 우리가 가진 결혼 이데올로기에서 굳건한 짝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해서 결혼한 커플은 당연히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동화 속 사랑이야기가 “그들은 결혼했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고 있듯이.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속박으로 느끼고, 불륜을 꿈꾸거나 실제로 외도를 하고, 이혼에 이른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올리비아 가잘레의 『철학적으로 널 사랑해』는 “사랑”과 “결혼”에 대해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중세 교부철학,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을 거쳐 프로히트와 니체 등 기라성 같은 서양철학자들의 사색의 궤적을 따라가는 한편, 문화인류학과 진화생물학을 통해 우리 인류가 어떤 경로를 밟아 지금의 성과 사랑, 결혼의 형태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프랑스어로 된 원제 Je t’aime a la philo는 ‘사랑’(philo)과 ‘지혜’(sophia)의 합성어인 ‘철학’(philosophy)에서 지혜(sophia) 말고 사랑(philo)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도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2013년 1월에 아마존서점에 출시된 지 반 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아직 영어나 다른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역자인 김주경의 세련되고 매끈한 번역도 책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사랑학”이라고 칭할 수 있는 분야, 즉 최근 들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사랑과 성, 결혼, 이혼, 외도 등에 관한 많은 연구서들 중 이 책이 갖는 독보적인 장점은 한가지 시각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지뢰밭 같은 수 많은 논의들을 섬세하게 아우르며 사랑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논의를 심도 있게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적 논의라고 하지만 특정 학파나 철학자의 생각에 치우치지 않고 경쾌한 필치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러다 보니 깊이 있는 철학적 논의를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서양 철학사 전반에 걸친 사랑에 관한 논의를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풀어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저자는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철학에서부터 시작해서 문화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문학에 걸쳐 사랑과 결혼, 성과 에로티즘, 이혼과 외도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면서 현재의 사랑과 결혼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지는데, 전반부 “사랑을 말하다”에서는 사랑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해 왔는가를 유혹, 욕망, 금욕, 결혼, 이혼, 쾌락, 사랑, 섹스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논의하고, 후반부 “사랑을 배우다”에서는 사랑의 현실에서 우리가 품게 되는 의문들, “왜 우리는 사랑에 열광하고,” “왜 사랑은 고통스럽고,” “과연 영원한 사랑이 가능한가” 와 같은 보편적 질문에 답을 구해본다.

1. 사랑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이성을 마비시키고 때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사랑은 지극히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것이다. 사랑은 자연발생적이고, 창조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것이어서, 때론 정신적 질병으로 때론 광기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열병과 같은 미친 사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사랑을 통제하려 했고, 피하라고 권고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인들이 분류한 세가지 종류의 사랑, 즉 에로스(남녀 간의 열정과 성적인 사랑), 필리아(원래 군인들 사이의 전우애를 지칭하는 것으로 우정과 동료애), 아가페(이타적 사랑) 중 에로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질까? 사랑에 “빠진다”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계획하고 의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치 않게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사랑에 맞닥뜨린다. 그래서 혹자는 사랑은 교통사고나 감기처럼 다가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진화생물학은 사랑을 우리 뇌 속의 화학적 반응으로 설명한다. 종족 번식을 위해 유전적으로 가장 적합한 상대에게 끌리게 되고 두 사람이 만나 아이를 낳고, 낳은 아이가 두 발로 걷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기에 적합하도록 인간이 수 만년 동안 진화해 온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쇼펜하우어가 “사랑이란 생식을 유도하기 위해 자연이 쳐 놓은 덫”이라고 천명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여성은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하는데 도움이 될 최상의 파트너 선택하려 하고, 남성은 가장 훌륭한 출산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대를 선택한다고 한다. 이 같은 설명은 사랑의 열정이 왜 영속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마련해 준다. 즉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유효기간은 보통 3-4년 정도로, 이 기간이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생존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폐경기나 노년의 나이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나, 생식과는 관계없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 하여 저자는 말한다. 화학작용은 사랑의 일면일 뿐, 전체는 아니라고. 진화생물학은 사랑이라는 광활한 대륙을 바라다보는 여러 관점 중 하나를 제공해 줄 뿐이라고.

모든 인간 사회는 동물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적 질서를 세우기 위해 성생활을 규제했다. 니체는 서유럽의 성억압적 문화의 원류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서 찾았고 그들이 인류를 노화시키고 육체를 파괴한 자들이라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저자 가잘레는 진짜 책임은 인간의 육체에 원죄를 선고한 기독교의 교부철학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마니교 신도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절대금욕을 통해 물질세계에서 해방될 것을 추구했던 마니교의 교리를 기독교에 들여왔다.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원죄를 성적 금기를 어긴 것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된 것은 금지된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이고, 그 결과 신에 대한 불복종의 죄로 여자는 산고의 고통을, 남자는 노동의 고통과 함께 자신의 성충동을 조절할 수 없는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남성이 자신의 발기를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이 피조물로서 창조주인 신에게 불복종한 죄를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라는 재미있는 해석이다. 이렇듯 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관계는 후세를 낳기 위한 필요악이라 설파했다. 가능하면 결혼하지 말아라. 결혼했으면 자녀를 낳기 위해 최소한의 성관계만 가져라. 성은 인간을 타락시킨 죄악이다. 이렇게 보면 인류를 구원할 신의 아들인 예수가 성관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나야만 했던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수 밖에 없다.

금지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성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성 본능에 훨씬 강력한 제제를 가한 것은 16세기 이후 근대국가의 탄생과 17세기 종교혁명이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보여주었듯이 종교 개혁은 노동의 필요성을 도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 안에 내포된 희생, 인내, 규칙준수, 정직으로 인해 노동 자체가 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고 설파했다. 개신교 윤리는 금욕과 근면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축적된 자본을 근간으로 산업혁명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되었다. 과학 또한 도덕주의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미 성행위로 인한 정액의 배출이 정신착란이나 노쇠, 탈모 등 수많은 질병을 일으킬 위험이 있음을 경고했다. 이성에 기반을 둔 18세기 합리주의는 통제할 수없는 인간의 열정인 사랑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성적 쾌락에 위협을 느꼈고 부부윤리와 청교주의적 금욕을 통해 이를 통제하려 했다.

2. 일부일처제와 결혼

믿을 수 없고 위험한 사랑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수단은 결혼이었다. 보들레르는 “사랑을 제거할 수 없었던 교회는 적어도 그것을 살균 소독이라도 할 생각에 결혼을 만들었다”고 조소했다. 가모스(Gamos 결혼)를 통해 에로스를 통제하려 한 것이다. 가모스의 여신은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로 정절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반면 관능적인 아프로디테는 정염을 도발하고 불륜을 부추기는 치명적이며 매혹적인 여신이다. 성적 사랑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중세의 기독교는 에로스와 아프로디테를 지옥의 악마로 변신시켰다. 하지만 결혼이 처음부터 신성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가 세속의 결혼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 것은 13세기에 들어서이고, 근세에 들어서는 절대로 깨어질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승격시키기에 이른다. 기독교의 결혼관은 처음에는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가, 다음은 오직 자손을 낳기 위해 사랑 없이 결혼하라는 것, 마지막은 사랑으로 결혼하되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성관계를 가지라는 것으로 변모했다.

18세기에 들어 결혼은 혁신적 변화를 겪는다. 근대 이전의 귀족들에게 결혼은 재산과 지위를 물려줄 적자를 생산하기 위한 가문끼리의 결합이었고, 로맨틱한 사랑과 성적 쾌락은 결혼과는 별개였다. 로맨틱한 사랑은 음유시인들의 노래 속에 이상화되어 있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영원한 찬미였고, 성적인 쾌락은 손쉽게 접근 가능한 하녀나 애인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종교개혁 이후 부르주아 사상이 주를 이루면서 사랑에 기반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게 되었다. 로맨틱한 사랑에 기초한 결혼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18세기를 즈음하여 새로이 등장한 문학형태인 소설의 주요 소재였고, 소설의 주요 독자층은 중산계급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었고, 소설은 그들이 원하는 내러티브를 제공해 줌으로써 현대의 드라마나 영화가 그러하듯이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핵심적인 장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인기를 이어오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지성과 감성』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들로 이후 하이틴 로맨스 등의 단골메뉴인 사랑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원형을 마련해 준다.

교회는 사랑에 기반한 결혼과 일부일처제, 가정의 신성함을 원래부터 당연한 것처럼 소개했지만, 실은 이러한 개념은 혁명적인 것으로 개인주의의 도래와 근대 산업사회의 경제질서가 맞물려 형성된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으므로 집안에서 정해주는 상대가 아니라 본인이 사랑하여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고 그렇게 이룩된 가정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제 결혼은 인생의 모든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 장이 되었다. 동화와 소설, 영화 등이 담아내는 행복한 결말, 즉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와 갈등이 마무리되는 시나리오. 이것이 근대 이후 결혼에 부여된 기대치이며 환상이다.

로맨틱한 사랑으로 결합된 결혼은 영원한 지상의 행복을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가잘레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결혼은 덫에 빠졌다”고. “사랑의 의무라는 덫”에. 이제 사랑은 자연스럽게 싹트고 사라지는 열정이 아니라 결혼 속에서 평생을 지속해야 하는 의무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사랑과 결혼이 같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데 있다. 사랑은 이유가 없고 창조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반면 결혼은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 이성적 제도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몰입하고 하나가 되고자 열망하는 단계에서 결혼은 이상적인 목표로 보인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이 설명해 주듯이 이러한 열정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일단 결혼한 두 사람은 어느덧 일상의 의무와 삶의 현실 속에서 서로에 대한 열정은 식어가고, 결혼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안정의 또 다른 모습인 구속에 힘겨워하게 된다. 이는 마치 청초한 들꽃을 꺾어 꽃병에 담아놓고는 그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또는 황금꾀꼬리를 새장에 가두어 두고 밤마다 자신만을 위해 노래해 주길 명령했던 중국황제의 우화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고 통제를 거부하는 황금꾀꼬리와 같은 사랑을 규범에 의해 절제되는 결혼이라는 새장에 가두어 놓고 열정적인 노래를 부르길 기대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꽃피어야 할 사랑은 결혼 속에서 도덕적 명령이 되어 버렸다. “결혼은 연애(사랑)의 무덤이다”라는 말에는 상당한 진실이 담겨있다. 이제 사랑은 결혼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이혼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모순에 빠져 버렸다. 사랑 때문에 결혼했으니 이제 사랑이 사라진 결혼은 존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사랑에 기반한 결혼이란 본질적으로 모순된 프로젝트이며 그 모순성 때문에 극단적인 취약성을 가진다고. 문제는 사랑이라는 절대 자유주의를 도덕적 질서를 중요시 하는 결혼과 결혼시켜버린 데에 있다.

3. “결혼은 사랑의 함정이다”

저자는 오늘날 결혼이 위험에 처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서로 융합될 수 없는 가치들이 상충하고, 그 가치들 사이에 더 이상 서열을 매길 객관적 기준이 사라진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찾는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와 사회적 질서를 우선시 하는 공화주의적 도덕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덕목인지 결정하는 것은 이제 개인의 판단에 맡겨지게 되었다. 현대인은 견고한 도덕적 지표가 사라져 버린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의 절대적 표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또한 기존의 결혼에 위협을 가하는 요인이 된다. 기독교는 남녀의 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상징으로 여겨 파기 불가능한 것으로 선포했다. 문제는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완전히 종속되어야 했고 전통사회에서 결혼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여성들은 결혼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고 부모에 의해 거래되는 가축과 같은 재화의 역할을 했었다. 결혼은 유산을 물려주고 재산을 증식시키는 목적이자 수단이었고 사랑과는 상관없는 제도적 장치였다. 결혼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에 맡길 수는 없었다. 여자는 가문의 세습재산을 불려주고, 시민단체가 영속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자녀를 공급해 주는 존재였다. 결혼을 통해 남녀가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남성우월주의의 바탕을 둔 것으로 여성은 부부라는 종교의 여사제가 되고 그녀의 직무는 사랑의 불(아궁이의 불)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지상에서의 유일한 소명은 아내 어머니 연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결혼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했다. 19세기 들어 이러한 결혼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되었고 일심동체인 여자는 남편과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혼자 독립재산을 유지할 필요도 없으므로 재산권이나 투표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사회진출이 활성화되자 기존의 남성중심적 결혼제도에 불만을 표출하게 되고 이제 결혼은 여성의 예속이 아닌 남녀간의 동등한 관계로 변화되었다. 여성의 지위향상과 경제적 독립은 사랑과 결혼의 역동성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혼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결혼 밖에서 해결하던 남성중심적 결혼제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고, 로맨틱한 사랑에 기반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여성들은 결혼에 있어 사랑의 중요성을 더욱 신봉하게 되었다.

결혼을 위기에 빠뜨리는 또 다른 문제로 저자는 에로티즘의 상실을 지적한다. 20세기 이후 여성권리의 신장과 사회진출, 이후 피임약의 발명과 더불어 야기된 성적 자유주의는 사랑과 생식을 분리시켰고 극단적으로는 결혼제도 자체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결혼에 있어 사랑이 의무가 되었듯이, 이번에는 성과 쾌락이 의무가 되어버렸다. 억압되던 사랑이 결혼 안에서 인정받고 나서 오히려 왜곡되었듯이, 이제 자유를 얻은 성은 성 자체를 즐기지 못하거나 상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는 의무가 되어 버렸다. 포르노 산업은 전자통신기기의 발달과 더불어 눈부시게 성장했고, 표현의 자유라는 기치 아래 각종 매체들은 선정적 이미지와 메시지들을 쏟아내었다.

성적 쾌락은 에로티즘을 바탕으로 하는데 에로티즘은 금기, 가려진 것, 갖지 못하는 것을 욕망하고 상상하는 데서 생겨난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락되고, 터부가 없는 곳에서 에로티즘은 설 곳이 없어진다. 이제 성과 쾌락은 생활 곳곳에 넘쳐나는 상품이 되어 버렸다. 에로티즘은 “신비”와 “환상”을 기반으로 성립하는 것으로 인간문화의 성적 규제인 금기는 역설적으로 에로티즘이 존재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금지된 것을 위반하려는 데서 인간 자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금지된 것을 원하는 데서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사실상 성에 대한 대부분의 금기가 사라졌고, 포르노와 대중매체의 선정성은 가려진 것에 대한 환상을 고갈시켰다. 또한 자극적 이미지와 허구에 익숙해진 대중은 현실에서 만나는 배우자에게서 이 같은 기대치를 충족하기 어렵게 되었다.

4. 결혼 신화

이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신화, 즉 결혼이 외롭고 부족한 자아를 채워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은 아직도 팽배해 있다. 이혼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더 나은 결합을 꿈꾸며 재혼을 하고, 심지어 동성커플들조차 동성결혼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데서 결혼신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세대의 결혼은 부부간의 새로운 규범이 모색되어야 하는 위기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결혼의 문제점들은 가치관의 혼란과 결혼 이데올로기 자체가 지닌 모순들 때문이다. 안정과 더불어 열정적 사랑을 원하고, 정절과 더불어 에로티즘을 원하고, 일심동체의 화합과 동시에 개인적 자유를 원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와 더불어 신선한 새로움을 원한다. 서로 상충되는 욕망과 가치의 혼재는 결혼이라는 현실의 실타래를 더욱 복잡하게 헝클어 놓는다.

결혼과 사랑이 본질적으로 상충된다는 것을 꿰뚫어 본 사르트르와 보브와르는 계약결혼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결합을 실험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서로의 자유를 구속한지 않은 채, 성숙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일시적일 수 있는 에로스적 사랑을 넘어서는 좀 더 견고한 사랑으로 둘만의 결합을 유지하겠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들은 각자 다른 이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크고 작은 연애를 계속했고, 처음 약속한 대로 서로에게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가 죽기까지 두 사람은 특별한 파트너쉽을 유지했다. 이들의 계약결혼은 사회적으로 많은 반향을 일으켰지만 보편화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두 사람은 이른바 “가정”이라는 것을 꾸리지 않았고 장기적인 동거도 하지 않았다. 결혼했다기보다는 각자의 삶을 살면서 특별한 연인관계를 이어나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에 기초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산업사회의 태동과 함께 발전된 것처럼, 후기 산업사회를 너머 포스트모던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우리 삶의 모습에 걸맞게 변화된 새로운 결혼형태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소비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사랑도 소비지상주의로 변해가고 노동시장과 똑같은 가혹한 법칙을 따르게 되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사랑은 언제든지 해약할 수 있는 유한책임 회사나 고용계약, 재협상을 해야 하는 특정계약처럼 되어버렸고, 이 관계는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두 출자자의 욕구에 달려 있다고. 우리는 이제 문제가 생겼을 때 회복보다 이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쓰기보다 새 물건을 구매하는데 익숙해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리퀴드 러브>에서 우리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파트너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는 유동적 관계의 시대에 들어섰으며 평생 지속되는 관계보다는 연속적인 일부일처제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연속적 일부일처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승자들은 상업자본주의 시대의 성공한 소수처럼 행복을 획득할 수 있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활용가치, 결혼 시장에서의 상품가치가 하락할까 두려워하고 패배의식에 젖게 된다.

5. 영원한 사랑은 가능한가?

원초적으로 고독한 개인은 타자와의 교감을 열망하고 사랑에 빠지고 고통 받는다. 사랑의 열정은 유통기한이 있고, 사랑이 식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다는 청개구리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로미오와 쥴리엣 사이에 가문의 장애가 없었던들 둘은 그렇게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도 이졸데가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고, 둘의 사랑은 금지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타오른다. 하지만 결혼은 두 연인의 사랑에 모든 장애를 없애고, 아무런 방해 없이 사랑에 몰입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사랑하겠다고 맹세했기에 이제 사랑은 둘 사이의 의무가 된다. 사랑이 의무가 되는 순간, 결혼은 구속이 된다. 예전에는 죽음이 이혼을 대신했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다 보면, 배우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사이 세상을 떠나거나, 생존한 경우에도 둘 다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고 병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현대의학 덕분에 인간의 수명이 갑자기 늘어난 데 있다. 소위 백세시대라고 불릴 만큼 연장된 수명 덕분에 한번 결혼하면 문자 그대로 백년해로를 하게 생긴 것이다. 과거에는 백년가약이니 백년해로라는 말이 현실이 아니었으니 아름다울 수 있는 꿈이고 이상이었다. 실제로 부부가 그만큼 오래 같이 사는 것이 불가능 했던 시절에 무슨 말을 못했겠는가? 말이 좋아 백년해로이지, 백 년 동안 변치 않고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서약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현대인은 영원한 사랑의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지만 현실은 같은 파트너와 보통 50-60년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엄청난 과제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이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인간의 수명은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본격적인 백세시대로 접어 들고 있다. 지구상 생물들 중 어떤 종도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수명이 두 배로 늘어난 종은 없다고 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로맨틱한 사랑이야기나 결혼관습은 대부분 인간의 평균수명이 지금의 절반 이하일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여 대부분 로맨스는 십 대 이 십대 이팔청춘의 이야기이고 이들의 사랑이야기의 결말은 둘 중 하나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사랑이 결혼으로 맺어지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죽음으로 마무리되거나. 결혼은 모든 사랑의 목적이자 궁극적 결말로 여겨졌고, 결혼 이후의 사랑이야기는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순애보나 불행으로 끝을 맺는 불륜 이야기가 간간히 남아 있을 뿐이다.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양육하여 그 자녀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무렵이면 부모세대는 노년기에 접어들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녀가 성년이 되어도 40대 후반에서 50대로 아직 신체적으로 젊고 건강하다. 별 문제없이 20년 이상 같이 살아온 부부라도 자녀양육이라는 공동의 과업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다시 두 사람만 남겨진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는 지극히 새로운 현대적 삶의 형태로 과거에서 선례를 찾기 어렵다. 이제 이 두 사람은 자녀가 떠나고 다시 둘만 남겨진 결혼에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 이데올로기는 평생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런 관계를 재정립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상태에서 둘 중 한 사람이 제 삼자와 로맨틱한 사랑에 빠진다면? 공자는 사십을 불혹이라 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중 대체 몇 사람이나 그런 평정심을 획득할 수 있을까? 사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의 평균수명은 사십 세가 채 못되었다고 한다. 사십이면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거나 아니면 곧 죽음을 맞이할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제 2의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여 공자의 지혜도 이 문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성 싶다.

오늘날 결혼의 문제는 늘어난 수명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전의 결혼제도와 결혼 이데올로기는 남성우위의 일부일처제를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다. 결혼한 여성은 남성에 예속되었고, 결혼생활에 대해 여성이 불만을 제기하고 자발적으로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결혼제도 바깥에서 여성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성과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고, 혼자서 얼마든지 사회적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결혼은 두 사람의 동등한 권리와 주장을 조율해야 하는 장이 되었고, 불만족스러운 결혼을 감내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여성의 수는 급격히 줄고 있다.

게다가 급변하는 사회환경과 대중매체 또한 전통적 결혼제도를 유지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거리를 뒤덮은 광고판은 매력적인 외모의 남녀가 선정적인 의상을 걸치고 우리를 유혹한다.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 등은 영원히 젊고 아름답고 섹시한 남녀가 우리 모두 열정적인 사랑을 즐겨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메시지를 온종일 쏟아낸다. 이렇게 성적인 환상을 부추기는 이미지와 자극들로 넘쳐나는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결혼한 두 사람이 현실의 배우자에 대한 성적 정신적 열정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은 보통의 인간들에겐 불가능한 과업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결혼한 남녀가 영원히 사랑의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서로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을 때 이혼이 답일까? 과연 결혼의 기반은 에로스여야 할까?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을 결혼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치명적인 트로이 목마를 결혼의 심장부에 끌어들인 셈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로맨틱한 사랑과 결합한 결혼을 이 질곡에서 구해내고 싶어한다. 드문 예지만 결혼 후 나이 들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세 쌍의 커플의 예를 들어, 성공적인 결혼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이들의 견고한 사랑은 불확실한 인생 길에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가정을 지상의 낙원으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잘레는 예로 든 세 쌍의 부부가 지속적인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사랑이 믿음을 창조”하고, 끊임없이 서로에게서 기쁨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간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사랑의 끊임없는 재발견이 훈련이나 의지력에 의해 가능하다면 진정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의 전제가 되는 사랑의 정의 자체를 조금 왜곡시켜 버렸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은 처음부터 에로스였다. 두 사람이 만나 모든 이성과 판단을 넘어서 서로에게 반하고 서로를 열망하는 열정적인 사랑에 관한 철학적 문화사적 담론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예로 든 세 쌍의 부부의 사랑은 이 에로스가 필리아, 즉 동료애로 전환된 상태에 더 가까워 보인다. 에로스가 가미된 필리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위기에 빠진 결혼을 구해낼 수 있는 비결은 에로스에 있지 않고 서로에 대한 믿음에 바탕한 필리아에 약간의 에로스를 가미한 관계가 아닐까? 결국 사랑보다 정(情)으로 산다는 구태의연한 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되는 대목이다.

만일 이 세 쌍의 부부가 진정 결혼관계 안에서 에로스의 불꽃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아주 운 좋은 소수였기 때문일 것 같다. 쉽게 싫증을 내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성실하게 임하는 심성을 가진 훌륭한 사람들이 아주 운이 좋게도 자신과 비슷한 자질을 가진 상대를 만났고, 더욱이 이 두 사람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드문 경우였기에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결혼한 커플들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같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릴 수 없다면, 이들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로또를 뽑은 특별한 행운아들인지 모른다.

6. 백세시대의 사랑과 결혼

가잘레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결혼의 예들이 결혼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이미 전통적 일부일처제의 결혼은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다. 날마다 뉴스 연예란을 장식하는 유명 스타들의 이혼과 재혼 소식들,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 애인이 없으면 장애인이라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외도나 불륜이 낯설지 않은 이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최소한 독신으로 사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결혼을 신성한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 건 일종의 전통에 대한 낭만적 향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혼한 많은 사람들이 재혼을 한다. 이는 결혼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제짝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대로 된 운명의 짝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그 짝을 만나는 순간 행복한 결혼과 만족스런 인생을 살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젤레의 『철학적으로 널 사랑해』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요약하면 사랑과 결혼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녔고, 이 둘을 합쳐놓은 것이 오늘날의 일부일처제의 결혼과 결혼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의 유통기한을 인정하고 사랑과 결혼은 서로 다른 논리를 따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결혼은 연애를 무한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을 만들고, 서로 신뢰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배우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다른 형태의 사랑의 장이라는 것, 에로스가 아니라 필리아와 아가페로 채워가는 이성적 노력이 필요한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 아닐까?

하지만 이성과 절제로 20년 이상 무던한 결혼생활을 영위해온 40-50대들은 백세로 늘어난 수명 덕에 제 2의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이른바 두 번째 사춘기를 맞고 있다.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수 십 년의 인생을 앞에 두고 또다시 사랑이라는 열정 앞에 흔들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척도가 사라진 포스트 모던 정보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세의 수명을 선물 받은 이 시대의 중년은 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삶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절실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들의 절박함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여행, 산행, 스포츠 활동에 몰입하고, 악기, 사진, 와인, 커피, 요리, 등 문화활동을 즐기고, 뒤늦게 향학열에 불타 대학의 평생교육원과 문화센터를 찾기도 한다. 가죽옷을 갖춰 입고 굉음을 내며 모터 싸이클을 타거나 값비싼 스포츠카를 몰고 속도를 내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채워지지 않은 열정에 뒤늦게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기도 한다.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할까? 가잘레의 책은 사랑과 결혼의 문제가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짚어줄 뿐 해답은 아직 요원하다.

* 이 저술을 인터넷과 카카오페이지에 게재할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손현주,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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