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작가의 신작소설 ‘정글만리’ 전3권을 읽었다. 우리 민족사의 좌우대립을 치열하게 소설적으로 재현하였던 고전 중의 고전 ‘태백산맥(太白山脈)’을 쓴 대작가 조정래가 과연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이자, 자본주의적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절묘한 모순투성이로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정치경제 체제’에 대해서 과연 어떤 소설적 해석을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였다.

3권의 책을 다 읽고 나니……, 전체적으로 이 책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 수출종합상사의 간부를 주인공으로 한 기업소설 형태의 대중적 통속 소설에 불과해 보인다는 책머리의 첫 인상을 번복시키지를 못했다.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가득차 온다. 천하의 대작가 조정래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심각한 의문이 몰려 왔다. 과연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어디 갔을까?”

조정래는 80년대에 소설 ‘태백산맥’으로 우리나라의 분단·전쟁시대를 정리하고, 90년대 전반기에 소설 ‘아리랑’으로 일제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의 국내외 전개를 기술한 후, 90년대 후반기에는 소설 ‘한강’으로 박정희시대의 민중과 경제생활 전반을 묘사하였다. ‘태백산맥’에서 횃불처럼 찬란하게 타올랐던 작가의 치열함은, ‘아리랑’에서는 상당정도 유지되고, ‘한강’에서는 다소 이완되는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각 소설이 각 시대상을 진지하게 해석하고 표현하려 노력했다는 점 자체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세 개의 장편소설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전부를 정리한 우리의 대작가 조정래가, 세계로 눈을 돌려 90년 동구사회주의 몰락 이후 아주 독특한 현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짬뽕시켜 전개하고 있는 「사회주의 겸 자본주의 국가」 중국을 해석하는 장편 소설을 펴냈다는 소식에, 작가의 심오한 현시대(現時代) 해석에 대해서 작가 조정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들이 어찌 큰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기대했던바 「현 시대 중국의 정치적 이념과 경제적 현실의 교묘한 혼합 - 뫼비우스의 띠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끝자락이 서로 맞붙는 현상」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탐구와 고민은 찾기 어려웠다. ‘태백산맥’의 사회주의자 염상진과 민족주의자 김범우의 치열한 시각(視覺)도 없었다. 중국 문제를 중국인의 시각에서 주체적으로 깊이 있게 고민하는 진지한 중국인 주인공은 단 한 사람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거대한 중국 시장(市場)이라는 경제적 정글 속에서 경제애국에 힘쓰는 70년대 스타일 한국 수출종합상사 직원들의 기업소설 이야기가 이 책의 전부였다. 이 책의 배경은 굳이 중국일 필요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보수와 진보가 모두들 뭔가 길을 잃어버리고 확신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2013년의 오늘 이 시대에 관한 여러 난해한 고민들은, 작가의 ‘정글만리’ 속에서 그 항목 자체가 분실(紛失)되었다. 과거 엄청난 용기와 힘으로 ‘태백산맥’의 굽이굽이 봉우리와 고개들을 넘어가던 우리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소설가 조정래 작가는, 오늘 중국의 밋밋한 ‘정글만리’에서 그냥 길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할 말들이 있겠으나, 작가 조정래 개인을 시시콜콜히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정확한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태백산맥을 넘어 길을 찾던 조정래 작가와 함께 시대의 산맥을 넘어 시대의 구호를 찾고 이루려 애쓰던 우리 모두가, 오늘 중국의 정글만리에서 길을 잃어버린 조정래 작가와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지만 어떤 것 하나도 분명하지 않아 보이는」 애매모호한 21세기의 오늘 ‘시대의 구호’를 분실하고 시류에 따라 표류하면서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 이것이 ‘정글만리’ 소설이 보여주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아닐까? 소설 ‘정글만리’의 퇴행(退行)은 시대의 구호를 분실(紛失)한 우리 시대 자체의 퇴행(退行)의 결과이고, 정글만리에서 길을 잃은 작가 조정래의 모습은 우리 시대의 정글에서 길을 잃어버린 우리 모두의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정글만리’와 조정래의 문제는 소설과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고, 시대의 구호를 분실한 우리들 자신의 문제가 된다. 소설 ‘정글만리’가 보여주는 시대적 퇴행은 우리 모두의 시대적 퇴행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의미 있는 경고(警告)일 수 있다. 작가 조정래의 신작 장편 ‘정글만리’의 적극적 의미는 ‘시대의 구호에 대한 분실신고서(紛失申告書)’라는 점에 있다. 자,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작가 조정래를 탓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그와 더불어 시대의 길을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탓‘하고, 우리 모두가 분실(紛失)한 ‘이 시대의 구호’를 함께 찾는 노력을 시작해 보자. 

    

각 시대에는 ‘시대의 구호’가 있다. 한 시대의 조건을 압도적(壓倒的)으로 규정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부간(可否間) 선택을 강요하는 한 시대의 대표적 과제(課題) 또는 요구(要求)이다.

 

우리나라 80년대 ‘시대의 구호’는 ‘민주주의(民主主義)’였다. ‘광주’로 시작하여 ‘6월 항쟁’으로 나아간 80년대에 우리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민주주의’에 관한 거리의 외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지 소극적으로 찬동할지 아니면 무관심하게 등을 돌릴지 여부에 대한 선택을 강요당했다. 80년 광주에서 진압당한 시민들은 87년 6월에는 권력을 이긴 시민이 되어, 이 땅에 ‘철회불가능한(irrevocable)’ 일반 민주주의(general democracy)를 자랑스러운 ‘시대의 결과물’로 획득하였다.

20세기 전반 일제 식민지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의 ‘시대의 구호’는 당연히 ‘독립(獨立)과 해방(解放)’이었다. 마을과 안방까지 들어온 일본의 침략자(alien)들은 가혹하게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압박하였고, 식민지라는 시대적 조건에 규정된 우리 민족 개개인의 삶은 ‘싸우다가 다치거나’ ‘분하게 참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슬픈 운명 속에 놓여 있었다. 이 슬픈 ‘시대의 구호’는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부분적으로 해소되었다.

1945년부터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나라를 압도한 ‘시대의 구호’는 좌우(左右) 대립, 즉 자본주의를 선택할 것이냐 사회주의를 선택할 것이냐 라는 ‘체제(體制) 선택’의 싸움이었다. 작게는 한 마을 단위로, 크게는 세계적 단위로 전개되었던 이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시대의 구호는 ‘남북(南北)의 분리(分離)와 휴전(休戰)’이라는 임시변통적 방법으로 불완전하게 정리되었다.

정치적 자유/자결의 구호와 경제적 생존/성장의 구호: 정치적인, ‘자유(自由)’에 관한 구호만이 ‘시대의 구호’가 된다고 보는 것은 인생과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사람’은, 아니 ‘우리들’은 그렇게 고상하고 거룩한 것만을 위해서 살지를 않기 때문이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자는 ‘잘 살아보세’ 구호는 매우 강력한 우리나라 60년대, 70년대의 경제적 ‘시대의 구호’였고,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동시대 또 하나의 절대적 ‘시대의 구호’와 병존(竝存)하면서 심각하고 치명적인 경쟁적 길항(拮抗) 관계에 있었다.

정치적 자유와 자결의 구호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정신적인 가치를, 경제적 생존과 성장의 구호는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물질적인 가치를 표상한다. 그래서 경제적 구호는 ‘땅’에 붙어있는 인간의 ‘현실’을 나타내고, 정치적 구호는 ‘하늘’로 향해 일어나는 인간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땅이 없는 하늘은 없고 현실을 떠난 이상은 물거품 같은 허상(虛像)이며, 하늘이 없는 땅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고 이상이 없는 현실은 꿈이 없는 암흑(暗黑)인 것처럼, 정치적 자유·자결의 구호와 경제적 생존·성장의 구호는 가부간에 상호 끈끈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각 시대의 객관적 조건과 사람들의 주관적 움직임에 따라, 정치적 ‘자유(자결)’의 구호와 경제적 ‘생존(성장)’의 구호는 서로 뭉쳐서 협력하기도 하고 떨어져서 서로 싸우기도 한다. 두 구호가 뭉칠 때에도 어떤 것이 ‘주(主) 구호’이고 어떤 것이 ‘부(副) 구호’인지는 각 시대와 각 상황 별로 달라진다. 이것이 대단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역사의 변주(變奏)들을 만들어 내며,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인생군상(人生群像)들의 모습을 조각해 낸다.

시대의 구호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일차적으로 연구하고 제시하는 것은 역사학이다. 그러나 시대의 구호를 보다 풍부하게 보여주는 것은 한 시대를 제대로 구현하는 문학이다. 역사학이 시대의 구호가 만드는 사회의 기본 틀(주형)을 보여준다면, 문학은 그 시대의 틀로 구워져 살아가는 인생들의 생생한 부침(浮沈)과 미세한 속살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시대의 구호(口號) – 박경리의 ‘토지(土地)’ : 일제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 대부분의 구성원에게는 정치적 ‘자유’의 구호와 ‘생존’의 구호가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의 자유와 주권을 탈취한 일본 제국주의는 동시에 우리 민족의 토지와 곡식도 빼앗았기 때문이다. 대등한 민족 간의 식민지배는 지배당하는 자를 모욕감 속에서 비참케 하고, 지배하는 자를 두려움 속에서 잔인케 한다.

그러니 일제 식민지시대 우리민족 대다수에게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독립은, 자유와 생존이라는 두 가지 구호 모두를 충족시키는 ‘절대구호’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도 ‘즉자적(卽自的) 생존의 요구’와 ‘궁극적(窮極的) 생존의 요구’ 간에는 서로 부딪힘이 있었다. 내 집안에 들어와 내 재산의 절반을 빼앗는 일제 순사에게 눈을 뜨고 항거(抗拒)하면? 감옥에 끌려가고 재산의 나머지 절반도 빼앗긴다. 참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감고 일단 굴복하면? 재산 절반은 빼앗겨도 나머지 절반의 재산은 일단 남는다. 그러니 피 끓는 젊은이는 맞서려 하고, 나이든 아버지는 참으라고 한다. 그러나 싸움은 빼앗기는 자만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빼앗는 자도 다치고 겁먹게 한다. 빼앗는 자는 절반을 빼앗기고도 눈을 감고 참는 자를 만만하게 무시하고, 다음 달에 또 와서 나머지 절반의 절반을 더 달라고 자신만만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절반을 빼앗길 때 눈을 뜨고 항거하는 자의 저항으로 코피가 터진 빼앗는 자는, 다음 달에 더 내놓으라고 했다가 겁 없이 대드는 놈에게 다리가 부러질까 무서워 겁먹고 조심을 하게 된다.

기압(氣壓)의 차이로 한 무리의 공기(기단)이 동쪽 방향으로 움직여서 바람을 만들 때, 그 기단(氣團) 속의 공기 입자(粒子)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동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입자가 많기는 하지만, 서쪽, 남쪽, 북쪽으로 움직이는 입자들도 있다. 하지만 동쪽의 기압이 낮고(공기가 옅고) 서쪽의 기압이 높으면(공기가 짙으면), 반드시 ‘더 많은’ 공기 입자가 동쪽으로 밀려가므로, 그 공기무리 전체는 필연코 동쪽으로 부는 바람을 만들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대등하게 존엄한 민족 간에 행해지는 억압적 지배와 경제적 수탈은, 수많은 억압과 좌절과 비겁함과 두려움이 있더라도, 필연코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인 독립의 바람을 일으키고야 만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세계의 현대사가 여실히 보여주는 진리다.

같은 민족의 동포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독립과 해방’이라는 시대의 구호를 떠나서 ‘친일, 매판’을 통해 자기의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권세를 추구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을 우리는 친일파라고 부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보통 어느 나라이든지 ‘우파(right)’ 진영의 정치적 아젠다(agenda)는 민족주의로 나타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새 우파(new right) 학자라는 일군의 사람들 중에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했다. 그러니 일제 식민지시대는 꼭 우리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내심 일제하의 친일파를 자기들과 비슷한 ‘보수’라고 부르며 변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천만의 말씀이다. ‘보수주의(conservatism)’은 「지켜야 할 전통과 가치」를 지키자는 주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타 민족의 지배와 억압을 받는 것’을 보수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진보에도 지켜야 할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수에도 지켜야 할 한계가 있고 염치라는 것이 있다. ‘친일 보수주의’는 논리적으로 성립불가능하며, 결코 의미 있는 시대의 구호가 될 수 없다. ‘친일’, ‘식민지배’는 결코 ‘보수(保守)’하여 지킬 가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염치없음과 무분별함이 최근 ‘정신대 여성들이 일본 군대를 따라다녔다’고 ‘일부러’ 서술한 교학사 국사교과서 파동을 낳게 되었다. 

일제 식민지시대, 사람들의 ‘자유’와 ‘생존’을 향한 정치적 구호와 경제적 구호, 그리고 그 속에서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그 시대의 구호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고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 인생을 이어갔는지는, 우리가 존경하는 소설가 박경리의 대작 ‘토지(土地)’에 아름답고 처연하며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토지’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모두들 슬프고 연약하고 자기의 한계로 몸부림치고 쉽게 무너지고 끝장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그려진 것은, 오히려 용감무쌍한 용사(勇士)들의 단순무식한 무용담보다도 더 진지하고 사실적으로 그 시대의 깊은 슬픔과 저항의 심연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분단시대의 구호(口號) – 조정래의 ‘태백산맥(太白山脈)’: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좌우(左右) 간의 체제선택 싸움이 국제적인 체제 경쟁과 엇물려 비극적으로 처절하게 전개되었다. 그 시절,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구호와 ‘생존’이라는 경제적 구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세트 속에서 각각 긴밀하게 통합되어 (경제적 자본주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경제적 공산주의 체제는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하였음) 계급과 계층 간에 두꺼운 금을 긋고 모든 사람에게 둘 중 한 진영만을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격렬한 두 개의 ‘시대의 구호’가 부딪쳤던 시대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 구성원들 사이에 부는 ‘바람’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독립이라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여기에는 친일파 일부를 제외하고 계급과 계층 간에 좌우(左右) 간에 바람의 불일치가 없었다. 그래서 소설 ‘토지(土地)’의 마지막 권 마지막 장에서 일본 식민지 지배가 끝났을 때 소설의 주인공들은 오랫동안 눌려왔던 고통에서 벗어나고 뭔가 희망의 새날이 오는 것을 두근거리며 기대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분단시대는 ‘토지(土地)’ 주인공들의 기대와 희망과 희생을 무색하고 허망케 한다. 하나로 뭉쳐 외부와 싸우던 바람은 이제 두 개의 큰 바람으로 나뉘어 내부에서 서로를 향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전후 반세기동안 부자나 가난한 자나 우리 민족이 함께 꾸어오던 ‘꿈’은 갑자기 아연실색할 ‘악몽(惡夢)’으로 변한다. 일제의 억압 하에서 함께 이해하고 연민하며 서로 돕던 동포들과 이웃들이 갑자기 이념상 나와 너의 적이 ‘되어야 했고’, 실제로 적이 ‘되어 버렸고’, 마침내 종국에는 ‘천추의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구호는 정치적 해방의 구호가 주(主) 구호로, 경제적 독립의 구호가 부(副) 구호로 결합된다. 따라서 식민지시대에는 민족 내부의 경제적 이해관계 차이가 민족 전체의 이해관계 속에 포함되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시대적 구호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경제적 구호가 주된 구호로 대립되고, 정치체제의 구조는 각 경제체제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부(副) 구호로 뒤따른다. 그 결과 분단시대의 시대적 구호는 한 사회의 구성원을 통일시키지 않고 분단(分斷)시킨다. 이것이 식민지시대보다 더 고약하고 가혹한 분단시대의 비극성을 낳는다.

분단시대의 시대의 구호는 무섭고 공포스럽다. 일제 식민지시대의 구호는 독립투사로서 억압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처절한 희생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에게도,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공감과 존경과 영광을 누리는, 영혼의 편안함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분단시대의 구호는 두 개로 나누어진 팽팽한 두 패 간에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배척과 증오와 원한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양쪽 모두에게 깨끗한 영광과 존경과 공감을 함께 얻을 수 없는, 영혼의 불안을 제공하였다. 한쪽의 존경을 받으면 다른 쪽의 증오를 얻고, 한쪽의 영광을 얻으면 다른 쪽의 모욕을 받아야 하니, 핏빛으로 갈라진 선과 악, 잔혹하게 갈라선 정의와 불의의 심판은 우리 모두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몸서리치게 한다. 휴전 이후 한반도 전역을 휘몰아쳐 동서남북의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싸움을 만들어내던 두 개의 폭풍 바람은, 이제 둘로 나뉘어 각각 남쪽과 북쪽의 지역 안으로 가두어졌다. 왼쪽의 바람은 북쪽으로, 오른 쪽의 바람은 남쪽으로 몰아넣어졌다. 그러니 이제 남쪽에는 왼쪽 바람이 없어야 하고, 북쪽에는 오른쪽 바람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남쪽은 공산주의를 박멸하고 북쪽은 자본주의를 박멸했다. 자유로운 정신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생각을 하는 것’은 위험해 졌다. 이 맹목의 역사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太白山脈)’은 우리나라 분단시대의 구호를 가장 용감하고 가장 치열하게 드러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 이전의 분단시대 소설들도 모두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진지하게 대면하려고 노력했지만, 두 개의 바람 중 왼쪽의 바람에 대해서는 반공주의 레드 콤플렉스의 틀에 겁이 나서 솔직하고 자유롭게 다룰 수 없는 ‘부자유(不自由)’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처음으로 왼쪽의 바람은 왼쪽의 입장에서, 오른쪽의 바람은 오른쪽의 입장에서 정직하고 자유(自由)롭게 자신을 변론하도록 솔직한 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太白山脈)’이 분단시대의 구호들을 솔직하고 치열하게 대면하고 용감하게 기술할 수 있었던 것에는, 소설이 씌여진 시대적 조건, 즉 그 소설이 ‘민주주의’라는 시대의 구호를 중심으로 커다란 바람을 휘몰아치고 전진하던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 결과 소설은 시대의 도움을 받고, 시대는 소설의 도움을 받았다. 소설을 쓰는 사람과 소설을 읽는 사람은, 모두 소설을 쓰고 읽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통해서, 소설이 묘사하는 다른 시대의 정신을 읽는다. 따라서 80년대에 쓰고 읽혀진 소설 태백산맥에는, 1945-1953년 분단시대의 시대적 구호와 1980년대 질풍노도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시대적 구호가 함께 녹아져서 같이 담겨져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 그 시대의 다양한 인물들이 섬세하게 감성적으로 풍부하게 묘사되어 있다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싸움 속 당대의 인물들이 이념적으로 배치되고 이성적으로 풍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차이에는 작가의 여성적인 면과 남성적인 면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고, 개별인간에 대한 관심과 역사적 흐름에 대한 관심의 비중 차이도 있다고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각 시대가 가지는 ‘시대의 구호’의 성격(性格)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 필연적인 원인이라고 보인다.

‘토지’의 시대에 시대의 ‘구호(口號)’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하나였고, ‘문제(問題)’는 사람들이 그 시대의 구호에 반응하는 다양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태백산맥’의 시대는 두 개의 강력한 시대의 구호가 양립하여 사람들을 이리저리로 몰아세우고 때리고 해치우던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개별인간의 개별적인 반응보다도 ‘두 개의 시대적 구호’ 자체(自體)를 규명해 내는 일이 더 중요하고, 그 연후에야 비로소 개별 사람들이 대립하는 시대의 구호들에 반응하고 갈등하는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식민지시대에는 정치적 구호에 경제적 구호가 ‘결합’되어 있었고(정치⊇경제), 분단시대에는 경제적 구호에 정치적 구호가 ‘결합’되어(경제⊇정치), 양자 모두 정치적 구호와 경제적 구호 간의 분리는 없었다. 따라서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그 시대의 정치적 구호와 경제적 구호를 모순 없이 함께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뒤에서 보듯 민주화의 시대적 구호와 경제성장의 시대적 구호는 정치적 구호와 경제적 구호가 서로 분리되어(정치↔경제)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하게 된다.

민주화시대의 구호(口號) -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980년 5월, 무력으로 나라의 권력을 훔친 자들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이 맞서 싸웠다. 비록 시민들은 군대의 무력에 패배했고 수백 수천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독재정권이 지속되었지만,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은 1960년 4.19혁명 전후에 시작되어 짧게는 1987년 6월항쟁까지, 길게는 실질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2000년 전후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민주화시대’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규정하는 찬란한 이정표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싸움에서 지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80년 광주의 시민은 일단 졌으나, 그 패배와 희생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를 위한 투쟁에 뛰어들었고, 더 많은 사람이 피 묻고 잔인하고 명분 없는 독재정권의 거짓말과 협박에 속지 않고 싸울 수 있었으며, 마침내 아시아에서 두어 나라 밖에 없다는 실질적인 민주주의 선거제도와 진성 정권교체를 우리나라에 이루어냈다. 80년 5월의 권력 절도범들은 일단은 이겼으나, 그 후로 권력을 쥐고도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통치해야 했고, 한 번 더 시민을 상대로 총질을 할 자신은 잃었으며, 권력을 잃은 뒤 몇 년이 지나서는 일당들이 모두 체포되어 법의 심판과 엄한 처벌을 받았고, 이제는 지극히 초라한 모습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이제 한국에서는 총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권력을 훔치는 시도는, 차마 겁이 나서 할 수 없다고 본다. 총으로 민주주의를 뒤엎는 자들은 잘되어봐야 불과 몇 년은 권력을 써보겠지만, 그 뒤로는 그들에게 영원히 지옥 같은 계속되는 심판의 날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이처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거저먹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피와 희생으로 얻은 민주주의이므로, 그 기초가 매우 단단하여, 이제는 한 두 개의 비민주적 정권이 아무리 건방을 부리고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표면을 집적거린다고 해도 그 뿌리까지는 흔들 수 없는 수준의 강력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 80년 광주항쟁을 정점으로 그 앞뒤 수십 년에 걸친 우리나라의 시대정신, 그 시대의 구호는 ‘민주주의(民主主義)’와 ‘자유(自由)’였다. 그리고 우리는 늠름하게, 남북분단의 한계 속에서도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와 자유를 싸워서 만들어 냈다.

광주와 민주화시대의 구호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는 80년 5월 광주항쟁 직후 소설가 황석영이 대표집필해서 지하에서 배포되다가 광주항쟁 5년 후에야 1985년 풀빛출판사에서 합법 출간된 르뽀 형식의 장엄한 광주항쟁 기록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죽음을 넘어”)를 들 수 있다. 민주화운동의 전후를 기록한 많은 문학작품이 있지만, 80년 광주 이전의 문학들은 아직 투쟁의 자신감이 약하고, 광주 이후의 몇 년간은 아예 자유로운 소설이 나오지 못했으며, 90년을 넘어간 이후의 민주화운동 후일담 소설들은 민주화운동의 생명력을 상실한 이후의 허무감을 기조로 하므로, ‘자유’를 찾고 ‘자유’를 만들어낸 이 시대의 진취적 본질과 자유를 향한 생명력을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만큼 표현한 작품은 없었다고 보인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는 소설이 아닌 르뽀라는 문학 형식면의 차이뿐 아니라, ‘시대의 구호’와 문학의 관계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죽음을 넘어’라는 문학작품이 감당한 역할은, 한 시대가 지난 후에 그 시대의 구호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그 ‘시대의 구호’를 천명하고 그 시대를 앞장서 이끌어가는 기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당시 광주사태의 현실을 알면서도 비겁함으로 입을 막은 언론(言論)들은 몇 년 동안이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국민들에게 아무 사실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비합법적으로 지하에서 손과 손으로 전해지던 이 르뽀는 많은 사람들에게 숨겨진 강력한 진실을 알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어 비겁과 두려움을 이기고 싸움에 나서게 하였으며, 마침내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명의 함성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위한 시대의 구호가 승리하게 하는 발화제(發火製)의 역할을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80년대 초반에 씌여진 ‘죽음을 넘어’와 80년대 중후반에 씌여진 ‘태백산맥’이 함께 힘을 합하여 80년대의 시대적 구호인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80년대 전반에 비합법 언더(under)에서 읽혀진 ‘죽음을 넘어’가 지하의 민주저항운동을 일구어냈다면, 80년대 후반에 대중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태백산맥은 공개된(open) 장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독자들에게 역사적 인식의 억압을 깸으로써 이제 막 획득하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기초와 토대를 다지고 또 다져갈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대중적으로 일깨우고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시대의 구호(口號) – 박정희의 ‘잘살아보세’ (한운사 작사/김희조 작곡): 불과 한 세대 내에 (in one generation)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함께 달성한 나라는 전 세계 역사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랑스러워하지 않기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중부정(二重否定)의 문장이 동원되는 이유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언급하는데 뭔가 석연치 않고 불편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석연치 않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같은 시대에 ‘민주주의’라는 정치적(政治的) 구호와 ‘경제성장’이라는 경제적(經濟的) 구호가 두 개의 동시대적 구호로 병존했는데, 그 두 개의 구호가 서로 짝이 맞지 않고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밀어내는 척력(斥力)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누구의 공(功)이냐를 따지기 전에, 일제 식민지시대 수탈로 고생하고 한국전쟁의 전화(戰禍)로 폐허 위에 섰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잘 살아보자’는 염원(念願)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우리 국민이 수십 년의 피땀 어린 노력을 통해서 경제적 생존을 이루고 나아가 세계를 주도하는 수준의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낸 것이 우리 민족 공동체 구성원 전부의 자부심이자 자신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 70~80년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상당기간 이어지는 시대의 경제적 구호가 ‘경제성장’이라는 점은 당연하고 정당성도 있다. 국내적으로는 삼성의 초과체중과 오만함을 싫어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국외에 나가면 일본의 소니를 눌러버린 삼성의 국제적 위엄을 민족적으로 자랑스러워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박정희에서 이건희로 이어지는 경제성장시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문학적 표현은, 그 어떤 소설이나 르뽀보다도 박정희 정권이 애창한 ‘잘살아보세’라는 노래라고 할 것이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고 전반부와 후렴구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 노래의 기본가사에는 우리 민족 공동체와 개개인의 주체들이 경제적 고통과 그로 인한 실존적 절망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는 처절한 절규들이 무겁게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비록 관제가요이고 전체주의적 동원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가히 한 시대의 구호를 감당할만한 커다란 힘과 무게가 들어있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음’은, 한 시대의 정치적 구호와 경제적 구호가 구체적인 역사의 맥락에서 서로 협력하지 않고 서로 대립하여 싸웠다는 점에 있다. ‘경제성장이라는 시대적 구호’를 주도한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유신체제로 권력을 연장하기 위하여, 선거와 헌법과 기본권이라는 민주제도의 모든 요소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동시대 구호 ‘민주주의’의 명백한 적(敵)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경제성장’을 ‘반민주(反民主)’의 핑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인간의 경제적 욕구와 민주주의라는 인간의 정치적 욕구는 각각 그 자체로서는 당연히 좋고 선한 것이다. 잘 살고 민주적인 나라에서 사는 것(①)이 좋지, 잘 살지만 비민주적인 나라에서 사는 것(②-1)이 좋은 것이 아니며, 민주적이지만 못 사는 나라에서 사는 것(②-2)도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비민주적이고 못사는 나라에서 사는 것(③)이 최악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식민지시대의 미래를 향한 구호는 ‘잘 살고 민주적인’ 독립국가였다. 분단시대 자본주의체제와 공산주의체제도 각각 다른 이념형(理念型)으로 ‘잘 살고 민주적인’ 나라를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근 30년을 이어간 군부정권은 ‘잘 사는 것’을 ‘민주주의’와 대립시켜, 시대의 정신분열(精神分裂) 현상을 만들어 냈다. 유신정권은 사소한 불평을 하는 사람도 긴급조치로 처단하는 악당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새마을운동을 벌이고 수출을 증대시키는 천사 노릇도 하였고, 5공 정권도 광주시민을 사살한 악당이면서 경제적 성장을 자기 업적으로 주장하였다. 한국에서 보수진영이 아직도 여전히 경제성장을 주장하면서 민주주의가 뭔지를 모르거나 반대하는 증상, 자유주의 진영이나 진보진영이 민주주의를 추진하면서 경제성장에는 다소 무능해 보이는 현상은 그 이후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민주주의의 구호와 경제적 성장의 구호는 이상적으로 쉽게 결합될 수 있는가? 사실 두 개의 구호 간에는 서로 쉽게 결합되기 어려운 갈등 요소가 있다. 민주주의는 ‘액면(額面)상’ 비효율성을 감수하여야 하는데, 경제성장은 액면상 효율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려면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무조건 일을 열심히 하자’는 효율성의 주장과, ‘민주주의는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하고 민주적으로 논의할 일은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부딪치고 갈등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금방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어렵다’고 해서 ‘어쩔 수 없고’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성장의 효율성과 민주주의의 절차적 신중함 간에 해소하기 어려운 긴장과 갈등이 있다고 하여, 경제성장을 위해 민주주의의 적법절차와 토론절차를 뛰어넘고 무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를 위해 경제성장의 요구를 등한시하면, 경제적 압박이 주는 압력으로 인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험이 증대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갈등하는 요구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는 없고, 두 가지 구호 간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시키고 승화시키는 예술적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부연할 것은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구호는 보수진영이나 진보진영 모두가 동의하고 존중해야 하는, 정치게임의 기본 룰이자 공통구호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경제적 구호에는 ‘성장주의’ 뿐만 아니라 ‘복지주의’도 중요한 구호로 함께 존재해서 그 무게가 ‘조금’ 작다. 일반적으로 성장주의는 상층 보수진영의 구호이고 복지주의는 서민과 중하층 진보진영의 구호로 나타난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구호는 경제적 성장주의의 구호와 한 쌍이 될 수도 있고 경제적 복지주의의 구호와 한 쌍이 될 수도 있다. 욕심을 낸다면 정치적 민주주의의 구호와 경제적 성장주의+복지주의의 혼합구호를 내거는 것도 이상형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적 구호의 일부인 성장주의만을 위해서 정치적 공통구호인 민주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위험하고, 경제적 구호의 일부인 복지주의를 위하여 정치적 공통구호인 민주주의를 배척하는 것도 무모한 도전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수십년, 길게는 수백년 수천년에 걸쳐서 우리가 피흘리며 만들어낸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간의 기본권이 모두 웃음거리가 되는 위험에 처한다. 민주주의 없는 성장도, 민주주의 없는 복지도 결코 우리가 추구할 시대의 구호는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이제 해방·독립의 ‘식민지시대’는 지나갔고, 체제경쟁의 ‘분단전쟁시대’는 거의 막바지 종점에 가까워진 것 같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민주화시대’는 1987년 이후 탄탄한 기초를 확보해서 일획을 그었고, 그 이후 현재까지 조금씩 민주주의의 전진과 조금씩의 퇴보가 있으나 우리가 확보한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경제적 구호에 있어서 ‘경제성장시대’는 쭉 올라가다가 IMF 위기로 한번 크게 흔들렸다가는 회복한 후에도 계속 논의되고 있고, ‘분배복지시대’는 80년대 전국민 건강보험제도 도입 이후 10년의 민주당 정권 하에서 복지체제가 상당정도 더욱 강화되어 제도로서 객관화된 이후 여전히 사회의 중심 이슈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여전히 성장주의의 말빨이 조금 더 세고, 복지주의의 말빨이 그에 비해 조금 약한 것 같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강세는 아니고 그렇게 무너뜨리는 것이 한쪽 구호의 이익이 되지도 않는다.

이래서 오늘 21세기의 시대의 구호는 어렵거나 선명치 않다. 해방독립도 이루어지고 사회주의도 거의 가고, 기본 민주주의는 일단 자리를 잡았고, 성장주의와 복지주의는 지속적인 상시(常時) 논쟁의 주제가 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는 시대의 구호가 되지도 못한다. 그래도 뭔가 불만스럽고 화가 나고 힘들고 괴롭고 한 일은 많은데, 도대체 이 시대의 구호가 무엇이냐, 이 시대의 핵심적 해결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한 마디로 답하기가 어렵다. 만일 지나간 시대처럼 선명한 시대의 구호가 있을법한데 우리가 못 찾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그 구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또는 선명하고 일의적(一義的)인 시대의 구호가 없는 것이 이 시대의 진상이고 본질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맞추어 흐릿(misty)하고 다의적(多義的)인 이 시대의 구호를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도 여전히 문제가 많거나 증폭되고 있지만, 창대했던 시작에 비하여 이제는 ‘비민주적이고 못사는 최악의 나라(③)’를 만들어 더 이상 볼만한 것도 아쉬울 것도 없어진 북한의 공산주의체제, 그리고 동구권 공산주의체제가 모두 무너진 후에도 마술적인 짬뽕 혼합체제를 만들어 세계경제의 성장유지를 뒷받침하고 있는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현실과 장래를 파악하고 이해하고 반응하는 것도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소설 ‘정글만리’는 21세기가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 중국 땅에서 돈을 버는 한국 수출종합상사의 70년대식 ‘경제성장주의’ 구호를 주창하고 있다. “자! 이제 중국에 가서 열심히 돈을 벌자!”고. 이것은 참 뜬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중국의 민주주의 문제도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중국의 노동자 산재 가족 하나가 엑스트라로 잠시 등장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복지분배 문제도 중국의 복지분배 문제도 다루어지지 않는다. 소설에서 정글이라 불리는 중국은 이미 돈벌이에 혈안이 되고 꽌시(關係)로 돈을 버는 타락사회로 묘사되지만, 이것도 어쩐지 우리나라 70년대 80년대의 모습에 유사한 냄새가 난다. 타락의 부산물들만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시장경제와 공산당 주도 정치 간의 논리적 현실적 긴장과 갈등, 모순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고 땅의 거죽처럼 슬쩍 스쳐지나가고만 있다. 결국 ‘정글만리’는 만일 그것이 이 시대의 정신, 이 시대의 구호를 논하는 소설이라면 초점을 전혀 못 잡고 딴 소리를 하는 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의 당초 생각대로,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복지분배주의라는 경합하는 시대의 구호들을 모두 소거하고 오직 70년대식 수출주도의 ‘잘살아보세’라는 성장주의만을 21세기 이 시대의 구호라고 제시한 것이라면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이 사실은 시대의 정신이나 시대의 구호를 진지하게 논의할 생각이나 욕심 없이 중국시장과 중국에서 일하는 수출종합상사 직원들의 애환을 표현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통속소설이라면? 위와 같은 비판은 지나친 것일 수 있다. 그냥 재미있는 상업소설로 읽어버리고 말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을 그냥 ‘아무나’가 쓴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조정래 작가가 썼다는 것에 있다. 나는 힘겨웠던 80년대에 조정래 작가의 전작(前作) 소설들로부터 큰 격려를 받고 힘을 얻었던 진성 애독자로서, 진심으로 그의 소설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팬으로서, 한 작가가 평생 쓰는 모든 작품들이 다 무지막지한 힘을 들여 쓰는 소설일 수도 없다는 점, 때로는 웃으면서 즐기듯이 대충 휙휙 쓰는 소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이를 애써 변호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우리 시대의 무게를, 우리 시대의 구호를 굳이 조정래라는 한 개인의 어깨에 짐 지운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고 묻고 싶기도 하다. 더구나 그동안 수십 년 동안 그토록 많은 수고를 해온 사람에게.

그러나 다시 문제는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조정래 작가라는 데로 돌아간다.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았다면 또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들은 열심히 이 책도 사서 읽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모두 조정래 작가의 글에서 이 시대의 정신을 배울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정글만리’를 읽고 지금 이시대의 시대정신, 시대구호가 「70년대식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구호」라고 깨달아 마음에 다짐하고 이 시대와 이 세상과 자기 인생의 방향을 잡게 되는 일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제발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희망한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조정래 작가에 대한 진심의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모든 글이 피터지게 시대와 역사를 정면으로 직면해서 승부하는 글이 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냉정하게 이해하기를, 굳이 소설 ‘정글만리’에서 이 시대의 정신, 중국의 시대정신,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다만 이 소설을 흥미 있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로 생각하고 즐기기만 하기를…….

자, 우리는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가 기대했던 조정래 작가의 소설 ‘정글만리’가 사실은, 식민지시대를 넘어, 태백산맥 시대를 넘어, 민주주의 시대를 거쳐, 선명한 ‘시대의 구호’와 씨름하던 것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지금의 시대는 시대의 구호를 분실(紛失)하고 찾지 못하는 상실(喪失)의 시대」라는 점, 「시대의 구호를 찾지 못하면 시대적 퇴행(退行)을 감수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시대의 구호의 상실과 시대적 퇴행의 책임은 소설이나 작가가 아닌 우리들 모두의 자화상이자 책임」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소설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시대의 구호를 분실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지나간 각 시대의 시대정신과 시대의 구호 그리고 각 시대의 구호에서 정치적 구호와 경제적 구호가 어떻게 결합되고 어떻게 대립하는지를 실증적으로 연구해 보았다. 그리고 많은 것이 진행되고 또 많은 것들이 흔들려버린 지금 이 시대에, ‘시대의 구호’를 제대로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들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지도 간략히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단 한 호흡, 하나의 글에서 이제 막 분실신고(紛失申告)를 접수한 ‘이 시대의 구호’를 찾아내는 것은 너무 벅차고 숨이 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여기에서 일단 멈추고! 더 이상 소설 ‘정글만리’나 조정래 작가를 시비할 필요도 없이, 우리 스스로의 책임과 노력으로 우리가 분실한 지금 이 시대의 구호를 본격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2, 2014년 2월, 이병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