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이달의 서평] 화려한 군주: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Splendid Monarchy: Power and Pageantry in Modern Japan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35,425
도서정보
저자명
다카시 후지타니
저서명
화려한 군주
출판사
이산
연도(ISBN)
2003(9788987608297)
[이달의 서평] 다카시 후지타니Takashi Fujitani, 『화려한 군주: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Splendid Monarchy: Power and Pageantry in Modern Japan』, 한석정 역, 이산, 2003(1996).
이노우에 단케이의 메이지 헌법 발포식 그림. KAJA에서.
1.
1979년 10월 27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갔지만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선생님은 교실에 오더니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날 아침에 뉴스를 보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집에 조그만 흑백TV가 있은 지 이년 정도였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너무 오랜 일이라 기억이 뒤섞여 정확치 않다. 다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었던 그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 정도. 살해나 암살이라 하면 안되고, 서거나 시해라 해야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릴 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바람에 날리는 호외를 주워들고 읽는데. 갑자기 현충일 사이렌 같은 것이 울었다. 그 자리에 서서 어색한 묵념을 하려던 나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선 5공화국 헌법의 중요성과 지도자의 그리고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개헌 국민투표의 투표율이 95.9%, 찬성율이 91.6% 였다는 데. 나는 그때 학교에서 설명을 듣고 반대가 너무 많아서 나라가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다. 진짜다. 만장일치나 그에 가깝게 나와야 하는데. 그리고 이어진 간접선거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도 득표율이 90.2%라 지지율이 낮아서 국정이 어렵겠구나 걱정했었다. 이것도 진짜다. 학교 선생님은 야당 후보가 있어 경쟁 선거가 되긴 해야 하지만, 압도적 지지가 꼭 필요하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라고 했었다. 나는 그렇게 박정희 체제가 만들어낸 애국소년이었다. 게다가 삐라나 북괴 간첩이 흘린 흔적 같은 거라도 발견하면, 파출소에 가져가고,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하면 상으로 주는 공책마저 굳이 사양하는 반공소년이기도 했다. 이런 기묘한 나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2.
1953년에 시카고에서 태어나 줄곧 미국에서 활동한 일본계 미국인 학자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는 이런 내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를 제공한다. 그의 주장을 단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천황제는 만들어졌다. 대규모의 국가적 상징과 의례도, 일반 민중은 신민-시민(subject-citizens)으로 재구성되었다. 즉, 국민의 탄생이다.(14) 에릭 홉스봄과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보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후지타니는 일본에 왔던 영국인 배즐 홀 체엄벌린Basil Hall Chamberlain에 눈을 돌린다. 그는 1912년 『새로운 종교의 발명』이라는 소책자에서 “일본의 지배엘리트가 일본 국민과 세계를 상대로 ‘미카도(御門, 帝: 천황) 숭배와 일본 숭배’라는 ‘일본의 새로운 종교’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납득시키려 하지만, 실은 아주 최근에 발명된 것”(21)이라고 간파한다. “일본 지도자들이 천황 숭배를 조장하기 위해 ‘폐기처분되었던 신도(神道)를 “선반에서 끄집어내 먼지를 털어냈”으며, 신도 사제들이 장례와 혼례를 주관하게 된 것도 근년의 일이라고 지적했다.”(21) 천황의 초상화도 황실의 경축식도 만들어진 것들이며, 과거의 일본인들은 천황을 함부로 다루었다.(22) 체엄벌린은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낸 이들이 이를 믿게 된 것은 이로 인해서 광범위한 계급이 권력을 얻은, 이익이 되는 것을 믿는 현상,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따라, ‘기원의 기억상실’genesis amnesia라 부를 수 있다.(23) 후지타니는 이를 연구하기 위해 푸코의 계보학, 연속성이라는 원칙을 일종의 형이상학적 선험으로 간주하고, 역사의 균열의 순간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연구한다.
만들어진 천황제가 다소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에릭 홉스봄의 유명한 『전통의 발명』이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킬트도 영국 여왕의 그 화려한 행진과 의식도 모두 몇 세기 동안 만들어졌는데. 일본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일본의 천황제가 오래되었다고 자각 없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나의 일본에 대한 지식이 모두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토에 있긴 했으나 국가제사장에 불과했던, 사람들에게 직접적 인식이 없었던 천황을 실질적인 주권자로 내세우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에 의해 수립된 신정부가 사실상 군사정변 또는 내란에 의해 구성된 정부였기 때문이다. 사쓰마와 초슈 오늘날 가고시마와 야마구치를 중심으로 한 군사력이 도쿠카와 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의 구심으로 천황이 선택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너무 당연한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다. 그럼에도 천황제라는 것이 거의 모두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만들어낸다는 사고방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전통을 만들어낸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오늘날 비교적 가까운 시기 불과 40~5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한국의 수많은 전통들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와 만들어지고 싶다는 피지배자 측의 열망이 아닐까. 물론 저항을 무너뜨릴 군사력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이 균열을 파악하는 눈이 더욱 중요하다.
천황제가 횡행한 메이지 시대 이전, 즉 도쿠가와 통치체계에서 정치, 사회, 문화는 수평적이면서 수직적인 구분과 분리가 이루어져 있었다. 계급으로 분할된 사회였고, 17세기 후반에야 교토/오사카 지역의 민간 수준에서 희미하게 국가정체성 의식이 겨우 생겨나는 정도였다.(26) 실제 메이지 시대가 되어 국가의 대리인인 경찰, 관리 등에 의해 민속종교와 민중의 생활양식이 파괴되고, 의무교육의 도입으로 높은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아이들의 노동력을 빼앗기고,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자, 민중은 맹렬히 저항했다.(28)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은 무저항 위에서 순조롭게 형성되지 않았다. 게다가 천황의 이미지는 비정치적 민간신앙, 세속의 복을 안겨주는 신성한 존재 쯤으로 여겨졌다.(30)
실제 메이지 유신이란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도쿄에서 막부군을 무너뜨리는 일로 시작한 보신 전쟁은, 동북의 아이즈 지방을 정복하고, 마침내 도쿠가와 막부파는 훗카이도에서 에조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결국 항복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몰락해 가는 사무라이들을 규합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은 사무라이들의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리고 민중의 저항도 이어진다. 전국을 휩쓴 잇키라는 이름의 농민 소요는 징병, 중과세, 민속신앙 파괴 등이 원인이었다. 갑오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200여건이 넘는 근대적 제도 개혁이 좌절된 이유도 의외로 간단한데, 사람들이 머리를 자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구조적 원인은 물론 깊이 깔려있지만, 사건이 촉발되는 장면은 의외로 간단하다.
메이지 정부는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과 애매하고 통합되지 않은 국민적 정체성 의식을 근대적 내셔널리즘 방법으로 전환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먼저 연설과 저술, 천황에 대한 포고문이 활용되었다.(31)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천황과 국신国神을 숭배하게 만들려 애썼다.(32) ‘기억의 장’mnemonic sites을 만들어 내는 데,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억과 현재의 국가적 성취와 미래의 가능성을 기념하는 상징적 표지로 기능했던 물질적 수단이었다. 먼저 의례儀禮의 장이다.(33) 메이지 일본의 지배엘리트는 열성적으로 국가의례를 발명하고 개정하고 조작했다. 이 영토에 하나의 통치자, 하나의 신성한 정통질서, 하나의 지배적인 기억이 존재하기를 염원했다.(34) 1878년부터 1927년까지 지켜진 10개의 국경일은 거의 모두 천황제와 관련되었다. 새롭게 천황이 직접 거행하게 된 13개 의례 중 11개는 역사적 전례도 없었다.(35) 천황과 그 가족, 그리고 천황정권의 문무관들을 대중 앞에 직접 보이는 대규모의 황실 패전트pageant는 장관이었다. 순행으로 시작되어, 메이지 헌법 발포식, 개선관병식, 황실장례식·황실결혼식·황실 결혼기념일이 패전트로 진행되었다.(36-37) 일본인들은 국가의 중요한 순간을 나타내는 거창한 공적 의례를 구경하는 데 익숙해졌고, 황실의례를 비롯해 국가의 상징, 전쟁, 세계문명 속의 국가, 황실, 국가의 군주, 국민정서 등의 기억은 천황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느낌, 일본인이라는 자부심, 다른 일본인과의 정신적 유대를 가져왔다.(38) 오늘날 순례의 장소인 황거는 황폐한 고성에 불과했었다.(39)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은 이런 패전트를 위해 황거 앞의 건물들을 헐어 광장을 만들고, 황거를 재건하며, 각종 신사나 건물, 공공장소의 외관을 변형시키며, 국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40-41) 도쿄와 교토의 두 수도와 이세신궁伊勢神宮이 근대 일본의 상징적 지형에서 가장 중요한 세 지점이 되었다.(42)
3.
이런 일련의 시도의 배경에는 피지배자에 대한 통치자의 태도 변화가 깔려 있었다. 정치엘리트인 사무라이가 일반 민중의 수동적 순종에 만족하던 시대를 떠나 국가적 목표의 실현에 일반인의 적극적이고 정신적 참여를 요구했다. 사람들을 단순한 통치대상이 아닌 지식이 있는 자기규율적 주체, 푸코가 말하는 이중적 의미의 주체-‘지배와 예속’에 복종하는 신민subject임과 동시에 ‘양심과 자의식’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주체subject로 다시 만들어 가려 하고 있었다.(43-44) 근대국가의 모든 문화기구가 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한 메커니즘을 인식했다.(44)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의 식문화는 인민의 일상생활에 쉽게 스며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일상적 관행과 신체에 새겨졌으며, 근래에 발명되었다는 사실은 망각되었다.(46) 기어츠가 말하는 ‘극장국가’, 지배자의 의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양측이 공유하는 문화적 가치를 연극화하는 데 있다.(48) 어떤 의미에서 후지타니의 작업은 근대 일본에 대한 역사민족지이다.(50)
사람에게 눈을 돌린 점이 어찌 보면 메이지 유신의 핵심이다. 이들은 국민을 만들어 내려했고, 사람들은 국민이 되고 싶어 했다. 미셸 푸코 식으로 말하면 주체화. 사람들의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든 힘을 동원할 수 있어야 했다. 때론 전쟁을 위해 목숨까지 동원할 수 있어야 했다. 메이지 신정부가 당한 국제사회의 현실과 국가발전을 위한 목표는 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근대 국민국가로 시동을 건 것이다. 그래서 민본 혹은 위민 같은 전근대적인 단어와 국민nation은 그 차이가 매우 크다.
다양한 공적 의례는 천황과 그의 스펙터클을 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군중은 시선의 주체이고 천황과 그의 의례는 관찰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국민이 천황의 응시대상, 관찰되상이 되도록 만들고, 천황을 초월적인 주체, 응시의 주체로 만든다. 이를 통해 시각적 지배가 구축된다.(51) 그러므로 일본 천황제는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모더니스트나 강좌파 마르크스주의가가 말하듯 일본의 근대성이 불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천황제가 일본의 근대성을 창출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한다.(53) 이런 이론은 근대화 이론가인 존 휘트니 홀John Whitney Hall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54)
다카시 후지타니가 공격하는 두 대상이 각각 가장 대표적인 근대화론자들이라 점이 너무나 흥미롭다. 마루야마 마사오과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 이 둘은 넓게 보아 근대화론자들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생을 통해 자유주의자로서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유로운 주체의 등장을 열망했다. 그에게 천황제는 전근대였고, 이는 파시즘과 연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집단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을 열망했다. 다카시 후지타니는 이를 멋지게 뒤집어 엎는다. 근대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천황제는 일본 근대를 이끌어낸 동력이자 상징이라고.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은 실상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국가에는 신성한 장소가 있게 마련이다. 국립묘지, 기념비, 궁전과 관저, 신전, 조각상 등, 일본에서 이세 신궁, 야스쿠니靖国 신사, 황거皇居, 교토 수학여행은 1880년대에 시작되어 20세기에 거의 모든 소학교의 관행이 되었다.(60) 그러나 메이지 유신 초기 천황의 순행이 국가 패전트의 주된 형태였기에 도쿄는 1889년 새 황거를 완성하기 까지 행재소行在所(임시궁전)에 불과했다.(63, 67) 메이지 정부가 물려받은 도쿄는 죽어가는 도시였다.(69) 순행巡幸 또는 行幸은 오래된 개념이었지만, 메이지 천황 만큼 일본의 4대 섬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닌 천황은 없었다. 재위 첫 20년간의 6대 순행이 이루어졌다.(79) 국가의 성역을 참배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선물과 상을 내리고, 표창하며, 효자, 충복, 열녀를 칭찬했다.(80) 국화菊花 문장이 황실로 제한되었고,(81) 일본국기와 히노마루 등이 걸렸다.(82) 위용과 광채는 권력을 창출했다.(83) 천황은 살아 있는 신처럼 보였고, 천황이 밟은 모래는 마력이 있다 여겼다.(84-85) 이 순행은 공간 통합의 의례였다.(86) 천황의 신체가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시간의 경과에 다라 사람들은 국민국가에 편입되었다.(88) 교토는 쉽사리 힘을 잃지 않았다. 정부는 즉위례와 대상제大嘗祭를 쿄토에서 거행하기로 했고, 교토는 거대한 박물관으로 변해갔다.(94) 교토와 도쿄는 고대적이고 순수일본적인 것과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것이라는 이원적 이미지를 갖게 되고, 하나는 일본의 과거, 다른 하나는 현재와 미래의 지배적 기호가 되었다.(101) 1880년대에 들어서 일본은 재정적, 정치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옛 일개 다이묘의 황폐한 영지가 아닌 황거 재건을 논의하게 된다. 시시도 다마키宍戸璣는 “천황의 근본은 국내외 청중을 위한 국가의 의례를 수행하는 것이며, 이것을 거행할 중심장소가 없다면, 천황은 근본을 잃을 것”이라며, “독립제국에 걸맞는 화려한 황거”가 필요하다 주장한다.(104-105) 연간 국가예산이 6,000만 엔을 약간 웃돌던 시절, 1,000만 엔의 예산이 제시되고, 그 약 절반으로 황거를 완성한다. 황거완성 후 도쿄는 근대적인 상업도시로 본격적으로 변모한다.(106-107) 일본이 본격적으로 국제적 의례 경쟁에 뛰어든다.(109) 동시에 황거 앞 건물들을 철거하고, 개방된 광장을 조성해 군중을 황거 앞으로 끄어들이고, 군중이 천황을 보는 동시에 천황에게 군중을 보이는 근대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국민과 천황이 상호관계에서 마주 보게 된다. 이어 우에노上野공원, 아오야마靑山연병장, 히비야 공원이 만들어진다.(116-118) 대순행은 종말을 맞는다. 대신 천황이 몸소 갈 필요가 없는 황실의 상징과 국가의례를 만든다. 천황의 초상, 표준화된 국민의례, 교육칙어, 국경일, 승전 기념 등. 또 지배엘리트는 도쿄와 교토를 구가의 상징적·의례적 무대로 마련했다.(121)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의 시대축제時代祭 같은 것이 이 시대에 만들어진다.(122) 새로운 신사들을 재건하고 다시 채우면서, 수많은 신들 중에서 천황의 친정親政이라는 지배적 국민적 내러티브에 통합될 수 있는 신들과 남자들만 기념된다.(124)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공식적 영웅이 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거부당한다.(127, 129)
새로운 민족을 위한 장소를 만드는 점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탈식민국가의 박물관 건립 열풍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요즘에 나오기 시작하는 주장이지만, 모두가 손꼽아서 기다리던 경주 수학여행이 실제 박정희의 경주 성역화의 결과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진 이후 외면받고 있긴 하지만. 불국사의 대부분의 건물은 실제 1970년대 양식에 불과했고. 그는 화랑도를 되살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화랑도는 만주국 출신의 이선근이 주장한 것인 동시에 한국의 파시즘 이론가들은 모두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왜 화랑도를 되살리려고 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원형을 가장 전통적인 것에서 어떤 이론이나 윤리나 사상에도 물들지 않은 본연적 정서로부터 끌어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이끈 国学의 정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가 현대로 이어지는. 일본에서 배워온 것이라고 무작정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좀 비교해 보려는 거다. 아마도 박정희는 경주를 교토京都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4.
메이지 천황의 순행을 통한 국가의 영토적 통일을 가져오는 방식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가 오늘날 가장 잘 보여준다. 그건 바로 ‘현지지도’라는 방식이다. 김일성이 무슨 농장하고 공장 어딘가에 가서 지도했다고 하던데. 이제는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론 박정희도 전국을 돌아다녔다. 내가 보기에 근대적 의미의 순행을 가장 먼저 시도한 사람은 바로 이승만이다. 1946년 6월의 남한 만의 단정을 요구하는 정읍 발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남부지방 순회였다. 해방 정국에서 대부분의 정치적 활동은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지방 조직은 좌익 성향이 먼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시절, 이승만은 미군정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남부지방을 순회하면서, 조직을 결성하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특히 일제 시대의 친일 경력으로 두려워하던 경찰과 지주 등의 후원을 이끌어낸 일은, 비상국민회의의 일로 몰락할 뻔한 그를 구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황실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의례가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했다.(135)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의례의 화려함·장엄함·정통성이 세부에 드러나도록 했고, 지방의례에도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이런 의례는 국가간 의례경쟁이 벌어지던 1870~1914년 사이에 국제적 관중을 고려했고,(137-138) 조선과 청에 대해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우위를 보이며 스스로 식민지 지배국으로서 특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139-140) 일본 정치질서 특유의 필요성이 드러나며서, 천황과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의미의 질서에 특별히 상응하는 두 부류의 상동성相同性을 도식화·객관화하고, 현실적이면서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140) 이는 “차등적으로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정치공동체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근대의 주체/신민을 창조하는 데 제국 정부가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대부분 중요하고 상반된 관념을 믿도록 만드는 데 달려 있었다. 국가와 황통皇統의 영속성, 일본인의 통합성,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는 천황의 능력, 정치를 초월하면서도 거기에 깊숙이 관여하는 천황의 위상, 정부와 정치활동에서 여성을 자연스럽게 배제시키는 것과 같은 그런 신념.”(142)
왕실을 폐지당한 나라, 몰락한 왕실을 복원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나라에서 영속성을 가져오는 통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치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민족과 국가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길 외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에 없는 ‘단일민족국가’라는 주장이 나오고,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칭송이 이어진다. 다른 나라들을 비웃으면서, 오랜 역사와 국토의 통일성을 강조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그 국가의 상징인 대통령은 오래도록 지배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가 수립된 이후, 단 한 번밖에 바뀌지 않았다.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국가-민족-국토-지도자의 연속성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메이지 시대에 볼 수 있었던 거창한 패전트는 제국정부의 번영과 안녕을 유지하는 힘을 나타내고, 국가의 근대성과 진보, 부, 군사력 그리고 세계문명에 합류하는 능력을 상징하는 도시인 도쿄에서 거행되는 동시에 황거의 궁중삼전에서 거행되는 고풍의 예식이 포함되었지만, 공식석상에서 메이지 천황은 마차를 타고 서양식 군복을 입었고, 문무관과 육해군과 무기가 국가의 힘을 드러냈다. 이 공개행사를 통해 제국정부는 국가의 복리를 책임진다는 것, 근대 세계의 선두에 서 있다는 것, 그래서 그 통치가 정당하다는 것을 과시했다.(147) 이 행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1889년 2월 11일의 메이지 헌법 발포식이다. 재건된 황거와 제도帝都를 무대로, 이 도시를 출입하는 사람들은 소식을 전하고, 의례의 중심과 때를 맞추어 각 지방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같은 행사를 치르는 최초의 근대적 국가의례였다.(147-148) 먼저 궁중삼전에서 선조의 예복을 입고, 맹세하고 절한 후, 전국 각지의 신사에도 알렸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황실과 정부 고관, 외교사절 앞에서 총리에게 헌법을 하사한다. 이 행사는 언론에도 개방되었다.(148-149) 천황과 그 일행은 오후에 궁성을 나와 중건된 니주바시와 황거 앞 광장을 지나 수도의 대로를 따라 가다 아오야마 연병장에서 마무리 지었고, 제국대학생들은 만세를, 여고생들은 새로 만든 기원절 노래를, 소학교 학생들은 기미가요를 계속 불렀다.(150) 연병장에서 천황은 1만 1,000명의 육해군 병사를 열병했다.(151) 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검토하여 진행된 1895년 메이지 천황의 은혼식 기념축전도 핵심내용은 비슷했다.(154) 이때 일본 최초의 기념우표가 만들어졌다.(156) 1900년의 황실결혼식에서 최초의 신도식 결혼식이 발명되어 거행되었다. 황족의 혼례는 종교적 의식이 되었다.(157-158) 궁중삼전에서 입는 고풍의 의상과 밖에 나타날 때 입는 군복은 천황과 황태자의 신성과 인성 양면을 표현했다.(160) 전쟁도 영향을 미치는 데, 일본 신사에서 보이는 거대한 도리이鳥居는 근대 특유의 현상이다.(164) 국가적 영웅의 동상도 유행하며,(165) 평민전사자를 위한 야스쿠니 신사의 연례축제와 봉안의식이 의미를 갖게 된다.(167) 도쿄는 개선하는 육해군장병을 위한 국가적 축제장소가 되었는데,(168) 1895년에 있었던 청일전쟁 승전 개선행사에서 거대한 아치를 세우고, 마차의 덮개를 엎애버렸고, 1905년 러일전쟁 후 관함식에서 천황은 200척의 전함을 열병했다. 천황의 응시 앞에 유순한 대상으로 변모한 인파와 함선이 드러났다.(171-173) 1906년의 개선관병식에서 대규모의 노획무기가 전시되었다.(174-176) 친린보호국의 대표 의친왕이 메이지 천황의 뒤를 따랐다. 군인들은 규율화된 신체를 보여주었다.(178)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규율화하는 군주로서의 천황은 대규모 석판화, 기념엽서 등으로 나타났다.(180) 19세기 말 일본 정치사와 문화사에서 군주가 종래와 달리 재발명되고, 지배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은 일본의 규율사회가 성립하는 과정과 일치했고, 일본에서는 푸코가 말하는 ‘군주적 권력’과 ‘규율적 권력’이 동일한 역사적 순간에 등장했다. 권력은 익명적인 것이 아니라 메이지 천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현시되었다. 천황의 가시성과 국민의 유례없는 가시성이 사실상 동시에 생겨났다.(188) 메이지 천황이 살아 있는 인간으로 죽음을 맞게 되자 엄숙한 장례가 준비된다. 천황의 위업 만으로는 국가의 분변성이라는 관념을 유지할 수 없기에 천황의 장례가 황실과 일본의 과거의 위대성과 깊이를 공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고, 교토로 이동한다. 고풍이 동원되었다.(192) 그러면서도 불교 요소를 끊어버리고 불교 전래 이전 시대의 아우라를 조성하려는 근대적 산물이었다.(197) 수많은 일본 신민은 교토나 도쿄에 장례를 구경하러 오거나 혹은 아모야마 연병장과 모모야마 능의 전시물을 구경하러 와서 황실의 ‘과거의 위대함’과 그 중요성을 상상할 수 있었다. 천황의 장례 및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은 ‘기억의 장’이었다.(198)
그래서일까? 그 시절에는 퍼레이드가 많았다. 학생들은 종종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에 동원되었다. 대통령이 해외로 나가도 태극기를 흔들어야 했고, 대통령이 해외에서 다시 들어와도 태극기를 흔들어야 했다. 큰 행사는 여의도 광장에서 주로 치러졌다. 새로만들어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군인들은 열병을 하고, 분열을 한 후, 시내를 행진하곤 했다. 해마다 국군의 날이 다가오면, 이러는 일이 반복되었다. 행사의 이름은 다양했지만, 하는 일은 늘 비슷했다. 외교관계가 빈약했던 시절 아프리카 신생국의 대통령이라도 하나 오기만 하면 큰 일이었다. 이런 일로 저런 일로 기념우표가 발매되었다. 대통령 취임식, 경제개발계획 기념, 수출목표 달성 기념, 어느 나라 대통령 방한 기념. 기념우표를 소화할 필요가 있어서 였을까. 별다른 취미라고는 없었던 시절, 학생들에게 우표수집은 강요되다시피 했다. 기념우표가 발매되면,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우표를 팔았다. 주로 두 장씩 만들어진 시트라고 부르던 거였지만, 가끔 전지를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우표에는 늘 그 사람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라면 굳이 우표를 살 필요는 없었을 텐데. 교실에도 그의 사진이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모두들 우표 수집을 하는 바람에 나도 몇 번 모으려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 우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다팔면, 책이라도 몇 권 사볼 텐데. 그래서 였던가 그의 눈은 늘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실에서도, 신문에서도, TV에서도, 사진에서도, 포스터에서도, 대한뉴스에서도 어디서나 그의 모습은 어디에나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늘 불러야 하는 노래는 늘 그의 작사작곡이었다. ‘나의 조국’이라던가 ‘새마을노래’라던가. 그런 노래의 작사작곡이 누군지를 묻는 시험문제가 나왔던 기억도 난다. 그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5.
영국 유학생이었던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는 “불명의 왕, …… 옛 왕의 신체가 새 왕으로 교체되어도 왕의 정신에는 변동이 없다” 해석을 보낸다.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tz가 제기한 ‘국왕의 두 신체’의 개념에 따르면 “한편으로 국왕은 “타고난 또는 사고로 인한 질환, 유년기나 노년기의 전신박약, 그리고 일반인의 신체에 (유전적으로) 발병하는 장애 등에 굴복하는” ‘자연적 신체’body natural를 갖는다. 또 한편으로 이 자연적 신체를 초월하여 정치질서의 불변성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도 갖는다. 이 정치적 신체는 보이지 않아 통제할 수 없으며, 정부와 정책을 구성하고 국민의 인도자가 되며 공공복리의 정신을 담아낸다. 이 신체는 자연적 신체가 겪는 유년기와 노년기, 기타 장애와 박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 이 명분을 갖고 국왕이 정치적 신체로 행하는 것은 그의 자연적 신체의 결함으로 인해 취소되거나 좌절될 수 없다.(201-202)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일본 사상가들이 마치 유럽과 일본의 왕위에 대한 관념이 서로 대동소이한 것처럼 기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근대 천황의 이원론을 만들어냈다.(203) 근대 천황의 이원성은 통치와 군사계획에 깊숙이 관여하는 동시에 이를 초월하는 듯한 이미지를 구성했다. 근대 일본의 ‘왕위’는 적어도 두 개의 ‘신체’, 즉 국민공동체의 세속적이고 가변적인 번영을 나타내는 부분과 그것을 초월하는 영속성을 나타내는 부분을 가졌다고 상상할 수 있다.(204) “메이지 천황은 천황이자 천황위emperorship였으며, 신비하면서도 가시적이고, 초월적이면서도 관여하고,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사에서 면제되면서도 국가의 모든 성취에 책임을 지는 이원적 존재였다.(205) 천황과 황족의 신비한 측면을 조장한 의례공간이 궁중삼전宮中三殿, 즉 현소賢所, 황령전皇靈殿, 신전神殿이었지만, 황령전과 신전은 새로 만들어진 성소였고, 거행된 의식도 근래에 반명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신사와 의식이 고풍으로 보이고, 일상사에서 동떨어진 신비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었다.(206) 동시에 1880년대를 통해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천황의 인간적·사회연루적 이미지와 직접통치의 현실 둘 다를 조장하는 것이 절실했고, 국민과 황족 사이의 친애親愛, 친밀親密, 친절親切의 함양으로 표현되었다.(209) 선물, 사면, 군주가 지나갈 때 모자나 스카프 흔들기, 천황의 신체를 드러내는 목판화 등.(210-213) 근대적 천황은 또 성별화된 존재여서 후지타니는 메이지 시대 칸토로비치가 군주의 ‘물리적 신체’라 부르는 천황의 신체는 남성화되었고, 이 남성화 작업은 지배적인 국민적 내러티브-천황을 국가의 연속성과 과거를 상징하는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강력한 국민국가의 중심에 있는 통치자로 분절하는 내러티브-를 믿게하는 핵심요소 였다고 주장한다.(218) 아시아태평양 전쟁기간 동안 천황은 여성화된 차원으로 이해되어, 유럽 파시즘의 모성적 차원과 비교할 만 했지만, 메이지 천황의 외관은 남성화되고 활동적이고 군인화된 새로운 이미지로 나타났다.(221) 남성화되고 군인화되고 역동적인 천황상과 황실의 여성들에게도 이상적인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봉사와 양육 같은 새로운 공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227) 일본의 황실여성들이 공적인 자리에 나타난 것은 다소나마 유럽 왕실의 관행을 모방했기 때문이다.(231) 황실여성들은 대외적 존경과 일본 시민을 위한 여성다운 미덕의 화신이 되어야 했다.(232) 천황과 황후 사이에 항구적 일부일처제 관계를 설정하고, 혼인을 신도식으로 신성화하며, 은혼식을 거행하는 등 가족의 특성을 재정의하면서, 느슨한 결혼관과 이혼관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235-236) 규범화된 가족은 국가공동체의 기본단위로서 이바지하였고, 1890년부터 ‘가족국가’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가족으로 표상되기 시작했다.(238) 공적인 노출과 살아 있는 천황에 대한 다른 시각적 표상들을 통해 천황은 신神일 뿐 아니라 사회와 정부의 중대사에 연루되는 한 인간이 되었다.(241)
칸토로비치의 ‘국왕의 두 신체’는 정말 탁월한 개념이다. 그중에서 영속하는 왕의 신체는 일본에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기원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왕이 있든 없든 이런 나라들은 모두 가족국가를 표방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했다. 나라가 만들어진 시기와 장소를 만들어내 했다. 단기를 연호로 쓴 건 아마도 그런 절박함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지도자의 이름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핀다는 가당찮은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판을 친다. 2016년 10월의 어느날 박근혜 대통령에 항의하려는 시위대의 발길도 여전히 청와대로 향한다. 이명박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시위대의 목소리를 들을리가 있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통령이 직접 이어진다는 일종의 망상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다. 자신이 자기의 권한을 대통령에게 스스로 위임했다는 식의 이론 같은 것이 마음 속을 사로잡고 있는 모양이다. 칸토로비치는 주장했다고 하지만, 다카시 후지타니가 굳이 지적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국왕의 영속하는 신체의 무책임성이다. 서양 중세의 국왕들이 신에게 책임을 진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체로서 였지, 국왕의 신체로서가 아니었다. 그런 국왕은 실패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잘못된 전쟁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의 병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을 진다. 바로 이 국왕의 두 신체에 대한 사고방식이 쇼와 천황의 전쟁 무책임론을 낳았다. 전후에 그는 마치 자신이 입헌군주국의 황제였던 것처럼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오늘날 근대국가가 국민국가가 바로 이 무책임성을 보유한 채로 살아 움직인다는 점이다.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고, 세금을 걷어가고, 4대강에 낭비하든, 무녀에게 갖다 바치던 책임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당시 국가 지도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개인들 뿐이다. 그게 이명박이든 박근혜든 그들에게 개인적 책임을 물을 방법은 없다. 그들은 최악의 순간에 자리를 내놓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다한다. 국정의 최고책임자 뿐아니라 오늘날 국가기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바로 이런 무책임성의 구조 속에서 일하고 있다.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접점에 선 사람들 뿐. 그래서 지난 주말에도, 이번 주말에도 시위대는 의경의 방패를 연민을 가지고 두드릴 뿐이다. 근본적 고민이 필요한 지점은 국가의 무책임성 그 자체다. 어떻게 책임지는 국가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럼에도 칸토로비치는 계급환원론, 기구환원론, 자본환원론 등등을 뛰어넘어 국가를 국가 그 자체로 사고할 수 있는 기반을 제시한다. 법인격corporate personality이라는 개념에서 고찰할 필요가 생긴다. 권력은 행사하고, 힘과 자원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책임은 지지 않는 기업, 단체, 각종법인, 국가까지 무책임과 제한된 책임 속에서 개인들은 부딛히며 무너져 간다. 법인격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법인격에 대한 전면적 책임이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 법인격이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유지시키고 있다. 법인격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황실의 패전트, 상징, 규율적 관행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공동체에 속한다는 상상의 전제조건이 인쇄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된 시간을 공유한다는 의식, ‘균질의 공허한 시간’, 동시성의 공유라고 말한다.(252) 천황의 순행으로 공간적 연속체를 구성하고, 천황의 패전트로 사람들은 동시성에 결부되었다. 귀천의 구별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든 대중이 참가하는 진정한 국민적 성찬식이었다. 개개인은 시공을 넘어 시간 안에서 시간을 통해서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253)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국민적 성찬식에 동시에 참가했는지 여부가 중요했다. 전국적 교통, 통신망의 발전, 기술의 발전이 기호, 이미지, 사람들의 급속한 순환으로, 사람들은 ‘일본 시민’이 되어가고 있었다.(254)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에 따르면, 내셔널리즘의 핵심 관념을 자동적으로 창출하는 것은 미디어 그 자체다.(254-255) 중요한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은 미디어와 수송체계이다.(255) 사람들은 천황의 패전트를 보러 도쿄로 몰려들었고, 인쇄 미디어, 시각 미디어를 통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258) 이는 직접 보지 않은 이들까지 국민적 동시성을 광범위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일본 신민 대다수가 모방한 지방의 의식에 참가하여 국민적 성찬식을 경험했다.(259) 개인이나 공동체가 제작한 기념물은 집단적 경험을 영구히 기억하는 데 기여하고, 훗날 집단적 동시성의 역사를 플롯화emplotment 할 수 있게 했다.(263) 기념품이 쏟아져 나왔고, 기념물도 많이 남겼으며, 기념공원도 생겼다.(264-265) ‘기념’이라는 관념이 근대 내셔널리즘의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266) 대중 동원은 위로부터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시작되었고, 국기를 게양하고, 휴무일로 정하고, 천황의 하사금을 받고, 지역 단위 경축식을 거행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일본국민이 되어 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근대적이고 대중적인 국가의례에의 참가는 국민공동체의식을 습득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대중의 참가는 거대한 행정조직망의 작동에 의해서, 지역엘리트를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가능했다.(267) 학생들은 가장 효과적으로 동원되었다.(268) 신사와 사찰이 지역의례의 장소로 이용되었다.(271) 애국주의 단체들이 동원에 기여했다.(272) 옛 관행과 근래에 발명된 관행이 뒤섞였고 친숙한 일상문화는 새로운 국가의 공식문화 안에 녹아 들어갔다. 이 혼합은 근대 국민국가에 모호한 유산을 남겼다.(274)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지역축제에 참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275) 비록 대중이 헌법이나 정치적 개념에 무지했다 해도, 국기, 천황 일가의 초상화, 기미가요, 히노마루 제등 등 새로운 국가적 상징들은 전통적 축제용품이나 음악과 결합되기 시작했다.(277) 국가의례를 구경할 이 여행은 메이지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서민들의 관광·순례 풍속과 관련이 있다. 국가의 패전트는 관광에서 하나의 거창한 절정에 불과했다.(278-279) 많은 부분에서 서민들은 그들과 친숙한 관습과 신앙을 간직한 채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예를 들면 비정통적 천황관) 쉽게 통제될 수 없었다.(281) 「(천황을) 바라보는 일반요령」이라는 부적절한 복장이나 행동에 대한 지적이 등장할 정도였다.(283) 규율적인 정부가 강요하는 새로운 습관 및 신앙과 민중생활의 오래되고 무질서하기까지 한 습관과 사고방식 사이의 긴장 속에서 다양한 국가장치(학교와 병영)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면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데 효과적이었다. 일본 안에 감시의 사회가 창출되어 갔다.(284-285)
6.
만들어진 것은 국민이었다. 박정희 체제가 만들어낸 것은 박정희의 국민들이다. 그리고 그 국민들이 그 딸을 다시 한 번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지금 이 상황에 와서도 그 딸에게 연민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세세하게 파고들어 가면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60년대를 통틀어 미국이 제시하는 방향이 아니었으면, 몰락은 훨씬 빨랐을 것이다. 월남전 참전과 미국이 열어준 시장이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70년대의 과잉투자는 결국 몰락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런 세세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적으로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적어도 부하의 손에 살해당하기까지. 그리고 그의 경제성장과 지도력은 신화가 되었다. 왜 이런 모든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그가 당시 자신의 모든 경쟁자들에 대하여 우월한 한 가지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원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일본에서 그것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대는 열망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몰락한 처지를 벗어나고 싶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일어서고 싶은, 지난 세기말의 왕조의 몰락으로부터 시작해서 식민지를 지나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은 성공의 열망, 힘의 열망, 돈에 대한 열망, 인정에 대한 열망. 그 열망을 이끌어내어 하나로 묶어낼 지도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때로 권모술수에 가까운 사람들을 동원하는 능력이었고, 그는 그 점에서 놀랍게 성공했다. 그래서 그는 박정희의 국민들을 아직까지도 살아 움직이는 그의 국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박정희를 바라보고, 박정희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스스로에게 내면화하는 국민. 이 국민에게 국가와 내셔널리즘은 하나의 종교였다. 로버트 벨라의 표현을 따르면 그것은 일종의 시민종교였다. 이 종교의 교리는 근대화와 반공이었다.
물론 이 종교는 독점적 지위를 곧 잃고 말았다. 독재에 오랫동안 신음하던 사람들은 민주화를 외쳤다. 이들은 근대화와 반공이라는 오래된 교리를 거부하고,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교리를 내세웠다. 하나의 국민 위에 또 하나의 국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역시 또 하나의 근대성Modernity이고, 또 하나의 세속종교이다. 87년 민주화에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이 두 국민의 연속적인 투쟁이다. 이 두 국민의 성원권은 배타적이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양쪽에 모두 속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는 진정성이나 바른 입장을 요구하면서, 한쪽에만 속해야 한다고 순수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지만, 그게 모두는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흔히 통치전략으로 지적되는 두 국민전략이란 비판은 지나치게 안일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둘로 갈라져 둘 중 하나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2016년의 한국에는 분명히 두 국민이 있다. 이 두 국민 모두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하나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에 의해서, 다른 하나는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정치 지도자나 활동가들이 생각하듯 이 두 국민은 외형적으로 충돌하고 있지 않다. 이 두 국민은 차라리 개인의 내면에서 출동하고 있다. 두 개의 믿음을 가진 채 스스로 모순을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두 국민의 충돌은 정치적 의례의 붕괴를 가져왔다. 대통령 취임식과 장례식 그리고 묘지를 참배하는 것 이외의 거의 모든 의례가 붕괴해 버렸다. 대통령의 퍼레이드, 해외순방, 군의 열병 등 산업화와 근대화를 상징하는 의례들이 매력을 상실해 가면서, 시위나 광장에서 열리는 축제가 이를 대치하지도 못하고 있다. 국가적 차원의 동질감을 이끌어낼 의례는 이제 없어졌다. 그저 남은 것이라고는 현충원에 가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의 묘소를 도는 것뿐이다. 효창공원에 가든지, 봉하마을에 가든지. 묘지 참배는 본래 중요한 의례의 양식이지만. 이제는 그것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현충원이 문제가 되는 것도 김대중 대통령이 국장과 현충원 안장을 고집하면서, 현충원의 독점을 깨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보수 정권을 아예 국장을 없애버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빠진 518기념식이야말로 의례 출동의 현장이다. 민주화의 의례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다. 적어도 모두의 의례가 될 수 없다는 강변인 셈이다. 의례와 상징을 상실해 가는 사람들이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고개를 처박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7.
그렇다면 이제 의례는 없는가. 그렇지 않다. 산업화와 성장은 한 가지 국민적 의례와 동질화의 공간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설과 추석에 하는 귀향과 귀경행렬이다. 놀랍게도 이런 대규모 가족찾기가 생긴 지는 채 30년이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지도 않았다. 70년대 간간이 공단에서 버스를 동원해서 고향가는 길을 함께 간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고향찾기는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설과 추석이 3일연휴가 된것은 1985년부터다. 비록 설과 추석에 정치가 밥상과 입길에 오르고, 새누리당은 경부선이 떠나는 서울역으로 민주당은 호남선이 떠나는 용산역으로 인사를 나가지만, 적어도 이것은 하나의 통일된 의례로 구축되어 있다. 물론 그 나마 의미를 위협받고 있지만. 알려진 대로 추석을 본격적으로 쇠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부터이고, 무엇보다 소위 말하는 차례상을 위해 조생종 햅쌀을 수확하고, 사과와 배에 성장 호르몬을 투여해서 빨리 크게 키워내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되겠는가. 차례나 제사, 족보 같은 일도 1970년대 기점이다.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되는 상향적 신분제 해체의 길이 열린 시점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의례 혹은 공동체 확인의 장으로 등장한 것이 2002년 월드컵 응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촛불집회. 응원이든 집회든 끝나고 모두들 거리를 치우는 장면은 박정희 산업화의 질서와 규율화가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 보여주는 사실상 공포였다. 어찌보면 사람들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의례의 장은 내셔널리즘 뿐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파시즘의 망령이 기웃거리는 듯해서, 가끔은 참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박근혜 정권의 시도들 중에서 박정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시도들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한다고 해서, 새마을 기념관을 만들고, 다시 새마을 운동을 한다고 해서, 동상과 기념관을 만들고,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를 만든다고 해서, 그 옛날을 연상시키는 해외순방을 다닌다고 해서, 이것들 중 어디에도 새로운 것은 없다. 이런 모든 일들은 실상 박정희가 만들어낸 국민들을 향해서 호소하려는 전략이다. 그들의 기억과 향수에 기대어서 자기자리를 확인하려는 움직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이런 오래된 낡은 국민형성 전략이 새롭게 형성되는 젊은 세대를 다시 자신들의 국민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열망도 없고, 구리기만한 동원도 지긋지긋해 한다. 몰락한 종교가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늘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선조의 정신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상 돌아갈 근본이나 기원 따위는 없다. 대부분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사람들은 그때의 사람들처럼 국민이 되려는 열망이 없다. 체조를 만들고, 상징을 만들고, 태극기를 강요한들 비웃음을 살 뿐이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은 그저 그 결과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가면, 그저 스러져 갈 일들에 불과하다.
덧붙여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도대체 기독교는 그 본래의 교리를 내버린 채, 때론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는 무속과 뒤섞이기까지한 박정희 정부의 유산과 결별하지 못하고, 아직도 옹호하고, 동정과 연민을 떨쳐내지 못하느냐고, 심지어 때로는 사이비 종교에 연루되기 까지 하는 현실에서. 이런 비판은 실상 한국에서 실제로 돌아가는 기독교에 대해서 막연한 기대나 오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믿음에는 우리가 모두 기독교의 교리라고 알고 있는 창조의 하나님,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교통과 사역,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이외에 다른 것이 섞여있다. 그것은 문명, 성취, 성공, 부, 힘, 권력에 대한 갈망인 동시에 이 갈망을 이루어주는 하나님이라는 실제적인 신앙이다. 이 갈망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어주시지만, 현실에서 대통령이, 권력이, 정부가, 대기업이, 부자가, 지식인이 나를 도울 때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순응하면서, 이런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리의 형태를 띄든, 윤리의 형태를 띄든, 통속 도덕의 형태를 띄든, 처세술과 속설의 형태를 띄든 상관없다. 여기에 반공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덧붙여진다. 어떻게 보면, 개신교인들은 두 개의 종교에 이중 성원권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전통적이라고 알고 있는 개신교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근대화와 성공이라는 근대화교라는 신앙이다. 이 두 개의 종교는 각기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이 겹치고,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의 영역에서 때로 하나로 움직여서 돌아간다. 이 둘은 조화를 이룬다. 이 사실을 가장 설득력있게 지적한 사람이 막스 베버다.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 기독교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씨줄과 날줄로 아니고, 콜라주 처럼 복잡한 형태로 뒤섞여서 돌아가고 있다. 또한 동시에 실천적 믿음의 영역인 개인의 삶과 교회에서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뒤섞여서 돌아가기 때문에 갈등이 없을 뿐 아니라, 둘 중 하나를 도려낼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박정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제 무속과 온갖 사이비가 뒤섞인 상태가 되어도 이를 버리지 못한다. 희한하게도 이 사이비들은 기성종교와 교회의 부패를 비난하면서 등장하고,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내지만, 결국 더 근본적인 몰락을 향해 걸어간다. 무속과 사이비는 결국 현세에서 복을 받고, 돈을 벌고, 성공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교회와 점집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별반 갈등이 없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헌금해서, 복을 받고, 돈을 벌고, 성공하든, 점집에서 복채를 바치고, 굿을 하고, 액을 피하든, 복을 받고, 돈을 벌고, 성공하면 된다. 박정희는 이들에서 다른 하나의 복음, 즉 성공이라는 복음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이건 한쪽을 뜯어낼 수 없는 샴쌍동이 같은 존재다. 만약 뜯어내려면,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야 한다. 그 연민은 어제도 오늘도 강단을 통해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흘러나온다. 당신들이 정말 보수적이라고, 생각을 뜯어고쳐야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나 교회 지도자를 붙들고, 조용히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보라. 그는 분명 물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선교의 시작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명과 성공 그리고 부와 힘을 집요하게 추구해온, 근대성 그 자체였던 기독교는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길을 잃었다. 이번 사태에서 나의 가장 흥미를 끄는 대목은 이 큰 사건을 일으킨 모녀가 기독교에 귀의해서 한 때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헌금과 함께 냈다는 기도제목을 아연실색하면서도 흥미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여러 종교를 떠돌아다니면서, 대부분 갈등없이 자연스럽게 다녔다. 그들의 기도제목 중 이 한 가지가 기억난다. “좋은 믿음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혼란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국가와 기업을 믿음의 기준으로 판단할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그런 역량이 없다. 국가와 기업의 활동이 마치 그런 구조 혹은 단위에 포함된 개인에게 환원되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래서 여전히 “신 앞의 단독자”라는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개인은 날마다 법인 속에서, 국가 속에서, 단체 속에서, 기업 속에서 일한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행위들에는 오직 법적 책임 이외에 신 앞에서 책임을 묻지 않는다. 법적 책임마저, 유한책임, 무책의 법적 구조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 앞에서 법인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간혹 법인과 개인의 접점에서 직접적인 잘못이나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라도, 법인의 일상적 구조가 돌아가도록 일했던 사람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옥시에서 말이다. 어디의 누구에게 까지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독이 든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멋진 마케팅을 팔아제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오늘날 개인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복잡한 구조 속에 자신의 책임을 묻어버리고, 안락함을 누리면서 산다. 이런 조직에 속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이 사람들에게 해로운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데 대해, 공동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 오늘도 사람들의 삶은 법인격 속에 묻혀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교회 역시 하나의 거대한 법인격이자 무책임의 구조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이 무력한 이유는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이 너무나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나와 우리를 구성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시간과 장소, 그리고 만들어진 방법을 직시할 때다. 필요하다면, 해체해서라도.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달의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4, No.11, 2016년 11월, 이원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