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다가온 질문은 ‘과연 이것이 한국 사회의 이야기인가?’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고,’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현대인들이 겪는 무수한 정신적 질병들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고 한다(12).
일차적으로 나는 ‘성과사회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논의되어야할 책임조차 개개인의 자기관리의 문제로 귀착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일상, 그리고 이러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좌절과 절망을 어느 정도는 해소시켜줄 답안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한국어 서문’에서 밝힌 바, “한국 사회를 서구와 모든 점에서 동일시 할 수 없다”는 말도 큰 위안을 주었다(6). 실제로 독일 사회의 관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저자가 사전에 주의를 주고 있었고, 독일 사회와 한국 사회의 차이가 있더라도 이렇게 사려있는 저자의 관찰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의 중간까지 독서가 진행되면서, 나는 서서히 “냉전”만이 독일사회와 한국사회의 경험적 차이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외생적으로 부여된 구조적 차이만큼이나, 내재적으로 발전해온 문화적 습속들과 환경적 요인들이 초래하는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비록 나치즘과 권위주의의 경험이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비록 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를 함께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두 사회의 차이는 외생적으로 부여된 가시적 차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오랜 사색, 기독교의 윤리적 규율과 끊임없이 호흡해온 규범, 그리고 근대와 탈근대의 경험이 축적해온 제도, 이 모든 것들이 독일 사회를 한국 사회와는 다른 정신적 질병을 가진 사회로 만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아직도 저자가 말하고 있는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나 이러한 행동의 본질로서 “공격과 방어”라는 병리현상 속에 신음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면역학적 행동의 패러다임들이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면서 긍정성의 과잉이 아니라 ‘반목과 좌절이 배태한 결핍’에 시달리는 이른바 “피곤한 사회”는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사회는 누구보다 열심히 ‘세계화 과정’에 몰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격과 방어’ 또는 ‘타자의 부정’을 그 본질로 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화와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공존할 수 없다고 보았다(15). 그러나 한국 사회는 세계화 과정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양립하면서 ‘긍정성의 과잉’이 아니라 ‘부정성이 초래한 결핍’ 속에 살고 있다. 여전히 흡수와 동화에 관심을 가지며, 거부와 개척의 동인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물질적으로는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이 우리를 일상에서 발견될 수는 있을 것이다(19).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우리는 아직도 ‘민족주의’의 환상과 ‘성장주의’의 목소리에 잠식당해 살고 있다. 즉 ‘만족할 수 없는 결핍’이 가져다준 불안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져다놓은 ‘성과주의’와 ‘자기관리’의 신화까지 겹겹이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의 국가주의적이고 성취중심적인 신화가 ‘보다 강한 것’에 대한 열망을 가져다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까지 위협하는 ‘쏠림’의 폭력성이 사회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궁핍하지 않은 시대’에 ‘흡수와 동화’에 여전히 집착하는 사회, 그리고 이것이 ‘관용과 평화’가 아니라 ‘배척과 동화’의 폭력을 배태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왜 한국 사회가 OECD 국가 중에 자살률이 가장 높고, 왜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이 다른 사회에도 있을법한 따돌림에 나약하게 노정되어 있는지 살펴볼 이유가 있다. 물질적 포화의 뒷면에 정신적 박탈이 내재하고, 고갈만큼이나 배제가 있는 사회가 혹시 한국 사회는 아닐까(Cf. 21).
둘째, 한국 사회는 개개인이 성과에 매달리면서도 자율성보다는 전체로부터 부여된 규율이 여전히 압도하는 사회다. 저자는 ‘개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치환된’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를 ‘성과주의’로 보고 있다(23). 진정 ‘성과주의’는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이다. 능력으로 평가받지는 못하지만 성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성과주의’로 한국 사회를 단언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반문해 볼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정신적인 질환들을 병원을 통해 해결하고 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부여한 성과에 스스로를 착취할 정도의 삶의 수준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전자는 ‘정신적 질병’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 그리고 실질적으로 이런 질병에 대해 스스로가 느끼는 한국인들의 민감도에 대한 사회문화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후자는 지금까지 다양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일상 속에서 ‘성과’나 ‘성취’만큼이나 부여된 일의 ‘반복’과 ‘절망’에 시달리고 있다.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기는 것(29),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인지 한번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스펙’과 ‘차별’에 대한 좌절이 젊은이의 일상을 지배하고,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규율’과 ‘도덕’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폭력성과 불관용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멀티태스킹’이 ‘자기가 부여한 자유로운 강제’의 단면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삶은 어쩌면 몇몇 자유로운 전문직 종사자의 전유물은 아닌지, 그러기에 ‘하우스 푸어(House Poor)’나 ‘에듀 푸어(Edu Poor)’와 같은 용어가 말해주듯 스스로가 타자가 되어버린 강요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32). 정치철학을 하는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저자의 말에 너무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그가 덧붙인 말은 보충이 필요할 듯 보인다. 저자는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활동적 삶’(vita activa)이 곧 ‘사색적 삶’(vita contemplativa)의 중요성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색적 삶이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곧 ‘정치적 삶’이며, 이러한 정치적 삶이 유발하는 과도한 열정(thumos)이 철학적 성찰로 조율되어야한다는 정치철학의 요구 중 한 단면만 거론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아렌트에 대한 비판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저자는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라고 주문한다(33). 이런 삶을 갖기까지 인류가 어떤 정치적 환경들을 겪어왔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약 피로사회의 성과주의가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킨다면 (66), 피곤사회의 성취주의는 사람들을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고밀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정치적 삶’의 복원과 ‘성찰적 삶’의 복원이 동시에 이루어져야하는 사회일 수도 있는 것이다.
2. 주지하다시피 한국사회도 이미 후기 산업사회의 폐해를 경험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적으로 관리되던 위험이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되고, 어떤 형태의 외부적 간섭도 거부하는 개인주의적 태도가 고착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을 졸업한 무직자의 수가 10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증가해도, 그리고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도,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치사회적 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미취업은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쌓지 못한 자기관리의 실패일 뿐이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오늘도 스펙을 쌓는 작업에 몰입한다. 사회는 더 이상 불확실한 세계에 내던져진 이들에게 위로와 안도를 주는 곳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개개인에게 무관심한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부여하는 ‘삶의 의미’(Bedeutsamkeit)가 더 이상 개개인을 초월한 정치사회적 영역에 자리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압감을 주는 ‘어려운’ 이야기보다 ‘쉬운’ 이야기가 반갑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선호’와 ‘재미’가 일상의 정치적·도덕적 판단의 잣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얼핏 서양의 자유주의 전통을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수적 해석이 한국사회의 대안처럼 보인다. 원자화된 개인들의 사회성을 복원시키고, 전체가 나아가야할 바를 개인의 선호보다 앞세우자는 공동체주의 말이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의 ‘감성주의’에 대한 비판은 적절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전체중심의 대안은 여전히 불편하다. 집단적 지향이 개인적 선호보다 우선된다는 원칙은 있지만, 집단적 목표가 전제적 지배와 대외적 팽창을 지향할 경우 이를 방지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내재적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영토에서 형성된 문화적 동질성과, 근대국가의 성립과 탈식민화과정이 동시에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위험할 것 같다. 내면 깊숙이 자리를 잡은 민족주의가 순식간에 동질적인 집단적 선호를 형성하는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다른 어떤 사회보다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결국 한국사회의 민족주의와 서구학계의 공동체주의를 접합하는 선택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서 목도되는 ‘도덕주의’(moralism)도 집단지성을 위한 다양성 확보에 큰 장애요인이 된다. 우선 한국사회의 도덕주의는 객관적 도덕의 기준이 민주적 심의에 선재해야한다는 ‘도덕적 완전주의’(moral perfectionism)와 구분된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오늘날의 후기 산업사회가 모두 그러하듯, 한국사회도 객관적 ‘선’(善)의 실재에 점점 무관심해지고 ‘절대적 선’이나 ‘최상의 삶’에 대해 큰 기대가 없다. 그러나 일단 집단선호가 형성되고 나면, 사안을 판단하는 데 있어 객관적 원칙을 요구하지 않던 태도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돌변한다. 따라서 동일한 사안도 대상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고, 절차와 근거가 무시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한 부정의에 대한 분노(anger)보다 ‘특정인’ 또는 ‘특정사안’에 대한 도덕적 혐오(disgust)가 집단의사로 표출된다. 예를 들어, 많은 정치인들이 병역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국정을 수행하는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연예인이나 일반인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잔인한 삿대질과 처벌이 가해진다. 대기업 총수의 횡령과 배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일반 기업주나 회사원의 불법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여기에서는 도덕적 기대치가 클수록 시민적 관용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없다. 그러기에 도덕적 완전주의는 객관적 기준 자체를 심의할 수 있다면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한국사회의 도덕주의는 집단적 여론몰이를 반복하며 개인의 자율성의 기반까지 위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사회의 ‘도덕주의’는 ‘도덕적 완결주의’(moral determinism)와도 달라 보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덕적 완결주의는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해왔다. ‘신독’(愼獨)이든 ‘성찰’(reflection)이든, 개개인 스스로가 최상의 선을 실현하기위해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인간의 나약함이 무결점보다 강조되고, 타인에게 도덕적 의무를 강제하는 행위도 자율성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지양되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고대 서양철학은 ‘수치심’(aischune)을 통해 한 사회가 지향하는 도덕을 주입하려는 태도를 경계했고, 공화주의는 ‘비지배’(nondomination)를 공공선의 오용을 막는 조정원칙으로 제시했으며, 자유주의는 ‘상호존중’(mutual respect)이라는 가치를 통해 개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반면 한국사회는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에게 도덕적 완결을 요구하는 문화를 강화하고 있다. 아마 현대사회의 문제점으로 ‘수치심의 상실’을 지적하는 공동체주의자들도 납득하기 힘들 정도다. 몰염치나 뻔뻔함에 대한 비난이 개인의 존엄(dignitas)을 파괴하는 수준에 이르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회복’과 ‘교정’보다 ‘응보’와 ‘배제’에 초점을 둔 처벌만이 대중에게 환영받는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낙인찍기’와 연계된 ‘수치심의 정치’를 강화하는 시민적 정서의 내용들을 다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수치심’(aischune)의 공적 사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 전반에 만연된 부도덕과 부정의가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사적 영역일 뿐’이라는 개인주의적 태도와 접합되어 있을 때, 사회적 규범의 확립이나 정치권력의 견제라는 목적으로 ‘수치심’을 공적으로 사용하고자하는 충동을 자제해야 한다. 물론 잘못된 행위 또는 부정의에 대한 집단적 분노(thumos)는 그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도덕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차원에서도, 부당함과 부정의에 대한 시민적 공분은 한 사회가 얼마나 민주적이며 얼마나 정의로운지를 반영한다. 그러나 ‘수치심’이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정치사회적 억압이 될 수 있는 경로는 차단해야 한다. ‘수치심’의 공적 사용은 대상에게 모멸과 좌절을 줄 수는 있어도 죄책감과 교정의지를 제공할 수 없고, 시민들의 공적 분노를 가지고 인간의 존엄까지 파괴할 수 있는 집단적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수치심’이 힘없고 소외된 개인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아야하고, 반대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민주적 심의의 기반을 지켜야하고, 낙인찍힌 개인들이 사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한다. 한 마디로, 인간의 근원적 허약함을 감추는 공격에 시민적 정의감을 모두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집단지성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리더에 대한 기대가 무르익는다. 전자는 반민주적이고 후자는 민주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현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집단지성에 대한 회의는 탁월한 집단 또는 개인의 판단에 미래를 맡기자는 입장과 맞물려있고, 새로운 리더에 대한 기대도 그 정치지도자가 무엇을 대표하고 대변하든 집단으로서 시민이 아니라 한 사람의 판단에 변화의 축을 두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의 유지와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후자가 전자보다 더 위험하다. 아테네 민주주의도 추첨을 통해 시민들의 대표를 선출했듯이, 집단지성에 대한 회의는 ‘대표성’(representation)과 같은 집단지성의 효율적 산출기제로 귀결될 수 있다. 반면 새로운 리더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민주적 심의를 통해 변화가 제도화될 수 있는 문을 닫아버린다. ‘낙인찍기’와 ‘우상화’(idolizing)가 대상에 대해 갖는 감정은 정반대이지만 동일한 집단적 행동양식이듯, 시민들의 결집된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 전체가 가야할 미래가 걸려있다는 입장에는 민주적 심의를 회피하거나 생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성공이 모든 사람들의 판단을 장악한 시점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의 ‘가능한 최선’을 위해 지도자들보다 시민들에게 주목했다. 유력가문 자제들의 권력욕을 고귀한 이상으로 견인하고자했던 이전 정치철학자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철학적이지만 상식이 담고 있는 지혜를 경청하는 자유로운 시민들에게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물론 ‘인간은 자연적으로 지식을 갈망’하기에 진리가 대중에게도 전달될 수 있다는 그의 인식론이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Metaphysics 903a22). 그러나 대중의 의견(doxa)도 진리를 반영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은 대중의 구미에 맞는 말이 곧 ‘상식’이라거나 ‘정의’라는 태도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중의 선호에 좌우되는 ‘상식’과 ‘정의’는 그가 꿈꾸던 ‘다양성’과 ‘설득’이 구성하는 ‘집단지성’(collective wisdom)을 방해하는 힘의 철학과 말의 남용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수의 ‘탁월한’(spoudaios) 사람들보다 상식의 ‘다수’(hoi polloi)가 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Politics 3.1281a42-b10). 첫째, 개개인이 의사를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hos sumpantas) 심의해야한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의사가 교환되는 ‘소통’(communication)의 과정이 아니라, 의견의 교환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의 선호가 변경될 뿐만 아니라 수렴된 정책결정에 대한 책임까지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심의’(deliberation)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시민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제도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집단지성은 결코 ‘주인과 노예의 관계’나 ‘전제적 통치’(despotike arche)에서 발현될 수 없기에, 오늘 다스리는 사람이 내일 다스림을 받는 ‘동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의 민주적 심의에 기초해야한다는 것이다(Cf. Politics 3.1276b16-b32). 셋째,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하나씩 음식을 만들어오는 만찬(sumphoreta)같이, 한명의 탁월함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의 기질(ethos)과 생각(dianoia)이 드러나고 표출되는 정치사회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로 보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감각(aistheseis)을 가지고 있는 개별 시민들의 다양한 덕성(arete)과 사려(phronesis)가 청취되고 표출되어져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다양성’은 올바른 집단지성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똑같은 종류의 음식을 가지고 만찬에 왔다고 가정해 보자. 동일한 종류의 음식들을 맛보는 사람들이나 그 음식들을 만든 사람들 모두 만찬으로부터 큰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잘 만든 하나의 요리를 선택하기는 용이하지만, 다양한 요리를 골고루 맛보는 재미는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한명의 탁월한 요리사의 음식을 맛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울러 이런 만찬에서는 음식을 만들어 온 많은 사람들의 성의도 빛바래기 쉬울 것이다.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은 한 사람은 있지만, 대부분의 다수는 스스로의 노력이 헛수고였다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주 반복된다면, 사람들은 이런 만찬보다는 한 명의 탁월한 요리사가 만든 만찬이 월등하다는 생각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경쟁과 보람도 없는 참여가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참여의지를 꺾을 것이고, 한 명의 탁월한 요리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낫다는 여론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성을 파괴하는 ‘어리석음’(aphrosune)을 시민들 스스로가 마련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도덕적 잣대가 시민들의 ‘선호’에 의해 구성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 사회, 개개인의 자율성을 파괴하면서까지 전체의 의지를 강제하는 사회,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회복보다 당면한 문제의 완벽한 정치적·도덕적 해결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자주 목도된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현대사회가 정치적·도덕적 판단기준을 개개인의 선호로 귀착시키는 ‘감성주의’(emotivism)의 시대로 돌입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시민이 정치적 흥행의 소비자로 전락한 청중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와 도덕의 영역에까지 시장의 원칙을 적용하는 신자유주의가 이런 태도를 고착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나머지 두 가지 특성은 각각의 사회가 축적해온 역사적·사회적 경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양성과 상호존중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전체우위의 강제나 도덕적 완전주의의 폐해가 훨씬 적게 나타나고, 전체성과 동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자율성의 무시와 즉흥적 집단여론이 더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4. 만약 한국 사회가 여기에 기술된 ‘피곤 사회’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다음 세 가지 주제를 함께 고민하기 원한다. 첫째는 ‘지배’(domination)다.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정치적 감성이 ‘지배’와 관련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지배’가 아니라 ‘비지배’가 시민들의 정치적 목표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정치집단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동의를 획득하는 과정을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구조가 아니라 ‘비지배의 관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힘의 논리’에 기초한 ‘비관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시민적 견제력’에 기초한 변화의 제도화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보다 풍부하게 할 것이다. 둘째는 ‘소통’(communication)이다. 한국사회가 ‘소통’을 요구하는 이면에 ‘설득’(persuasion)을 곧 ‘교화’(indoctrination)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민주적 심의가 시민적 책임성을 담아낼 수 있는 정책결정에 이르기 위해서라도 ‘설득’에 대한 편견이 극복되어야한다. 만약 설득의 정치사회적 중요성을 각인하지 못할 경우, 민주주의는 결국 ‘다수결’과 ‘적대적 반목’을 통한 힘의 정치를 강화시킬 뿐이다. 셋째, ‘공감’(共感)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감은 갈등을 조정하고 입장의 차이를 조절하는 주요한 정치사회적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한 ‘공감’이 특정 사고와 생각을 ‘진리’로 강요하는 경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히려 ‘동정’(sympathy)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분단과 전쟁으로 촉발된 이념경쟁이 무정형의 집단 이데올로기의 정쟁으로 전환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감정이입(empathy)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대한 성찰적 공유가 진정한 ‘공감’의 내용이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