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09 08:53
[짧은 서평] 광신(Fanaticism)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4,447  


도서정보
저자명 알베르토 토스카노(문강형준 역)
저서명 광신
출판사 후마니타스
연도(ISBN) 2013(9788964371954)
[짧은 서평] 광신(Fanaticism)

곽준혁 (중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1. 열정과 광신

이번에는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의 <광신>(Fanaticism: On the Uses of an Idea (2010)을 소개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편으로는 변화에 대한 열망이 이념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광신’이라는 낙인의 역사를 통해 재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 현상유지를 통해 집단적 이기심을 충족시켜왔던 사람들의 기만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저항’이라는 서사적이고 대중적인 열정에 대한 세기적 목마름이 또 다른 형태로 설명된 것이다.    

‘열정’이든 ‘저항’이든, 정치사회적 현상이자 집단행동의 표상으로서 ‘광신’은 정치철학적으로는 ‘분노’라는 감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광신’이 갖는 정치사회적 기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철학자들의 논의에서 빠진 적이 없다. 대중의 집단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분노’(thumos)의 순기능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고, ‘분노’를 ‘영혼의 질병’(delictum animi)이나 ‘짧은 광기’(brevis insania)라고 규정했던 세네카도 ‘부정의’와 ‘부당함’에 대한 최초의 거부감조차 제거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광기에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던 마키아벨리도 ‘지배받지 않고자하는 시민적 열정’을 자유의 가장 중요한 밑거름으로 제시했을 정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광신’의 악의적인 사용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성찰의 소재를 제공한다. 때때로 우리는 무분별하게 ‘부당함에 대한 분노’나 ‘지배받지 않고자하는 열정’마저도 막스 베버가 한탄하던 ‘신념윤리’(Gesinnungsethik), 즉 편협하고 극단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공적 영역에서 무기력하거나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는 ‘비이성적 관념’이라는 낙인을 찍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듯이(18-21쪽), 우리도 ‘광신’이라는 낙인을 통해 바람직한 갈등과 건강한 반대마저도 어려운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점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2. 혁명과 반혁명

이 책이 갖는 장점 중의 하나는 ‘광신’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노출된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들을 망각의 세계사 속에서 끄집어내는 방식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역사적 사실들을 ‘광신’이라는 렌즈를 통해 다시 돌아보게 될 때 느끼는 충격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반복된다. 특히 변화에 대한 열망과 유지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역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일방이 타방을 ‘광신’이라고 비난하며 ‘적과 동지’라는 대결구도를 ‘선과 악’의 판단문제로 전치시키는 행위를 그려낸 뒤, 부당함에 대한 당연한 분노를 ‘관념의 극단’으로 몰아가는 수사 속에 내재한 지배집단 또는 지배하려는 집단의 정치적 의도를 노출시키는 서술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보다 구체적으로, 제국주의시대 식민지 관리자들이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떨쳐 일어난 주민들을 ‘광신도들’이라고 부른 일(25쪽), 미국 남부의 점잖은 정치인들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사람들을 ‘선동적’(incendiary)이라고 비난한 일(원서 3-9쪽), 계몽주의 시대 <백과사전>을 통해 고착화된 ‘광신’에 대한 착란이 정당한 분노마저 전염병처럼 여기게 만든 일(195-209쪽) 등,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광신’이라는 꼬리표가 조장한 집단행동에 대한 도덕적 냉대와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진지한 경고를 전달한다. 비록 ‘천년왕국’이나 ‘유토피아’를 외쳤던 집단행동들이 모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대사적 변화마다 ‘열광(enthusiasm)과 추상(abstraction)의 오묘한 결합으로 등장했던 해방을 향한 몸짓들이 광신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역사를 기억해야한다.’는 저자의 메시지가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원서 xxvi쪽). 

아울러 주목해야할 부분 중의 하나는 저자의 학자적 성실함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자기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과 이론들을 검토한다. 매우 방대한 독서의 노력이 노정되고, 자기의 입장과 상반된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정치철학적 전통과 정치사회학적 관찰에 대한 분석들이 세밀하게 진행된다. 이 정도라면, 저자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이 정치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의 독서를 크게 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자가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고, 저자가 자신의 논지에 대한 반박을 기대하고 있기에, 편한 마음으로 독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유주의자들의 지나친 제도에 대한 천착이 가져온 ‘정치적 열정의 무력화’에 대한 왈쩌의 비판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정치사회적 실패를 개탄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83-85쪽). ‘천년왕국 운동’이 갖는 근대성에 대한 날선 대립에서 저자가 조명한 홉스봄은 그의 이론을 ‘민족주의’나 ‘혁명’에 국한시켰던 우리의 선입견을 내려놓기에 충분하다(114-132쪽). 바디우의 ‘감산적’(subtractive) 격정까지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시대사적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는 지적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원서 68-97쪽). 

3. 정치와 신념

물론 저자의 주장과 해석이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부정’과 ‘초월’의 앙상블로서 ‘광신’의 정치사회적 역할에 대한 두둔만큼이나, ‘이상’과 ‘현실’의 조화나 ‘운동에 선재하는 신중함’에 대한 요구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정치철학적 숙제다. 억눌림에 대한 분개를 비이성적이라고 무조건 배격할 수 없듯이, 변화를 유발하는 ‘열정’이 자동적으로 새로운 제도의 창출로 귀결된다고 볼 수만은 없다. 계몽주의 시대에 벌어진 ‘시민적 열정’과 ‘교화된 무관심’ 또는 지금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진보’와 ‘보수’의 단순한 이분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개연성에 주의를 기울여야할 이유는 여전히 충분하다. 

이런 관점에서, 버크에 대한 저자의 반복되는 부정적인 평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전제를 예견했던 ‘이론 정치의 전제’(the tyranny of the politics of theory)가 담고 있는 정치적 신중함을 지나치게 폄하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1775년에 버크가 미국 노예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인도 식민지의 자치를 옹호하는 진보적 발언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유념해서 봐야한다. 아울러 ‘점진주의’ 또는 ‘실용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철학적 전통이 모두 반혁명적이었거나 보수적이지 않았다는 점, ‘해방’과 ‘폭력’이라는 열정의 양가성에 대한 보다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 현상유지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집단의 정치적 수사로 바로 등치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좀 더 부각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실 정치적 신중함에 대한 재고는 ‘신념윤리’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 버크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의 ‘지배받지 않고자하는 열정’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적으로 상정하고, 이러한 열정이 촉발하는 갈등을 시민적 자유와 공동체 번영의 초석이라고 역설하며, 안정과 조화라는 화두를 통해 불공정한 구조를 유지하려던 귀족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발견된다. 서로의 차이가 인정될 수 없고, 대화와 설득이 선전과 교화의 도구로 전락한, 이른바 종파적 갈등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날선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Discorsi 1.8.(18)). 어쩌면 자기가 ‘신’인 것처럼 판단하는 정치가 초래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면역은 베버가 말하는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레이(John Gray)의 <추악한 동맹>(Black Mass, 2007: 추선영 옮김, 이후, 2007)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좀 더 논의해볼 거리가 된다. 특히 그레이가 취한 ‘광신’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열정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단정한 점은 조금 아쉽다(343-358쪽). 중세이후 지속된 천년왕국 운동들이 초래한 절망적 순간들, 자코뱅주의와 나치즘에서 드러난 신념을 바탕으로 한 폭력의 위험성들, 이라크에 자유민주주의를 심어야한다는 잘못된 기획이 초래한 불필요한 희생들, 이 모든 것들은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적 삶의 근거마저도 송두리째 바꾸려는 ‘정치’와 ‘신념’의 잘못된 앙상블이 불러일으킨 비극이다. 따라서 무분별한 폭력으로 귀결된 비극적 앙상블로부터 인간성을 지켜내려는 노력은 언제나 필요하고, 이러한 노력이 보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정치사회적 운동을 희석시킬 것이라고 쉽게 속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성공과 실패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광신’이라는 정치적 매도 속에 존재했던 부정의와 부당함에 대한 ‘분노’의 역사성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광신이 그것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역사적 변화에서 동기를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했든지 간에, 우리가 광신 없는 역사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원서 xiii). 동시에 책 전반에서 저자는 광신의 역사를 재고함으로써 ‘비이성적’이라는 말로 정당한 분노에 부당한 공격을 요구하는 잘못을 고발하고, ‘해방’과 ‘평등’이라는 급진적인 요구가 충분히 허용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꿈꾼다. 전자는 성공적이지만, 후자는 그가 꿈꾸는 정치가 ‘인간성을 개조하려는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줄 규제적 원칙들이 더 필요한 듯 보인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4,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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